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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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브리맨』 130~131쪽)

 

  바다를 바라보면 저 물살에 내 몸을 맡겨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세상이 지속되리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상상의 이면에는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뿐인 삶이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에도 왜 늘 우리는 포기가 더 빠른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희망보다 막막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웬일인지 갈수록 협소해지는 내 마음 상태가 이 문구를 쉽게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황폐한 공동묘지에 주인공이 묻히는 것으로 시작된 소설은 죽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긴장감도 없이 죽음으로부터 그가 살아온 과거의 시간을 더듬어간다. 그렇게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편안함마저 든다. 그가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긴장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처럼, 죽음 또한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책의 제목처럼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감동을 만나고 나서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죽음, 특히나 노년의 고독과 죽음에 관해 적나라하게 마주하자 나의 젊음이 영원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다.(23쪽)' 라는 말처럼 흔해빠진 죽음 앞에서 이미 익숙해진 우리지만 그 충격이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잊히는 사실 앞에 침울해져 버렸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이미 삶을 끝낸 사람의 인생을, 그것도 젊은 시절의 그가 아닌 노년에 바라본 삶의 언저리들은 쓸쓸했다. 그가 욕을 해대는 흥분 가운데서도, 이미 맞이한 죽음을 한탄하는 과정에서도 분노와 슬픔은 외로웠다. 주변에 너무 흔한 노인의 내면을 이렇게 들여다 싶었을까 싶을 정도로 쓸쓸하고 고독한, 어쩌면 우리가 밟게 될 삶의 전철이 아닌가란 두려움이 엄습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이 순간에 왜 내가 내 삶을 불신해야 할까?(37쪽)

 

  어쩌면 이 소설이 내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된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의 양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삶이 숭고하게 끝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 나약하고 두렵고 때론 악다구니를 해대며 죽음 앞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런 담담함이 오히려 평범할 것 같은 소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어떤 화려한 이야기 못지않은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이런 소설을 이제야 만났다는 사실과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흥분 속에 내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다보니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을 조금 편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내 삶을 돌아보며 기쁨과 슬픔, 분노와 쓸쓸함 이 모두를 다시 되뇔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흔한 죽음의 과정이 될지 모르지만 그 삶의 주인인 내 자신에게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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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거절술 - 편집자가 투고 원고를 거절하는 99가지 방법
카밀리앵 루아 지음, 최정수 옮김 / 톨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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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이 되었건 거절을 당한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기운 빠지는 일이고, 나처럼 심약한 사람은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사랑을 거부당했건, 꿈꿔왔던 일이 좌절에 빠졌건, 내 존재나 내가 희망했던 일들이 거절당하고 거부당한다면 좋은 기억으로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저자는 '그동안 내가 받은 부끄러운 거절 편지들을 모두 보관해두었고, 심지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부러 그 편지들을 특징에 따라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류' 해 놓았다며 다양한 거절의 편지를 공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을 건네고 있는데 처음엔 이 용기를 내라는 말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부한 말인 줄 알았다.

 

  저자는 '여기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매정한 거절 편지가 있다.' 라고 했는데 '편집자가 소설 원고를 거절하는 99가지 방법'이란 부제를 봤으면서도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정말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매정한 거절의 편지가 있었고, 그 편지들을 읽다 나도 모르게 킥킥대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임에도 편집자들의 다양한 거절편지에서 그들의 심리적 상태와 거절을 서슴지 않는 모습에 실소가 나와 버린 것이다. 블랙코미디처럼 펼쳐지는 거절 편지들이 이렇게 다양할지 상상도 못했지만 정말 방대하과 광활(?)했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다.

 

  가장 먼저 눈에 띤 점은 저자가 '특징에 따라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류'했다는 제목이었다. 99가지의 거절 편지에는 저마다 짧은 제목이 붙여져 있는데 편지의 내용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 그 간단명료함과 냉철함(거절의 편지를 받다보니 달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시간이 있을 때 펜을 놓으라는 <맹비난>부터 탈락이라는 단 한마디가 적힌 <직언>, 너무 많은 종이를 더럽혔다는 <분풀이>, 해석할 수 없는 <베트남어>, 편집자가 보낸 편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오탈자가 심한 <오자투성이>, 무정부주의 만세를 외치는 <아나키즘> 등 정말 제목과 내용이 하나가 되어 비수를 꽂는 편지들이었다.

