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 175년 동안 바다를 품고 살았던 갈라파고스 거북 이야기 보름달문고 45
한윤섭 지음, 서영아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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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두려울 때는 현재의 나를 바꿔야 하는 현실과 직면할 때와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 내 자신을 마주할 때다. 그런 상황에서는 내면의 두려움으로 인해 모든 감정이 몸속에 새겨지는 것 같다. 그럴 때 내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면 이상하게 고마움보다 서러움을 먼저 느껴 울어버리고 만다. 그런 내가 요즘에는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손을 내밀면 진심으로 나의 문제를 받아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원숭이 찰리도 나처럼 두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엄마와 헤어져 동물원에 보내진 찰리는 새로운 환경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런 찰리를 보고 다른 원숭이는 ‘중요한 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거야. 어차피 네가 살았던 숲도 원숭이의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세상이거든.’(19쪽) 이라며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생활을 암시해 주었다. 우연히 테드라는 아이의 눈에 띄어 그들이 원하는 생활에 맞추어 살아가지만 다시 동물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은 그동안 상상할 수 없었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우리에 갇힌 찰리는 거친 개코원숭이 스미스에게 첫 날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돌에 맞고 협박을 당하며 절망의 한 가운데 있을 때, 구원처럼 175년을 살아온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이 찰리에게 온다. 

“처음이라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외로울 거야. 난 네 마음을 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여기는 너 혼자가 아니다. 그걸 알려 주고 싶어 온 거야.”(61쪽)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며, 나는 너의 친구라며 찰리를 위로한다. 철저히 혼자라고 느꼈던 찰리, 그런 찰리를 보면서 앞으로의 동물원 생활이 절망적일 거라고 단정 지었던 나 또한 해리엇의 등장으로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찰리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해리엇이 다정스레 말하는 것 같아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말았다. 타인에게 드러내지 못한 나의 감정, 나의 내면 깊숙이 박혀 있는 외로움이 해리엇의 한 마디로 모두 드러남과 동시에 스르르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해리엇은 찰리를 위해 같이 밤을 보내 주었지만 스미스의 괴롭힘은 끝이 없었다. 우연히 철창 열쇠를 갖게 된 찰리를 끊임없이 협박하는 스미스를 보며 결국 해리엇은 찰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육사에게 몸으로 자신의 뜻을 전한다. 새로운 우리로 옮긴 찰리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동물원의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행히 해리엇과 함께 할 수 있어 안심이 되었지만 적대적인 스미스는 늘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스미스의 아기 원숭이가 사탕이 목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찰리는 자기가 가진 열쇠로 문을 열고 너구리 올드와 함께 아기 원숭이를 구하려 했지만 그토록 열쇠를 원하는 스미스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아기 원숭이의 생명이 위태로워 올드와 함께 원숭이들의 우리로 향하게 되는데, 아기 원숭이를 구하고 다시 철문을 닫고 나오려는 순간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천천히 하라며 문을 닫는 찰리를 위로했고, 그 말로 인해 마음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찰리를 괴롭히던 스미스가 열쇠를 빼앗지 않았고, 공격하지도 않았으며, 아기 원숭이를 살려준 사실에 드디어 마음을 연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는 해리엇의 도움이 컸다. 혼자였던 찰리에게 다가와 위로해 주었고,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려는 모습을 통해 찰리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발판이 되어 주었다. 찰리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밤, 해리엇이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찰리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위협적인 스미스 때문에 힘들어 하며 탈출할 생각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많은 것을 주었던 해리엇이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너무 나이가 많아 죽음이 임박했고, 그 사실을 알고 모든 동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동물원 안의 현자였던 해리엇이 그렇게 죽을 거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고 서러웠다. 더 오랫동안 동물들의 곁에 남아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길 바랐는데, 해리엇에게 시간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들 슬퍼하고 있을 때, 해리엇은 지금껏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175년을 살아온 이야기이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던 고향이야기였다. 평화롭던 거북섬에 인간이 찾아왔고 수많은 거북이 배에 실려 이동하던 중에 잡아 먹혔다. 그곳에서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다른 거북이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누군가는 바다를 만날 거야'란 공통적인 희망을 갖고 살아남은 해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동물원으로 오게 되었다. 해리엇이 배를 타고 동물원에 오는 과정들에서의 인간은 파괴자였고 동물들의 삶을 순식간에 지배한 권력자였다. 그들이 살아온 곳도 '사람들의 세상' 이라고 말하던 동물들에겐 진정한 삶을 누릴 권리가 없었다. 동물원에 갇혀 서로의 삶을 구속하며 서로를 위해주지 못한 데서 오는 절망을 맛보고 있을 때, 해리엇은 동물원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해리엇의 이야기를 들은 찰리는 해리엇을 마지막으로 바다로 데려가주고 싶었다. 바다가 해리엇을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을 믿으며 위험한 길을 나선 그들은 해리엇이 바다를 향해 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다. 스미스와 찰리, 올드가 해리엇을 바다에 데려다 주는 과정은 눈물을 숨겨도 되지 않을 정도로 뭉클한 장면이었다. 175년 동안 고향을 그리워했던 해리엇이 바다에 닿기만 하면 갈라파고스로 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그대로 보여준 부분이었다. 

