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난 여러 번 좌절했다. 예전에 난 우리 나라만 이렇게 병신같이 살고 있는줄 알았다.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일제 치하에서 다시 미국의 내정간섭으로, 독재에서 독재로 점철해 온 우리 역사를 늘 한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마치 모르고 자랐다가 다 자라서 만난 쌍둥이 형제와 같은 아시아의 나라들을 쳐다볼 때, 동병상련이라든지, 위안이라든지, 네트워크를 통한 위로보담은 어쩜 아시아는 이렇게 바보같은 나라들만 모아 놓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아시아는 너무 넓다. 우리 나라에 희망은 있을까?

난 아직도 1979년 10월 27일 아침 날씨를 기억한다. 부산의 가을 날 치고는 정말 음산할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고, 그 아침에 한 독재자의 죽음을 들었다.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마음아픈 국민들은 구일간이나 조기를 달았고, 레퀴엠이란 레퀴엠은 그 때 평생 들을 것을 다 들었다. 지금도 장송곡을 들으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열 네살 내 나이에는 내 평생 한 분이었던 독재자의 죽음을 애도하러 구청까지 단체로 가서 분향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그 짙던 향냄새여.

우리 나라는 아직도 그 독재자의 독재 개발의 망령을 그리워하여 그 딸을 야당 당수로 올려 놓았고, 다음 대통령 감이라며 부추기는 허황된 망상가들이 가득하고, 그 공주 출신의 천막 당사 옆에 주차된 즐비한 고급 승용차들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안정을 희구하는 희한한 나라다.

아시아의 비극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개발 도상에서 빚어지는 비극적 아이러니가 어느 나라에나 패러디되어 있었고, 그 비극적 아이러니는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에게처럼 결국 가난과 비극의 파국을 맞게 한 것이 아시아의 공통된 역사였다.

간디, 코리와 같은 신문에서 많이 보던 인물들도, 박통의 허상에 다름아니었다.

박통의 새마을 운동을 본받아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분발하고 있다는 말을 못 들어본 이 없으련만, 그 박통의 공주가 다시 대권을 이어받는 끔찍한 상상을 발칙하게도 하고 있는 어리석은 집단이 다시 있을까? 아마 한나라당이 아무리 정치의식 없다손 치더라도, 이회창 카드로 두 번이나 패배하고도 다시 공주 카드를 내밀지는 않을 듯 싶긴 한데, (창, 공주, 그들의 공통점은 정치가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도 현실적 대안이 없다면 악수를 두지 않으란 법 없다.

내가 자라면서 듣고 외우고 불렀던 의식화의 메커니즘.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며...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새 역사를 창조하다.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유신 헌법,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던 때부터,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태극기 휘날리며 벅차게 노래불러 자유대한 나의 조국 길이 빛내리라.

이런 것들이 계속 떠오르며 아시아의 미래는 매춘과 관광을 빙자한 문화재 유출 외엔 뾰족한 문화도 문명도 자존심도 없는 그들의 비극적 현실을 돌아볼 때, 희망을 말해도 좋을는지 의문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홍세화, 박노자 등의 비판적 시각은 왠지 읽고 나면 오기가 생겼지만, 아시아의 지난한 역사를 읽고 나니 어깨가 축 늘어지는 기분이다.

아시아여, 아시아여, 동방의 옛 영화여. 인도야, 태국과 미얀마, 캄보디아와 베트남, 말레이 반도 국가들. 필리핀이여, 중국과 한국이여. 스리랑카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아프간의 굶주리고 헐벗은 동족들이여. 정말 꽃으로도 때릴 수 없는 우리의 못남은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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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4-06-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에 코멘트를 달아주시고 바로 읽으셨군요.. 맞아요.. 제가 느꼈던 동질감과 아픔이 바로 이런거였나 봅니다. 그 나라를 읽으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 모두 다른 나라들에 대한 느낌이라기 보다, 자신의 아픔을 다시 돌아보아 아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겠지요. 1979년에 나라가 망할 줄 알고 울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말이죠.. 뻔뻔스럽게 돌아온 과거의 사람들도 제 몫을 찾겠죠. 제 리뷰보다 훨씬 좋아서 많이 배웠습니다..

