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디노의 램프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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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간이 발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 돼 책을 구입했음에도,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없이 쌓여가는 책들 때문이기도 했고, 몇 편의 단편을 읽고 책을 덮어 버리고 방치한 탓도 있었다. 그렇게 읽다만 단편들이 흩어질까 봐 다시 책을 잡고 부랴부랴 읽었지만 역시나 책을 덮고 나니 내게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집을 대할 때마다 드는 느낌이라 그다지 생경하지 않았지만 흩어져 버린 이야기들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난감했다.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알라디노의 램프>는 저자의 <외면>이나 <소외>에서처럼 다양한 장소의 다양한 사람들의 독특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옮긴이는 '작가의 삶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인생 여정과도 같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열두 편의 단편들은 이러한 작가의 여행, 즉 작가의 삶을 담아낸 것이다.'라고 했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듯한 글들은 그런 배경 때문인지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읽다보면 지명과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무척 생경해 흐름을 엉키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낯선 세계의 낯선 이야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저자 특유의 익살이 드러나는 작품 앞에서는 책을 읽다 깔깔 거리며 웃기도 했다. 요즘 책을 읽다가 깔깔 거리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의 나라면 절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곳에서 웃는 모습을 보며 놀랄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웃었던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해주면 공감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책의 흐름을 읽고 분위기를 느껴야만 웃음을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인데 <죽은 시인들과의 저녁 식사>에서도 그랬다. 온 종일 번 돈과 구두약을 도둑맞은 어린 아이를 광장에서 발견하고 여러 친구들은 그 아이를 도와주기로 한다. 당연히 얼마간의 돈을 쥐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많'은 어른들은 샌들을 신은 친구의 발까지 서로 짓밟아 구두를 더럽힌다. 광이 번쩍이는 신발과 밤색이 되어버린 친구의 발을 보고 놀라워하는 친구에게 태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는 영혼을 광내고 있었어." 라고 하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에피소드 앞에 정치적인 죽음과 관계있는 친구들에게 애도를 표한 후 "친구들은 그냥 그렇게 죽는 게 아니다. 우리 곁에서 죽어 가는 것이며, 잔인한 힘이 우리에게서 친구를 뺏어가고, 우리는 뼛속에 허전함을 담은 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울하거나 역사 때문에 고통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면서도 할 말 다하며 써 내는 일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딩동! 딩동! 사랑이 찾아왔어요>에서는 강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잦은 헤어짐을 겪어야 했던 청년에게는 "사랑은 고통 말고도 다른 가능성도 제시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메모지를 붙여 '맞아, 고통은 너무 힘겨워. 마비시킬 뿐이야.' 라고 붙여 놓을 정도였다. <섬>에서는 손을 잡는 여인에게서 "손은 몸에서 유일하게 거짓말하지 않는 부위에요. 열기와 땀, 떨림, 힘. 그게 손의 언어이지요."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렇듯 루이스 세풀베다는 사랑, 정치적인 요소, 일상의 이야기를 때로는 걸쭉한 표현들이 섞인 이국적인 이미지로 그려 놓는다. 모든 글에는 저자의 내면이 담겨 있고, 경험이 있으며, 추구하고 싶은 삶의 욕망이 가로지르기도 한다.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 때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 흐름을 읽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목적지가 아닌 생뚱맞은 곳에 내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온전히 흡수될 수 없었고,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경험이 녹아 있는 이야기 속에 '삶'이 주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몇 편의 단편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언급했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이 책의 느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내겐 벅찬 일이다. 특히나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은 저마다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통틀어서 얘기할 수 없는 축에 속한다. 장편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줄거리를 추려낼 수 있을지 모르나, 독특한 단편들의 모음은 새로운 세계의 모험이라 여운을 챙길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펼쳐놓은 세계로의 여행은 조심스러우면서 흥미를 돋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저자의 여러 작품을 만나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의 안내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언제나 나의 무한한 신뢰에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고, 큰 여운을 남겨주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게 다가오는 작가이기에 자꾸 그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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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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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뒷목이 뻐근한 게 새벽까지 무리해서 책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잠을 이기지 못한 책이라면 알아서 일찍 잠이 들었겠지만, 잠을 이겨내도록 흥미로운 책을 만나면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책을 다 읽고 잔다. 늘 그 뒷감당을 이기지 못해 허우적대면서도 욕구에 대한 호기심은 충족시켜야만 직성이 풀린다. 다른 것에 그런 끈기가 있다면 좋으련만. 오로지 책에 대해서만 그런 열망이 인다. 그렇게 새벽에 책을 덮고 나면 평상시와 더 예민한 감정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이질감, 감동, 낯섦, 분노 같은 감정은 낮보다는 밤에 더 색깔이 짙어진다. <소수의견>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드러난 진실과 결과 앞에 망연자실하고 나의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나에게서 떠나간 지 오래된 감정이 되고 만다.