  해리엇은 분명 갈라파고스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원에 남겨진 동물들은 서로를 위하며 자기네들이 태어났던 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며 잘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해리엇이 남겨준 선물이었고, 찰리가 해리엇을 바다로 데려다 주려 했을 때 '다른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용기 또한 해리엇이 가르쳐 준 일이다.'(143쪽) 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이 다른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추천의 말을 써주신 김진경 작가는 '해리엇과 같은 진정한 어른이 지금의 인간 현실 속에는 없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갈라파고스 거북을 통해 그려 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작품 속에 녹아든 메시지가 누구에게로 향해있는지는 빤한 일이지만,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들뿐만 아닌 나 같은 어른아이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번역된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이는 저자의 문체와 이야기는 매혹적이었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과거도 아닌 미래도 아닌 현재에 이런 소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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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초 이야기 - 할머니 탐정의 사건일지
요시나가 나오 지음, 송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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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기를 시키려 열어놓은 창문을 닫다가 우연히 앞집의 내부를 보았다. 늘 하숙방처럼 잠만 자고 나가는 요즘 바짝 붙어 있는 앞집에 관심도 없었지만 오늘따라 설거지 하는 모습, tv를 보는 모습 등 동태가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나 그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타인이 들여다본 우리 집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타인의 집은 밀실이다. 전혀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46쪽)' 라는 말에 공감하며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운초의 '소우 할머니'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어딘가에 소우 할머니 같은 분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은 순전히 『고운초 이야기』 때문이다.

 

  부제를 보면 '할머니 탐정의 사건일지'라고 되어있다. 탐정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흥미가 이는 '할머니 탐정'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에서 의외의 감동을 만난 기분이었다. 정통미를 간직한 탐정소설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사건들이 잔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인물을 그려내는 묘사나 고운초라는 공간을 통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이야기인 「고운초의 소우 할머니」가 데뷔작이라고 하니 주목할 만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일흔여섯의 할머니 탐정이 지팡이를 짚고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간 살아온 삶의 경험과 따뜻한 마음씨가 관건이라는 것을 소우 할머니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운초의 소우 할머니」에서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게를 개조해 커피와 전통도기를 파는 '고쿠라야'를 운영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젊은 시절 이혼해 아이까지 잃어버린 아픈 과거가 맞물린 모습이 나온다. 그래서였을까. 우연히 목격하게 된 동네 맨션의 이상한 점을 통해 한 아이를 구출해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창문으로 드러난 피 묻은 손을 빌미로 조금씩 추리를 해 나가긴 하지만 나이를 고려했을 때 격렬한 조사와 열정적인 다가감은 무리였다. 소우 할머니 나름대로 꾸준히 조사해 나가지만 정작 그 집에 학대를 받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구출해 내려 했을 때는 도저히 혼자서 할 수 없었다. 그때 도둑을 만나게 했고, 도둑과 거래를 해서 아이를 구출해 내게 한다. 그 사건은 대서특필되고 소우 할머니는 도둑이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고 갔다며 언론에는 사건의 공을 도둑에게 돌린다.