드팀전 2004-06-1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구중심의 역사가 보편적 역사인것 처럼 교육을 받고 자란 대한민국은 정서적으론 아시아라기보다 미국의 한 구석같습니다.아시아에서도 동북쪽에 한참 쏠려서 과거부터 한중일 삼국의 상호관계만을 마치 아시아 전체의 가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내재화된 오리엔털리즘이 아시아에서도 스스로 격리시키고 소통불능의 국가인양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 아시아의 나라들은 주변국으로 또는 준주변국으로 세계체제의 거대한 흐름에 묻혀가고 있습니다.한국은 미국의 충실한 똥개로써 이제 준주변국의 신분은 확보한 듯 합니다.준주변국의 특성상 중심국으로 부터의 착취와 주변국으로의 역착취라는 이중적 구조를 행하고 있습니다.아시아 시장의 개척이란 이름,자유의 수호라는 베트남 파병...그럴싸한 명분으로 미국이 행했던 방식의 자본주의식 개방과 개척에만 앞장선 듯 합니다.
미국인 영어강사에 대한 태도와 외국인 공장노동자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보여주듯 우리안의 선긋기와 편협한 타자화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한국은 미국의 똘마니 국가로 아시아에서 영원히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통치자가 박근혜든 노무현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글샘 2004-06-16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감사합니다.
한국은 확실한 제3세계 국가입니다. 물론 준주변국이지만, 독점 자본주의의 흐름이 너무도 얕고 천박해서 전혀 밑바탕이 없는 국가이지요. 그래서 한국의 문화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수출되어도 한국 문화라고 하지 않고 '한류'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본 문화'가 밀려온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한류라는 말을 들으면 오싹합니다. 한 때의 흐름 이상으로 가치 매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 하여.
 
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치옹을 가장 좋아한다. 치옹은 윤오영 선생님의 호다. 바보같은 늙은이.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데도 그 분은 스스로를 바보같다고 질타하신다. 아니.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하신게다.

수천년 전부터 이어져 온 화두. 너 자신을 알라. 에 대한 답으로 그 분은 바보라고 답하신 거야. 피천득의 수필을 읽은 지 오래 되었지만, 그 분이 등장하는 수필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되고 만다.

피천득의 수필 중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필이 인연이다. 우리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 아스라하던 청년들의 가슴에 일제시대에 있던 일을 교과서에서 사랑이란 감정으로 배웠던 씁쓸한 기억이 남는 수필. 인연. 아사코가 어린 시절 헤어질 때는 아사코가 목덜미에 매달리면서 입맞춤을 해 주었고, 아사코가 대학 다니던 시절 만났을 무렵에는 아사코와 손을 잡고 헤어졌고, 마지막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류의 잡문. 윤오영 선생님이 보았더라면, 치열함이 부족한 덜떨어진 글이라고 일갈을 던지셨을 지 모른다.

광고영화 여친소에 이 책이 등장해서 이 책의 회사 샘터에서 돈을 주었나? 하고 생각 들 정도로, 영화와는 별로 관계 없는 수필집.

피천득이 아직도 우리나라 수필계의 일인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정말 학같고, 난같고 청초한 부인같은 글들은 윤오영 님의 글인데 말이다.

그나마 내가 위안 받는 건, 전지현이 피천득을 몰랐던 것에 대해서다. 여경진이 피천득을 몰라줬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지 않게 했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초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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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6-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아든 치옹이든 ....글쓰기에 1인자가 있기는 있나요? 가끔 그런류 질문 받습니다.제게 질문한 사람들은 무안한 답변만 듣기 일수죠. 예를 들면 "누가 최고의 락커냐? 세계 3대 기타리스트는 누구냐? 한국 최고의 소설가는 누구냐? ...누가 최고의 영화감독이냐? 누가 최고의 지휘자냐? 어떤 여배우가 가장 예쁘냐? 등등....고딩땐 그런거 가지고 마구 핏대를 올렸던 거 같습니다. ^^ 자신의 주관적인 감동을 객관화시켜 대중의 동의를 구하고 자신의 안목이 결코 그릇된것이 아님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심리때문이겠지요.근데...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객관적인 평가와 동의가 꼭 필요한건가 모르겠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태준 님의 수필을 좋아하는데 꼭 한국최고 뭐 그런말 안써도 섭섭하진 않습니다.

