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니콜라 세트 - 전5권 꼬마 니콜라
장 자끄 상뻬 그림, 르네 고시니 글 / 문학동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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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로니컬하게도 니콜라 시리즈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꼬마 니콜라>를 시리즈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꼬마 니콜라의 빨간 풍선>을 읽고, 니콜라 시리즈를 구하려는 찰나 해적판 <꼬마 니콜라>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와 그 책을 읽은 탓이었다. 순서로 따지자면 <꼬마 니콜라>를 두 번째로 읽은 셈인데, 정식 판본이 아닌 오래된 책이어서 그런지 많은 부분이 엉성해 꼭 다시 한 번 읽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니콜라 시리즈는 뒤죽박죽이 되어 <꼬마 니콜라의 빨간 풍선>, <돌아온 꼬마 니콜라>, <앙코르 꼬마 니콜라>, <꼬마 니콜라> 순서대로 읽게 되었다. 나조차도 읽는 내내 순서가 헷갈려 애를 먹었지만, <꼬마 니콜라>를 읽고 나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아 이제야 제대로 읽은 기분이 든다. 오히려 그 사이에 니콜라와 친구들, 주변 인물들의 이름을 외우고 친해져서 <꼬마 니콜라>를 만났을 때는 생경함 없이 아주 느긋하게 읽을 정도였다. 니콜라 시리즈의 순서가 꼭 중요하지 않지만 엄연히 따지면 시리즈의 첫 작품인데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들어온 <꼬마 니콜라> 해적판과 비교해 봤다. 상페의 삽화도 많이 달랐고, 색감이 입혀진 것 하며 번역도 상당부분 달랐다. 거기다 주석이 달려있어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나름 즐겁게 읽었던 해적판의 어지러움이 정식 판본에서는 말끔하게 정리된 기분이었다. 그런 느낌 때문에 <꼬마 니콜라>를 꼭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새롭게 부응하고자 다가온 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매끄러운 번역과 깔끔한 삽화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 주었고, 오래된 친구들을 만난 양 그들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게 되었다.

 


  처음 니콜라 시리즈를 읽을 때는 니콜라 외에 친구들의 이름이 너무 헷갈려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여러 권을 읽다보니 그들의 특징을 거의 다 외우게 되었다. 우등생이지만 얌체인 아냥, 먹보 알세스트, 힘이 센 외드, 부자 아빠를 둔 조프루아, 아빠가 경찰인 뤼퓌스 등 오히려 더 친근하고 재미나게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있는 곳에 늘 사고가 터지고, 엉뚱한 발상이 일어나며, 어른들의 골칫거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어른인 나의 시각일 것이고,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어른들은 늘 잔소리만 해대고 재미도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나는 어른도 아이들도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어른들의 행동과 사고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도, 어린 시절을 거쳐 왔기 때문에 아이들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 니콜라 시리즈를 읽었을 때는 문화의 차이가 얼마나 낯설었는지 모른다. 인물들의 이름은 마구 헷갈리고(저자가 친절히 반복해서 설명해 줌에도), 학교 선생님들은 툭하면 감옥에 간다는 말을 하는 거나, 부모님이 아이들의 뺨을 아무렇지 않게 때리는 것, 남자 아이들이라도 코피를 터트리고 뒤엉켜 싸우는 것이 일상화 된 모습이 너무 삭막했다. 거기다 목요일이면 학교를 가지 않는 거나(잘못을 했을 땐 목요일이라도 학교에 나와야 하지만), 점심은 대부분 집에 가서 먹고 오는 거 하며, 어린 아이들이라도 자주 영화를 보러 가고, 디저트에 목숨을 거는 것이 너무나 생경했다. 지금의 프랑스 아이들의 모습이 어떨지, 생활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지 못하지만 온전히 저자가 그려낸 프랑스 문화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에 무조건 적응해야 했다.

