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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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을 읽어낸 느낌치고는 너무나 생경해 당황스럽다. 언뜻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리게 만드는 겉표지에 친근감이 갔지만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낯선 저자의 이름이 긴장감을 주었다. 책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을 강렬하게 만들면서도, 책장을 여는 순간 현재의 나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겉표지, 저자, 제목만으로 이토록 긴장하기는 오랜만이었고 그 기억을 상기시키듯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을 덮고 난 뒤까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은 상실과 환희라곤 맛볼 수 없는 지지부진함이었다.

 

  단편을 읽으면서 이렇게 길을 잃어 본 것은 처음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물론이고 책 속에 들어와 있는 도중에도 길을 잃기 일쑤였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잃고, 이야기의 흐름을 잃었으며, 그들의 의식가운데 담겨있는 고뇌를 잃었다. 그래서인지 10편의 단편을 읽었음에도 어떤 한 인물이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고, 각자의 색깔을 까지고 있음에도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들을 좇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헤맸으며 걸핏하면 길을 잃었던 것일까. 삶에서 마주치기 싫었던 것들을 그들 가운데 마주하고 말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녔다고는 해도 비슷한 느낌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통된 소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혼, 사랑, 불륜, 배신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피하고 싶은 인생의 단면이었다. 행복한 삶을 향해가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까 말까인데 이런 주제들로 채워진 단편들 속에서 무엇을 갈망해야 하고,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절망과 극단의 끝에서 범희망적인 가치를 꿈꿀 수 있다 해도 나의 내면은 온통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룩들로 채워진 것 같다. 아내의 귀걸이를 정부에게 선물로 주고 쾌락에 몰두하는 남자,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는 시인과의 관계를 눈치 챈 부인, 젊은 시절의 사랑을 다시 만났지만 겁이 나 도망치는 남자, 사랑의 실패와 성적 욕망이 뒤범벅된 여자들의 이야기 등 어느 하나 유쾌한 축에 못 드는 이야기들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피하고 싶으면서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 내부에 깊이 포진되어 있는 뒤틀린 욕망과 어긋나고 싶지 않은 삶에 대한 반듯한 잣대 때문이 아니었을 까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꼭꼭 감추어둘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행동하며, 거리낌 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적어도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상실감에 겨워 불행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능에 충실하며,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저자 또한 뚜렷한 결말을 내어주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옆에서 지켜보며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창조한 것이(많은 소재를 실재에서 재구성했다하더라도) 저자라고 해도 타인의 인생의 단면을 기록한 듯 어떠한 감정이입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다만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몰랐어.' 라고 말한 <방콕>의 여인처럼 삶의 진리가 책 속에 듬성듬성 박혀 나를 한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인 <어젯밤>은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어 그런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었다. 병든 아내의 자살은 도운 남편은 애인과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지만, 다음 날 아침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아내를 보고 경악하고 만다. 애인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냥 그게 전부였다.'라고 끝맺음을 한 부분에서 이 책의 독특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단편집이기에 꼭 순서를 지킬 필요는 없으나 순차적으로 읽어나간 뒤 만난 <어젯밤>은 마지막에 실려 있는 것이 유종의 미를 거두려 거드름을 피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와는 거리가 먼, 혹은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아낸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불쾌감이 일었지만 비난할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다. 길을 헤맸을지언정 그들의 인생을 지켜본것 뿐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일부분을 본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나와는 다른 삶이라는 차이를 둘 밖에는.

 