글샘 2004-06-1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1인자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금아의 사상 없는 글들이 이제껏 미화된 측면이 너무 컸던 것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요. 우리 나라의 선비들은 늘 어두운 곳에서 꼿꼿한 성깔 하나로 버텨왔던 반면,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서 광채를 입었던 글들이 한결같이 미국의 세례를 입은 자들이라 쓰디쓴 입술만 축일 뿐인 거지요. 이태준 님의 수필도 좋지요. 그분의 글에는 반드시 시대가 반영되어 있거든요. 금아의 글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싫고, 그런 사람의 글은 우리 문단에서 순수문학으로 과대포장된 우리 역사가 서글퍼서 한 소리랍니다.

드팀전 2004-06-1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시대적 고민이 반영되지 못한 금아의 글들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하지만 우리가 어두운 시대를 살았고 그 어두운 시대의 무게에 눌려있덨다고 시대의 고민이라는 거대담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그건 순수문학이 문학의 예술성만을 주장하는 몰상식처럼 일상영역의 문제를 거대담론으로 무시하는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기때문입니다.저도 개인적으론 그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진지한 성찰이 담긴 글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집니다.하지만 일제시대에도 한국전쟁 때도 사람들은 해가 뜨면 쌀을 씻어야했고 또 지나가던 아가씨가 예쁘면 눈길을 보냈습니다.이러한 일상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을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고 하면 또 하나의 폭력이되고 맙니다.그건 너무 감상적이고 이분법적으로 문제를 바라볼 오류가 있습니다.

글샘 2004-06-1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점을 이분법적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실증주의자들의 오류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도를 잡고 있을 때는 개별성을 주장하다가, 세력이 없어지면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숱한 이론들의 원천이 아니었던가요.
제가 금아를 욕한 게 아니라, 치옹이 문단의 중심이 아니었음을 한탄한 것임을 아시겠지만, 저는 중도, 상대주의를 믿지 않는 쪽이랍니다. 옳은 것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담임 통신 2004 - 4호      양운고등학교 3학년 5반

