예언자 - 칼릴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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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한 열 번은 읽었던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다른데, 매번 완독하기 힘든 책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한 부분 훌쩍 읽어 넘기곤 했더랬다.

레바논과 뉴욕만큼의 거리를 환상의 배를 타고 회귀하는 환상적인 찬트(chant)라고나 할까. 이 글을 읽노라면 그의 그림과 함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며 웅장한 오르간의 화성이 어우러진 찬트를 듣는 것 같은 느낌에 싸이곤 한다.

중세의 엄숙함을 덮어쓴, 르네상스와 현대인의 거리감을 오가며 쓰는 이야기는 근본적인 삶의 문제들을 쓰다듬기도 하고 씹어버리기도 하며, 따스하게 바라보게도 한다.

'배가 오다'로 시작하여 '고별에 대하여'로 끝내기까지의 여정은 우리의 삶의 실타래가 어딘가에서 홀연히 툭- 끝나는 그 지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곤,

잠깐, 바람 위에 일순의 휴식이 오면, 그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윤회의 업을 싸고 안게 되고, 중세를 건넌 르네상스 시대 단테의 '신곡'처럼 영혼의 여행, 혼의 소풍을 읽게 된다.

인간의 면모들을 지나치게 2분적으로 다루고, 인위적으로 내분을 아우르려는 점은 좀 아쉽기도 하고,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는 우화 형식을 내게 깊숙이 각인시키는 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데...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그대들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 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아이들이 화살이라면, 그 화살을 날리는 신에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활'의 존재라는 통찰은 이번 독서에서 얻은 화두이다.

화살인 아이들과, 많이 휘어질 수록 화살을 멀리 쏘아보내는 활과, 세계를 주재하시는 분과...

고통의 대부분은 스스로가 택한 것이라 했다. 자신이 활임을 알고, 많이 휘어질 수록 화살을 위해, 그들의 내일의 집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될 수 있다면, 휘어짐도 아름다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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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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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익 할아버지는 농부다. 먼젓 번 책도 참 좋았지만, 이번 책도 맘에 든다.

호박이 공짜로 굴러오는지... 공짜로 굴러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그럼 호박은 어떻게 굴러들어올까. 스코트 니어링처럼 지적인 활동가는 아니면서, 농사군으로서의 전우익 할아버지의 삶은 나름대로 명쾌하다.

서권기 문자향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오늘 읽던 고은 선생님의 글에도 있었다. 書卷氣 文字香. 좋은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솟고, 글 구절에도 향기가 있다고... 정말 그렇다. 내 서재 제목도 독서는 인생의 멘토라고 했지만, 힘들 때마다 책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이 글 쓰실 때는 나무에 푹 빠져 계셨다. 환경이 좋다는 곳에서 자란 나무는 단단하기도 향기롭기도 덜하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나물수록 나이테가 쫌쫌하고 단단하고 아름답다. 향기도 아주 진하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잘 먹고 잘 사는 아이들이 단단한 맛이 없다. 그러다 보니 멋도 없어 보인다.

루쉰 선생님을 칭찬한 대목도 멋지다. 뒤쪽에 절망이 덕지덕지 붙은 희망의 방패를 들고 밀려오는 절망을 막겠다고 아무도 가담해주지 않으면 혼자라도 하겠다는 자세로 평생을 산 사람이란 비유는 감동적이다. 정말 서권기이고 문자향이다. 루쉰 선생님이 할아버지의 이 글을 못 읽으신 것이 안타깝다.