 

  '내가 잘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아이일세. 그래서 대충 넘어갈 수 없네. 그뿐이야.'(68쪽) 라고 말하는 할머니를 통해 도둑은 아이를 구해 왔지만 그들의 한탄대로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소우 할머니의 이런 고통은 이 책의 전반부에 두루 나타나는데, 고쿠라야를 운영하는 평범한 할머니로 보일지라도 그 안에 숨겨있는 상처와 그간 살아온 내력, 소우 할머니 나름대로의 로맨스를 통해 다양한 인간의 삶을 엿볼 수 있어 색다를 묘미를 맛보았다. 「구와바라, 구와바라」에서는 얄미운 동창생을 「0과 1사이」에서는 컴퓨터를 과외를 해주는 대학생을 「나쁜남자」에서는 갑자기 나타나 문제를 일으키는 전직 야구선수를  「싸리를 흔드는 비」에서는 정치가로 성공한 옛 친구를 상대로 소우 할머니의 특유의 친절과 지혜로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하기도 하고 관여하기도 한다.

 

  소우 할머니의 연로함이 늘 걱정되긴 했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 안에서 끊임없이 향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할머니 탐정 일지'라고 했으나 사건들이 할머니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소우 할머니가 사건들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귀 기울임에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상처를 괴로움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것을 거둬내려는 노력이 이 소설의 메시지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사회에서 소우 할머니를 통해 아직도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아갈 만 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이 소설의 의미는 충분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먼저 안부를 여쭈고 귀를 기울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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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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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책이라면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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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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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그려주어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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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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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고도 한참을 머무르는 책이 있다. 하룻밤이 지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여운이 사라질까봐 걱정이 되는 늦은 밤,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히려 며칠이 지나면 이런 복잡함이 차분히 정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잠도 이루지 못한 채 책상머리에 앉아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다. 나는 어떤 세상을 보고 어떤 세상의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한바탕 꿈을 꾼 것일까. 내가 만난 이야기가 정말 우리 곁에 있는 다른 곳의 이야기일까?

 

  "이렇게 먹구사는 법을 먼저 배워야 진짜 일꾼이 되는 거란말야."(23쪽)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남들처럼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며 열심히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런 고민의 근본에는 내가 '일꾼'의 자세가 되어있는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꽃섬'이라 불리는 쓰레기장에서 나온 음식으로 끓인 일명 '꽃섬탕'을 먹으면서 '먹구사는 법'을 배워가는 딱부리에게 그것은 진정한 배움이 되었을까? 그동안 내가 쓰레기봉투 안에 우겨넣었던 온갖 쓰레기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을 주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자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햄, 곰팡이가 피어 버린 마른반찬들이 들어있는 나의 냉장고가 떠올랐고, 이 음식들을 버리면 어디선가 '꽃섬탕'으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나는 '먹구사는 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져 부끄러워졌다.

 

  꽃섬. '바다가 보이는 낙원'(28쪽)이 아니라 도시의 온갖 쓰레기들이 들어오는 곳. 그곳에서 마치 '물건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사다가 쓰고 버린 것처럼 자기네도 더이상 쓸 데가 없어져'(147쪽) 몰려든 사람들이 사는 곳. 특유한 냄새 때문에 어딜 가든 '꽃섬' 사람들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지 못하는 곳. 그럼에도 쓰레기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꽃섬이었다. 이름과 상반되게 꽃이라곤 피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삶이 존재했고,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별명으로 통했다. 새사람을 만들어 내보낸다는 교육대에 아버지가 끌려가자 엄마와 함께 꽃섬으로 흘러들어온 딱부리나,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아수라 반장의 아들도 땜통으로 통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두더지, 송장메뚜기, 방개도 모두 그곳에 사는 아이들의 별명이었다.

