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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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을 하루키 마니아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하는 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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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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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의 수많은 책을 보면서 언제 저 책을 다 읽을까 걱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직 내가 소화하지 못한 책은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다. 그런 억지가 종종 들어맞을 때가 있는데,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그랬다. 이 책에 대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온 터라 진작 구입해 놓고는 펼쳤다 덮곤 했다. 이상하게 책이 잘 안 읽혔는데, 이 책은 그러게 읽어대면 안될 것 같아서 아껴두었었다. 그렇게 책장에 묵혀두다 최근에 다시 꺼내게 되었는데,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그 여운을 이기지 못해 저자의 다른 책을 꺼내서 읽기도 하고, 내게 없는 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저자의 책을 불현듯 꺼내든 것은 요즘 소설만 읽어댄 탓도 있었고, 거대한 자연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그렇게 알래스카를 만나고 싶어 책을 펼쳐 들었건만, 그가 1996년에 불곰의 공격으로 숨을 거뒀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이 일었다. 내가 중 3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나서야 그의 책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더 많은 글과 사진들을 만날 수 있었을 거라는 독자입장의 욕심만 드러낸 것이 부끄러웠다. 저자는 19살 때 알래스카에서 여름을 보낸 계기로 죽을 때까지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낸 사진작가였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본 알래스카의 마을에 반해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고, 기적처럼 답장이 와 알래스카로 건너가 거대한 자연을 맛보았다. 그가 담아낸 사진 속의 알래스카, 거칠지만 진심이 드러나는 그의 글 앞에서 알래스카와 그와의 오래전 인연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내면서 그곳의 주민들과 우정을 나누곤 했는데, 그런 만남들을 지켜볼 때마다 그가 모든 것을 마음으로 담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도, 그곳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진심이 느껴졌다. 카리부 떼를 쫓아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면서도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이리를 보며 '그 배후에 있는, 지금까지 이리가 살아온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그래서 풍경은 이리나 곰 한 마리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찍어내고 싶은 사진이 분명할 때도 있었지만, 이렇듯 알래스카 곳곳에서 만나는 생명체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알래스카의 사진과 글을 보고 있노라면 이유 없이 내 마음이 맑아진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의 알래스카는 저자가 경험했을 때보다 많은 것이 변했을지라도, 당시의 알래스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알래스카의 황홀한 자연 경관 뒤에는 문명의 훼방이 늘 위협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아닐까 싶다. 알코올중독 문제, 이상할 정도로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 붕괴 등등 가장 뿌리 깊은 근본 원인은 알코올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는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그들에게, 알코올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며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던 알래스카에는 이미 문명의 때가 찌들어 있었다. 원전 개발이다 뭐다 해서 그곳을 더욱 황폐화시켜가고 있는 원인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무책임함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저자는 1971년 처음으로 알래스카에 갔을 때, 그 여행을 통해 '누구나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꼭 한 번만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민족과 환경의 차이 없이 이 한가지 공통점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저자가 만난 사람들과 알래스카의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해설을 남긴 오오바 미나코씨는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아무리 비참한 사람의 이야기라도 절망적으로 흐르는 일이 없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알래스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절망적인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그는 그것을 그대로 전달해주면서도, 그 이후에는 좀 더 희망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곤 했다. 아마 그가 20여 년 동안 보아온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배운 긍정적이고 넉넉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그의 맑은 내면이 내게 와 닿는 것 같다.

 

  오랫동안 묵혀뒀던 책을 꺼내들었음에도 마치 어제 만난 책을 다시 꺼낸 듯 마음이 참 평안하다. 저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 알래스카는 당시와는 무척 다르게 변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온전히 사진과 글 속의 풍경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일 것만 같고, 그렇게라도 간직하지 않으면 저자의 노력이 헛될 것만 같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알래스카가 내 기억에서 영영 잊힐 것만 같다. 언젠가 알래스카에 당도해 그가 남긴 흔적을 밟을 수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바람 같은 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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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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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회색빛 도시를 떠도는 기분. 그 도시의 잔여물처럼 느껴지던 시기. 내게도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아무리 찬란한 햇살이 비추어도 도시는 늘 우울하고 그늘진 장소로 여겨졌었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 속의 부적응 자. 그런 모습이 나라고 해도 도시와 나는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가 주는 삭막함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기에 도시의 느낌을 그렇게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도시 속에서 비겁한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면 어땠을까? 아마 도시도, 자신도 못 견디게 무기력해져서 스스로 존재의 위협을 받았을 것 같다. 