스승의 날에 부쳐

마흔 명의 숙녀들에게...
이제 숙녀란 말에도 좀 익숙해 졌겠구나.
빨리 지나간다는 오월이 벌써 15일이나 되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라, 너희가 하루 홀가분하게 지낼 것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즐겁다.
요즘은 사람 사이의 정이 없다는 둥, 세상은 삭막하다는 둥 해도, 우리  교실을 보면 늘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하다. 맨날 3학년실에서 떡 얻어 먹던 아이들이 떡을 해 와서, 요즘 며칠은 선생님들 허리가 날로 굵어지고 있단다. 선생님들이 너희 떡 먹으면서 5반 아이들은 정이 많다고 칭찬도 하셨단다. 우리 반 보면 좋은 점이 참 많다. 우선 아이들이 패거리를 짓지 않고 두루두루 친한 거 같아서 가장 좋고, 청소 시간에 누구 하나 눈치보지 않고 열심히 해서 좋다. 지난 번 북녘 룡천 사고 돕기 성금을 걷을 때에도, 난 처음에 아이들이 무관심하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만 액수가 189,740원이나 되는 걸 보고 다른 선생님들도 깜짝 놀랐단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니 만큼, 스승님 말씀을 경청하기 바란다.
우리 나라의 '先生님'은 서양처럼 teach - er(영어, 가르치는 사람), ler - er(독일어)처럼 가르치는 사람에 한정하지 않는 호칭이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먼저 났기' 때문에 선생님이 된 거다. 너희보다 먼저 나신 선생님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그게 공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
이제 날도 서서히 더워지고 몸도 나른해 질 시기다. 보통 오월을 잘못 넘기면 마음이 해이해지기 제일 좋은 때란다. 저도 모르게 한 달을 허송세월하고 나면 마음의 정리를 하게 되지. '아무大'로 가기로.
이제 평가원 시험도 이 주 정도 남았다. 앞으로 절대로 아프지 마라. 배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일교차가 크니깐 감기도 쉽게 걸리고 하는데,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배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해서 먹고,  허리가 아프면 미리 복대같은 걸 준비하고, 감기가 잘 드는 사람은 미리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아프고 열나면 뇌세포가 팍팍 죽는단다. 그리고 조만간 등교 시간도 조금 늦출 것을 학교에서 협의하고 있으니 잘 때 푹 자고, 정신 번쩍 차려서 공부하면 좋겠다.
스승의 날을 빙자한 선생님의 부탁 하나. 월요일부터 좌석을 바꾸기로 하자. 그런데 지난 번처럼 친한 친구랑 앉지 말기 바란다. 아무래도 친한 친구랑 앉다 보면 한 마디라도 더 떠들게 되잖아.
두 번째 부탁, 시간을 좀 정확히 지키자. 아침에 일곱 시 반. 아침조회 아홉 시, 수업 시작 시간, 자습 시작 시간을 잘 지켜 주기 바란다. 체크하는데 빈 자리가 보이면 선생님의 마음이 아파온다.
너희가 자기 소개서에 적은 그대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 선생님은 너희의 진로 탐색과 진학을 도와주는 사람이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너희의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을 토대로 최대한 진학을 잘 하도록 도와주는 게 선생님 몫이고, 너희는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을 잘 얻어오는 게 너희 몫이다. 나중에 주례 설 때를 대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6월 2일 시험까지 졸지 말고 열심히!
담쟁이 장미가 탐스럽게도 핀 오월, 담임선생님이 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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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통신 2004 - 3호      양운고등학교 3학년 5반

D-200, Mission Impossible!

마흔 명의 숙녀들, 안녕.
일주일만에 다시 편지를 쓴다. 중간고사들은 잘 쳤겠지? 3학년 들어 첫 결과물이 이제 완성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수도 있을게고, 잘 한 과목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제 시험은 지나갔다.
우리 앞에 남은 것은 D-200의 숫자와 대학 진학이라는 과제를 잘 조합해서 졸업식날 즐겁게 참석하는 것이다.

시험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오늘 하루 정도 쉬기 바란다. 푹 자고, 안 졸리면 친구와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수다라도 떨자. 단, 오늘 하루만. 그리고 200일 주(酒), 뭐 그런 건 마시지 말자. 내일부텀은 다시 공부해야 하잖아.

200일 남은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설계도를 그려 보자는 것이 오늘의 주제다.

앞으로 중요한 일정은 25일 모의고사와 6월 2일 평가원 모의고사가 있다. 그 두 시험은 너희 3학년 노력의 결과물이 이제 막 나올 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전의 시험은 2학년 실력이라 보면 되고, 이제부터는 너희가 책임져야 할 점수들이다.