 

  서울의 한 도심 재개발지구에서 두 명이 죽었다. 철거민들을 진압하던 전경 한 명과 그곳에 있던 16세 소년이었다. 소년은 철거용역업체의 직원에게 맞아 죽었고, 아들을 방어하기 위해 아버지가 휘두른 각목에 경찰이 죽었다. 두 명이 죽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너무 쉽게 사건이 무마되었고, 현장이 보존되지 않았으며, 죽은 소년의 아버지 박재호는 특무방해치사로 구속 기소되어 있었다. 박재호는 아들을 죽인 사람이 경찰이라고 했고, 경찰은 철거용역업체의 직원이 죽였다고 했으며 이미 자신의 죄를 인정한 김수만도 특수폭행치사로 피소되어 있었다. 그 사건은 국선변호사인 '나'에게 맡겨졌다. '한 달에 서른 개씩 돌아오는 국선 사건 중 하나. 다들 고개를 내저었던 지저분하고 무가치한 사건.' 이었기에 '나'밖에 맡을 사람이 없었으리라.

 

  진실은 알려면 할수록 더 달아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또한 깊숙이 개입할수록 들어간 사람만 다친다는 사실을 이토록 치사하고 옹졸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었다. 진실의 이면을 캐려고 하자 모두들 생각해 주는 척 비웃었으며, 변호사의 지위에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험한 말들만 오갔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신문 기자 준형, 법대 교수 재민, 같은 사무실을 쓰는 대석 등으로 인해 이 사건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언론에 사건을 노출시키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쏠렸고, 벌떼같이 달려들어 이 사건에 도움을 주겠다는 손길이 넘쳐났다. 그들은 언론 플레이의 막강한 힘과 그에 따르는 부작용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면서도 최대한 언론을 활용해 진실을 파헤쳐 승소하길 원했다.

 

  사건의 진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까. 경험하고 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히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은 또렷했다.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 최후의 공판이 진행 될수록, 판결이 가까워질수록 답답함은 더 심해졌고 책을 덮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엇을 알려고 했던 것이며,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피해자와 검사, 변호사,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변론하고 파헤치고 숨기려 했는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드러난 결과 앞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추려낼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눈에는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으며 겨우 하나의 사건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느낌뿐이었다. 온전한 진실은 없었으며 진실을 인간이 판단하고, 판결하고, 죄에 대가를 문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 넘는 일이었고 신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건의 내막은 그랬다. 재개발지구를 향해 탐욕스런 손길을 뻗는 손길과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투쟁. 그 과정에서 경찰이 소년을 죽였고, 소년의 아버지는 경찰을 죽였다. 이 사건의 수사기록을 처음 넘겨받은 홍재덕 검사는 즉시 문제점을 발견했고, 자신이 생각한 소중한 것을 위해 판단했다. 이 사건을 은폐하기로.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위해서였고,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한 개인이 판단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무언가 석연찮다. 그가 진심으로 소중한 것을 생각했다면, 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고 두 번 다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국가에 로비를 하는 재개발지구의 건설회사, 사람이 죽어 나가든 철거민들의 집이 사라지든 이익에만 눈 먼 사람들, 치부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에 꼬리를 붙여 계속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들의 모습에 나를 비추어 되묻고 있었다.