  대화체 옆에 연결된 문장 때문에 읽기에 헷갈렸던 나만큼이나 옮긴이는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나 유명한 작가이고 문장에 들어있는 엄청난 의미를 온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어쩜 불가능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어색한 번역체를 읽다 단아한 우리 문장을 읽을 때의 차이를 알기에 옮긴이의 고역과 내가 느낀 낯섦을 이해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두가 찬사하는 작품이더라도 나와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면에서 <어젯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고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에 대해 조심스러워 진다. 먼 훗날 원서로 그의 책을 읽을 때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현재 나에게 제임스 설터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작가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겠지만 낯설고 당황스러운 첫 만남으로 그를 판단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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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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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활자에 중독되어 있을 때, 오로지 읽는 것에만 치중해 사진으로 채워진 책이나 데생 집 같은 책은 멀리했었다. 읽을거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고, 느낌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글에서 맛볼 수 없는 매력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진집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읽을거리가 없다는 편견은 깨진지 오래였으나 여전히 느낌을 남겨야 하는 부분에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국내에서 굵직한 사진가로 알려져 있음에도 사진에 관해서 문외한인 내게는 이름조차 낯설었다. 책을 읽다 여기저기서 그에 관한 정보를 듣고는 그제야 약간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와의 조우는 처음이니 이 만남으로 인해 온전한 시간이 되길 바랐다. 저자는 중국 시안에서 찍은 사진들로 채워 짧은 글과 함께 <얼굴>이라 책제목을 붙였다. '사람의 표정을 사진에 담는 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라고 말한 저자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었다. 시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네 70~80년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 우리도 저런 표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순수한 웃음이 배어나는 얼굴이 많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는 얼굴을 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특별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느껴졌다. 저자 또한 그런 사람들의 통해 '삶이란, 그 존재로 이미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들의 무심한 표정에서 배운다.' 라고 했듯이 일상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인 것 같았다. 무심한 표정의 이면에는 '타인을 향한 호기심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제시키는 웃음.' 도 담겨 있었다.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가족은 몇 명이나 될까, 자신의 삶에 행복해 할까 등 나름대로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활자로 읽지 않고 이면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진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글이 없다고 투덜대며 쉽게 넘기던 책장을 오랫동안 붙들면서 사진이 찍힌 순간의 찰나와 사진 속에 담겨지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 보려 애썼다. 저자도 '구구절절한 문장들을 거둬내고 간결한 한마디로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작업의 묘미를 느끼는 순간이라고 했으니, 그 사진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묘미가 전달될 거라 생각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혹은 찍히지 않은 곳을 마음에 담으면서 사진가는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곳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함께 살아있음을 불쑥불쑥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사진을 찍는 일에 앞서 마음을 여는 일일 것이다. 풍경 속에 자신이 녹아들게 만들고, 마음에 따라 사진의 양상이 달라지듯이 사진을 찍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삶의 찰나를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그 모든 것이 잘 녹아 있는 것이 시안 사람들의 얼굴이 찍힌 사진집이었다. 얼굴을 보며 단순하게 표정만 지나칠 때도 있고, 흔적을 추측하기도 하며, 사진 속 배경을 탐문하기도 했다. 잘 찍힌 사진집이 만들어졌다는 생각보다 마음과 마음이 얽혀 보는 이에게도 얽힘을 유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며 때문에 사진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 강조한다고 한다. 사진에 대해 잘 알아야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진가가 좋은 사진가이고, 사진을 보면서 찍는 이의 시선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독자가 깊은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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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인격 개암 청소년 문학 6
마거릿 피터슨 해딕스 지음, 최제니 옮김 / 개암나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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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평화롭던 일상이 뒤집히고 익숙했던 사물들이 낯설게 보이는 시점은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부터다.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은 기쁨을 동반하기보다 대부분 혼란과 당황스러움 복잡함을 달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13살을 앞둔 베서니만 해도 그랬다. 일상의 변화를 맞이하다 못해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아무런 설명 없이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면식도 없는 마일리 이모 집에 오게 되었지만 부모님은 베서니를 그곳에 맡겨둔 채 떠나버리고 만다. 과연 그런 현실은 베서니가 감당할 수 있을까? 베서니의 부모님은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한 것일까? 답답한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궁금증은 끊이질 않았고, 책장은 더디게 넘어갔다.

 

  책의 약 1/3 지점에서 조금씩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초반의 지난함은 당연했다. 그 후로 해일이 몰아치듯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질 때마다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베서니의 부모님이 아무런 설명을 해 주지 않은 채 이모 집에 남겨두고, 핸드폰을 해지하면서까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무척 답답했다. 베서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의 행동에 대해 자책하거나 이모네 집에서 적응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일리 이모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베서니의 부모님과 통화하면서 엿듣고, 이모네 이웃들이 말하는 '엘리자베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해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언니였다는 사실만으로 충격을 받은 베서니에겐 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언니인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자신에게도 사촌인 조스에게 전해들은 베서니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분명 엘리자베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에 이모네와 부모님은 단절된 생활을 해왔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사실을 부모님은 자신에게 철저히 숨겨왔고, 베서니를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심하게 과잉보호를 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왜 자신을 이곳에 맡겨두고 떠나버렸는지 여전히 의문은 충족되지 않았다. 갑갑하고 답답한 상황만 이어질 뿐, 누구하나 속 시원히 사건의 전말을 말해주지 않았다. 모든 열쇠의 키는 부모님이 쥐고 있는데, 그런 부모님하고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최근 부모님의 행동에 이상이 찾아온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마는 늘 울기만 하고 아빠는 더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자신은 낯선 이모네 집에 맡겨져 지금껏 몰랐던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언니와 베서니는 너무나 닮아 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모네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베서니를 엘리자베스로 착각했다. 그런 베서니는 엄마부터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은 엘리자베스 언니의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빠가 보낸 여러 개의 출생증명서와 거액의 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엄마의 말을 뒷받침 해 주고 있었다. 베서니는 정말 복제인간일까? 자신만의 고유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채, 언니를 잃은 슬픔으로 채워진 부모님의 복제품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그때부터 베서니는 자신이 이곳에 와있다는 현실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된다.

