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레베카 밀러 지음, 최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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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주 동안 벼렸던 베란다 청소를 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도 말끔히 청소를 하고 나니 어찌나 속이 개운하던지. 갑자기 내가 머물러 있는 이 공간이 무척 평안하게 느껴졌다. 책이 가득한 거실하며, 휑하지만 온전히 책을 볼 수 있는 안방, 심지어 먹을 게 없어 텅텅 빈 냉장고까지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주말이면 햇살 가득 들어온 거실에 누워 뒹굴 거리며 책을 보는 것이 최고의 여유로움으로 느껴지는 사실이 무척 감사하다. 이런 평안함이 무너져 버릴 거란 불안감 없이 이 공간에, 내 삶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으면 싶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만족스러울 때,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걸로 비춰진다.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의 피파 리가 아마 그런 인물이 아닐까? 나이 차이는 나지만 왕성하게 활동하는 편집자 남편, 잘 자라고 있는 쌍둥이 자녀, 그런 가정을 잘 돌보고 있는 피파 리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현재의 그녀는 무척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녀가 반추하는 과거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그녀가 현재의 그녀와 동일한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판이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가 현재의 삶을 유지하고,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데는 큰 사건이 있었다. 그녀로 하여금 하나하나 타고 올라오는 기억은, 평탄하지 못했던 가정생활과 현재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 일까지 모두 펼쳐진다. 최근에 몽유병이 다시 도지면서 현재의 안락함과 안정감이 조금씩 무너져 아픈 과거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에 무관심했던 아버지, 각성제에 시달리며 자신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피파도 결국 각성제를 복용하기도 하고, 유부남인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현실을 뒤로 하고 뉴욕에 사는 고모네로 왔지만 그곳에서도 평탄하지 않았다. 결국 고모네에서도 나오게 되고, 미술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섹스 파트너로 남아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피파의 삶을 돌아보면서도 안심이 되었던 것은 현재의 만족스러운 삶 때문이었다. 과거는 그러했을지라도 현재는 전혀 다른 그녀가 되어 있기에 과거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이 거북스럽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도 분명 순탄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불편하게 그려지지 않아 평상심을 유지한 채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몽유병과 이웃의 아들 크리스와 자꾸 얽히는 것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서서히 엄습했다. 현재의 남편을 얻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다시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그녀였는데, 그녀에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수록 균열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현재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분명 크리스는 피파가 당면한 혼란스러움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긴 했으나, 그로 인해 결혼생활에 누가 될까 되레 내가 더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괴롭혔던 불안감은 피파가 아닌 의외의 곳에서 드러나게 되었고, 책 제목의 ‘로맨스’ 때문에 그녀에게 다른 사랑이 찾아와 혼란을 줄 거란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녀의 삶에서 로맨스는 빼 놓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것이 더욱 더 특별한 로맨스가 되었다는 것을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깨닫게 되었다. 또렷한 대상이 있어야만 로맨스가 형성된다는 안일한 생각. 그 생각을 깨트려 준 소설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에서 피파의 로맨스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로맨스가 중점이 되어 소설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로맨스는 피파의 삶을 그리고 이 소설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오히려 한 여성의 삶을 통해 가정안에서의 어머니의 역할, 인생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의지와 노력, 그럼에도 주어진 삶에 순응해 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독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정을 뛰어넘어 변화된 다양한 삶의 한 구석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피파의 삶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발견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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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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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만날 때마다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나의 이런 모습을 타인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마음들이 들어 있는 나를 과연 알기나 할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대부분 그런 내면을 잘 숨겨오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내면을 들통 날 때도 많다. 그럴때면 누구나 인간의 내면에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삶이라는 것이 그것을 잘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때로는 나를 탈탈 털어 햇볕에 바짝 말려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내 안의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요즘이다.
 