<제1기, 국영수 다지기 30일 코스>
남은 30일은 언어, (수학), 영어를 최선을 다해서 매달려 보기 바란다. 사회는 수업 시간에나 열심히 들어라.
언어는 매일 한 시간 이상 자기가 진도를 나가는 문제집을 풀 것. 그리고 문제를 풀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60분에 35문제 정도 속도를 내서 풀 것. 옆에 있는 이 책이 괜찮더군. 조금 어려운 수준인 것 같더라. 언어는 정말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결국 올해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점수는 언어영역 점수일 것이다.
수학을 칠 친구들은 매일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하고, 일 주일에 한 번정도 스스로 모의고사를 쳐서 자기가 약한 단원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자.
영어는 일단 듣기를 잡아야 된다. 아침에 잘 듣고(듣기 있는 날은 절대 늦지 말자.), 다음 모의고사에서는 인문반 여섯 반 중에서 1등을 해 보자. 한 사람이 한 문제씩만 더 맞추면 1등이 될 거다. 독해를 꾸준히 하되, 단어가 부족한 사람은 단어 외우기보다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서 단어를 문맥 속에서 추리하는 연습이 필요하단다.
이 기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차 말한 '주말을 잡아라'이다.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그리고 어린이 날, 석가탄신일, 개교기념일 등 공휴일만 잘 활용해도 한 등급 올리는 건 떼어놓은 당상이다. 주말에 공부하지 않고 책상에 '열공'하고 적는 녀석은 욕심쟁이다. 열공은 주말에 하는 것이다. 하고 보면 효과는 확실하다.

6월 2일 평가원 시험 마치고 나면 다음 20여일 정도는 기말고사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실패한 과목의 원인을 분석해서 기말고사에는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듣기평가 준비는 물론이고, 범위가 엄청나게 넓은 과목들(국어, 영어 등)을 미리미리 공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시험에 날 것이 뻔한데, 다 보지도 못하고 시험을 망치는 어리석음은 비가 올 걸 알면서도 우산을 안 가져가서 홈빡 젖는 거나 마찬가지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칼이 빠지면 지금 바로 물에 뛰어들어 건져야 한다. 전에 개구리 법칙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개구리 법칙을 한자 성어로 한 것이 각주구검.

<제2기, 사탐 완전정복 40일 코스>
그러고 나면 이제 140일 전이다. 기말고사를 마쳤으니 여름방학이 남았다. 너희 수능 준비의 완성은 여름방학으로 끝나게 된다. 그럼 2학기는? 좀 있다 얘기하자.
기말고사 마치고 나면 40일 작전을 펴야 한다. 40일 동안 국영수는 이전과 같게 꾸준히 하되, 이 기간의 핵심은 사탐이다. 자기가 선택한 과목을 이 때 정리한다. 가장 좋은 교재는 교육방송 교재다. 꼭 봐야 한다. 네 권의 교육방송 교재를 40일 동안 볼까요? 천만의 말씀. 한 과목을 3일 정도에 마칠 수 있어야 한다. 여름 방학때는 2시부터 5시까지 자습이니까, 학교에서 세 시간 열심히 하고 집에서도 두 세시간 투자하면, 3일이면 한 과목 본다. 그러면 주말을 잘 활용해서 2주 정도면 사탐을 한 번 독파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말이 쉽지, 사실은 뼈를 깎는 노력이 없이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린 해야 한다. 아무리 임파서블한 미션이라도. 우리는 프로니까. 이 작전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 째 과목을 오래 끌면 안 된다. 첫 단추는 무조건 가장 쉬운 것, 자신있는 과목으로 3일만에 꼭 떼자. 두 번째는 가장 어려운 과목. 3-4일만에 하고. 그리고는 다시 네 권의 문제집을 산다. 12일 정도면 네 권 볼 수 있다. 여름 방학 중에 '수능 100일 전'을 만날 것이다. 그 때까지 사탐을 세 번 독파하는 게 너희에게 주는 Mission이다.

이제 100일 전, 2학기 중간고사를 20여일 완벽하게 준비하자. 이제 시험이 재미있어 질 것이다. 설마? 프로는 중독이 되고 나면 즐기게 된다. 게임의 법칙을 꿰고 있는 프로는 즐길 줄 안다. 너희는 지금 방황 중이 아니라, 퀘스트 수행 중임을 깨달아라.

