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나체들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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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와 접촉하는 것이 겉이며 외측이라면, 모자이크에 가려진 쪽은 안이며 내측이다. 이런 발상 때문에 인터넷 세계는 늘 간단히 내면화 된다. 15쪽

 

  언젠가 개인 블로그를 본 내 지인들이 혀를 끌끌 찬 적이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블로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찬사를 던지자 나온 반응이었다. 내 지인들은 이곳에 너의 실체(?)를 폭로해도 되냐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었다. 단점은 싹 가린 채 장점만 부각되게 만들어 놓은 온라인 공간 그 자체가 나의 실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는 것은 온라인이 아닌 현실세계에게 나와 만나고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형성한 온라인의 이미지 또한 반박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나의 실체는 '이러이러하다'라고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오프라인에서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을 온라인에서는 조금이나마 가리고 싶은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나를 봐준다는 기대감도 내포되어 있다.

 

  좋아하는 것을 확연히 드러내고 사람들과 자유자재로 만나는 모습은 오프라인에서 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온라인에서 나는 유독 자신감이 높아졌다. 어느 정도 나를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음을 부각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 요시다 기미코와 나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로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거닐었고, 요시다 기미코는 '미키'란 이름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나체 사진으로 유명세를 타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주요 종목(?)이 다를 뿐 온라인 세계에서 요시다 기미코와 내가 얻었던 무언의 자신감은 쉽게 간과할 수 없었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주목을 받는 다는 사실만큼 짜릿한 것도 없다. 물론 현실의 나의 모습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짜릿함은 고조되겠지만 요시다 기미코는 최상의 짜릿함을 맛보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너무나 평범해 지루할 정도로 굴곡 없이 살아온 요시다 기미코. 지방의 한 중학교 교사인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인터넷 공간에서 가타하라 미쓰루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를 통해 그녀의 숨겨왔던 성적 본능과 위험한 거래가 점점 고조되는데, '빵'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 질주하는 모습이 씁쓸했다.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닌 익명성이 가져다 준 위험한 자신감이었다.

 

그 무렵 교실 한가운데에서 모든 이의 인기를 끌었던 학생들이, 아무리 사사로운 정보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집적해놓은 듯한 인터넷 세계에서는 하나같이 실마리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이름을 잃었다는 사실이 '요시다 기미코'에게는 불가사의하게 다가왔다. 75쪽

 

  가타하라 미쓰루라는 남자 덕분에 인터넷 세계에서 '인기'를 얻게 된 그녀의 욕망 분출은 멈춰지지 않았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성인 사이트에서 나체 사진 및 성관계를 맺는 모습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도 묘한 쾌감을 느꼈다. 가타하라 미쓰루가 아니었다면 내면 깊이 숨어있는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겠지만 위험한 자신감을 얻으면서 맞게 될 비극적인 결말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어쩜 그녀는 이미 위험을 감지했음에도 멈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한 남자와의 만남을 끊을 수 없었다.

 

   학교의 운동장에서 그들이 벌인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행각은 들통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왜 늘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여성이 더 큰 피해자로 부각되는지 모르겠지만 교사의 신분인 그녀가 그동안 벌려놓은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자 그녀의 설자리가 없어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인간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저자가 그려낸 인물은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단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반듯한 삶을 살아왔던 중학교 교사. 짧은 소개만으로도 그녀를 어떻게 파멸시켜버릴 지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의도가 농후했다. 그에 반해 가타하라 미쓰루는 분명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님에도 '정신 나간 사람' 정도로 취급하고 건너뛰어 버릴 정도로 후한(?) 무관심을 유발시켰다. 그녀를 파멸시킨 원인 한가운데는 그가 있는데도 왜 그는 쉽게 간과되고 그녀는 파멸당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일까? 원인 제공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단정 짓고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평범한 여성의 선택의 올바름의 여부는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온라인 세계의 폭력성, 익명으로 인한 쓸데없는 자신감과 흠집 내기, 책임감 결여 등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상기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에 대한 추측이 그대로 들어맞은 결말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과정에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말하고 싶은 데는 두 인물의 그릇된 행동은 물론 그들의 학창시절까지 더듬어가는 세심한 배려 때문이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에 수긍하면서도 수긍할 수 없는 이유가 과정 안에 담겨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는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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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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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때면 공부를 한답시고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배게며 간식이며 라디오며 살림을 따로 차릴 정도로 늘여놓고 널브러져 있는 게 일과였다. 공부는 늘 뒷전이고 잠자고 책 읽기 바빴지만 그때 바라본 풍경들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나는 어렸었고 하늘을 보며 무한한 꿈을 꾸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걱정도 앞섰지만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공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늠되지 않아 늘 두려웠던 것 같다. 그 두려움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무언가를 잃고 나니 내 마음은 피폐해져 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달달한 제목의 소설을 꺼내들었는지도 모른다.

