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러시아 문학이 없어서 부끄럽다. 또한 아직도 접하지 못한 러시아 작가들이 너무나 많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자신 없어진다. 톨스토이는 나와 성향이 안 맞아서 대표작만 겨우 읽을 정도였다 치더라도 늘 이반 투르게네프가 마음에 걸렸었다. 제대로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 세계에는 무지했는데, 이번에는 꼭 만나리라 다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펼쳐들었다.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좀 더 글씨가 크고 최근에 번역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읽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품들은 출판사별로 비교하며 읽는지라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다음에 읽어도 될 듯 싶었다.
 

  초반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약간 주눅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 이제야 이런 책을 만났을까 하는 탄식이 자연스레 터져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 성향에 꼭 들어맞는 소설이었고, 오랜만에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독서를 하는 내내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어냈다는 후련함보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내면을 지배했다. 다시 러시아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정도로 무척 반갑고 고마운 소설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두 세대의 갈등을 보여주고자 제목을 『아버지와 아들』로 지은 것처럼 작품 속에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옮긴이도 말했듯이 소설속의 논쟁과 갈등은 현재의 실질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한 세대 간의 보편적 갈등, 동시대의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묘사, 중부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서정적 묘사,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묘사'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좋아한 것도 이런 세세한 묘사와 장황스러운 대화체, 끝 간 데 없는 수다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는데, 이반 투르게네프도 그러한 매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하며, 당시의 사회문제들을 필두로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거기에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까지 보태 19세기 러시아로 편입한 듯한 착각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작품 속의 아들 세대는 아르카디와 그의 대학 친구 바자로프였고, 아버지 세대는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와 큰아버지 파벨이었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를 따라 그의 고향에 잠시 머물면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특히나 파벨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니힐리스트라고 소개할 정도로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어떤 것이든 인정하지 않는 바자로프는 사사건건 파벨과 충돌했다. 바자로프가 보기에 파벨은 낡아빠진 귀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자였고,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버릇없고 뻔뻔하고 예의도 모르는 자였다. 둘의 문제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라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어느 사회건 겪는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는 섣부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와 신세대가 나란히 동시대를 살아가지 않으면 내부의 붕괴는 뻔 한 법이고, 충돌을 방치하게 되면 화합과는 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중심선상에 팽팽하게 맞선 바자로프와 파벨이 있었으니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바자로프가 좀 더 공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말하거나 논리정연하게 말했더라면. 파벨은 귀족의 본보기를 내면까지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결국 결투까지 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끝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현재의 수많은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속의 논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니콜라이, 파벨이 겪는 사랑도 있었고, 가족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던 바자로프는 매력적인 과부 오딘초바에게 사랑을 느끼고, 지금껏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어긋나는 마음에 혼란스러워한다. 오딘초바도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긴 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걸기엔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아르카디 또한 오딘초바에게 첫 눈에 반하고,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고 나자 바자로프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아르카디가 바자로프와 오랜 우정을 깊이 나누었다고 할 순 없지만, 최근에 친해진 그들은 오딘초바가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잘 지냈을 친구였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지만,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극성인 부모를 만나 좋은 인상을 남긴다. 바자로프를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부모님을 보면서 부러움도 느끼고, 바자로프가 부모에게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혈기인 그들, 구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시골생활과 따분한 집은 갑갑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당장 도시를 향했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키워가며,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논쟁하고, 안락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아르카디는 결국 오딘초바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오해와 충돌로 인한 거리감으로 멀어진 바자로프와 결별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게 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그리고 오딘초바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그를 열렬히 반기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로 인한 즐거움을 오래 선사하지 못한 채, 장티푸스로 죽은 시신 해부에 참여했다가 감염되어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니힐리즘을 이 모든 사건들도 인해 빠져나왔건만 예고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죽음 직전에 오딘초바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었노라 고백은 했지만 그만 빼고 모두 나름대로 행복한 것 같아 쓸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논쟁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해 가던 청년이 스러져 버린 것은 '러시아의 1860년대는 아직 바자로프의 때가 아니라는 투르게네프의 객관적인 현실인식'과 철저히 마주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며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저자의 말처럼 사랑의 무기력이 헛됨이 아님을,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듯 정치적, 가족, 사랑, 심리적인 면까지 두루 가춘  『아버지와 아들』은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메시지를 선사한다. 때로는 철학적인 사색 앞에 감탄하기도 하고, 능글맞은 비유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오랜만에 달게 읽은 소설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100년이 훨씬 지난 소설을 읽고 이렇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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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사는 나라
데이브 에거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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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니네 집에 얹혀 살 때 거실 책장에는 어린이 책이 가득이었다. 네 명의 조카들이 볼 책들이라 책장이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동화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내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집어 들었던 것은 또렷이 기억난다. 막내 조카가 잠들기 전에 꼭 이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언니들에게 졸라대서 도대체 뭔 내용이기에 이러나 싶어 궁금했다. 그렇게 집어든 책을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라면 알록달록 예쁠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어두워도 되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읽고 충격을 받은 후, 동화책은 내가 생각하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이들만 읽는다는 편견을 깨트리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보게 된 것이 이 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 속에 묻어놓고 있었는데 소설 버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한 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연 소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막연히 동화책의 저자 모리스 센닥이 소설을 썼을 거라 생각했는데, 영화 각색 작업에 참여했던 데이브 에거스 작가가 쓴 책이었다. 저자 또한 동화책의 팬이어서 흔쾌히 각색 작업에 참여를 했는데, 영화가 만들어진 후에 모리스 센닥으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소설로 탄생될 밑거름을 만들고 있었다.