 


  나의 어려움은 개의치 않고 아이들은 늘 말썽만 피웠다. 아이의 시선을 능글맞게 표현해 내면서도, 은근한 풍자와 익살이 들어간 에피소드를 읽고 있노라면 많은 감정들이 휩쓸고 지나갔다. 아이들만의 순수함을 잃었다가 찾아주고, 천진난만함을 어이상실과 함께 던져주며, 결론을 해피엔딩(?)을 만들어 주지 않고, 엉뚱한 결말을 맞이하는 에피소드 앞에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늘 피곤하면서 무관심한 아빠, 살림 하랴 니콜라와 아빠 뒷바라지 하랴 바쁜 엄마가 있는 니콜라의 집에서도 많은 에피소드가 일어났다. 집에서는 그나마 부모님의 감시 때문에 니콜라가 아주 조금은 얌전해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의 눈에는 부모님은 늘 귀찮아하고, 잘 싸우며, 때로는 철없어 보이기도 했으니 진면목은 친구들과 만날 때 드러난다.

 


  그야말로 니콜라와 친구들이 모인 곳에는 메뚜기 때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이 초토화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늘 제대로 된 처리되는 일은 없었으며 엉키고, 싸우고, 깨지고, 부서지고, 어른들이 늘 뒤처리를 못해 애 먹는 일들만 일어난다. 그러면서 말은 어찌나 잘 하는지. 그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으레 그러려니 해도 이 아이들은 말썽꾸러기 중에 말썽꾸러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학교에서 있는 행사나 자잘한 일상도 도무지 선생님들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늘 선생님들이 먼저 나가떨어지곤 했다. 그 아이들이 밖에만 나갔다하면 사고를 치니 다른 어른들이 선생님의 노고를 칭찬하는 것조차 이해가 될 판국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콜라와 친구들은 학교의 룰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도 적당히 어긋나며, 말썽을 피우고 실컷 뛰어 놀았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어른들이 온전히 비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을 제어하려 했다가 제풀에 꺾이고, 모든 것에 심드렁하고, 때로는 더 유치한 어른들의 모습이 아이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들이 무언가로 언쟁을 벌일 때는 부이옹 선생님이 말려야 감칠맛이 났고, 니콜라가 떼를 쓰고 울 때면 서로의 탓으로 돌리는 부모님이 등장해야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 보였다. 다음에 그 아이들이 커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보다, 늘 말썽꾸러기인 아이들과 그들의 수준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어른들의 세상과 구별되길 바랐다. 한편으로는 내 기억 속에 영원한 꼬마들로 남아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했던 <꼬마 니콜라>의 대장정이 마무리 되었다. 언제든지 생각날 때면 책을 꺼내 다시 읽으면 되지만, 첫 만남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책장에 꽂혀있는 니콜라 시리즈만 봐도 그냥 흐뭇한 미소가 먼저 묻어난다. 너무나 많은 에피소드를 읽어서 어쩔 때는 내가 경험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앞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 발간되어 나를 헷갈리게 해도 투덜대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꼬박꼬박 읽어 주었을 것이다. 단지 오래전 르네 고시니가 우리 곁을 떠났기에 다음 시리즈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르네 고시니와 장 자끄 상페는 환상적인 콤비로 꼬마 니콜라 시리즈를 탄생시켜 많은 이들에게 추억과 재미, 골칫거리를 안겨다 주었다. 많은 독자들은 책 속의 주인공들을 각자의 취향대로 인식시켰을 것이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자신의 추억과 버무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상페의 삽화로 주인공들이 더 친근해졌고, 글을 이해하기 쉬웠으며, 반대로 글을 통해 상페의 삽화가 돋보이기도 했다. 이 둘의 만남은 늘 입이 아프게 칭찬하고 반복해도 환상적이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니콜라 시리즈를 너무 유쾌하게 펼쳐 놓았고 덕분에 많은 독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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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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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매일 발걸음을 하는 도서관에 가지 않은 이유는 날씨 때문이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 때문에 도무지 도서관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젖은 바짓단을 끌며 오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혼미해져 오늘은 집에서 좀 쉬자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독서를 했다. 