 

  읽고 있는 책이 많았지만 뭔가 내 마음을 다스려 줄 책이 필요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 아니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놀라운 소설!' 이 문구에 끌린 이유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위로를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고 이 소설을 만났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동거하던 남자친구가 집을 나가 친한 친구와 사귀고, 자살한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은 어머니 사이에서 리에는 도피했다. 산골에 자리한 꿀벌의 집에 찾아가 면접을 보고 거처를 옮겨오기까지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다. 벌을 키우고 꿀을 채취하는 일은 도쿄에서만 살아온 22살 리에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된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도피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늘 배신하지 않는 것 같다. 살아 쉼 쉬는 자연 속에 있다 보면 인간도 미물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어느 곳에 있던지 그 사실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지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리에는 양봉 일을 하면서 그 과정을 충실히 경험했다. 리에 뿐만 아니라 상처 받은 사람들과 그곳에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평화로운 곳을 보며 도시의 치열함과 냉정함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소소하게 써 내려간 그곳의 풍경과 일상들이 나에게도 평안을 주었다.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빤히 보인 구성에는 조금 아쉬웠지만 리에가 변화되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어 과정만으로도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도쿄에서 살아온 22살의 리에가 그런 삶을 살수도 있겠다는 들여다봄이 아니라 나에게도 다양한 삶이 펼쳐져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리에처럼 그런 산골에 찾아가 자연과 마주할 수 없지만 리에를 통해 마치 내가 그곳에서 생활한 듯한 간접경험을 했다. 독서의 효과를 제대로 충족한 셈인데 책으로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과정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작품이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말이지, 땅속에서 솟아나온 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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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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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질녘에 읽으면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름밤에 더 어울리는 소설이다. 책을 다 읽을 즈음에 날이 저물고 창밖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고즈넉한 밤을 맞으면 '나의 아버지'가 또렷이 떠오를 것이다. 많은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아버지에 관한 책이다. 잔잔하게, 절제하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열린다.

 

  대부분이 그렇듯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먼저는 못난 자식으로 부모를 대하는 죄책감과 당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죄책감을 잔뜩 실어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 작품처럼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온 세월을 되짚어볼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를 탓하지 않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그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 일.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담담하게 아버지를 미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함께한 세월 속에서 아버지의 위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무뚝뚝하고 살갑게 대해주지 않는 아버지. 그렇다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왔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아버지가 열망했던 삶에 닿아있는 자신을 보면서 아버지를 바라보자 그 간극은 더 멀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고 함께 한 시간들의 방향이 전혀 다름에도 같아질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봤을 때 고독하지 않고 서글프지 않다면 좋았을 것을. 나의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이 작품속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느 누구에게도 회자되지 못하는 나의 아버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지만 어느새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이 사그라져버린 나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아무런 죄책감없이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이나 음악은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난 살아가는 데 그런 거 필요없다. 92쪽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아버지는 경험하지 못했다고,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고 무시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한마디가 나의 아버지를 아프게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곁에 있건 없건 그렇게 해왔던 순간들을 무마시킬 수 없다. 하나의 기억이 똑같을 수 없고 나의 생각을 관철시킨다고 해도 기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기억을 조각조각 붙여넣더라도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마웠다. 내 기억속에 잊혀지고 있던 아버지를 다시 꺼내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어떠한 삶을 살아왔건 어떠한 상처를 받고 어떠한 환희를 느꼈던 나의 아버지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동반하지 않고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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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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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죽음을 맞이했는데 정신만은 또렷해 이상한 광경을 끊임없이 봐야했던 꿈. 너무도 생생해 ‘꿈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다 깼다. ‘다행이다.’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지만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간절히 바랐던, 현실에서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두려움과 직면해 버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도쿠쇼는 기이하게 부어버린 오른 다리를 마주하고는 두려움보다 짜증이 앞서고 말았다. 정신은 또렷한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꿈에서 마주했던 기이한 현실과 또렷한 정신. 내 보기엔 도쿠쇼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물방울』이란 제목만으로 소설의 내용을 추측하기 어렵다고 생각을 굳히기도 전에 이상한 병에 걸린 주인공 도쿠쇼의 발끝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료소 의사도 석회질이 많은 그냥 물이라고만 할 뿐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을까?’ 란 의아함을 가지면서도 능청스러운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거부감보다 호기심이 일었다. 주인공의 발끝에서 물이 나와『물방울』이란 단순한 제목을 붙였을 리가 없다고 생각할 즈음, 도쿠쇼의 발 끝에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는 군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당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이었는데 도쿠쇼는 그들 중 자신의 친구를 알아보고는 오키나와 전투 때 자연 방공호에서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하게 부어오른 다리, 발 끝에서 나오는 물, 그 물을 받아먹는 군인, 그 가운데 만난 친구. 발끝에서 나오는 물은 분명 깨끗한 물의 이미지가 아님에도 용서를 구하고 내면 깊숙이 자리했던 죄의식을 떨쳐버리며, 나중에는 기이한 효과를 맛보게 하는 신기한 물로 희화된다.
 