 

  단순히 죽음만을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면에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과연 푼다고 풀릴 것인지에 대해 사건을 맡은 '나'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고, 좋은 전략이 있었으며, 진실 된 사람들을 만나 일이 잘 풀리기도 했다. 한 몫 잡아보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잠시 박재호의 변호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며, 국선 변호사를 관두고, 100원의 국가배상청구소송 청구서를 냈으며, 중요한 증인과 증거를 얻었다가 잃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이 책에 녹아 있었으며, 특이한 점은 '나'가 변호사인 관계로, 또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법정소설의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누구의 시선도 아닌 법의 테두리에 갇힌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 책의 구성 또한 사건의 진행에 따른 법률 용어들로 되어 있어 그런 용어로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초반에 애를 먹기도 했다. 부록에 용어의 뜻과 다양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거의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나 마찬가지라,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사실이 갑갑했다. 느려지는 속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독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지루하기보다 스스로에게 대충 읽지 않았다는 만족감을 부여하고자 꼼꼼히 읽어 나갔다.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뜻을 알았다고 해도 수많은 법률 용어와 그 용어들이 사건 안에 자리하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더라도 소설의 흐름을 읽는데 큰 걸림돌 없이 무난했으며, 법안에 갇힌 사건의 이모저모를 빠져나오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공판이 있는 3일 동안의 기록은 나름대로 빠른 흐름을 타고 읽었지만, 용어를 모른다는 답답함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국민참여재판을 연 것이나, 증인과 증거에 대한 불투명성,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가운데서도 진실을 알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한 판의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잔인한 게임, 진실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면서도 이기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전략을 짜야 하는 게임.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그들이(정확히는 법조계 사람들과 진실을 숨기려는 사람들)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빤하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현실감을 잃고 있지는 않았으나 기적도 없었고, 온 몸을 휘도는 감동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진심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으나 인간이 내린 판결 앞에 그런 감정 나부랭이 따윈 애초부터 포함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맡은 '나'는 결국 패소했다. 그러나 박재호의 삶에 완전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너무나 많은 후폭풍이 밀려왔다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 속에 잊힌 사건은 또 일어날 것이며 승소하거나 패소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을 겪어본 자들이야말로 법은 한낱 몸부림과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은 절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도 소수요, 제대로 된 양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소수라는 것만 알려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소수는 다수가 될 수 있으며 주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에, 소수의 사람이 만들어낸 소수의견을 무시하고 살고 싶진 않다. 소수가 자리를 탈바꿈 했을 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설을 퇴고한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파일이 날아갔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일을 복구해 빛을 보게 된 이 소설은 그런 사연만큼이나 독특하다. 법과 사건을 촘촘히 엮은 것이나 마치 사건을 보고하듯 무미건조하면서도 툭툭 쳐대는 문체, 어느 누구도 주체가 되지 않는 시선들이 그랬다. 해설을 맡은 이정현님은 이 소설이 '용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으나 '용산을 떠오르게 한다.'고 했다. 나도 용산 사건을 익히 안다. 그러나 세세하게는 모른다. 내가 말한 세세함은 뉴스에 조그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게 되는 사건의 흐름을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자세히 모르는 용산 사건을 더 잘 알게 된 기분이 든다. 마치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아버린 것 같은 씁쓸함이 나를 옥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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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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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賞)이란 것이 참으로 이상해서, 아무런 편견 없이 대했던 작가라도 일단 상을 받았다고 하면 괜히 거부감이 느껴진다. 