  『잔해』의 필리프가 그랬다. 날씨 좋은 10월의 저녁,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센 강변에서 한 쌍의 커플을 보게 된다. 남자의 위협적인 태도와 겁먹은 여자의 모습에 끌려 뒤를 쫓지만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건은 오래도록 필리프를 괴롭힌다. 아내보다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처형한테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건은 필리프를 무상하게 만든다. 그 장소에 다시 가보기도 하고, 그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괴로움은 풀리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은, 진짜 부끄러운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비겁하다고 알려지는 것이다.’라며 전전긍긍하다 고뇌하며, 의욕 없는 날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는 이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얘기를 시시콜콜 들어주는 처형에게도, 한 집에 살지만 전혀 다른 생활을 영위해 가는 아내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 봤을 때 필리프는 남부러울 것 없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과 사업으로 부유했고,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의욕적인 것도 아니었고, 아내는 자신들이 결혼이 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또한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음에도 다른 도시의 기숙학교에서 지내게 했다. 그가 사랑받고 있는 대상은 처형 엘리안이었다. 집을 돌보지 않는 아내 앙리에트를 대신해 거의 안주인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엘리안은 그가 결혼한 순간부터 11년 동안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필리프에게 센 강의 한 쌍의 커플의 사건이 오히려 큰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로인해 실존에 대한 문제가 그의 내면에서 쉼 없이 들끓었다. 무기력함이 그를 지배했고, 허무함이 그의 삶을 바꿔버릴 듯 했다. 엘리안은 그런 사실은 모른 채 필리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앙리에트는 가난한 애인을 두고 있었다. 앙리에트와 엘리안이 필리프가 사는 아파트로 오기 전까지 그들은 가난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는 상황에서 사랑 없는 결혼을 영위해 나가다보니 앙리에트는 가난한 남자에게 끌렸다. 그 남자에게 ‘자신이 그를 만나는 것이 그의 가난 때문이라고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언니를 설득해 필리프에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필리프와는 거의 대화가 없어 돈을 요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언니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앙리에트는 ‘인간 존재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본 삶에 대한 격렬한 애정을 내부에서 키워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필리프가 격렬한 애정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며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필리프, 엘리안, 앙리에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격렬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평범함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필리프와 앙리에트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해가고, 엘리안이 앙리에트의 자리를 메우듯 필리프를 사랑하는 것, 그 사실을 앙리에에게 말하고, 앙리에트는 외도를 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언니를 통해 남편의 돈을 빌리는 것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에서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인을 도와주지 못한 자책감이 필리프를 괴롭혔듯이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흐름보다는 그들의 존재위치, 끊임없이 변해가는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무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드러나기보다 과정이 담긴 소설임을 깨달았기에 그들이 도시에 떠도는 ‘잔해’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며 만나는 것이 더 편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면 깊숙이 잠재해있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욕망들을 드러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엘리안은 잠시 집을 나가기도 하고, 그런 엘리안을 필리프가 찾아가기도 하며, 앙리에트는 정부의 부탁을 거절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필리프가 그렇듯 이들 모두 무기력한 존재의 상징을 드러내듯 그들이 하고자 하는 행동들은 어떠한 변화도 꿰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필리프와 앙리에트의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음에도 전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것 하며, 질투 아닌 질투 때문에 조카를 좋아하지 않는 엘리안 등 많지도 않는 가족이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큰 변화는 아니더라도 필리프가 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 ‘멋있기는 하지만 무리결한 존재야.’라며 필리프를 바라보는 엘리안, 정부에게 돈을 주고 돌아오던 길에 위험한 일을 당할 뻔 했던 앙리에트, 드디어 센 강에서의 자신의 비겁함을 엘리안에게 말하는 필리프. 이런 것들이 큰 흐름을 바꿔놓지는 않았을지라도 도시를 떠도는 잔여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가웠다. 자신의 내면속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가족이라는 타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려 하는 시도가 소설의 중심 화두였던 실존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시선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미미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이 존재 의식을 더 키워나가길 바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의『잔해』는 녹록치 않은 소설이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내면의 격정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었다. 존재 여부가 불투명할 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때 이 작품을 만난다면 더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오히려 고통의 근원으로 더 다다갈 수 있는 법. 타인이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생각이 아닌, 스스로 만나는 내면이라 생각하고 이 소설을 대한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과 함께 더불어 소설의 본질에 더 다다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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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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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회색빛 도시를 떠도는 기분. 그 도시의 잔여물처럼 느껴지던 시기. 내게도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아무리 찬란한 햇살이 비추어도 도시는 늘 우울하고 그늘진 장소로 여겨졌었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 속의 부적응 자. 그런 모습이 나라고 해도 도시와 나는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가 주는 삭막함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기에 도시의 느낌을 그렇게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도시 속에서 비겁한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면 어땠을까? 아마 도시도, 자신도 못 견디게 무기력해져서 스스로 존재의 위협을 받았을 것 같다. 