두 번째 단편『바람 소리』도 서정적인 제목과는 달리 전쟁에 동원되어 다가올 죽음 앞에 무방비로 놓은 젊은이의 두려움을 그려냈다. 풍장터에 놓인 해골에서 나오는 구슬피 우는 소리의 원인을 알려 전쟁의 참상 및 마을을 홍보하려는 자와 그 시신에서 만년필을 훔쳐 온 자, 같이 전쟁에 동원되어 자신은 살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노출되었던 한 청년의 이야기. 끝내 해골의 신원도, 만년필의 되돌려짐도, 해골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국주의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한 젊은이의 울음소리를 통해 한(恨) 맺힌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해설에서는 ‘죽으러 가는 한 젊은이의 불안과 공포의 크기를 작가는 관자놀이에 난 총알구멍으로 표현했다.’고 되어있다. 해골의 눈으로 들어와 관자놀이의 총알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는 남겨져 있는 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마지막 단편『오키나와 북 리뷰』는 저자의 기발함을 가장 난해하면서도 독특하게 풀어낸 소설이었다. 리뷰의 형식을 빌려 쓴 단편소설이라는 사실도 독특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책 제목 속에 황당하면서도 때론 진지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것이 기발했다. 북 리뷰를 통해 두 인물의 일대기를 보여주며, 오키나와를 알려주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의견을 슬그머니 올려놓는 구성에서 저자의 유머까지 함께 맛보았다.
 
세 편의 단편을 마주하면서 공통으로 만나게 되는 공간적 배경은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알면 이 세편의 실린 단편을 좀 더 깊이 있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남쪽에 자리한 오키나와 현은 휴양지와 장수 마을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의 오키나와 현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어 간다면 지금의 아름다운 이미지만으로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류쿠국’으로 오래된 독립국가로 존재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때 일본에서 유일한 지상전에 휘말려 들면서 27년 동안 미군의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 그곳의 세계평화기념 기념비에는 23만 6천 명의 희생자 이름이 적혀있다고 한다. 1972년 일본에 복귀되긴 했으나 온전히 일본의 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1960년에 오키나와에서 태어난 저자는 왜 이렇게 기발한 소설을 통해 오키나와를 드러내는 것일까? 과연 1945년에 끝난 전쟁이 온전히 끝났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땅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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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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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온갖 상념을 실어 보내고, 또다시 생겨나는 파도에 다른 생각을 물고 오는 일. 바다를 볼 때마다 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바다를 보는 일은 지겹지 않다. 언젠가부터 파도 결이 모두 다름을 깨달았다. 그 결처럼 나의 생각도 수천 가지가 떠올랐다 사라지곤 한다. 하나의 고민을 건져 올리고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수많은 파도의 결을 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도 늘 내포되어 있다.