 

짧은 동화책을 소설로 쓴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짧은 이야기에 상상력을 덧대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각색한 자료로 소설을 썼다고 해도 모리스 센닥의 명성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야기를 꼼꼼히 구성해 나갔고, 독자로 하여금 좀 더 상세한 인물들을 만나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맥스가 괴물들이 사는 곳으로 가게 된 여정, 그곳에서의 모험,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 저자의 손에 의해 동화책의 명성을 뒤로하고 하나의 소설로 탄생하게 되었다.

 

주인공 맥스는 꾸중을 듣고 집을 나서게 된다. 이혼한 엄마, 사춘기를 겪고 있는 누나, 엄마의 남자친구까지 모두 맥스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누나의 방을 물바다로 만들고 꾸중을 듣고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물 받은 늑대 옷을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던 맥스는 더 이상 가족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선다. 한참을 달려 강가에 도착한 맥스는 보트를 발견하고 그 길로 모험에 나선다. 오랜 항해 끝에 한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였다.

 

몸집이 큰 괴물들에 겁을 낼 법도 하건만, 맥스는 괴물들 사이를 호기심을 잔뜩 품은 채 돌아다닌다. 괴물들도 맥스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그런 괴물들과 실컷 어울리지만 괴물들은 맥스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기지를 발휘해 맥스는 자신이 괴물들이 왕이라 칭하고, 다시 괴물들과 친해진다. 그러나 여덟 살 맥스가 이 괴물들을 지배하기란 역부족이다. 괴물들의 리더인 캐서린과는 친해져 우정을 나누지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괴물들을 관리하기란 쉽지 않다. 캐서린과 맥스의 관계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괴물도 있고, 맥스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지 않는 무리도 있었다. 수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괴물들이 사는 이곳에서도 현대 사회와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얼핏 『파리대왕』이 떠오를 정도로 괴물들과 맥스의 에피소드가 얽혀들었다. 내용은 판이하게 다를지라도, 『파리대왕』에서 아이들이 패로 나뉘어 서로 권위를 차지하려 했던 모습이 괴물들과 맥스의 행동들에 오버랩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그렇게 무겁다는 얘기는 아니고, 맥스가 괴물들과 함께 한 모험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또 다른 요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쉽게 장면전환이 되는 구성 속에서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 보았음직한 모험이 맥스를 통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맥스가 괴물들의 나라에 당도한 과정은 순탄치 못했을지라도, 이곳에 와서 괴물들과 우정을 나누고 실컷 모험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으리라 생각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와 가족들을 걱정시켰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 집에서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한다. 맥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캐서린과의 아쉬운 이별이 있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 맥스는 좀 더 씩씩한 아이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화책과 소설책을 모두 읽고 나니, 같은 이야기면서도 다른 이야기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화책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짧은 모험 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면 소설은 긴 모험 속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기분이다. 동화책이 아쉬웠던 독자에게는 소설 버전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 같고, 소설을 먼저 접한 독자라면 동화책의 강렬함도 맛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인 만큼 이렇게 다양하게 팬 서비스를 해 주는 것이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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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레베카 밀러 지음, 최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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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동안 벼렸던 베란다 청소를 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도 말끔히 청소를 하고 나니 어찌나 속이 개운하던지. 갑자기 내가 머물러 있는 이 공간이 무척 평안하게 느껴졌다. 책이 가득한 거실하며, 휑하지만 온전히 책을 볼 수 있는 안방, 심지어 먹을 게 없어 텅텅 빈 냉장고까지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주말이면 햇살 가득 들어온 거실에 누워 뒹굴 거리며 책을 보는 것이 최고의 여유로움으로 느껴지는 사실이 무척 감사하다. 이런 평안함이 무너져 버릴 거란 불안감 없이 이 공간에, 내 삶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으면 싶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만족스러울 때,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걸로 비춰진다.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의 피파 리가 아마 그런 인물이 아닐까? 나이 차이는 나지만 왕성하게 활동하는 편집자 남편, 잘 자라고 있는 쌍둥이 자녀, 그런 가정을 잘 돌보고 있는 피파 리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현재의 그녀는 무척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녀가 반추하는 과거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그녀가 현재의 그녀와 동일한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판이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가 현재의 삶을 유지하고,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데는 큰 사건이 있었다. 그녀로 하여금 하나하나 타고 올라오는 기억은, 평탄하지 못했던 가정생활과 현재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 일까지 모두 펼쳐진다. 최근에 몽유병이 다시 도지면서 현재의 안락함과 안정감이 조금씩 무너져 아픈 과거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에 무관심했던 아버지, 각성제에 시달리며 자신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피파도 결국 각성제를 복용하기도 하고, 유부남인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현실을 뒤로 하고 뉴욕에 사는 고모네로 왔지만 그곳에서도 평탄하지 않았다. 결국 고모네에서도 나오게 되고, 미술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섹스 파트너로 남아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피파의 삶을 돌아보면서도 안심이 되었던 것은 현재의 만족스러운 삶 때문이었다. 