사무실에 비상용으로 가져다 놓은 미니북 <냉정과 열정사이>를 우연히 꺼내 읽다 흥미가 일어 집에 가져왔고, 그 길로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왔고, 현재 나의 상황이 아오이와 현저하게 닮아 있다는데서 오는 기묘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를 본 것은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였을 것이다. 2004~5년 사이었을 것이고, 당시의 마음 상태 때문이었는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남아있던 영화였다.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만난 터라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막연하게나마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런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리고 당시 24~5이던 나는 서른이 되었고, 아오이의 생일이 있는 5월에 이 책을 읽었으며, 비오는 날을 싫어하고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내 자신과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은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른을 맞은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무척 쓸쓸하게 다가와 마음 한켠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냉정과 열정사이> ROSSO와 BLE 중에서 BLE를 먼저 꺼내든 것은 츠지 히토나리 때문이었다. 이 책을 쓴 두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츠지 히토나리의 문체가 좀 더 좋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이데, 끝까지 읽지 못하고 초반을 헤매다 덮어 버렸다. 그리고 숙명처럼 내가 서른 살이 된 5월, 아오이와 쥰세이가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2000년 5월에서 꼭 10년이 흐른 오늘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조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딱 들어맞음이 기시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없이 아오이의 내면에 빨려 들어갔던 것이고, 빗소리도 듣지 못한 채 정신없이 책을 읽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무척 서정적이었다. 그것이 오늘 끝까지 책을 읽게 만든 첫 번째 이유였고,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도서관에 가지 않는 상황과(도서관에 갔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5월이라는 시간적 공간이 나를 더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꿈꿔 마지않는 잔잔하고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의 묘사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자잘한 풍경 묘사들로 인해 자연스레 아오이가 보는 풍경을 떠오르게 했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오히려 특별함을 느끼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없이 늘어놓는 이국 풍경들, 음식, 취향, 음악, 책 등이 나를 사로잡았고, 그런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꿈꾸는 일상을 살고 있는 그녀의 내면에는 비밀스런 무엇인가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완벽한 미국인 남자친구 마빈이 있었다. 보석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오이를 보고 첫 눈에 반해 동거를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무척 친절하고, 지적이며, 마음도 물질도 넉넉했으며 아오이를 무척 사랑하고 아낀다. 그것을 아오이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녀 역시 그의 정확함과 허벅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떠날까 불안해하는 마빈을 안심시키지 못하는 불안감이 그녀에게 내제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과거, 일본에서의 추억이 그 원인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잊히지 않은 이름 쥰세이. 그의 이름이 떠오르고, 그와의 추억이 조금씩 상기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아오이는 과거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오랜 세월 동안 남아있던 오해가 풀리는 편지 한 장이 날아오자 아오이의 삶은 흔들리고 만다.