 

  청소년들이 겪는 혼란을 질풍노도라고 표현할 정도로 존재감에 대한 고민과 방황은 꼭 한번쯤 찾아온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아래 이루어지는 감정이고, 그 과정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큰 영향을 받는다. 과연 베서니에게 닥친 현실을 질풍노도라고 단순하게 규명지어 버릴 수 있을까?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 앞에 정체성은 물론이고 존재조차 의심받고 있는 상황인데? 그동안의 자잘한 고민들과 의문들이 한낱 먼지처럼 느껴질 만큼 베서니에게 닥친 현실은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혼란은 낯선 남자가 베서니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두려운 감정으로 바뀌게 된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낯선 남자와 아빠의 과거 행적이 드러났지만 그의 곁에는 이모와 조스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연 베서니를 그 남자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까?

 

  한 편의 서스펜스를 만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더디게 넘겨지던 책장은 후반에 이르러 정신없이 넘어갔다. 과연 어떤 내막이 숨겨 있는지, 베서니의 정체는 그 동안의 사건과 어떻게 결부시켜질지 조마조마했다. 결국 부모님과 베서니를 뒤쫓던 남자가 대면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사연이 밝혀졌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란 의문의 과녁에 베서니가 복제인간이라는 화살은 명중했다. 그 사실이 언론에 밝혀짐으로 돈과 과학의 발전, 명예만을 중시하는 세태 속에서 베서니는 나름대로 잃어버렸던 정체성을 되찾는다. 자신을 괴롭혔던 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인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 사람이 완전히 똑같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능력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한단다.' 라고 말해주는 선생님이 있어 베서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출생에 아픔과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었지만 현재에 존재하는 자신을 더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베서니가 존재감을 찾아가는 과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낯설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혼란과 방황이야말로 그들에게 현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복잡다단한 시기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존재의 가치가 무너질 때,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절망이 밀려올 때 청소년뿐만 아니라 인간은 좌절하고 만다. 각자에게 주어진 존재의 가치의 농도가 다를 뿐, 베서니처럼 복잡하고 특별한 경우라도 고민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만약 베서니가 혼자였다면 혼란함과 두려움을 잘 이겨냈을 거란 확신이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떠난 부모님은 제쳐두고라도 마일리 이모와 조스 언니가 곁에서 함께 그 시간을 견뎌 주었기에 베일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빨리 용기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근원을 떠나 인간과 인간이 서로 기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고, 옮긴이의 말마따나 '지독한 안개 속을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이라는 말에 동조하게 된 소설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소설과 함께 추천된 베토벤의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을 들으며, 우리는 모두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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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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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어령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딸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최근에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의 제목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였기에 제목만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탓도 있었다. 그만큼 저자가 신앙을 가지고 안가지고의 여부에 대해 큰 의의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그동안의 행보를 고려해 볼 때, 단순하게 치부하고 지나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일흔이 넘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 딸의 기도가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과 무엇보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써 낸 수많은 글들이 그동안의 내적 영성을 증거 함에도 현재의 중요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자의 책을 그다지 많이 읽은 것은 아니기에 신앙에 관한 에세이를 만나게 된 것이 자못 당황스러웠다. 나 또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그간의 저자의 행보와 신앙이 일치가 안 되는 낯섦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내 시선 또한 이러할진대, 저자가 당면했을 시선들이 그제야 조금씩 느껴졌다. 현재를 이루고 있는 밑바탕이 과거가 되더라도, 현재가 더 중요한데 왜 그렇게 과거의 행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지식인으로써의 인식되어 있었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그 묵은 감정을 벗겨내고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에 저자의 진심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초반에는 저자에 대한 인식을 벗기기는 힘들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고 신앙에 대한 경험과 저자의 생각, 농도까지 모두 알아갔다. 교토, 하와이, 한국에서의 일들과 딸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 속에는 신앙이 중심이 되었지만 저자만의 집약적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글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독자적인 생각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실재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니 세례를 받는 것부터 이슈가 되었다.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례를 받겠다고 말해놓고, 국내에서 받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것 같아 '러브소나타' 도쿄 대회 현장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5천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바람에 더 크게 일을 벌이게 되었노라고 회상했다.

