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사건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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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생각나게 4월 3일을 비롯한 실험적인 소설들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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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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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곳은 공항이었다. 중요한 일 때문에 볼 일이 있어 국내선을 타면서 들고 갔던 책이 <어.나.벨>이었다. 책을 읽기 전 책 머리에 당시의 느낌을 간단하게 남겨 놓았는데, 다시 꺼내서 읽어보니 그때의 일이 벌써 까마득한 것 같아 새삼 놀라웠다. 당시의 기대가 현재 이루어졌음에도 하루하루를 밀어내듯 살아온 내가 부끄러웠다. 또한 책 속에서 마주한 청춘들의 혼란이, 잊고 있던 나의 과거를 건드려 현재의 내 모습이 낯설어지고 말았다. 20살에 겪었던 성장통과 고뇌들이 꼭꼭 잠가놓았던 마음의 문을 비집고 나와 내 모든 것을 헤집어 놓은 기분이다.

 

  '시간은 언제나 밀려오지만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 날에 인식하고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윤은 팔 년 만에 걸려온 그의 전화 앞에 이런 생각을 품는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나의 섣부른 후회를 만들어 냈다. 나도 뭔가 달라질 수 있었을 거란 생각. 똑같은 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며 청춘을 보냈더라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나를 만나고 있지 않을까란 부질없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란 문장 앞에서도 후회가 밀려왔다. 내 멋대로 기억하고 판단하고 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끄집어내어 주변인들에게까지 인식시켰던 어리석음이 후회가 되어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괴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른의 나이에 스무 살 적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건너버린 강을 그리워만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당시에 내 마음을 차지했던 사랑, 이루고 싶은 꿈, 알 수 없는 방황들이 쉴 새 없이 몰려와 당황스러웠다. 정윤과 명서, 미루, 단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스무 살의 행복과 고통이 동시에 찾아오곤 했다.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빙빙 돌아서 오는 삶을 살아온 듯한 그들이 처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 아프기도 했다. 네 명의 청춘의 내면은 길들여지지 않은 각자의 고통이 내제해 있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세상을 향해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 정윤, 언니의 죽음의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루, 미루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 곁을 지키는 명서, 정윤의 소꿉친구이자 그녀를 몹시 사랑했던 단. 그들은 운명처럼 필연처럼 묘하게 만나 얽히고설키다 처연한 고통을 남겨놓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에 또 다른 내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아침마다 깻잎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정윤을 생각했다. 제대하지 못하고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단이를 보면서 군대에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카가 생각났다. 에밀리를 보며 어릴 적 키우던 고양이를 생각했고, 모범생이었다던 명서를 보면서 짝사랑했던 동네오빠가 떠올랐다. 이렇듯 감추고만 싶었던 내 삶의 잔재가 이 소설로 모두 드러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이에게, 혹은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자란 누군가에게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미소와 함께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면, 내면의 고통이 모두 쏟아져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현재를 살아가도 고통이고, 현재를 이어가지 못해도 고통으로 기억되는 이들에게 어떠한 선택이 있을까. 네 명의 청춘들이 품고 있는 고뇌와 방황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떠한 선택을 하든 아릿한 쓰라림이 그들과 함께 딸려 나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정윤과 명서가 서로를 깊이 원하는 것, 정윤을 만나면서 미루의 고통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여지를 보여준 단.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이끌림에 의해 나 또한 피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루와 단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삶은 그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왜 이세상은 이토록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가. 고통으로 얼룩진 젊은이들이 왜 힘겹게 살아야 하는가. 고통으로 가득한 시대밖에 줄 수 없는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떠올랐을 그들. 그들은 용케도 서로 만나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 순간은 관계의 벽을 허물고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갔으나, 그들이 각자 흩어졌을 때는 마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청춘. 그 불안하고 확실하지 못한 것에 무엇을 덧댈 수 있으랴. 또한 그들과 같은 나이를 지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어찌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할 정도로, 먼 길을 돌아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이 안쓰러울 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특별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크리스토프'였다. 아이 하나를 어깨에 태운 채 강을 건너면서 '마치 이 세상 전체를 내 어깨에 지고 있는 것 같'은 크리스토프처럼 그들은 각자의 어깨에 각자의 세계를 짊어지느라 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내디딜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소설의 전개도, 끝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는 담담해져만 갔다. 고백이 덧대어 질 때마다 소설의 흐름은 심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나는 평행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윤과 명서의 만남, 헤어짐, 재회, 단이와 미루의 죽음 앞에서도 비교적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여 내 마음이 쓰라림으로 가득할지라도, 도저히 드러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끄집어내어진 수많은 기억들로 인해 중간 중간 심호흡이 필요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저릿저릿하게 남아있는 고통들로 허우적대면서도 먼 길을 돌아 현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서른의 나이에서 스무 살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더이상 고통으로만 당시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남김이 되었다. 또한 각자의 삶의 굴곡이 다르다고 무시해버리던 타인의 내면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얼마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지를 그들로부터 알게 되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라고 말한 저자처럼, 이 책을 통해 고통의 한켠에 작은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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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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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게 읽은 빵가게 재습격!! 역시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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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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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문학을 보면 이제는 그리움이 인다. 내 책장을 어느 정도 차지했던 청소년 문학에 손을 뻗을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책들을 모두 두고 타지로 나와 보니, 내가 얼마나 행복한 공간에서 지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오히려 내 방을 쓰고 있는 조카가 부러울 지경이다. 조카에게 책장의 청소년 문학을 추천해 주고 왔으면서도, 정작 내가 이렇게 멈춰 있는 것이 조금은 어불성설처럼 느껴져 타지에 와서 한참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빵과 장미>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낯선 저자라서 갸웃거리다가 '뉴베리 상 2회 수상작가'란 타이틀과 <내가 사랑한 야곱>의 저자라는 사실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베리 상'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상이고, 상의 타이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작품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그 타이틀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엔 책 제목을 보고 풋풋한 연애소설일거라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겉표지의 소녀와 소년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제목을 좀 더 생각해 본다면 익히 들어온 슬로건이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파업을 배경으로, 그 당시 머나먼 버몬트 주로 보내진 아이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쓰인 청소년 소설이라고 한다. '빵과 장미'라는 슬로건이 나오는 배경을 소설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적인 파업의 현장을 아이들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라는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빵도 원하고 장미도 원했던 것처럼, 파업을 정의롭게 외치는 어른과 비난하는 어른 속에서 아이들의 혼란과 성장을 그려내고 있었다.