특히나 노벨 문학상 같은 큰 상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도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에 구입해 놓았는데, 막상 상을 받고 나자 손이 더 안 갔다. 더군다나 상금 때문에 작가의 자식들 간의 불화가 일었다는 풍문까지 들려 상이라는 것에 더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책을 구입한지 3년 만에 겨우 꺼내들었음에도 초반 30페이지를 못 넘겨 몇 번의 덮음과 펼침을 반복했다. 깊은 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책을 읽었더니 그제야 차분하게 읽혔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직장파티에서 처음 만났다고 시작되는 소설은 두 사람의 만남 자체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암시 같았다. 그들이 순조롭게 결혼하고, 터무니없이 큰 집을 산 것과 아이들을 많이 낳겠다는 생각이 무언가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부부였지만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분명 다르게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가와 성탄절을 비롯한 축일 때 많은 비용을 들여 친척들을 불러 모아, 기꺼이 봉사하고 북적댈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보고, 해리엇 부부가 시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뒷걸음질 쳐서 어둠속으로 잠식해 들어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집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파티를 열지도, 아이들을 많이 낳지도 않았다.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아이가 하나씩 늘어났고, 모두들 비난하다시피 불쾌한 뜻을 내비쳤음에도 해리엇 부부는 뜻이 맞았고 더 많은 아이를 낳길 원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기간이 늘어날수록 해리엇은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해졌으며, 데이비드는 더 많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늦게까지 일해야 했고, 그들을 도와 해리엇 엄마가 늘 상주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이를 더 낳는 것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적어도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해리엇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가 하는 발길질이 남달랐고, 그것은 엄마인 해리엇이 느끼기엔 고통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진통제를 먹어가며 고통을 참아냈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벤을 좋아하지 않았다.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어떠한 진단도 내려지지 않고 진단할 수도 없는 벤의 증상이 사람들을 멀리하게 했고, 해리엇 조차도 감당하기 버겁게 만들었다. 벤의 탄생으로 네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집안은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가족의 행복은 거기서부터 멈췄고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가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되는지 <다섯째 아이>는 잔인하게 기록해 갔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들어가며 고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벤으로 인해 소소한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처절하게 깨지는지를 세세하게 드러냈다. 해리엇은 벤을 위해 많은 부분 희생하고, 한편으론 원망도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지만 과연 그것이 현명한 방법과 선택이었는지에 관한 여부는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다. 갈수록 과격해지고 고집이 심해지는 벤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해리엇 조차도 그런 벤을 보며 수많은 갈등과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벤이 어렸을 적에 도로로 뛰쳐나간 적이 있었는데, 해리엇은 속으로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라고 기도하'는 부분을 읽고, 절대로 벤을 통한 헤리엇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가족에게 평화와 행복은 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벤을 시설로 보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약물에 취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벤을 직접 만나고 찾아온 것은 해리엇이었다. 벤을 그런 곳에 버려둔 것도, 벤을 다시 되찾아 옴으로써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벤으로 인해 가족의 끈은 끊어져 버렸고, 벤이 다시 돌아왔을 땐 집은 텅 비어 버린 후였다. 벤이 커가면서 아이들은 집에서 멀어져 갔고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였다. 벤으로 인해 넷째아이가 정서불안이 되어 갔으며 해리엇이 벤을 감당할 수 없음에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벤에 대해 생각할 때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에서 정상적인 감정의 불티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독자인 나도 해리엇을 그렇게 판단하려 했으며 아주 적은 동정밖에 던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아프게 느껴가고 있었다.