<제3기, 모의고사 제1기>
중간고사 마치고 나면 80일 전. 10일간 모의고사를 실시한다. 스스로 치는 모의고사. 월요일은 국어와 수학, 화요일은 영어와 사탐을 스스로 시간을 재면서 시험 친다. 여름 방학 때 보던 교재가 많이 남았다고 미련을 갖지 말라. 미련을 갖는 건 미련할 짓이다. 각 과목의 모의고사집(모의고사 한 권에 5회 정도 수록)을 사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시험을 치라. 열흘이면 다섯 번의 자체 모의고사를 치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9월 16일 평가원 시험을 치게 될 것이다. 9월 모의고사 표준점수와 등급에는 이제 책임을 져야한다. 재수생도 모두 치르고, 실업계도 거진 참여하는 실제 수능과 모집단이 거의 같게 된다. 이 시험을 마치고 우는 친구는 수능 다음날 울 것이고, 웃을 수 있는 친구는 수능을 기다리게 된다.

<제4기, 모의고사 제2기>
그 다음은 기말고사 준비로 한 20일. 기말고사 마치고 나면 수능 40일 전이다.
이 40일에는 사실 실력을 쌓을 수 없다. 이젠 쌓아올릴 게 아니라, 인테리어를 할 때이다. 이 때까지도 쌓으려고 하면 마무리에 실패한다. 마지막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수능 치고 나야 실감할 거다. 40일 동안 할 일은 다시 모의고사 치는 일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모의고사를 치면 10회 이상 치를 수 있다. 모의고사 제1기와 다른 점은 이 때는 월 언수, 화 영사 이렇게 칠게 아니라, 자기가 부족한 과목을 집중 배치하는 것이다. 월요일은 언어 2회, 화요일은 영어와 사탐, 수요일은 언어와 사탐(결국 언어는 세 번, 사탐은 두 번, 영어는 한 번 보게 되는 학생의 예)을 보는 식으로 약한 과목의 모의 고사를 계속 치면서 감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수능이 마치면, 허전하다.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손잡고 여기저기 놀러다니다가 점수 나오면 원서만 쓰면 된다.

앞으로도 한 시기가 지날 때마다 편지를 받게 될 거다. 제발 선생님의 편지를 여러 번 읽지만 말고, 마음에 새겨 도움을 받는 친구들이 여러 명이면 좋겠다. 고3은 상담도 중요한데 너희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기도 미안하고 하니, 앞으로는 내 편지를 받으면 너희도 마음을 정리해서 주말이나 휴일에 선생님에게 답장을 보내주면 좋겠다. (shy3042@hanmail.net) 답장을 읽어보고 필요하면 상담을 하든지 하자.

자, 오늘부터 국영수 다지기 30일 코스를 시작한다. 계획을 잘 짜고, 잘 실천해서, 필승의 노력으로 30일 코스를 완주하고 평가원 시험에서 훌륭한 결과를 기대한다.

햇살이 따가운 5월의 첫 날, 예쁜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담임선생님이 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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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6-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동생도 올해 고3인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추천하고 퍼가겠습니다^^
 

담임 통신 2004 - 2호      양운고등학교 3학년 5반

프로가 되자

마흔 명의 숙녀들, 안녕.
엄마보다 더 자주 만나는 담임선생님이다.
이제 너희를 만난 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여섯 달만 더 너희랑 뒹굴면 수능이다. 정말 세월 빠르지?

두 달을 너희 쳐다보면서 느낀 걸 몇 가지 말하고 싶다.
너희는 처음 만나는 고3이겠지만, 선생님은 너희 같은 아이들을 해마다 만나고 떠나 보내는 게 일이다 보니, 너희한테 요구하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없다.

오늘 할 말은 프로가 되라는 것이다.
아마추어가 프로의 반대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거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뭘까? 프로는 돈을 위해 일하고, 아마추어는 취미나 흥미로 하는 것?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난 너희를 보면서 고1,2까지는 아마추어고 고3은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싶다. 물론 이 종이를 소중하게 가슴에 새기는 친구는 너희 중 5% 미만일 거란 사실을 난 알지만, 내겐 그 5%의 학생이 정말 소중한 제자란다.
삼십 년 지나서 선생님의 그 때 편지를 읽고 제가 이렇게 살았어요 하는 제자가 5% 아니라 1%만 있어도 난 행복한 선생님이라 생각하니깐...