 

  처음엔 이 거절의 편지들을 받았을 당사자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나름 경건하게 읽어 내려갔다. 이런 편지를 받는 사람이 있구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아련한 마음도 잠시, 철저히 편집자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편지들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들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일단 거절의 편지를 쓰게 만드는 원고 투고자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담당 편집자로 하여금 이런 편지를 쓰게 만들었고, 거절의 편지다 보니 결코 좋은 내용으로 채워질 수 없었다. 개중에는 정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주는 편지도 있었지만 결과는 거절이었기에 큰 용기를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히스테리를 부리고, 분석하고 비평하고, 쓰잘데기 없이 자신의 처지나 회사의 입장을 밝히는 편지들 속에서 솔직함을 더 느꼈다. 그런 편지들을 99통을 읽다보면 소설이 어떠한 내용이었는가가 궁금한 게 아니라 편집자의 시선에서 왜 그들은 이런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가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듯 했다.

 

  그럼에도 거절의 편지 강도는 전혀 약해지지 않고 원고를 잃어버렸으니 비밀로 해달라는 둥, 이런 원고들이 쌓여가는 게 징글징글 하다는 불평을 하고, 혀짤배기소리로 거절을 하는가 하면, 희곡으로 거절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거절의 편지에 면역이 생겨 다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절망감을 안는 게 아니라 무시하고 진가를 알아줄 출판사를 찾아 재도전 할 의사까지 생기게 된다. 실제로 이런 편지를 받고나서 다시 용기를 내어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저자가 거절의 편지를 쓴 의도를 파악한 이상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무언가에 면역이 되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겠지만 긍정적인 면역은 오히려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거절의 편지를 읽고 좌절하느냐, 용기를 얻느냐는 순전히 개인의 몫에 달렸다. 다양한 편집자의 편지를 읽다보면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편지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그런 편지에 휘둘리는 여부도 철저히 내 마음가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충고를 받아들이되 심신박약에 시달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굉장히 독특한 책이었고 저자의 태연한 능글맞음(?)에 마음을 뺏겨 웃음을 터트린 부분도 많았다. 아무래도 편지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배제한 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소설을 투고하고 기다리고 있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잃길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자신의 처지를 미뤄놓은 채, 멀찍이서 이 책을 바라보며 저자의 진실 된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굳은 의지를 잃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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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래빗 시리즈 03 : 다람쥐 넛킨 이야기 베아트릭스 포터 베스트 콜렉션 3
베아트릭스 포터 글.그림, 김동근 옮김 / 소와다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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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올빼미 브라운 할아버지에게 버릇없이 굴다 혼쭐이 난 다람쥐 넛킨 이야기다.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데 다람쥐 넛킨은 해도 해도 버릇없이 굴어서 당할 만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람쥐 넛킨과 그의 형제 트윙클베리와 다람쥐 친구들은 밤이랑 잣이랑 도토리를 주우러 뗏목을 타고 브라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섬으로 간다. 트윙클베리와 다람쥐 친구들은 브라운 할아버지에게 드릴 생쥐를 가져가서 공손하게 식량을 주워가도 되냐고 여쭌다. 그리고 부지런히 몸을 놀려 해가 진 다음 뗏목에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다람쥐 넛킨만은 예외였다.

 

  넛킨은 식량을 줍는 일에도 관심도 없고 브라운 할아버지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도 모자라 괴롭힌다. 나뭇가지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쐐기풀로 할아버지의 코를 간지럽히고 도토리로 구슬치기를 하는 등 브라운 할아버지의 인내심 테스트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람쥐들은 며칠 동안 할아버지가 좋아할만한 식량을 가져다 드리면서 공손히 자기네들의 식량을 주워갔는데 그럴 때마다 넛킨만 유독 엉뚱하고 버릇없는 행동으로 브라운 할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다.