 

  벤의 문제를 알기 위해 의사를 찾은 해리엇은 별 도움 없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의사가 가진 감정을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고 읊조리는 것을 보고, 그 의사의 감정이 바로 나의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설의 주체가 되는 벤과 해리엇을 나 또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우울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상적인 행복을 보길 원했고,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길 바랐다. 내가 해리엇이었다면 그녀만큼 해 낼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앎에도 그녀에게는 그런 삶을 살아달라고 강요했으며, 그렇게 살지 못한 해리엇을 내 세계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소설은 끝나 가는데 도무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나의 불안감을 확인시키듯 '세상의 대도시 아무데나 휩쓸려 그곳의 지하세계에 합류하여 그들의 머리로 살아갈 수 있을' 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어떠한 가능성과 절망도 던져주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독자에게 맡겨 버리는 저자가 야속할 정도였다.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 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몸속의 진액이 다 빠져 나가버린 것 같이 힘겨웠다. 고통을 모두 드러내놓고 모든 것을 앗아가는 소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 고통의 대가가 내게 남겨진 우울이라면, 앞으로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을 용기를 절대 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가 내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수긍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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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후예 알베르 카뮈 전집 10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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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던 카뮈 책 중 <태양의 후예>를 꺼낸 것은 카뮈 전집이 완성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20권의 책이 세트로 판매가 되는 것도 모자라 특별 양장본으로 제작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갖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이 쳐졌다. 이미 카뮈 전집 중 11권이 있기 때문에 입맛만 다시고, 그 여세를 몰아 전집이나 읽어보자며 꺼낸 것이었다. 소설이나 산문을 꺼내들었더니 너무 묵직해서, 사진과 짤막한 글이 들어 있는 <태양의 후예>를 골랐다.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님은 이 책을 1992년 파리에서 지인에 의해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진행 중이던 '카뮈 전집' 번역 계획 속에 이 책을 포함시켜 현재 독자인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앙리에트 그렝다의 사진에 카뮈의 짤막한 글이 담겨 있어, 카뮈의 흔적을 엿보려고 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카뮈의 흔적을 느끼기 보다는 글과 사진이 같이 어우러져있는 공동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쩌면 내면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카뮈 전집 중에서 이제 한 권밖에 읽지 않은 나도 그 점을 염려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이 책으로 인해 휴식을 취한 기분이었고 형언할 수 없는 신선함을 안은 것 같았다. 

 

  보통 사진이 실려 있는 책들은 책 따로 글 따로 인 경우가 흔하다. 찍는 이와 글쓴이가 같아도 동일시되는 느낌이 부족한 경우도 있고, 극히 드물게 공동작업의 경우에 일치되는 느낌을 책들을 만나게 된다. <태양의 후예>는 일치되다 못해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한 책이었다. 사진에 짧은 텍스트를 붙인 책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고 이면을 보게 할까 걱정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이어지는 사진을 보며 어떤 텍스트를 써냈을지 기대하며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총 30장의 사진과 카뮈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책이 탄생한 배경에는 카뮈와 각별한 우정을 자아냈던 시인 르네 샤르의 발문이 참고가 되었다.

 

"젊은 사진작가 앙리에트 그렝다와 카뮈가 이 고장을 샅샅이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된 기쁨과, 앙리에트 그렝다의 초기 사진 작품들을 보았을 때, 본의 아닌 기교 때문에 그만 본질을 훼손하게 된 그림 엽서의 사진들이나 순수한 연구 자료들과는 다른, 보클뤼즈 지방의 영상, 초상, 풍경들을 가져봤으면 하고 느꼈던 나의 욕심이 만나서 태어난 것이다".(142~143쪽)

 