과거는 그러했을지라도 현재는 전혀 다른 그녀가 되어 있기에 과거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이 거북스럽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도 분명 순탄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불편하게 그려지지 않아 평상심을 유지한 채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몽유병과 이웃의 아들 크리스와 자꾸 얽히는 것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서서히 엄습했다. 현재의 남편을 얻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다시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그녀였는데, 그녀에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수록 균열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현재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분명 크리스는 피파가 당면한 혼란스러움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긴 했으나, 그로 인해 결혼생활에 누가 될까 되레 내가 더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괴롭혔던 불안감은 피파가 아닌 의외의 곳에서 드러나게 되었고, 책 제목의 ‘로맨스’ 때문에 그녀에게 다른 사랑이 찾아와 혼란을 줄 거란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녀의 삶에서 로맨스는 빼 놓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것이 더욱 더 특별한 로맨스가 되었다는 것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깨닫게 되었다. 또렷한 대상이 있어야만 로맨스가 형성된다는 안일한 생각. 그 생각을 깨트려 준 소설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에서 피파의 로맨스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로맨스가 중점이 되어 소설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로맨스는 피파의 삶을 그리고 이 소설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오히려 한 여성의 삶을 통해 가정안에서의 어머니의 역할, 인생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의지와 노력, 그럼에도 주어진 삶에 순응해 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독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정을 뛰어넘어 변화된 다양한 삶의 한 구석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피파의 삶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발견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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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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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만날 때마다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나의 이런 모습을 타인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마음들이 들어 있는 나를 과연 알기나 할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대부분 그런 내면을 잘 숨겨오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내면을 들통 날 때도 많다. 그럴때면 누구나 인간의 내면에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삶이라는 것이 그것을 잘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때로는 나를 탈탈 털어 햇볕에 바짝 말려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내 안의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요즘이다.
 

  『팔코너』의 이야기를 꺼내려다 보니 혼잣말이 길어졌다. 패러것이란 남자를 알고 나니, 그를 비난하기보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는 마약중독자, 형을 죽인 살인자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이라도 실컷 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감옥이라는 곳을 통해 이중성을 다 드러내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를 보게 된 것 같아 무척 혼란스럽다. 패러것이야말로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죄를 저지르고, 정당하지 못하는 방법의 연속일지라도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이야말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훨씬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패러것은 형을 죽였다는 죄로 감옥 팔코너에 들어오게 되지만 그가 왜 형을 죽이게 되었고,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볼 수 있을 거란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대학교수라는 신분도, 죄를 짓고 들어왔다는 명목을 잠시 잊은 채, 그는 팔코너라는 감옥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며 이곳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팔코너 감옥에서 재소자들과의 새로운 터전을 영위해 나가면서 그는 바깥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나간다. 창살 밖으로 보이는 조각하늘이 자신이 볼 수 있는 풍경의 전부라는 것, 동성애, 수감자와 교도관의 폭력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거친 면들을 그곳에서 모두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생활, 결코 정겹지 않은 아내와의 추억들이 그려진다. 또한 패러것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당시 미국인들의 실생활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압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팔코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당연한 노선을 그리며 이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 오히려 이곳이 그의 인생의 절정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것 같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패러것이란 인물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깥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수감 첫 날 자신을 비웃던 치킨 넘버 투의 죽음으로 그는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가 성공적인 탈출을 했는지, 그가 원하는 자유를 찾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오로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기보다 그가 차라리 멀리멀리 무사히 도망가기를 원했다. 이제 막 바깥세상에 당도한 그가 가진 불안을 씻어내고 지금까지의 삶(감옥을 들어오기 전의 삶과 감옥 안에서의 삶)을 모두 잊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나의 내면에 있는 갈망을 패러것에 힘껏 불어 넣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을지라도 그가 꼭 그래주길 간절히 원했다.

