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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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고 누우려는데  평소보다 훤한 달빛이 느껴졌다. 밝은 달을 보며 감탄을 터트리는 것이 아니라 혹시 달이 두개 뜨지 않았나를 확인하는 나를 보며, 1Q84 세계에 너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1Q84가 출간되자마자 책을 읽고 생긴 에피소드임에도, 종종 달의 개수를 확인하곤 한다. 혹여 착각으로 달이 두개 보이더라도 덴고와 아오마메가 있는 세상이라 생각하고 안심하고 싶어 한다면 좀 억지일까? 



  1Q84 1,2권을 읽을 때만 해도 언제 3권을 기다리나 싶어 안절부절 이었다. 다음 이야기를 바로 읽을 수 없다는 초조함 속에서도 혹시나 덴고와 아오마메가 불행해질까 마음을 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오마메는 자살을 시도했고, 아오마메의 행동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면 덴고와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졌다. 그런 연유로 3권을 기다리면서도 불안했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면서도 내가 염려한 불행을 만나지 않을까 초조했다. 아오마메는 여전히 은신 중이었고, 덴고도 아오마메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지지 않아 어떤 전개를 추측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들 사이에 우시카와란 인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덴고에게 의심이 가는 제안을 했던 만큼 그의 등장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선구의 끄나풀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덴고와 아오마메는 위험해지고 있었다.


  선구의 리더가 죽자 그들은 아오마메를 추적한다. 그것을 대비해 아자부 저택의 노부인은 아오마메를 피신시켰고, 그들이 찾지 못하게 그녀의 모습까지 변신시키려 했다. 그러나 놀이터에서 덴고를 본 아오마메는 위험한 것을 앎에도 덴고와의 재회를 기다렸다. 그런 사이에 우시카와는 예리한 감각과 치밀함으로 아오마메에게 조금씩 접근해왔다. 그의 활약상을 지켜보면 3권의 표지가 왜 우시카와인지를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우시카와가 지닌 보통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어두운 면으로 발달된 날카로움은 책을 읽는 동안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전혀 닿지 않을 것 같던 덴고와 아오마메에게 조금씩 접근해가는 본능을 뛰어넘는 기질이 독자를 불안하게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가며 뒤를 쫓는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덴고를 찾아내고, 그들이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아냄으로 덴고를 추적해서 아오마메를 찾겠다는 생각은 그를 탐정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기발한 추적이었다. 그것이 덴고와 아오마메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해도 우시카와의 뛰어난 감각은 인정하는 바였다. 그것을 아오마메가 역 이용하기까지는.