 

  그만큼 쥰세이의 존재는 강렬했고, 잊을 수 없었으며, 그리움과 사랑하는 마음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것이 마빈을 불안하게 했고, 아오이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빈이 아오이의 삶 속에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는 순간 아오이는 집을 나온다. 그리고 충분히 그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그를 잃어버리는 데에 어쩔 수 없음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고 생각한 쥰세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발견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일까?

 

  쥰세이와 아오이는 약속을 했었다.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날 밀라노가 아닌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오르자고. 그리고 밀라노에서 살고 있던 아오이는 서른 번째 생일 날, 자신에게 그런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듯 충동적으로 피렌체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거라 생각 못했던 서로를 만나게 된다. 아오이와 쥰세이는 그렇게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또다시 헤어진다. 아오이가 마빈과 헤어졌다고 쥰세이에게 말했다면 쥰세이는 아오이를 붙잡았을 것이다. 또한 쥰세이가 떠나지 말라고 한 마디만 했다면 아오이도 쥰세이 곁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놨으며, 무엇이 그토록 오랫동안 간직해 온 사랑을 아무렇지 않은 듯 되돌아가게 만들었을까. 그것 역시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 모호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진심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영화의 장면들이 모아졌다. 온전한 합체라고 할 수 없고, 결론을 알고 있는 읽기였고, 영화 속 주인공으로 인물들을 상상하는 한정적인 틀 속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섬세한 묘사와 잔잔한 일상을 만나고 있노라면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아오이의 내면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쥰세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아오이 또한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고, 기다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아오이에게 "사람이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라고 말해준 지인의 말을 확신이라고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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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디노의 램프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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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간이 발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 돼 책을 구입했음에도,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없이 쌓여가는 책들 때문이기도 했고, 몇 편의 단편을 읽고 책을 덮어 버리고 방치한 탓도 있었다. 그렇게 읽다만 단편들이 흩어질까 봐 다시 책을 잡고 부랴부랴 읽었지만 역시나 책을 덮고 나니 내게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집을 대할 때마다 드는 느낌이라 그다지 생경하지 않았지만 흩어져 버린 이야기들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난감했다.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알라디노의 램프>는 저자의 <외면>이나 <소외>에서처럼 다양한 장소의 다양한 사람들의 독특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옮긴이는 '작가의 삶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인생 여정과도 같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열두 편의 단편들은 이러한 작가의 여행, 즉 작가의 삶을 담아낸 것이다.'라고 했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듯한 글들은 그런 배경 때문인지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읽다보면 지명과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무척 생경해 흐름을 엉키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낯선 세계의 낯선 이야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저자 특유의 익살이 드러나는 작품 앞에서는 책을 읽다 깔깔 거리며 웃기도 했다. 요즘 책을 읽다가 깔깔 거리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의 나라면 절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곳에서 웃는 모습을 보며 놀랄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웃었던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해주면 공감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책의 흐름을 읽고 분위기를 느껴야만 웃음을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인데 <죽은 시인들과의 저녁 식사>에서도 그랬다. 온 종일 번 돈과 구두약을 도둑맞은 어린 아이를 광장에서 발견하고 여러 친구들은 그 아이를 도와주기로 한다. 당연히 얼마간의 돈을 쥐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많'은 어른들은 샌들을 신은 친구의 발까지 서로 짓밟아 구두를 더럽힌다. 광이 번쩍이는 신발과 밤색이 되어버린 친구의 발을 보고 놀라워하는 친구에게 태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는 영혼을 광내고 있었어." 라고 하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에피소드 앞에 정치적인 죽음과 관계있는 친구들에게 애도를 표한 후 "친구들은 그냥 그렇게 죽는 게 아니다. 우리 곁에서 죽어 가는 것이며, 잔인한 힘이 우리에게서 친구를 뺏어가고, 우리는 뼛속에 허전함을 담은 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울하거나 역사 때문에 고통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면서도 할 말 다하며 써 내는 일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딩동! 딩동! 사랑이 찾아왔어요>에서는 강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잦은 헤어짐을 겪어야 했던 청년에게는 "사랑은 고통 말고도 다른 가능성도 제시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메모지를 붙여 '맞아, 고통은 너무 힘겨워. 마비시킬 뿐이야.' 라고 붙여 놓을 정도였다. <섬>에서는 손을 잡는 여인에게서 "손은 몸에서 유일하게 거짓말하지 않는 부위에요. 열기와 땀, 떨림, 힘. 그게 손의 언어이지요."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렇듯 루이스 세풀베다는 사랑, 정치적인 요소, 일상의 이야기를 때로는 걸쭉한 표현들이 섞인 이국적인 이미지로 그려 놓는다. 모든 글에는 저자의 내면이 담겨 있고, 경험이 있으며, 추구하고 싶은 삶의 욕망이 가로지르기도 한다.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 때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 흐름을 읽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목적지가 아닌 생뚱맞은 곳에 내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온전히 흡수될 수 없었고,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경험이 녹아 있는 이야기 속에 '삶'이 주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몇 편의 단편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언급했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이 책의 느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내겐 벅찬 일이다. 특히나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은 저마다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통틀어서 얘기할 수 없는 축에 속한다. 장편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줄거리를 추려낼 수 있을지 모르나, 독특한 단편들의 모음은 새로운 세계의 모험이라 여운을 챙길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펼쳐놓은 세계로의 여행은 조심스러우면서 흥미를 돋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저자의 여러 작품을 만나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의 안내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언제나 나의 무한한 신뢰에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고, 큰 여운을 남겨주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게 다가오는 작가이기에 자꾸 그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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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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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목이 뻐근한 게 새벽까지 무리해서 책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잠을 이기지 못한 책이라면 알아서 일찍 잠이 들었겠지만, 잠을 이겨내도록 흥미로운 책을 만나면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책을 다 읽고 잔다. 늘 그 뒷감당을 이기지 못해 허우적대면서도 욕구에 대한 호기심은 충족시켜야만 직성이 풀린다. 다른 것에 그런 끈기가 있다면 좋으련만. 오로지 책에 대해서만 그런 열망이 인다. 그렇게 새벽에 책을 덮고 나면 평상시와 더 예민한 감정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이질감, 감동, 낯섦, 분노 같은 감정은 낮보다는 밤에 더 색깔이 짙어진다. <소수의견>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드러난 진실과 결과 앞에 망연자실하고 나의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나에게서 떠나간 지 오래된 감정이 되고 만다.