 

  브라운 영감이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다른 다람쥐들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넛킨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브라운 할아버지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마땅한 얼굴로 넛킨을 쳐다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넛킨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않았다. 그러다 여섯째 날 브라운 할아버지 머리위로 올라간 넛킨을 참다못해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쥔다. 넛킨을 잡아먹으려고 거꾸로 들어 올리자 놀란 넛킨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혹시 숲 속을 지나가다 꼬리가 떨어진 다람쥐를 발견하면 틀림없이 넛킨일 것이다. 꼬리가 떨어진 이런 이유를 알게 된다면 넛킨에게 동정의 눈길만 줄 순 없을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버릇없이 굴어도 후한이 두려워 쉽게 혼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뉴스에도 보면 아이들을 혼냈다 죽음까지 이르는 소식을 듣고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소식들이 들려올 때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예전의 이미지가 무색할 정도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어귀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어른들 앞을 지나는 것이 곤욕이었다. 아버지가 한분한분 인사를  드리고 지나가라고 해서 몇 번의 인사를 거친 다음에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동네어르신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은 차를 타고 마당까지 들어가는 상황이라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그럼에도 곤욕스러웠던 그때를 떠올리면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는데, 삭막한 도시 속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레 개인주의가 되어버리는 내 마음이 낯설기만 할 뿐이다.

 

  다람쥐 넛킨을 통해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지만 비단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리기엔 뭔가 묵직한 것이 남아있는 것 같다. 나도 언젠간 늙어서 노인이 될 테고 젊은 사람들과 세대 차이를 겪게 될 터인데 그런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나만 생각하는 마음이 협소하게 느껴진다. 너무 무겁게 엮어가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대사회에 팽배해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오늘따라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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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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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령』 상권을 읽은 지 2년 8개월이 지나서야 하권을 꺼내들었다. 보통 상, 하권이 분리되어 있는 책을 읽다 말았을 때는 포기하거나, 다시 처음부터 읽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 상권만 읽고 하권을 꺼내들지 못한 책이 여러 권이고, 긴 장편소설을 읽다 중단한 채 여전히 대기 중인 책도 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상권을 다시 읽지 않고, 혹은 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권을 꺼내들었던 것은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이었기에 가능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집을 접하면서부터 꼭 2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빨간색 전집도 힘겹게 모았지만 무선으로 된 보급판 전집도 겨우 한질을 완성했다. 출판사에서 기존의 전집이 절판시키고 한정판을 준비하던 시기에 전집을 만난 터라 우여곡절이 많은 책이 되어 버렸다1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2독을 하겠노라 마음먹고 보급판 전집을 모았고, 2년 8개월 만에 하권을 꺼내드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음에도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었다. 2독할 때 제대로 읽자는 심정이 어느 정도 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편안한 마음으로 하권을 꺼내들었음에도 당연하게도 상권의 줄거리가 세세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줄거리 요약을 다시 읽고 하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스무 명이 넘는 등장인물은 헷갈리기 시작했으며 저자가 만들어놓은 그들 각각의 성정이나 특징들이 온전히 각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랜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너무 재미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을 나또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집을 마주하기 전까지 매력을 알 길이 도통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죄와 벌』도 고등학교 때 읽고 너무 어려워 치를 떨었고, 전집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읽는다는 것이 도스또예프스끼가 작품을 쓰게 된 배경과 각각의 사상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악령』 하권을 읽으면서 잠시 잊었던 도스또예프스끼만의 매력을 되찾게 되었고 총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을 나름 정독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밑바탕이 만들어졌다.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을 읽던 흐름이 쭉 이어지지 않아 전체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악령』은 그야말로 잔인하고 냉정하며 범죄가 가득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스따브로긴을 선두로 그와 일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두 제각각인 5인조의 행동만 지켜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22명인데 12명이 파멸해 버리는 것만 보더라도 살인과 사건, 자살이 난무했음에도 무덤덤하게 지켜볼 정도였다.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소설의 양도 그렇지만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이 나눈 세세한 대화 사건의 전개 등을 미뤄볼 때 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요약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작품을 읽는 동안 깨달았다. 또한 이 소설이 굉장히 산만한 소설로 평가되는데 상권과 하권의 긴 공백을 가진 나로써도 하권을 읽으면서 한참을 헤맸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문체에 매료되어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저자의 작품의 매력이 뭐냐고 물으면 존경이라곤 할 수 없는 찌질 한 인물이나 궁핍하고 고난에 찬, 궁지에 몰린 등장인물들이 나옴에도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황한 대화와 소소한 일상과 사건들에 눈을 뗄 수 없다는 점이다. 서로의 대화를 정독해도 산만함과 부산스러움,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묘사 때문에 그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음에도 읽는 순간만큼은 재밌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후에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한다든지 자신들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엉뚱한 언변을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기에 가능하다는 알 수 없는 수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옮긴이는 『악령』의 매력을 '주인공과 여타 인물들이 지닌 <마력>에 있다.' 라고 하면서 '그들은 자신을 먹어 치운, 혹은 자신이 집어삼킨 관념들과 함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다. 그러니까, 『악령』에서는 관념이라는 마귀를 쫓아 내줄 신이 결코 등장하지 않으며, 마귀와 한 몸이 된 인물들은 그들의 물리적 생이 중단되지 않는 한 <홀림> 혹은 <들림>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작품인 『악령』은 등장인물들이 하나하나 파멸해 가는 모습, 그것도 서로에게 살해당하거나 역자의 말대로 자기 반성 없이 '관념들과 함께' 자살해 버리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 내면에 깃든 잔인함과 무작위성을 그대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스따브로긴을 들 수 있다. 역자는 스따브로긴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특징 때문에 다른 인물들이 오히려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행동과 타인에게 끼치는 다양한 영향이 너무나 굳건했다.