  아오마메가 1Q84로 넘어갔던 수도고속도로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어떠한 느낌 때문에 그녀는 결국 행동으로 취하지 않았다. 덴고를 만나야겠다는 간절함을 뛰어넘는 행동이었으나 아오마메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 덴고를 만난 적이 없고 그와는 더더욱 성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3권에서 첫 번째로 나를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바로 아오마메의 임신이었다. 하지만 덴고와 아오마메의 현실적인 만남에 너무 빠져있다 보니, 달이 두개 뜨는 1Q84세계, 리틀피플이 등장하는 세계라는 사실은 잊은 채 아모마메가 덴고의 아이를 갖게 된 경위를 망각하고 있었다. 천둥치던 밤에 덴고와 후카에리의 성행위, 리더에게 중요한 얘기를 듣던 그 밤. 그때 아오마메를 임신하게 만들어 준 매개체는 후카에리와 선구의 리더였다. 그랬기에 아오마메는 뱃속의 생명이 덴고의 아이라 확신했고, 그 존재 때문에 총구를 당길 수 없었고, 더더욱 간절히 덴고를 만나기를 바랐다. 덴고를 어떤 식으로든 찾을 수 없다면 점점 자신을 위협해오는 우시카와란 남자를 쫓아가면 덴고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이 덴고는 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에 내려갔다. 아버지의 곁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공기번데기 속의 아오마메를 본 이상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덴고가 요양원에 머무르는 동안 우시카와는 거리를 좁혀왔고, 아오마메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덴고 나름대로는 그것이 아오마메를 만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다 시기를 느껴 그의 거처로 돌아왔고, 덴고가 사는 아파트에 세를 내어 지내던 우시카와에게 덴고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긴장감이 치솟을 무렵, 다마루는 아자부의 저택을 조사하던 우시카와를 뒤쫓아 동시에 덴고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 덴고를 반드시 만나야 했던 아오마메는 덴고의 아파트에 왔다 우시카와에게 역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하지만 어두운 밑바닥 세계에서 살던 자는 그 바닥의 사람만이 처치할 수 있는 법. 출중한 추리력과 끈기를 가지고 있던 우시카와도 결국 다마루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우시카와가 운명을 달리했다고해서 아오마메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시카와의 뒤에는 선구가 있었고, 리더를 잃은 그들은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 이를 간구했다. 그들은 아오마메가 임신한 사실을 통해 마더와 도터의 역할을 할 것을 알고 아오마메에게 정중한 척 접근해 오지만 위험을 감지한 아오마메가 순순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반드시 덴고를 만나야했고, 1Q84 세계를 빠져나와 1984 세계로 넘어가야만 안전했다. 그 둘을 위협하던 우시카와가 사라짐으로써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우시카와로 인해 아오마메는 덴고가 사는 곳을 알아냈다. 다마루를 통해 덴고와의 만남을 부탁할 때까지 과연 그들이 만날 수 있을지 너무 긴장되고 떨려왔다. 서로를 숱하게 그리워했음에도 오랫 동안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수함이 그들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오마메가 덴고를 보았던 놀이터에서 함께 달을 바라보는 장면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재회는 어떤 놀라운 사실도 수긍하게 만들었고 비로소 둘을 하나 되게 만들었다. 아오마메가 수태하던 밤의 이야기며 그 아이가 덴고의 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은 채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누렸고, 이 세계를 빠져나가고자 했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수도고속도로를 넘어갈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들이 무사히 1Q84 세계를 빠져나간다고 생각될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이 세계에 왔어.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그게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이었어." 덴고의 말처럼 많은 어려움과 비현실을 뛰어넘고 만난 그들이기 때문에 안전하게 1Q84 세계를 빠져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미묘한 여지를 남겨두면서 다음 책이 나올 거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어 주었다. 분명 3권에서 이 책의 시리즈가 끝이 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역경 끝에 다시 만났고, 그곳이 어떤 세상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세계로 건너왔고 둘이 함께하는 이상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오마메는 덴고와 함께 수도고속도로를 빠져 나오면서 '타이거를 당신 차에' 라고 쓰인 간판의 호랑이 옆얼굴의 방향이 바뀐 것을 알아챈다. 1Q84의 시리즈가 여기서 끝난다면 이 부분이 걸린다. 또한 선구 사람들이 새로운 목소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덴고를 통해 아오마메를 추적해 오다 한 발 늦은 것으로 마무리 된 것도 무언가 찜찜하다. 신쵸사에서는 3권으로 완결이라고 말했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야기가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품게 된다. 내가 걸리는 부분도 그렇고 무엇보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힘겹게 만난 이상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다. 1Q84의 독특한 세계에 중독되어 밝은 달을 보면서도 개수를 헤아리더라도, 저자가 만들어 낸 세계에 더 빠져있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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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2019-01-2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는 태엽을 감는새를 읽어볼 예정입니다. 안녕님은요?
 