 

  서울의 한 도심 재개발지구에서 두 명이 죽었다. 철거민들을 진압하던 전경 한 명과 그곳에 있던 16세 소년이었다. 소년은 철거용역업체의 직원에게 맞아 죽었고, 아들을 방어하기 위해 아버지가 휘두른 각목에 경찰이 죽었다. 두 명이 죽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너무 쉽게 사건이 무마되었고, 현장이 보존되지 않았으며, 죽은 소년의 아버지 박재호는 특무방해치사로 구속 기소되어 있었다. 박재호는 아들을 죽인 사람이 경찰이라고 했고, 경찰은 철거용역업체의 직원이 죽였다고 했으며 이미 자신의 죄를 인정한 김수만도 특수폭행치사로 피소되어 있었다. 그 사건은 국선변호사인 '나'에게 맡겨졌다. '한 달에 서른 개씩 돌아오는 국선 사건 중 하나. 다들 고개를 내저었던 지저분하고 무가치한 사건.' 이었기에 '나'밖에 맡을 사람이 없었으리라.

 

  진실은 알려면 할수록 더 달아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또한 깊숙이 개입할수록 들어간 사람만 다친다는 사실을 이토록 치사하고 옹졸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었다. 진실의 이면을 캐려고 하자 모두들 생각해 주는 척 비웃었으며, 변호사의 지위에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험한 말들만 오갔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신문 기자 준형, 법대 교수 재민, 같은 사무실을 쓰는 대석 등으로 인해 이 사건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언론에 사건을 노출시키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쏠렸고, 벌떼같이 달려들어 이 사건에 도움을 주겠다는 손길이 넘쳐났다. 그들은 언론 플레이의 막강한 힘과 그에 따르는 부작용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면서도 최대한 언론을 활용해 진실을 파헤쳐 승소하길 원했다.

 

  사건의 진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까. 경험하고 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히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은 또렷했다.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 최후의 공판이 진행 될수록, 판결이 가까워질수록 답답함은 더 심해졌고 책을 덮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엇을 알려고 했던 것이며,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피해자와 검사, 변호사,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변론하고 파헤치고 숨기려 했는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드러난 결과 앞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추려낼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눈에는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으며 겨우 하나의 사건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느낌뿐이었다. 온전한 진실은 없었으며 진실을 인간이 판단하고, 판결하고, 죄에 대가를 문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 넘는 일이었고 신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건의 내막은 그랬다. 재개발지구를 향해 탐욕스런 손길을 뻗는 손길과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투쟁. 그 과정에서 경찰이 소년을 죽였고, 소년의 아버지는 경찰을 죽였다. 이 사건의 수사기록을 처음 넘겨받은 홍재덕 검사는 즉시 문제점을 발견했고, 자신이 생각한 소중한 것을 위해 판단했다. 이 사건을 은폐하기로.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위해서였고,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한 개인이 판단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무언가 석연찮다. 그가 진심으로 소중한 것을 생각했다면, 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고 두 번 다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국가에 로비를 하는 재개발지구의 건설회사, 사람이 죽어 나가든 철거민들의 집이 사라지든 이익에만 눈 먼 사람들, 치부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에 꼬리를 붙여 계속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들의 모습에 나를 비추어 되묻고 있었다.