 

  세례를 받는 것부터 그 뒤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들 목도하면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것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도 제안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 셈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의 모습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똑같은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데도 저자는 보통 사람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딸의 기도가 육신의 아버지에게 닿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이 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시련이 저자의 딸에게 연속으로 다가왔음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암을 앓는 것도 모자라 재발까지 했고, 아이 중 한명은 자폐증상과 함께 과잉행동증상으로 오랫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총명하던 큰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하는 일까지 그야말로 시련은 끊이질 않았다.

 

  암을 이겨낸 것만도 힘겨웠을 텐데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와이까지 거처를 옮기는 고난이 안쓰러웠다. 그곳에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소식까지 겹쳐 저자는 급히 하와이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런 딸을 보며 딸을 낫게 해준다면 앞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겠다고 기도를 드린다. 딸의 눈은 국내에서 진료를 받은 뒤 기적처럼 나았고, 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가 신앙을 가지기 전과 후에 쓴 시들을 읽으면서 변화된 내적 영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가시는 것부터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까지 저자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을 낱낱이 보게 되면서 살아계신 그 분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저자의 광범위한 지식 때문에 잠시 책의 내용이 혼동되기도 했다. 신앙과 자신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드러낼 때는 장황한 것 같아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된 것 같았으나 개인적으로 신앙에 대한 주제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앙을 사람이 판단할 수 없고, 믿음의 척도를 비교할 수 없듯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겠지만 부족한 나의 눈으로 보여지는 여러 가지 것들에 생각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저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딸의 눈물겨운 기도와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그들의 모습이 있었다. 거기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나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이 교차됐다.

 

  저자도 저자지만 딸의 절절한 편지와 간증, 기도가 마음을 더 애달프게 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떠한 시선으로 쳐다보는지와 신앙의 여부를 떠나 삶에 대한 시각이 보통 사람과 좀 더 다를 뿐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녀를 보면서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저자는 일흔이 넘어 세례를 받는 것과 시집을 낸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망령 났다고 수군댔다 했지만 오히려 그 나이에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글로 표현하고, 감사해 할 수 있는 모습 속에는 아픔, 절망, 환희, 성스러움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날로 날로 깊어지고 짙어지는 믿음을 보면서 그 믿음을 닮아가야겠다고, 감사할 수 있을 때 맘껏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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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우린 열일곱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2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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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소설이어서 덥석 집었는데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덮어 버렸다. 말을 못하는 여주인공 순지와 바보인 오빠, 그런 가족을 부끄러워하는 남동생, 세 자녀를 홀로 키워온 엄마가 등장하는 초반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사투리까지 섞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발랄함을 기대했던 마음이 순간 사라져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책을 방치하다 겨우 다시 읽게 되었는데, 묵혀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읽어버렸고 안타까움에 마음이 싸해지고 말았다.

 

  현재와 과거를 나눠 훑어가는 구성은 읽기를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말도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는 현재의 순지가 그렇게 된 과정을 알아가는 것이 괴롭다면 괴로웠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농사를 지어야하는 순지의 처지가 안타까웠고, 그런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나, 서울에서 일하는 동네 친구들을 향한 부러운 시선 모두가 나를 괴롭혔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디선가 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 때문에 괜히 마음이 가라 앉아 버렸다. 꿋꿋하고 순박한 순지였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즐거울 리 없었다. 명절 때 만나는 동네 친구 은영과 정애는 서울 물에 푹 절어 순지를 유혹하고,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던 순지는 엄마에게 서울로 보내달라고 조르게 된다.