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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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3권의 표지가 우시카와인지 알겠다. 우시카와로 인해 덴고와 아오마메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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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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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문학의 집대성! 물흐르듯이 수려하다. 한국에서 집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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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마리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5
캐럴린 메이어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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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소녀가 있다. 언니와 동생, 엄마와 함께 생활하는 소녀는 가난하다. 삶이 너무 힘든 엄마는 늘 술에 절어있지만, 세 딸을 발레 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앙투아네트, 마리, 샤를로트는 각자가 가진 발레 능력도, 꿈도, 삶의 방식도 모두 다르다. 이런 세 자매의 이야기가 좀 더 화기애애하게 펼쳐졌으면 좋으련만.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서글픈 이들의 현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 때문에 춤을 출 수 없을 지경에 이름에도 엄마는 술을 마시고, 앙투아네트는 대기실에서 부유한 남자들에게 접근하고, 샤를로트는 배고픔에 허덕였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벅찬 현실을 마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마리에게는 춤이 있었다. 그리고 에드가 드가의 모델이 되면서 작품 속에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저자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의 조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소설 속에서 에드가 드가의 역할이 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의 삶을 더 농밀하게 그려냈고, 에드가 드가는 '너를 에투알(스타)로 만들어 주마.' 라는 최종적인 목적에 기여를 했다. 물론 마리가 에드가 드가의 모델이 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에드가 드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에투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 책은 에드가 드가의 역할보다 마리가 어떻게 에투알이 되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역경을 딛고 에투알이 되는 방법이 아닌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의 조각 속의 진정한 에투알로 남는 과정이었다.

 

  소설의 중반부까지 마리가 발레를 할 수 있고, 에드가 드가와 만나고, 힘든 상황에서도 조금씩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마리의 모습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일었다. 빤한 결말일지라도 그렇게 조금씩 밟아 나가다보면 에드가 드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에투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에게 주어진 상황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란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 수많은 일들을 이겨내는 가운데, 언니 앙투아네트로 인해 승급시험을 준비할 수 없을 때에도 시험장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적마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리에겐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는 엄마, 점점 어긋난 길로 가는 언니, 뒷받침해 줄 수 없는 동생, 그리고 마리 곁을 잠시 떠나 있는 장 피에르는 그런 마리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리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모든 희망이었던 발레는 그녀를 다른 세계로 밀어내 버렸다.

 

  마리에게 발레가 없다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까. 공장의 노동자가 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어도 그것은 마리도, 마리의 아빠도, 선한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마리의 엄마도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마리가 발레를 관둘 수밖에 없었을 때는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마리가 힘들게 꾸려온 삶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마리의 선택이라고 해도 장 피에르를 따라가지 않은 것, 언니의 불행한 최후는 마리의 삶을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샤를로트가 무용수로서의 꿈을 활짝 펴 기대에 부응을 해주었으나, 마리도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렇다면 도대체 에드가 드가는 마리에게 허튼 약속만 한 것일까. 마리를 에투알로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마리의 삶은 에투알과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분명 에드가 드가가 마리에게 했던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발레와는 먼 길을 가고 있는 마리가 에투알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리가 에드가 드가의 모델이 되었던 작품이 완성되면서 약속은 지켜졌다. 바로 작품 속의 열네 살 소녀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튀튀까지 입고 툭 건들면 뻗어 나올 것 같은 생생함이 살아있는 마리의 모습. 아름답게 발레를 하는 모습이 아니라 피로에 쌓인, 지쳐있는 모습일지라도 마리는 에투알이 되었다. 그것도 한 순간에 사라지는 에투알이 아니라 에드가 드가의 작품으로 영원히 남아 있는 진정한 에투알이었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할 때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방식에서 벗어나면 실패라고 생각했다. 마리가 발레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실패자이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생각은 이미 내가 경험으로 체득한 극단적인 생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드가 드가의 작품을 통해 저자는 다른 방식으로 마리를 에투알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회자되고 있는 마리의 모습을 어찌 실패자라고, 희망 없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리를 통해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방식을 벗어났다고 해도 섣불리 실패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은 마리가 발레리나로 성공하는 것보다 더 큰 울림을 주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희망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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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보급판 문고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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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관한 에피소드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내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읽고 와서인지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으로 꿈꾸었던 것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결국 그런 갈망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서 더 책을 많이 보게 되었지만, 우연히 빌린 책 속에서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면 그 사람을 단숨에 사랑할 것 같다. 영적인 교류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 살의 권태에 빠진 콩스탕스처럼 말이다.
 