 

  스따브로긴을 결코 동정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는 이유는 그가 저지른 악행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내면으로나마 자기성찰과 반성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태연자약하면서도 매몰찬 그의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결코 독자가 분노할만한 결말을 맞이할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찌혼의 암자에서」는 편집자의 권유와 압박에 의해 삭제되었는데 스따브로긴의 참회를 다루고 있어 작품을 읽으면서 가졌던 안개 속에 갇힌 스따브로긴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부분을 통해 '『악령』에서 수수께끼처럼, 혹은 내적 모순으로 읽히는 여러 부분이 완전히 해독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의 해갈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았지만 상, 하권을 긴 시간에 걸쳐 읽은 탓도 있고 갈수록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읽고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결말도 중요하지만 철저히 과정에서 드러나고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기에 그럴 것이다. 고등학교 때 『죄와 벌』을 읽을 때만 해도 저자의 이런 매력을 알 리가 없었고 왜 명작인지 의미부여에만 치우치다보니 오히려 과정에서 더 힘겨워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접하지 못한 타인에게 어떤 내용인지, 읽고 난 뒤의 나의 느낌이 어떤지 세세하게 전하지 못해도 전혀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독자 자신이 온전히 작품 속에서 과정을 만끽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나처럼 의미부여를 위해 어려운 작품이라는 편견을 가지지 않은 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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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옹을 찾아 주세요 - 셀레스틴느이야기 1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35
가브리엘르 벵상 / 시공주니어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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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부터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할게!'라고 말해놓곤 알면서도 지나쳐 버리거나 '안 해도 되겠지.'란 마음으로 대충대충 해버릴 때가 있다. 분명 지켜야 할 약속임에도 지키지 않고 '괜찮겠지.'란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버린다. 결코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없음에도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저자의 이름을 보고 구입한 책이라 그림에 온통 정신이 팔려 곰 에르네스트 아저씨와 생쥐 셀레스틴느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말았다. 겨우 같이 산책 나갔다 셀레스틴느가 잃어버린 펭귄 인형 시메옹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에르네스트 아저씨가 다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에르네스트 아저씨가 셀레스틴느에게 산책을 가자고 했고, 그 길에 시메옹을 잃어버렸기에 아저씨 탓이라고 시메옹을 찾아달라고 떼쓰는 셀레스틴느가 조금은 무례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셀레스틴느에게 뭐라 하지 않고 다시 날이 밝으면 찾아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음날 산책 나갔던 길에서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시메옹을 찾긴 했지만 이미 엉망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인형가게에 간다. 인형가게에서 펭귄인형 시메옹을 찾았지만 없자 다른 인형을 사와서 셀레스틴느에게 선물을 준다. 하지만 시메옹을 가장 좋아하는 셀레스틴느는 기운 빠져 하고 그 모습을 보고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좋은 생각이 있다며 시메옹을 그려보라고 한다. 셀레스틴느가 그린 시메옹 인형을 보고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직접 인형을 만들고 친구들을 불러 인형 파티를 열어준다.

 

  아저씨 탓이라고 떼를 부리던 셀레스틴느는 파티 이후로 아저씨의 말씀을 잘 듣게 된다. 대충 다른 인형으로 때우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데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셀레스틴느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곰과 생쥐라는 인물 배치도 그렇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를 따듯하게 그리고 있어 아이들을 대할 때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다. 해설을 보면서 이 사실들을 깨닫고 다시 읽게 되었지만 내가 온전히 느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깊이 있게 읽지 않은 독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오랜만에 만난 저자의 그림이 반갑기도 했다. 책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더 흥미진진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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