 

  자신의 고집대로 서울에 가게 되었지만 그곳 생활은 꿈에 그리던 생활이 아니었다. 비좁은 자취방과 고단한 공장생활은 순지에게 공부는커녕 도시의 호락하지 않음을 그대로 느끼게 해 주었다. 은영과 정애가 있었지만 오히려 정애 때문에 공장에서 난처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순지는 존재감이 없는 투명한 사물에 불과했다. 그런 서울생활과 다시 집으로 돌아온 순지의 이야기는 어지럽게 흩어져 어떤 모습을 더 지켜봐야 할지 몰라 겁이 나기도 했다. 말 못하고 병약한 현재의 순지의 모습이 처음에는 답답했으나, 조금씩 서울에서의 이야기가 펼쳐지면 오히려 시골속의 순지가 평안했다. 반대로 서울에서의 경험이 이어지면 힘겨워도 무언가 희망이 보이기도 하다가, 심상치 않은 결말로 좁혀 들어갈 때면 마주하기 싫어 피하고만 싶었다. 저렇게 발랄했는데 순지는 왜 말을 못하게 되었으며 자꾸 은영과 정애만 찾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순지를 비롯한 친구들과 공장에 모여든 수많은 여공들은 십대가 많았다. 88서울 올림픽 개막을 앞둔 시기였지만 당시의 팍팍한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순지가 공부를 한다는 꿈은 꿀 수도 없었다. 시골만 벗어나면 대학도 다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꿈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현실만 깨달아갈 뿐이었다. 집에도 가고 싶고, 가족들도 보고 싶고, 자신이 좋아하는 정태오빠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하루하루가 고역 같은 나날이었다. 그런 일상도 감당하기 힘든데, 급기야 공장에서 싸우다 잘리고 만다. 그런 상황에 내던져진 순지가 너무나 막연해 두려움이 일었다. 열일곱이면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데, 그런 쓰디쓴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방직공작으로 일자리를 옮긴 순지를 따라 친구 정애와 은영도 같은 공장에 다니게 되었고, 지하 기숙사일망정 생활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와 구박 속에서도 무료로 야학을 해주는 곳에서 공부를 하며 희망을 부여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공장 생활에서 힘들어도 공부가 활력이 되어 주었으며, 현재를 견디면 보다 나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고 불행의 그림자는 서서히 아이들을 덮치고 있었다. 순지가 그런 상태로 고향에 다시 돌아온 이유에는 정애와 은영의 죽음이 있었다. 순지는 분명 그 기억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었고, 고통 받고 있었음에도 엄마는 정애와 은영의 귀신이 순지를 괴롭힌다 생각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는 말에 순지 엄마는 질겁을 하고, 굿을 해 귀신을 쫓으려 하고 그런 순지를 도와주려 정태가 나타난다.

 

  정애와 은영의 목숨을 비롯한 다른 소녀들의 삶을 모조리 뺏어간 사건은 불이었다. 셔터가 내려진 지하 기숙사에서 잠든 사이 불이 났고, 아이들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빠져 나가려 했지만 창살 때문에 나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갔다. 22명의 사망자를 낸 그 사건은 실화였으며 순지만이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 사건을 향해 순지의 과거가 펼쳐졌고, 아이들의 생은 끝을 달리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읽어나가고 있었다. 순지가 저런 모습으로 고향에 내려온 진실의 이면에 이런 내막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오만이었다. 순지의 내면에는 그날의 고통과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이 맞물려 말문을 막고 있었고, 치료가 없이는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없었다.

 

  동생을 잃은 정태나 은영과 정애의 엄마는 순지를 보는 것이 괴로웠고, 그들 간의 벽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나마 순지에게는 자신을 생각하는 가족이 있었고, 마음의 치료가 아닌 엉뚱한 굿을 벌이다 다시 화해하는 사건이 만들어졌으며, 정태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된다. 순지의 고통을 알아주는 의사와 정태의 도움으로 순지는 그간의 고통을 조금씩 털어내며 말문을 여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나지만, 그것으로 순지를 안심하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물론 힘든 시간을 거쳐 왔으니 좀 더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미 지나온 시간도 고통으로 얼룩져있어 무조건적인 희망을 던져주기가 미안했다.

 

  1988년에 일어난 사건을 소설화 시키는 사실을 모르고 읽어서인지, 열일곱의 시선으로 시시콜콜 늘어놓는 감정의 나열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억지로 들어가려는 경향으로 보이기도 했고, 고리타분한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타박을 했다. 순지가 겪은 일이 드러나고 저자의 말을 읽고 나니 그제야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또한 내가 그들의 삶을 짓밟은 것 같아 죄책감에 마음은 얼룩져갔다. 1988년 당시 그들보다 어렸지만 어른이 된 현재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삶을 짓밟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던져줄 수 없다면 최소한 짓밟지는 말아야 한다. 지켜줄 수 없다면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하고 그 아이들이 '어쩌자고 우린' 하며 현실과 나이를 탓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을 통해 어른의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면 더 이상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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