 

  단순히 죽음만을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면에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과연 푼다고 풀릴 것인지에 대해 사건을 맡은 '나'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고, 좋은 전략이 있었으며, 진실 된 사람들을 만나 일이 잘 풀리기도 했다. 한 몫 잡아보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잠시 박재호의 변호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며, 국선 변호사를 관두고, 100원의 국가배상청구소송 청구서를 냈으며, 중요한 증인과 증거를 얻었다가 잃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이 책에 녹아 있었으며, 특이한 점은 '나'가 변호사인 관계로, 또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법정소설의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누구의 시선도 아닌 법의 테두리에 갇힌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 책의 구성 또한 사건의 진행에 따른 법률 용어들로 되어 있어 그런 용어로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초반에 애를 먹기도 했다. 부록에 용어의 뜻과 다양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거의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나 마찬가지라,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사실이 갑갑했다. 느려지는 속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독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지루하기보다 스스로에게 대충 읽지 않았다는 만족감을 부여하고자 꼼꼼히 읽어 나갔다.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뜻을 알았다고 해도 수많은 법률 용어와 그 용어들이 사건 안에 자리하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더라도 소설의 흐름을 읽는데 큰 걸림돌 없이 무난했으며, 법안에 갇힌 사건의 이모저모를 빠져나오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공판이 있는 3일 동안의 기록은 나름대로 빠른 흐름을 타고 읽었지만, 용어를 모른다는 답답함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국민참여재판을 연 것이나, 증인과 증거에 대한 불투명성,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가운데서도 진실을 알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한 판의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잔인한 게임, 진실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면서도 이기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전략을 짜야 하는 게임.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그들이(정확히는 법조계 사람들과 진실을 숨기려는 사람들)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빤하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현실감을 잃고 있지는 않았으나 기적도 없었고, 온 몸을 휘도는 감동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진심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으나 인간이 내린 판결 앞에 그런 감정 나부랭이 따윈 애초부터 포함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맡은 '나'는 결국 패소했다. 그러나 박재호의 삶에 완전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너무나 많은 후폭풍이 밀려왔다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 속에 잊힌 사건은 또 일어날 것이며 승소하거나 패소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을 겪어본 자들이야말로 법은 한낱 몸부림과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은 절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도 소수요, 제대로 된 양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소수라는 것만 알려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소수는 다수가 될 수 있으며 주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에, 소수의 사람이 만들어낸 소수의견을 무시하고 살고 싶진 않다. 소수가 자리를 탈바꿈 했을 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설을 퇴고한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파일이 날아갔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일을 복구해 빛을 보게 된 이 소설은 그런 사연만큼이나 독특하다. 법과 사건을 촘촘히 엮은 것이나 마치 사건을 보고하듯 무미건조하면서도 툭툭 쳐대는 문체, 어느 누구도 주체가 되지 않는 시선들이 그랬다. 해설을 맡은 이정현님은 이 소설이 '용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으나 '용산을 떠오르게 한다.'고 했다. 나도 용산 사건을 익히 안다. 그러나 세세하게는 모른다. 내가 말한 세세함은 뉴스에 조그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게 되는 사건의 흐름을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자세히 모르는 용산 사건을 더 잘 알게 된 기분이 든다. 마치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아버린 것 같은 씁쓸함이 나를 옥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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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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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賞)이란 것이 참으로 이상해서, 아무런 편견 없이 대했던 작가라도 일단 상을 받았다고 하면 괜히 거부감이 느껴진다. 특히나 노벨 문학상 같은 큰 상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도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에 구입해 놓았는데, 막상 상을 받고 나자 손이 더 안 갔다. 더군다나 상금 때문에 작가의 자식들 간의 불화가 일었다는 풍문까지 들려 상이라는 것에 더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책을 구입한지 3년 만에 겨우 꺼내들었음에도 초반 30페이지를 못 넘겨 몇 번의 덮음과 펼침을 반복했다. 깊은 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책을 읽었더니 그제야 차분하게 읽혔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직장파티에서 처음 만났다고 시작되는 소설은 두 사람의 만남 자체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암시 같았다. 