  로맹 가리를 무척 사랑하는 콩스탕스는 그의 책을 아껴 읽기 위해, 그리고 다른 작가들을 사랑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회원으로 가입한다. 일반회원이 되는데 80프랑이 필요함에도 기꺼이 가입을 하는 콩스탕스를 보면서 우리나라 도서관은 참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사진과 가족관계증명서 한통만 있으면 무료로 가입되어 책을 바로 빌려 볼 수 있다. 거기다 밑줄이나 낙서한다고 일일이 검사하지 않으니(이건 좋은 게 아닌가?) 나름 책을 볼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콩스탕스는 회원으로 가입한 후 빌려온 책에서 한 줄의 낙서를 보게 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누군가 규칙을 위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반납하려던 책에서 사서인 지젤이 낙서를 하면 안 된다며 면막을 주는 바람에 또 다른 글귀를 찾아낸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이 좋은 책이라며 읽어보기를 권하자 콩스탕스는 『노름꾼』의 내용과 그 책에 있을 낙서가 궁금해 안절부절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반납자를 도서관에서 기다려 바로 책을 받고서 역시 그 책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콩스탕스에게 말을 걸듯 밑줄이 그어져 있어 그 사람의 흔적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 라는 문장의 밑줄을 보게 되면 어느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어지는 밑줄 때문에 혼란스러워 책을 반납했더라도 다른 여자가 그 책을 읽게 된다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렇게 한껏 꿈꾸게 만든 밑줄 긋는 사람은 그 이후에 읽을 책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콩스탕스는 고독하고 진부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밑줄을 찾아 하는 독서가 서서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밑줄을 찾아 독서를 했다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렸을지 모르나 일상과 맞물리는 밑줄 긋는 사람의 존재는 침착하면서도 빠르게 내면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사람의 흔적을 따라 그를 남자라 확신하고, 그 책을 읽으려는 사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밑줄 긋는 남자를 찾아도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사람을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의외로 그 사람은 일찍 콩스탕스 앞에 나타난다.

 

  그는 도서관에서 그녀에게 대출을 해주던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편지를 받고, 그와 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읽은 책들 속에서 드러난 밑줄로 볼 때 더 고상하고, 아름답고, 문학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너무 평범했고, 콩스탕스가 만난 밑줄 속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밑줄 그은 남자 역할을 했던 청년의 고백이 이어지고, 급기야 청년의 도움으로 밑줄 긋는 남자의 정체를 밝혀내려 한다. 도서관 기록을 이용해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좇으려던 그들은 거의 그 남자를 찾을 뻔 했지만, 그가 최후에 남긴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사프로노프란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것도 최근이 아니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끝내 밝힐 수 없었다. 그렇게 멋진 문장들을 남겨놓고(작가가 쓴 것이지만 밑줄로 인해 그의 문장인 것만 같았다.) 콩스탕스를 무척 설레고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 속의 밑줄은 콩스탕스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보게 만들었고,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현실에서의 사랑과 이상을 꿈꿀 수도 있었다. 밑줄 긋는 남자와의 이뤄짐이 더 로맨틱하고 애틋하기도 하겠으나, 책 속에 가둬두는 것도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진지하고 독특한 독서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볼 때, 그 사람은 어쩌면 부서지고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자는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으로 독자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에 대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긴장감 있게 펼쳐놓아 무척 흥미로웠다. 콩스탕스 뿐만 아니라 밑줄 긋는 남자를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문학과 인생의 고독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의 흔적이 툭 끊긴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했으나, 그 사람을 현실에서 만날 수 없더라도 책 속에서 만난 그 시간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느낄 법한 갈망을, 드러내지 못한 희망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밑줄 긋는 남자가 추천해 주었던 책들 중에서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책들을 읽으며 그를 떠올려 보려고 한다. 그가 내게 보낸 메시지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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