 

  오늘도 나는 나의 내면 속의 부끄러운 것들을 잠 감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감을 푼 채, 패러것과 다시 한 번 조우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내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다. 감히 내면의 것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행동으로 보이지 못한 비겁함이, 패러것이란 인물 앞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압축된다. 그렇다고 그가 절대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갈망을 향해 과감히 발걸음을 내 디뎠다는 점은 부러울 정도다. 패러것처럼 감옥 안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깨닫기보다, 보이지 않는 창살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내가 속해있는 곳을 진정한 자유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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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08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단에 쓰여진 마지막 문장 마음에 담깁니다^^ 우리들이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으로 살아가려니 현실은 이중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장치이니까요^^ 어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지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치가 되어 주니 서글픈 것만은 아니네요^^ 책임을 전제로 하는 자유라면, 현실이 허락하는 이상이라면 해 볼만하지 않을까요^^책 한권을 읽은 것 같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팔코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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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만날 때마다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나의 이런 모습을 타인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마음들이 들어 있는 나를 과연 알기나 할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대부분 그런 내면을 잘 숨겨오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내면을 들통 날 때도 많다. 그럴때면 누구나 인간의 내면에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삶이라는 것이 그것을 잘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때로는 나를 탈탈 털어 햇볕에 바짝 말려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내 안의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요즘이다.
 

  『팔코너』의 이야기를 꺼내려다 보니 혼잣말이 길어졌다. 패러것이란 남자를 알고 나니, 그를 비난하기보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는 마약중독자, 형을 죽인 살인자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이라도 실컷 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감옥이라는 곳을 통해 이중성을 다 드러내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를 보게 된 것 같아 무척 혼란스럽다. 패러것이야말로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죄를 저지르고, 정당하지 못하는 방법의 연속일지라도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이야말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훨씬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패러것은 형을 죽였다는 죄로 감옥 팔코너에 들어오게 되지만 그가 왜 형을 죽이게 되었고,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볼 수 있을 거란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대학교수라는 신분도, 죄를 짓고 들어왔다는 명목을 잠시 잊은 채, 그는 팔코너라는 감옥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며 이곳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팔코너 감옥에서 재소자들과의 새로운 터전을 영위해 나가면서 그는 바깥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나간다. 창살 밖으로 보이는 조각하늘이 자신이 볼 수 있는 풍경의 전부라는 것, 동성애, 수감자와 교도관의 폭력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거친 면들을 그곳에서 모두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생활, 결코 정겹지 않은 아내와의 추억들이 그려진다. 또한 패러것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당시 미국인들의 실생활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압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팔코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당연한 노선을 그리며 이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 오히려 이곳이 그의 인생의 절정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것 같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패러것이란 인물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깥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수감 첫 날 자신을 비웃던 치킨 넘버 투의 죽음으로 그는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가 성공적인 탈출을 했는지, 그가 원하는 자유를 찾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오로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기보다 그가 차라리 멀리멀리 무사히 도망가기를 원했다. 이제 막 바깥세상에 당도한 그가 가진 불안을 씻어내고 지금까지의 삶(감옥을 들어오기 전의 삶과 감옥 안에서의 삶)을 모두 잊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나의 내면에 있는 갈망을 패러것에 힘껏 불어 넣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을지라도 그가 꼭 그래주길 간절히 원했다.

 

  오늘도 나는 나의 내면 속의 부끄러운 것들을 잠 감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감을 푼 채, 패러것과 다시 한 번 조우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내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다. 감히 내면의 것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행동으로 보이지 못한 비겁함이, 패러것이란 인물 앞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압축된다. 그렇다고 그가 절대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갈망을 향해 과감히 발걸음을 내 디뎠다는 점은 부러울 정도다. 패러것처럼 감옥 안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깨닫기보다, 보이지 않는 창살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내가 속해있는 곳을 진정한 자유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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