그들이 순조롭게 결혼하고, 터무니없이 큰 집을 산 것과 아이들을 많이 낳겠다는 생각이 무언가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부부였지만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분명 다르게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가와 성탄절을 비롯한 축일 때 많은 비용을 들여 친척들을 불러 모아, 기꺼이 봉사하고 북적댈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보고, 해리엇 부부가 시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뒷걸음질 쳐서 어둠속으로 잠식해 들어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집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파티를 열지도, 아이들을 많이 낳지도 않았다.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아이가 하나씩 늘어났고, 모두들 비난하다시피 불쾌한 뜻을 내비쳤음에도 해리엇 부부는 뜻이 맞았고 더 많은 아이를 낳길 원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기간이 늘어날수록 해리엇은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해졌으며, 데이비드는 더 많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늦게까지 일해야 했고, 그들을 도와 해리엇 엄마가 늘 상주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이를 더 낳는 것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적어도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해리엇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가 하는 발길질이 남달랐고, 그것은 엄마인 해리엇이 느끼기엔 고통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진통제를 먹어가며 고통을 참아냈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벤을 좋아하지 않았다.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어떠한 진단도 내려지지 않고 진단할 수도 없는 벤의 증상이 사람들을 멀리하게 했고, 해리엇 조차도 감당하기 버겁게 만들었다. 벤의 탄생으로 네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집안은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가족의 행복은 거기서부터 멈췄고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가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되는지 <다섯째 아이>는 잔인하게 기록해 갔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들어가며 고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벤으로 인해 소소한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처절하게 깨지는지를 세세하게 드러냈다. 해리엇은 벤을 위해 많은 부분 희생하고, 한편으론 원망도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지만 과연 그것이 현명한 방법과 선택이었는지에 관한 여부는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다. 갈수록 과격해지고 고집이 심해지는 벤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해리엇 조차도 그런 벤을 보며 수많은 갈등과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벤이 어렸을 적에 도로로 뛰쳐나간 적이 있었는데, 해리엇은 속으로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라고 기도하'는 부분을 읽고, 절대로 벤을 통한 헤리엇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가족에게 평화와 행복은 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벤을 시설로 보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약물에 취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벤을 직접 만나고 찾아온 것은 해리엇이었다. 벤을 그런 곳에 버려둔 것도, 벤을 다시 되찾아 옴으로써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벤으로 인해 가족의 끈은 끊어져 버렸고, 벤이 다시 돌아왔을 땐 집은 텅 비어 버린 후였다. 벤이 커가면서 아이들은 집에서 멀어져 갔고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였다. 벤으로 인해 넷째아이가 정서불안이 되어 갔으며 해리엇이 벤을 감당할 수 없음에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벤에 대해 생각할 때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에서 정상적인 감정의 불티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독자인 나도 해리엇을 그렇게 판단하려 했으며 아주 적은 동정밖에 던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아프게 느껴가고 있었다.

 

  벤의 문제를 알기 위해 의사를 찾은 해리엇은 별 도움 없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의사가 가진 감정을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고 읊조리는 것을 보고, 그 의사의 감정이 바로 나의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설의 주체가 되는 벤과 해리엇을 나 또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우울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상적인 행복을 보길 원했고,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길 바랐다. 내가 해리엇이었다면 그녀만큼 해 낼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앎에도 그녀에게는 그런 삶을 살아달라고 강요했으며, 그렇게 살지 못한 해리엇을 내 세계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소설은 끝나 가는데 도무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나의 불안감을 확인시키듯 '세상의 대도시 아무데나 휩쓸려 그곳의 지하세계에 합류하여 그들의 머리로 살아갈 수 있을' 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어떠한 가능성과 절망도 던져주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독자에게 맡겨 버리는 저자가 야속할 정도였다.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몸속의 진액이 다 빠져 나가버린 것 같이 힘겨웠다. 고통을 모두 드러내놓고 모든 것을 앗아가는 소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 고통의 대가가 내게 남겨진 우울이라면, 앞으로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을 용기를 절대 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가 내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수긍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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