자연과 멀어지고 인공, 인위 일색으로 사는 것은 발전이 아니다. 자연과 인위의 균형이 깨어져 인공이 판을 치는데 '사람인 변'에 '할위'자 쓰면 거짓위, 속일위 僞자가 된다. 사람이 너무 나선다. 사람이 뭐든지 손을 대려고 한다. 유홍준 교수가 20세기 인간은 문화재에 손 안 대는 것이 가장 보존하는 길이라 했는데...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세월이 만들어주는 빛깔이 있다. 손때처럼. 과정은 조급함보다 느긋함이고, 그 과정은 길 수록 좋고, 과정에서 삶은 이루어지고, 결과에선 삶을 그르칠 수도 있다. 인생도 삶도 과정이지 결과로 판단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고3때 열심히 공부했어도 시험을 못 쳐 버리면 재수라는 구렁텅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야 하고, 훌륭한 학창시절에 불명예를 안기지 않던가. 그리고 그 얄팍한 점수 좀 잘 받아서 서울대 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왔던가.

이 촌로가 권정생 할아버지랑 나눈 대화는 나를 밑바닥부터 반성하게 했다. '간신히 겨우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 그래도 줄기는 오색으로 빛나고 잎은 푸르기만 한 나무처럼.'이라는 말. 나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나. 나는 얼마나 겨우겨우 사는 데 인색했던가. 그걸 혐오한 것은 아닌가. 나는 아이들 앞에서 좀 더 가지라고 강요하며 살고있진 않은가.

요 며칠 알라딘의 시스템이 불안정했다. 다들 그렇겠지만 그간 세심하게 모아왔던 재산들이 날아가지 않았나 걱정할 만 했다. 컴퓨터에선 언제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한때 허접스럽지만 써왔던 글들을 프린트해 놓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이젠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겨우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거란 말에 자신을 얻고. 역시 '서권기'이다. (이렇게 좋은 말은 자꾸 써먹어야 내 말이 된다.) 내가 글을 자꾸 적어 보는 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다. 나중에 나중에 아들이 아빠는 뭘 했어요?하고 물을 때 이렇게 읽고 생각했단다 하고 핑계삼아 쓰고 있다. 그리고 순간순간 좋은 생각들이 놓치고 나면 아쉽기도 하고. 내가 적은 글들도 일이 년 뒤에 보면 제법 괜찮은 것들도 있다. 어느 하루 날잡아서 이것들을 싹- 지워버릴 염이 생길지도 모른다. 좀 더 겨우겨우 살게 되면.

불야성의 시대, 말 그대로 밤낮없이 밝은 이 시대가 더욱 캄캄함을 지켜보던 십 년 전의 할아버지 말씀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세월은 흐르지만 역사가 발전하는가. 가끔은 부정적이다. 늙어죽은 나무(고사목)는 향기도 나고 색깔도 변하는데 죽었다고 하는 사람의 판단이 합당한가. 그냥 열심히 일만 하는 것과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르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하루 하루 열심히 살고, 늘 배우려는 마음 변치않도록 문자의 힘을 빌려서 나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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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0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우익 선생은 이름이 우익이지만 '좌익' 행동을 많이 하고 사신 분이죠..^^ 이오덕, 권정생, 이런 분들과 교류하면서 소박하고 욕심없이 사시는 노철학가의 책을 글샘님의 리뷰를 통해서 잘 만났습니다.^^

드팀전 2004-11-0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우익 할아버지의 책은 느낌표에 소개되기 전까지 소리소문없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통했지요. 느낌표의 김영희 PD가 인터뷰하러 갔을대 책 표지에 나온것과 똑같이 생긴 할아버지 모습이 무척 반가왔습니다.인재 책은 안만드시고 농사만 지으실려나봐요.

글샘 2004-11-2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익... 새는 한 쪽 날개로만 날 수 없는데요... 할아버지가 이제 책을 쓰신다면, 피눈물이 묻어날까 두렵습니다.
 

목욕탕에 가면 바닥에 뒹구는 일회용 면도기들이 언젠가 두고 보자며 나를 벼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칫솔, 비누, 때타올 등 제 목숨껏 살지도 못하고 쓰레기 더미가 된 일회용들이 으드득 이를 갈며 한결같이 큰 재앙이 되어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면도를 하는 동안에도, 때를 미는 동안에도 계속 틀어 놓은 수도꼭지에서는 보람도 없이 억울하게 버려지는 물들이.

