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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어 이거 노무현이(이런 말만 들어도 대통령을 싫어한다고 느껴져서 그냥 넘어갔다.) 권했다는 그 책 아냐?'했다. 읽어보진 않았단다. 난 그게 뭔 소린가 하고 넘긴 뒤, 나중에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보고서야 질색을 했다. 느낌표 도서에 대통령이 읽은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이놈의 천민 자본주의는 책에다가 무식하게도 라벨을 잘도 갖다 붙인다. 대통령이 읽은 책이 뭐 대수란 말인가. 대통령이 칩거하면서 읽을만한 책이 어디 한두권이겠는가.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읽어서 그런지 이순신의 실루엣과 대통령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교차되었던 책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물을 골똘하게 보고 있으면 사물의 본질이 떠오르면서 마음 속으로 비쳐 들어온다. 이런 것을 관조라고 한다. 외로움, 사색의 시간, 그리고 많은 적들... 이런 상황의 그들에게 가장 큰 공통점은 고뇌가 아니었을까? 그 고뇌는 적에 대한 고뇌, 자신에 대한 고뇌, 조직 내부의 적에 대한 고뇌, 가장 핵심적인 것은 큰 나라의 횡포에 대한 고뇌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성웅 이순신으로 추앙받던 이순신을 고뇌하는 장군으로 그려냈다. 간결하고 무뚝뚝한 문체가 그런 장군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소설로써는 많은 점수를 못 주겠다. 형상화에 실패하고 있으며 박진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는 것처럼, 내가 그의 자전거 여행을 읽고 극구 칭찬했던 그의 말맛이 이 무거운 소설에서는 전혀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다.
태백산맥에서 조정래가 무거운 사나이들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기가 막힌 묘사와 지방 사투리들을 녹여낸 데 반해서, 이 소설에서는 정녕 '쿨'한 사나이, 臣 李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은 여기서도 묻어난다. 끼니를 때워야 하는 민중들의 고역을 바라보는 이순신.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 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그는 먹는 음식 앞에서 상당히 엄숙하다. 주막에서 군사들을 먹이는 이순신.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 국에 만 밥을 넘길 때 창자 속에서 먹이를 부르는 손짓을 나는 느꼈다."
모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산문 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는 그의 칼에 대한 단상.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守와 攻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세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흘러들어감이 없고,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