 

  로사는 총명하고 가족을 무척이나 생각하는 아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더 기울어진 가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 선생님의 총애도 받고 있었다. 엄마와 언니가 공장에서 벌어오는 주급으로 넉넉한 생활을 못하고 있었지만 가족 간의 끈끈함을 알고, 불평이 있더라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었다. 그런 로사 네의 빵의 공급처이자 온 식구의 생계수단인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난다. 그것도 모자라 로사의 엄마와 언니가 파업에 동참하면서 로사는 갈수록 걱정이 늘어만 간다. 학교에서는 파업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수입이 없자 로사 네는 더 궁핍해져만 간다. 어떤 것이 옳은지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파업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몰랐고, 그런 로사 앞에 제이크라는 소년이 나타난다.

 

  제이크는 로사처럼 파업하는 어른들 틈에서 더 심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었다. 제이크 또한 자신을 감싸주는 무리와 비난하는 무리를 모두 겪게 된다. 하지만 제이크에게는 형편없는 주급과 공장주의 횡포보다 자신이 벌어온 돈을 모두 뺏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매질까지 하는 아버지란 존재가 더 두려웠다. 당연히 늘 춥고 배가 고팠고, 아버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했다. 로사를 만나게 된 날도 아버지를 피해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로사는 그런 제이크를 자신의 집 거실에서 몰래 재웠고, 그때부터 둘은 인연을 맺게 된다. 둘 다 평안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로사와 제이크의 시선은 무척 달랐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사는 엄마와 언니가 파업을 하지 않기 바랐고, 공부도 계속 할 수 있기 바랐다. 파업의 정당성의 여부를 따지기 전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 제이크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자꾸 도둑질을 하게 되고, 늘 어디론가 도망칠 생각만 하게 되어 늘 불안하고 두려움이 가득 몰려왔다.