  『잔해』의 필리프가 그랬다. 날씨 좋은 10월의 저녁,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센 강변에서 한 쌍의 커플을 보게 된다. 남자의 위협적인 태도와 겁먹은 여자의 모습에 끌려 뒤를 쫓지만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건은 오래도록 필리프를 괴롭힌다. 아내보다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처형한테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건은 필리프를 무상하게 만든다. 그 장소에 다시 가보기도 하고, 그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괴로움은 풀리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은, 진짜 부끄러운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비겁하다고 알려지는 것이다.’라며 전전긍긍하다 고뇌하며, 의욕 없는 날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는 이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얘기를 시시콜콜 들어주는 처형에게도, 한 집에 살지만 전혀 다른 생활을 영위해 가는 아내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 봤을 때 필리프는 남부러울 것 없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과 사업으로 부유했고,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의욕적인 것도 아니었고, 아내는 자신들이 결혼이 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또한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음에도 다른 도시의 기숙학교에서 지내게 했다. 그가 사랑받고 있는 대상은 처형 엘리안이었다. 집을 돌보지 않는 아내 앙리에트를 대신해 거의 안주인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엘리안은 그가 결혼한 순간부터 11년 동안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필리프에게 센 강의 한 쌍의 커플의 사건이 오히려 큰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로인해 실존에 대한 문제가 그의 내면에서 쉼 없이 들끓었다. 무기력함이 그를 지배했고, 허무함이 그의 삶을 바꿔버릴 듯 했다. 엘리안은 그런 사실은 모른 채 필리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앙리에트는 가난한 애인을 두고 있었다. 앙리에트와 엘리안이 필리프가 사는 아파트로 오기 전까지 그들은 가난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는 상황에서 사랑 없는 결혼을 영위해 나가다보니 앙리에트는 가난한 남자에게 끌렸다. 그 남자에게 ‘자신이 그를 만나는 것이 그의 가난 때문이라고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언니를 설득해 필리프에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필리프와는 거의 대화가 없어 돈을 요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언니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앙리에트는 ‘인간 존재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본 삶에 대한 격렬한 애정을 내부에서 키워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필리프가 격렬한 애정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며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필리프, 엘리안, 앙리에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격렬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평범함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필리프와 앙리에트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해가고, 엘리안이 앙리에트의 자리를 메우듯 필리프를 사랑하는 것, 그 사실을 앙리에에게 말하고, 앙리에트는 외도를 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언니를 통해 남편의 돈을 빌리는 것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에서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인을 도와주지 못한 자책감이 필리프를 괴롭혔듯이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흐름보다는 그들의 존재위치, 끊임없이 변해가는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무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드러나기보다 과정이 담긴 소설임을 깨달았기에 그들이 도시에 떠도는 ‘잔해’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며 만나는 것이 더 편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면 깊숙이 잠재해있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욕망들을 드러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엘리안은 잠시 집을 나가기도 하고, 그런 엘리안을 필리프가 찾아가기도 하며, 앙리에트는 정부의 부탁을 거절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필리프가 그렇듯 이들 모두 무기력한 존재의 상징을 드러내듯 그들이 하고자 하는 행동들은 어떠한 변화도 꿰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필리프와 앙리에트의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음에도 전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것 하며, 질투 아닌 질투 때문에 조카를 좋아하지 않는 엘리안 등 많지도 않는 가족이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큰 변화는 아니더라도 필리프가 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 ‘멋있기는 하지만 무리결한 존재야.’라며 필리프를 바라보는 엘리안, 정부에게 돈을 주고 돌아오던 길에 위험한 일을 당할 뻔 했던 앙리에트, 드디어 센 강에서의 자신의 비겁함을 엘리안에게 말하는 필리프. 이런 것들이 큰 흐름을 바꿔놓지는 않았을지라도 도시를 떠도는 잔여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가웠다. 자신의 내면속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가족이라는 타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려 하는 시도가 소설의 중심 화두였던 실존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시선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미미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이 존재 의식을 더 키워나가길 바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의『잔해』는 녹록치 않은 소설이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내면의 격정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었다. 존재 여부가 불투명할 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때 이 작품을 만난다면 더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오히려 고통의 근원으로 더 다다갈 수 있는 법. 타인이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생각이 아닌, 스스로 만나는 내면이라 생각하고 이 소설을 대한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과 함께 더불어 소설의 본질에 더 다다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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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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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판탈레온 대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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