  『팔코너』의 이야기를 꺼내려다 보니 혼잣말이 길어졌다. 패러것이란 남자를 알고 나니, 그를 비난하기보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는 마약중독자, 형을 죽인 살인자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이라도 실컷 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감옥이라는 곳을 통해 이중성을 다 드러내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를 보게 된 것 같아 무척 혼란스럽다. 패러것이야말로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죄를 저지르고, 정당하지 못하는 방법의 연속일지라도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이야말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훨씬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패러것은 형을 죽였다는 죄로 감옥 팔코너에 들어오게 되지만 그가 왜 형을 죽이게 되었고,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볼 수 있을 거란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대학교수라는 신분도, 죄를 짓고 들어왔다는 명목을 잠시 잊은 채, 그는 팔코너라는 감옥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며 이곳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팔코너 감옥에서 재소자들과의 새로운 터전을 영위해 나가면서 그는 바깥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나간다. 창살 밖으로 보이는 조각하늘이 자신이 볼 수 있는 풍경의 전부라는 것, 동성애, 수감자와 교도관의 폭력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거친 면들을 그곳에서 모두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생활, 결코 정겹지 않은 아내와의 추억들이 그려진다. 또한 패러것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당시 미국인들의 실생활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압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팔코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당연한 노선을 그리며 이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 오히려 이곳이 그의 인생의 절정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것 같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패러것이란 인물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깥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수감 첫 날 자신을 비웃던 치킨 넘버 투의 죽음으로 그는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가 성공적인 탈출을 했는지, 그가 원하는 자유를 찾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오로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기보다 그가 차라리 멀리멀리 무사히 도망가기를 원했다. 이제 막 바깥세상에 당도한 그가 가진 불안을 씻어내고 지금까지의 삶(감옥을 들어오기 전의 삶과 감옥 안에서의 삶)을 모두 잊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나의 내면에 있는 갈망을 패러것에 힘껏 불어 넣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을지라도 그가 꼭 그래주길 간절히 원했다.

 

  오늘도 나는 나의 내면 속의 부끄러운 것들을 잠 감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감을 푼 채, 패러것과 다시 한 번 조우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내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다. 감히 내면의 것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행동으로 보이지 못한 비겁함이, 패러것이란 인물 앞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압축된다. 그렇다고 그가 절대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갈망을 향해 과감히 발걸음을 내 디뎠다는 점은 부러울 정도다. 패러것처럼 감옥 안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깨닫기보다, 보이지 않는 창살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내가 속해있는 곳을 진정한 자유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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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08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단에 쓰여진 마지막 문장 마음에 담깁니다^^ 우리들이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으로 살아가려니 현실은 이중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장치이니까요^^ 어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지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치가 되어 주니 서글픈 것만은 아니네요^^ 책임을 전제로 하는 자유라면, 현실이 허락하는 이상이라면 해 볼만하지 않을까요^^책 한권을 읽은 것 같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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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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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만날 때마다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나의 이런 모습을 타인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마음들이 들어 있는 나를 과연 알기나 할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대부분 그런 내면을 잘 숨겨오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내면을 들통 날 때도 많다. 그럴때면 누구나 인간의 내면에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삶이라는 것이 그것을 잘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때로는 나를 탈탈 털어 햇볕에 바짝 말려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내 안의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요즘이다.
 

  『팔코너』의 이야기를 꺼내려다 보니 혼잣말이 길어졌다. 패러것이란 남자를 알고 나니, 그를 비난하기보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 속에는 마약중독자, 형을 죽인 살인자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이라도 실컷 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감옥이라는 곳을 통해 이중성을 다 드러내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를 보게 된 것 같아 무척 혼란스럽다. 패러것이야말로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죄를 저지르고, 정당하지 못하는 방법의 연속일지라도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이야말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훨씬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패러것은 형을 죽였다는 죄로 감옥 팔코너에 들어오게 되지만 그가 왜 형을 죽이게 되었고,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볼 수 있을 거란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대학교수라는 신분도, 죄를 짓고 들어왔다는 명목을 잠시 잊은 채, 그는 팔코너라는 감옥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며 이곳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팔코너 감옥에서 재소자들과의 새로운 터전을 영위해 나가면서 그는 바깥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나간다. 창살 밖으로 보이는 조각하늘이 자신이 볼 수 있는 풍경의 전부라는 것, 동성애, 수감자와 교도관의 폭력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거친 면들을 그곳에서 모두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생활, 결코 정겹지 않은 아내와의 추억들이 그려진다. 또한 패러것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당시 미국인들의 실생활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압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팔코너에 갇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당연한 노선을 그리며 이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 오히려 이곳이 그의 인생의 절정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것 같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패러것이란 인물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깥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수감 첫 날 자신을 비웃던 치킨 넘버 투의 죽음으로 그는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가 성공적인 탈출을 했는지, 그가 원하는 자유를 찾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려주지 않은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오로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기보다 그가 차라리 멀리멀리 무사히 도망가기를 원했다. 이제 막 바깥세상에 당도한 그가 가진 불안을 씻어내고 지금까지의 삶(감옥을 들어오기 전의 삶과 감옥 안에서의 삶)을 모두 잊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나의 내면에 있는 갈망을 패러것에 힘껏 불어 넣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을지라도 그가 꼭 그래주길 간절히 원했다.