 

  로사와 제이크의 시선에서 비춰지는 파업의 현장은 생생하긴 하지만 아이들의 의식만큼이나 혼란스럽고 또렷하지 못했다. 파업이 진척되는 상황을 아이들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달리 보여주다 보니, 아이들만큼이나 무엇이 정당한지 어지러운 현실만 보였다. 그런 혼란스러움을 조금이나마 잠식시켜 주는 사건이 있었다면 로사가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란 슬로건을 쓰게 된 일이었다. 유명한 운동가의 방문 환영회 때 쓰일 피켓의 글씨를 쓰면서 로사는 어른들이 파업을 하는 것을 선생님이 알려준 것처럼, 자신과 가족들이 배를 곯는 어리석은 일로만 생각하지 않게 된다. 제이크 또한 도둑질과 거짓말을 일삼으며 배고픈 생활을 하면서 파업의 현장을 또렷이 보게 된다. 파업에 동참하면서 음식을 얻어먹기도 하며, 물벼락을 맞고, 여성운동가의 모습에 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이크의 삶에 필요한 것은 파업의 혼돈이 아니라 안정이었다.

 

  로사가 집을 떠나게 된 것은 장기화되는 파업 가운데 아이들이 점점 피폐한 생활을 하게 되자 잠시나마  안정된 곳으로 보내자는 위원회의 의견 때문이었다. 우선 로사가 버몬트 주로 떠나게 되고, 이상한 우연으로 제이크 또한 로사가 탄 기차에 불법으로 탑승하게 된다. 명단에 없던 제이크를 위해 로사는 오빠라고 거짓말을 하고, 함께 노부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자아이만을 맡기로 했던 노부부는 제이크를 반기지 않았지만 로사의 부탁으로 같이 머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사는 노부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안정을 되찾는가 싶었지만 끊임없이 가족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반면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도망치듯 버몬트 주로 온 제이크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두려움 때문에 그곳이 좋으면서도 자꾸 떠나려고 했다. 파업의 쟁점 속에서 두 아이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으며 노부부의 집에서 풍요로운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로사는 파업이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늘 도망칠 궁리만 하던 제이크는 아들을 잃고 마음을 닫고 사는 자신을 보살펴 준 할아버지에 의해 신분이 탄로 나고 만다. 하지만 제이크의 비밀과 두려움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제이크를 어느 곳에도 보내지 않고 집에 머물게 함으로써 잠정적인 해피엔딩으로 책은 끝이 난다. 파업으로 인해 제이크는 따뜻한 가정과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로사 또한 혼란스러운 과정을 잘 이겨냈다고 생각한다. 잠정적인 해피엔딩이라고 했지만 두 아이들이 모두 안정을 얻게 된 만큼, 지속적인 해피엔딩이 될 가능성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책의 제목처럼 빵이 필요한 제이크와 장미가 필요한 로사를 그리고 있지만, 결국은 두 아이 모두에게 빵과 장미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소설이었다. 당시 미국 산업혁명에 필수 불가결했던 이민 노동자와 토박이 아이의 시선을 통해 저자는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빵도 중요하고 장미도 중요하다는 의미는 물론, 그런 가운데도 아이들은 성장해가고 그 모든 것을 흡수하며 기억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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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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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기억난다. 작년 가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발표했을 때의 그 생소함. 부랴부랴 헤르타 뮐러란 작가를 검색해봤지만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책그림책>이라는 책에서 헤르타 뮐러의 이름을 건져 올릴 수 있었으나, 이미 읽은 책임에도 기억이 안나 더 당황스러웠다.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보아도 그림을 보고 다양한 작가들이 짤막한 글을 쓴 책이라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를 알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문학동네에서 <숨그네>와 <저지대>가 출간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헤르타 뮐러의 작품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읽어볼까 하고 구입한 것인 지난 6월이다. 그때라도 바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저자의 방한 소식과 함께 세 권의 책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를 먼저 선택한 것은 저자의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소문에 지레 겁먹지 않으려 비교적 얇은 책을 고르다 먼저 읽게 되었다. 