 

  꽃섬은 그런 아이들의 시선과 성장 과정의 중심에 있었다. 순경에게 머리를 쥐어 박히며 얻었던 별명을 쓰는 딱부리와 화상으로 뭔가 조금은 부족하지만 눈치 빠르고 속정이 깊은 땜통이 눈에 띄었다. 그들 눈에 비춰진 꽃섬의 모습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느 시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시간과 색깔을 잃어버린 곳. 그곳에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개인의 특질을 가질 수 없는 통일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집단이었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은 지쳐갔다. '꿈속에서처럼 갑자기 휙하는 순간 무슨 구멍이나 우물이나 아니면 낡은 문 같은 곳을 통과해서 사람들이 사는 동네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도깨비 나라로 들어서고 말았다.'는 딱부리의 말마따나 그곳은 '이상한 도깨비 나라'라 해도 반박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버린 멀쩡한 것, '하나씩 쥐어보면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물건들'(42쪽)과 '생선 머리처럼 원래의 모양을 잃고 복잡하고 자잘하게 분해되어 있어서 기계가 처음 만들어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괴한 사물'(122쪽)로 보이는 것들이 모여드는 곳이 꽃섬이었다. 그런 것들을 분해하고 해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꽃섬 주민들이었다. 아이들에겐 학교란 가끔 가는 교회가 전부였고, 나이를 조금 올려붙여 쓰레기더미에서 어른들과 함께 돈거리를 찾아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곳에서 쓰레기를 분류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장에게 권리금을 내고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나름대로의 규칙과 구역이 나눠진 쓰레기를 취급했지만 결코 정겨움이 일지 않는, 싸움이 일고 사고도 나며, 때론 사람까지 죽는 일이 발생하는 끄트머리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같았다. 얼결에 동생이 된 땜통과 딱부리가 보여주는 꽃섬의 세계는 여태껏 내가 맛보지 못한 세계를 드러내듯 모든 것이 적나라했다.

 

  정말 그 곳도 '못 살 데가 어디 있겠냐'(121쪽)고 말하던 만물상 할아버지의 말처럼 지낼 만한 곳일까? 그곳 사람들이 가끔 도시로 나가 일반 시민들처럼 섞일 때가 아니면 그들은 특별하게 구분되어 있는 사람들 같았다. 딱부리의 생각처럼 '쓸 데가 없어져'버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되는 그곳에 그들이 살건만, 그들보다 먼저 존재해왔던 '김서방네 식구들'이 있었다. '빼빼아줌마'의 눈에만 보여 '빼빼아줌마'는 실성한 사람 취급 받았지만 땜통과 딱부리의 눈에도 보이는 '파란 불'로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후에 꽃섬에 큰 불이 났을 때 '세상에 니들만 사는 줄 아냐?'(219쪽)며 몸부림치던, 땜통과 딱부리에게 지금 모습과 전혀 다른 꽃섬을 보여주었던, 땜통에게 메밀묵을 부탁하고 돈이 묻혀 있는 곳을 알려주던 존재들. 빼빼아줌마의 몸을 빌려 연결된 그들은 딱부리와 땜통에게도 실재하는 존재들이었다.

 

  꽃섬의 과거 모습은 상상해내기 힘들지만 아마도 김서방네가 보여주었던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꽃섬을 만든 것은 분명 우리일 것이다.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233쪽)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쓰고 버리는 욕망'이 없었다면 그곳은 전혀 다른 곳으로 불리고 현재와 다른 모습으로 간직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228쪽)나는 모습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땜통이 맞이하는 비극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김서방네 막내가 말했던 '풀꽃들 씨앗'(137쪽)이 어딘가에 가득 거둬져 꽃섬에 가득 뿌려질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이 되면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234쪽)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그럴 때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고 질문하고 싶다던 저자의 마음을 우리가 이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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