 

  오늘도 나는 나의 내면 속의 부끄러운 것들을 잠 감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감을 푼 채, 패러것과 다시 한 번 조우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내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다. 감히 내면의 것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행동으로 보이지 못한 비겁함이, 패러것이란 인물 앞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압축된다. 그렇다고 그가 절대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갈망을 향해 과감히 발걸음을 내 디뎠다는 점은 부러울 정도다. 패러것처럼 감옥 안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깨닫기보다, 보이지 않는 창살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내가 속해있는 곳을 진정한 자유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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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사는 나라
데이브 에거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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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사는 나라 소설 버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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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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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하면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와 『아Q정전』 『광인일기』 등 대표소설이 떠오른다. 대표작품이 뚜렷해서인지 루쉰의 소설 이외의 작품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루쉰을 이해하려면  『들풀』을 꼭 읽어야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처음 듣는 작품이었고 산문시집이었다. 게다가 '중국 근대문학사 최초의 산문시집'이라고 하니 그 의미에 더 주눅이 들었다. 다행히 『아Q정전』과 동시에 자오옌녠의 판화가 들어간 책이 출간 되어 접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아Q정전』을 다시 읽고 내친 김에  『들풀』까지 읽었는데, 깊이 있는 문장에 반하고 말았다. 분명 고전이라고 불릴 만큼 오래된 작품임에도 나의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고 있다.
 

  산문시집이라고 해서 어려울 거란 생각으로 지레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상의 자잘함 들로 독자를 이끄는 초반의 작품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루쉰이라는 거장의 문장이라는 사실도 잊고 문학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희망>이라는 글 앞에서 멍하니 시선을 멈추게 되었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이 문장 때문이었고, 저자의 고뇌와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별도 없고, 달도 없다. 죽은 나비도, 웃음의 아득함도, 사랑의 춤도 없다. 그런데 청년들은 아주 고요하다.'며 내면의 고통을 그대로 표현한다. 이유인즉 루쉰이 이 작품을 쓸 당시에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개인사도 그러했고 중국의 현실도 그러했는데 '내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 허망함 속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사라진 저 슬프고 아득한 청춘을 찾으리라.'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이 절망적이었더라도, 작품 속에서 온전히 그것들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저자는 끝끝내 희망을 이끌어내려 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 속에는 중국인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특히 <복수>라는 작품에서는 서로 칼을 겨누고 서있는 두 사람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구경하는 모습이 나온다. 절대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하려는 행인들이었다. 왜 그렇게 겨누고 있는지 묻지도 않은 채,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행인들은 재미없다며 그 자리를 뜬다. 어쩌면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중국인들의 내면의 병폐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구경꾼에 지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때 무언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총명한 사람과 바보 그리고 노예>에서는 한 노예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불평하자 총명한 사람이 그의 삶을 바꿔주려고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하지만 노예는 오히려 그 사람이 일을 저지른다며 주인에게 고한다. 삶을 충분히 바꿀 수 있음에도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무르려는 근성을 버리지 못한 노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당시의 중국인들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라고 해도, 어찌 그 대상이 중국인들만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모습에도 그런 모습이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얇은 책이고 길지 않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로 다양한 이야기 속에 방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 작품을 이제야 만났는지 부끄럽기보다,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Q정전』과 마찬가지로 자오옌녠의 판화가 곁들여 있어 작품을 돋보이게 했다. 절망적인 내용이 많아 판화가 좀 어둡게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흑백으로 이루어진 판화 속에서 글만큼이나 꿈틀대는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저자의 글을 돋보이게만 하는 장치가 아니라 판화로 작품 이상의 것을 표현해 내려는 의도 속에서 형상화 된 의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저자의 개인적인 절망이든, 중국의 암울한 상황이든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의학을 공부하다 의학으로는 국민정신을 계몽시킬 수 없다 생각하고 문학으로 전환한 그의 결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학으로 중국뿐만이 아닌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니 그의 존재는 앞으로도 큰 의의로 남으리라. 루쉰을 이해하려면 『들풀』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온전히 와 닿은 느낌이다. 그의 대표작도 중요하지만 루쉰을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개인사부터 중국 현실을 드러내는 이 작품 속에서 내 곁에 좀 더 가까이 와 있는 저자를 만나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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