국내에 출간된 다섯 작품 가운데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책이라 약간 떨리긴 했으나, 방한소식과 함께 책 정보와 저자에 대한 소식을 어느 정도 알고 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약 150쪽의 얇은 책이었으나 짐작대로 가볍지 않은 책이었고, 그녀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감히 내가 노벨문학상을 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문학과 결합시키는 과정을 철저히 보아온 느낌 때문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실감나는 묘사보다 무심한 듯 툭툭 던져내는 그녀의 문체가 어떤 묘사와 설명보다 더 진솔하게 다가왔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종종 전쟁에 관한 문학을 읽다보면 과연 나라면 어떻게 살아갔을 까란 막막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은 일분도 이어지지 못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흩뜨려 버리는 걸로 끝이 나곤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내가 주인공 빈디시의 가족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저런 상황이었다면 과연 나를 온전히 지킨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까란 질문으로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독재 치하의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독일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에 빈디시의 가족이 중심에 있었고, 빈디시의 가족처럼 서구세계로 가기위해 여권을 손에 쥐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권만 손에 쥐면 핍박받는 땅을 떠나 고향에서 맘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여권은 쉽게 쥐어지지 않는다. 여권을 받기 위해 많은 뇌물을 주었음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여권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여권을 받으려는 것인지, 여권을 받으려고 그 치욕을 참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삶의 괴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빈디시는 여권을 받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치욕을 견디면서도 나름대로의 중심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은 루마니아를 떠나 고향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 그것이 희망으로 비춰지지 않더라도 그들이 여권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이웃의 죽음,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키운다는 것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일 같았다. "처음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히틀러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독일 사람이 있다는 걸 의아해했어.(중략)'아니, 아직도 독일 사람이 있네, 더구나 루마니아에.' " 이런 의아한 시선을 견뎌낸 독일 사람들처럼 빈디시는 나름대로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외동딸인 아말리에를 바치는 일까지 하고 말았다. 빈디시의 아내는 "다들 어떻든 여권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데, 당신은 아니야. 그렇게 정직하고 잘났으니 어떡하겠어." 라고 말하며 여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당당하다고 못 박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난할 힘조차 없는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그들이 당면해 있는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철저히 알게 되었다.

 

  빈디시와 개(犬)뿐인데도 '혹시 그림자가 다가와 엿보지 않는지, 엿듣지 않는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야간경비원처럼 그들에게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가택수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와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오히려 죽음이 평안해 보일 정도로 느껴졌다면 너무 잔인한 것일까.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확신만 있다면 버티고 버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들 그런 과거가 어떻게 기억될지 뻔해 어떠한 말도 뱉어낼 수 없었다. 그들이 고향이나 고향이 아닌 곳에 돌아가서 현재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에게 남겨진 과거는 추억이 아니라 고통이 될 터였다. 정도를 지킬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조차도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삶에서의 내면이라 할지라도 지켜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이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독특한 문체를 빚어내고 있었다. 저자의 문체는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꾸 헛손질을 하는 것처럼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로 의미 함축적이다. 늘어지지 않는 간단한 문장 가운데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다음을 연결하는 발판이 무엇인지를 잊게 만들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문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함축성 뒤에 숨은 실재의 바탕이다. 소설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현재성,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절망과 희망의 부조화가 그녀의 작품에 자꾸 다가가게 만든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지인이 내게 말했던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어 좋다."란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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