고3은 프로다. 그럼 프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아마추어는 늘 변명을 할 수 있다. 경기에 지든 이기든,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그게 제일이라는 둥,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는 둥, 승부보다는 참여에 의미를 둔다는 둥, 정당한 방법으로 싸워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등의 변명이 아마추어리즘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러나, 프로에겐 변명이란 있을 수 없다. 경기에 이기면 잘 한 것이고, 지면 잘못한 것이다. 과정없는 결과는 없지만, 반드시 결과를 이뤄내야한다. 그게 프로다. 참여하는 데 의미를 두는 프로는 없다. 프로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든 이겨야 한다. 그게 프로다.

둘째, 프로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자기 관리 없는 승리는 기약할 수 없으니까. 난 권상우를 보고 '나도 저런 몸매를 가져봤으면…' 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프로니까. 내가 만일 영화배우라면 나도 석 달 안에 저런 몸매 가질 수 있다. 물론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프로라면 목표를 정해서 어떠한 고통도 감수해 나가는 것이 정석이다. 나를 더욱 가치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프로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 프로는 시간을 초월한다. 사람은 여섯 시간 내지 일곱 시간을 자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추어는 그걸 잘 지키면서 생활한다. 평소에 몸을 가꾸고, 운동을 꾸준히 한다. 그러나 프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단기간에 체중 조절에 나선다. 필요하다면 하루 한 시간 잘 수 있어야 프로다.

마지막, 프로에겐 꿈이 있다. 꿈이 없다면 그건 프로가 될 수 없다.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이 프로의 꿈인데, 꿈이 없다면 높이 날고 싶단 생각도 없을 게고 늘 망설임으로 주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유승준의 비전이란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있잖아.

높이 날고 싶다면 작은 망설임은 걷어 차버려. 끝없는 미지를 향해 내디뎌야 해! 새롭게 시작되는 오늘에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는거야 … 네 삶을 사는 것이 아냐 뜻이 없다면... 메뉴얼대로 살아만 간다면 과연 꿈꿀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이고 싶은 그런 모습의 그삶을 위하여 발을 내디뎌! 그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일로...

쉽게 아프다고 하고, 집에 보내달라고 하는 너희를 보면, 아직 아마추어라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는 아프면 쉬지만, 프로는 아프지 않는다. 프로에겐 의지가 있으니깐.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도,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 교실 오른 쪽엔 늘 이 말이 너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자꾸 비관적인 생각이 들고 힘이 빠지고 '난 왜 안될까.', '이러다 정말 안 되는 거 아닐까?' 이런 비관적 생각이 들더라도, 의지로 <낙관>하자꾸나.

너희 옆엔 선생님이 있고, 서른 아홉명의 친구들이 있고, 가족들의 기대가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 예쁜 너희에겐, 아직 열아홉이란 젊은 나이가 훈장처럼 지키고 있고, 아직 일곱 달이란 여유가 있고, 아직도 깨끗한 백지의 3학년의 생활기록부가 남아있으니까. 생활기록부에 까만 글씨로 하나 하나 성적이 들어가면 너희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느는 반면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걸 생각하기 바란다.

이제 중간고사 며칠 안 남았지만, 중간 고사 기간을 맞아서 몇 가지 부탁하자.
첫째, 교실을 독서실로 만들자. 큰 소리를 내지 말고, 늘 서로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자. 다른 반 친구들은 되도록 밖에서 만나자. 그리고 깨끗하게 사용하고.
둘째, 자기 시간을 자기가 잘 사용하자. 등교 시간, 영어듣기 시간, 수업 시간에 완전학습하기, 점심시간에 자거나 공부하기, 틈틈이 단어 책상에 써 보고, 낙서하기. 발음 좋은 친구가 떠드는 영어 듣기. 무엇보다 시험공부 다 하기 전엔 안 자기.

마흔 명의 숙녀들과 생활하는 나날이 즐거움인
 담임선생님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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