  처음에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헷갈렸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앙리에트 그렝다와 카뮈가 프로방스를 '샅샅이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만들어 낸 작업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앙리에트 그렝다와 카뮈가 아닌, 르네 샤르와 카뮈였고 르네 샤르가 앙리에트 그렝다의 초기작을 보고 이 책을 만들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아리송하긴 해도 어찌 되었든 같은 장소를 누비고 다닌 사람들의 공감대로 한 권의 책이 탄생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렝다의 사진과 카뮈가 본 고장이 어느 정도의 시기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굳이 그 시간을 따지기보다 혼연일치되는 사진과 글의 매력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혼연일치'라는 표현을 과감하게 쓸 정도로 사진과 카뮈의 글을 극찬하는 것은 사실감 때문이었다. 나 또한 온라인상에서 돌아다니는 사진에 짤막한 글을 붙여본 경험이 있는데, 영감이 떠오를 때는 쉽게 글이 나오지만 반대일 때는 허구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일치되지 못한 글을 붙일 때도 있다. 카뮈는 내가 경험한 허구적인 느낌을 배제시키고 사실적인 묘사와 사진 밖의 풍경은 물론 시적인 느낌과 함께 삶을 뛰어넘는 시선을 그릴 줄 알았다. 왼쪽 면에는 카뮈의 글이, 오른쪽에는 그렝다의 사진이 실려 있음에도 한 사람의 작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한 사람의 작업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조화라고 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버드나무 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사진을 보며 '늙은 버드나무 둥치에서 신선한 가지들 다발로 뿜어 나온다. 이 세상 최초의 정원이다. 새로운 새벽마다 최초의 인간.' 이라고 텍스트를 붙인 것이나, 늘어지는 갈대 사진을 보며 '여기 눈 앞 가까이엔 사랑의 침상. 벌써 잠자리는 따뜻하다. 멀리서, 그이들 웃는 소리 들린다.' 라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완벽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아한 표현하며, 흑백사진임에도 사진이 생생하게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도 했다. 옮긴이는 '비약과 생략법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다운 것이 카뮈의 시적 텍스트다.'라고 말했는데, 어렵게 들리는 의미를 직접 보고 읽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옮긴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독자들의 몽상을 도와주려는 의도에서(과연 이런 것이 가능할까?) (중략) 일종의 주석을 사진 뒷면에 붙여놓았다.'고 했는데 그 주석이 별 도움이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주석은 옮긴이의 개인적인 느낌이 드러나기도 했고, 카뮈가 남긴 텍스트를 좀 더 풍부하게 해 줄 요량으로 카뮈의 작품에서 세세하게 발췌한 것들이었다. 사진과 짤막한 글에서 이미 풍부함을 느껴서인지 그것들을 읽을 때면 오히려 흐름이 끊겨 술렁술렁 읽고 넘길 때도 많았다. 그렇더라도 묻힐 뻔 했던 독특한 책을 카뮈 전집에 포함 시켜 준 옮긴이의 공로에 힘입어 여러 사람의 조화로 탄생된(주석을 붙인 옮긴이의 노고도 포함해) <태양의 후예>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의미도 잘 떠올려 보지 않는 나인데도 책을 보고, 읽고 나자 이렇게 기막힌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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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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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을 하고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오는 백치인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이라는 청년이 기차에서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있었다. 미쉬낀은 친척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찾으러 오는 길이었고, 로고진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라는 여인에게 아버지 몰래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도망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만남은 단순한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앞으로 펼쳐질 사건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으며,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사이에 나스따시야란 여인이 얽혀 파란만장한 사건을 전개하게 된다. 미쉬낀 공작은 백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약간은 어수룩하고, ‘상처받지 않고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요양을 간 것이나, 확실하지 않은 친척을 찾아 상뜨 뻬쩨르부르그로 오는 것이나,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 것이나 순수하면서도 대책 없음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행히 예빤친 장군의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를 찾게 되었고, 그 집의 세 딸과 어울리면서 특히 막내인 아글라야와 복잡 미묘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공작은 그들과 교류하면서 스위스에서 요양할 때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런 공작의 태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고, 종종 백치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는 그를 보며 낯섦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유부단함과 순수한 내면으로 인해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와 로고진의 사각관계는 더 복잡하게 얽히고, 결국 모든 것은 그가 요양한 곳에서 출발할 때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나스따시아란 여인은 절세미인으로 또쯔끼라는 재산가에 의해 성적으로 농락당한 여인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그의 보살핌을 받긴 했으나 나스따시아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하게 된다. 또쯔끼는 예빤친 장군과 그런 나스따시아를 따돌리려 했고, 그 방책이라는 것이 예빤친의 비서인 가브릴라 이볼긴과 결혼을 시키려 한다. 철저하게 돈으로 계산된 입막음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로고진이 나스따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그녀에게 주기로 한다. 이렇듯 나스따시아의 미모에 빠져 그녀의 참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오로지 차지하려고만 하는 수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점점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종잡을 수 없는 히스테릭한 여인으로 변모해 가며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복수로 풀어내려 한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미쉬낀 공작이었고, 공작이야말로 그녀의 본 모습을 볼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진심으로 사랑해 준 단 한 사람이었다.