"인간들아,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며 씨불씨불 흘러가는 물들이

바닥에 질펀한 죄를 씻어 내리며

언젠가, 언젠가 두고 보자! 그렇게 벼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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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쟤들이 말을 한다면 무서울 겁니다. 물들이, 일회용품들이, 숱한 생명 다하지 못한 것들이 울어댄다면 아마 우린 미칠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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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4-11-0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찌릿하네요...무섭기도 하구..요..흐미~
 
한국 중국 일본 지금은 몇 시인가
차동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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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3국. 과연 일본과 중국은 이 말을 달가워할까?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했지만, 자기들은 동아시아에 처박힌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일본이 이룬 꿈과 중국이 꾸는 꿈은 모두 엄청난 것들이라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 하다.

장사꾼으로서 이런 책을 적고자 하는 의욕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내용은 안타까울 만치 어설프다. 우선 한자를 병기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중요한 곳에는 한자가 적혀있지 않다. 사람 이름이나 지명 같은 것만 한자로 적었다면 높이 살 수 있는 항목이었지만, 그런 것들엔 한자가 없다. 아쉬운 일이다.

그리고 상당히 국수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듯 하게 말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사적 안목은 꽤 높은 듯 하지만, 이런 책을 집필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역시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1992년 영국의 경제 평론가 리스 모그는 시계 바늘의 위치를 상징으로 세계 각국의 경제 지표를 예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소련은 정지해있고, 중국은 3시,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6시, 일본의 경제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으나, 중국의 경제 시계는 어느 순간 지금보다 더욱 빨리 움직여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각은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만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지... 혹시, 6시 정도인 한국의 시계는 거꾸로 도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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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리트미 예술 - 혼을 그리는 동작
루돌프 슈타이너 지음, 김성숙 옮김 / 물병자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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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발도르프 학교의 오이리트미에 대한 강연들을 모은 책이다.

표지가 참 예쁘다. 사진으로 검색되지 않는 것은 안타깝지만, 옆부분 제목 자리에는 진분홍(분홍보단 진한데 색 이름을 모르겠다. 진달래색이라고 할까?)이고, 그 외는 연두색에 오이리트미 포스터가 은은하게 깔려 있다.

오이리트미는 슈타이너 학교의 언어예술이다. 어린이들이 연분홍, 오렌지, 하늘색 등 파스텔 색조의 옷을 입고 언어의 자음, 모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혼을 그리는 동작이라고 부제가 붙어 있다. 혼. 영혼. 정신. 인간에게 이것들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혼이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의 혼을 어떻게 지도하는가. 과연 매순간 아이들의 '영혼'에 관심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고 요즈음 반성하며 읽었다.

이 책을 읽고 오이리트미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에겐 별로 권해주고 싶지 않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별로 알 수 없었다. 오이리트미에 대해서는 고야스미치코의 책에서 더 상세하게 관찰한 것이 있다. 이 책은 다만 오이리트미의 철학적 기반에 대한 연설을 적은 것들이다. 나는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 왠지 수도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 그의 말들로 세례를 받고 아이들을 바라보면 왠지 그들의 영혼 앞에서 나도 하나의 영혼의 자격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들어서... 내게 슈타이너 학교의 의미는 대안학교로서의 의미보다는 자기 성찰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오이(아름다운) 리트미(리듬)을 들으면서 병아리처럼, 사푼사푼 걷고 몸을 놀릴 아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천박한 가수들의 저속하고 관능적인 춤사위를 따라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우린 아이들에게 독사의 독같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돌아보게 된다.

인간의 언어를 관습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조응하는 관계로 본 그의 통찰력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며 조잡한 나의 삶 속에도 영혼의 한 떨기를 피워올릴 수 있을지를 의심해보며, 돌아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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