 

바다를 보며 잠이 들었다. 달콤한 꿈을 꿀 거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풍경, 고요한 시간. 오랫동안 바랐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나는 중요한 사람에게 신뢰를 잃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밖에 인지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눈앞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읽다만 책 한 귀퉁이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마치 수술을 해서 잘라낸 것처럼 공포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들어섰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이. 그것이 그들을 남자로 만들어주었다. 여자들도 그것을 알았다. 빌어먹을 공포가 그들에게서 사라졌다는 것을.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중

 

꿈에서 깬 나는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꾼 꿈. 내가 보고 있는 바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문장 앞에서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소설속의 프랜시스 머콤보가 부러웠다. 사파리에 나섰다가 공포를 만나고, '빌어먹을 공포가' 사라진 경험을 한 그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목도할지 궁금해졌다. <킬리만자로의 눈> 에서는 죽음을 앞둔 남자 해리를 만났다. '잘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게 되면 쓰려고 아껴두었던 것들을 영영 쓰지' 못할 것을 알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

 

결국에는 싸움의 부식력 때문에 그들이 공유했던 것들이 죽고 말았다. 늘 그랬다. 그는 너무 많이 사랑했고, 너무 많이 요구했고, 결국 모두 닳아 없어지게 만들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중

 

자신의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담담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다. 프랜시스 머콤보는 공포가 사라진 멋진 삶을 앞두고 생을 마감했고, 해리는 감염된 상처 때문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아껴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두려워하다 자신이 가는 곳이 '킬리만자로의 평평한 꼭대기' 라는 걸 알고 죽음을 뛰어넘어 버린 사람과 잠시 후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삶은 그렇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뿐인 걸까? 그러나 그들이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진중하게 만났다고 믿고 있다.

 

여행의 묘미는 다양한 경험이다. 이곳에서 책을 읽는 것, 바다를 보며 낮잠을 자는 것도 평범하지만 여행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반면 처음 경험해 보는 일들도 많았다. 스노클링, 바다낚시, 스킨스쿠버다이빙 등 앞으로 내 기억을 풍부하게 해 줄 추억들을 쌓았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삶의 경험을 녹인 '닉'이란 인물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치부하기엔 파란만장한 삶. 헤밍웨이 작가의 '인생관과 미학적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했듯이 여러 가지 의미를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여행을 통해 만난 다양한 내 모습처럼 말이다.

 

한 인물이라고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웨이터로 나오기도 하고, 아버지와 함께 인디언 임신부의 출산을 돕고, 친구들과 스키를 즐기고, 전쟁터 속의 군인, 이별을 겪고, 송어 낚시를 하는 모습 등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겹치고 세월의 흐름에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하곤 뒤늦게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저자 자신의 삶이 녹아있다는 사실과 하나의 장편으로 볼 수 있는 구성, 뛰어난 단편작가의 면모를 느끼고 후에 명작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도. 특히 <심장이 둘인 큰 강> 1, 2부를 읽으면서 <노인과 바다>의 밑그림을 본 듯 했다. 헤밍웨이 작가의 장편소설의 명성만 들어왔던 내게 이 작품집은 늘 익숙했던 길의 뒤편으로 들어갔다 비밀의 화원을 발견한 것처럼 지난한 일상을 통과해버린 기분이다. 아니면 비밀의 화원을 나 혼자 뒤늦게 발견한 셈이거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거나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를 치유 받기도 한다. 물론 즐거움 때문에 소설을 읽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스스로 치유하고 힘을 얻는 과정 때문에 소설을 가까이 하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여행에서 이 작품집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바다를 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꿈을 꾸었다면, 내가 만난 글귀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게 끝났어." 닉이 말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 어쩔 수 없었어. 꼭 지금 이렇게 사흘간 바람이 불어 나무에서 잎을 모두 벗겨내는 것과 똑같아." <사흘간의 바람> 중

 

내안에도 이런 절망감이 있었다.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 그냥 방에서 기다리기만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 빌어먹을. 너무 끔찍해." <살인자들> 중

 

나도 이렇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작품집을 읽게 됐고 내 안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조금씩 사라짐을 느꼈다. 왜 이렇게 깊은 공감과 함께 용기를 얻은 것일까? 비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만을 모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려한 문장, 함축인 의미와 때론 세세한 묘사가 주는 다양한 매력도 물론 큰 이유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진실성과 고비마다 묶여있는 고민의 드러냄만으로도 동질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도 바다를 보면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상념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생각들을 이끌고 올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곳의 바다에서 만났던 절망과 두려움, 헤밍웨이 작가의 작품집을 통해 얻었던 용기와 위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매일 우리는 그것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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