나스따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거리가 멀고 파멸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앎에도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빤친 장군마저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고, 로고진과 이볼긴이 돈으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 하는 것을 비웃는 그녀의 행동은 그들을 농락 한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하기 위해 미쉬낀 공작도 그녀에게 청혼한다. 얽히고설킨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생일 날 의중을 밝히는데 추측을 깨고 로고진과 결혼을 공표하고 그곳을 떠나 버린다. 하지만 로고진을 선택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고, 로고진에게서도 도망간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미쉬낀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쉬낀 공작도 반년 가량 모스끄바로 떠나있다 후견인의 상속자가 되어 예빤친 장군의 별장에서 그의 가족과 여름을 보내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나스따시아가 떠남으로써 무언가가 조금은 정리된 듯 했다. 미쉬낀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아글라야와 역시 그녀를 좋아하는 공작이 이뤄질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둘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미쉬낀과 나스따시아가 탐탁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마음이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한 채 오해와 불신이 쌓여갔고, 나스따시아의 재등장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나스따시아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뒤에도 로고진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곁에서 수많은 노력을 들였음에도 그녀가 끄떡도 안하자 미쉬낀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나스따시아가 나타나면서 아글라야도 마찬가지로 질투심을 동반한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고, 네 명의 관계를 무엇으로 풀어야 할지 최선의 방책의 복선은 드러나지 않았다. 나스따시아는 상처를 깊게 받은 여인이었고, 로고진은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으며, 아글라야는 질투와 사랑의 혼돈을 정립하지 못했고, 미쉬낀 공작은 똑 부러지지 못한 행동과 사고로 답답함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적어도 미쉬낀 공작이 나스따시아와 아글라야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해 결혼을 했더라면 이러한 비극까지 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누구와 엮이든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비극이 잠재해 있는 복잡한 사랑의 얽힘이었다.



나스따시아는 공작을 아글라야와 적당히 엮어 정리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 아글라야를 농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 나스따시아와 단판을 짓기 위해 찾아온 아글라야 앞에서 보란 듯이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며 공작과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 공작은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 제대로 된 행동을 하지 못해 아글라야에겐 상처만 주고 나스따시아와의 결혼이 진행되고 만다. 무언의 불안감이 계속 되는 가운데 결혼식 전날 나스따시아는 로고진에게 납치되고, 공작이 로고진을 찾아갔을 때 나스따시아는 방수포에 싸인 시체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를 살해할 수밖에 없던 로고진, 그를 위로하는 공작과의 대면은 그들에게 내제되어 있는 모든 문제를 초월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최초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로고진의 살해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한 그들에게 남은 건 그에 상응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몰랐다. 로고진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아글라야는 공작을 포기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국인과 결혼한다. 그녀의 가족도 국외에서 체류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공작 또한 원래의 백치상태로 돌아가 소설은 끝이 난다. 많은 아쉬움이 남아 ‘~하지 않았더라면’ 이란 상황을 만들어 내봤자 최선의 방책도, 어떠한 불행과 일련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 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 간의 갈등과 의식을 통해 러시아인의 기질과 당시의 사회상, 인간 깊숙이 숨겨 있는 모든 본능을 끌어냈다. 그 길고도 긴 여행 속에 몇몇 인물들만 드러냈지만 그 이외에도 다양한 인간군상은 새로운 의식의 너머를 가늠하게 했다.



그 중에 돋보였던 인물은 폐병을 앓고 있는 18세 청년 이뽈리뜨였다.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을 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공작을 비롯한 사회에 대해 통렬한 증오심을 드러낸 그는 나스따시야가 살해 된 뒤 역시 병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가 보인 행동과 사고는 스캔들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긴 했어도, 역시 유쾌하거나 비극을 넘어선 만남이 아니었다는 데서 안타까움이 인다.



오랜만에 읽게 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가운데서도 장편을 읽어서인지 무척 긴 과정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상, 하를 읽어낸 공백이 커서 묵직한 부담감은 덜했으나, 소설이 주는 무게감은 여전히 나를 비틀거리게 만든다. 그가 펼쳐놓은 세계에서 흩어진 의미들을 일일이 챙기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도 알고, 그것을 따져가며 책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문제를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607쪽)’라고 말한 이뽈리트처럼 끊임없이 그의 세계를 탐독해 가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책을 놓을 수 없고 2독, 3독을 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철저히 의미를 찾고 메시지를 분석하는 작가가 아닌, 읽는 과정을 즐기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 그의 작품을 계속 접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남겨 놓은 소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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