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우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염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히라노 게이치로는 조금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고등학교 때 문학을 읽는답시고 도서관을 들락거릴 때, 우연히 <일식>을 읽게 되었고 어려운 작가로 인식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꼈다. <달>까지 읽고 난 뒤에도 그 느낌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의 뇌리에 작가의 이름은 아로새겨졌다. 그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모두 구비해 놓았는데, 결국은 읽은 책보다 읽어야 할 책이 더 많은 작가에 속하고 말았다. 책에 관심이 증폭될 때 만나게 된 작가라서 그런지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감격으로 다가온다.

 

  활발한 활동을 하는 저자와는 달리 그의 작품을 제때 읽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내 수준이 형성되지 못할 때 <일식>을 읽어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이왕 읽을 거라면 제대로 읽고 싶다는 열망에 그의 책을 모두 구입하면서도 선뜻 손을 못 대었던 것 같다. 이제는 <일식>부터 다시 꺼내 그의 작품을 읽어도 될 것 같아 가볍게 시작할 맘으로 <문명의 우울>을 먼저 읽게 되었다. 두께가 얇아 먼저 꺼내들었는데, 오로지 글로만 대면하게 되는 작가이며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책의 두께로 가늠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짧은 칼럼 형식으로 실린 글들은 2000년 1월부터 1년간 월간 <voice>에 실린 것이라고 한다. 단행본으로 만들면서 가필과 수정, 제목도 직접 붙였으며, 「사진초寫眞抄」라는 연재 글의 형식에 따라 사진을 보고 느낀 대로 쓰는 스타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소설가인 자신이 시사에 대해서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연재 스타일을 알고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시사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 작가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연재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읽었음에도 사회 현상의 화제는 옛 일이 되어 버렸을지 모르나 저자의 생각을 통해 글 속에 투영된 문제의식과 경각심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글을 읽다보면 주제에 맞는 부연설명과 저자의 생각은 충분히 드러나서 저자가 보았다는 사진을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저자후기에서야 연재 글의 성격을 알았을 정도로 시사문제라고 해서 꼭 사진이 들어가 있거나, 전문적으로 글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쓴이의 생각이 온전히 판에 박힌 듯 독자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글을 읽으면서 읽는 이의 생각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저자의 글이 결코 가벼웠다는 것은 아니다. 옮긴이 또한 저자가 한자를 잘 알고 잘 쓰는 젊은 작가에 속해 번역이 쉽지 않았다고 했듯이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글들은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해력이 떨어지기 딱 좋았다. 글을 읽으면서 종종 멈춰서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며, 내가 수용해야 할 것과 나의 생각을 같이 관철시켜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며 읽어나갔다. 저자가 쓴 글들이 우리 사회와 밀접한 현상들이어서 좀 더 신경 써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말한 주제들이 일본사회를 중심으로 그려나갔다고 해도 대부분 내게도 익숙한 것들이라 관심 있게 보기도 했다. 로봇 강아지, 휴대전화를 통한 연애학, 사이비종교, 9.11사태, 고질라 등 과학과 사회현상이 빚어내는 갖가지 일들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읊조려 나갔다.

 

  저자가 읊조렸다는 표현을 쓴 것은 저자의 생각이 풍기는 주관적인 견해와 젊은 지식인으로서의 풋풋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확성기를 들고 나의 생각은 이러하니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고 해서 바뀔 것들도 아니었고, 저자도 그런 형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문제의식과 함께 대두된 저자의 생각은 이제 막 알에서 깨어 나오려는(알은 배움의 단계인 과정, 깨어 나옴은 소설가로써 입지를 굳히는 일) 움직임으로 보였다. 그의 생각이 깊고 고르며,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면서도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자잘한 경험과 함께 일상에 녹아 있는 주변의 것들을 들춰내서 새로운 시각을 독자에게 던져 준 것 같다.

 

  정독하며 읽었음에도 눈을 뗄 수 없어 한 호흡에 읽어 버린 책이다. 소설과 에세이가 모두 뛰어난 작가를 특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저자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셈이었다. 10년 전에 읽은 소설 두 편과 이제 에세이 한 편을 읽었을 뿐이어서, 책장에 꽂힌 그의 책 중에서 다음 읽을거리로 무엇을 지목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다. 여전히 내게는 결코 쉽게 읽어나갈 수 없는 작가이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 큰맘을 먹고 대해야 하는 작가라는 인식이 남아있다. 그의 첫 작품을 읽은 후로 10년 동안 꾸준하게 그의 동태를 살펴왔다고 할 수 없으나,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맙게 느껴진다. 단숨에 그의 작품을 독파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그의 작품을 만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호사를 누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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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읽은 책

 

 

1.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2. 타샤의 열두 달 - 타샤 튜더

3. 거창한 꿈 - 장 자끄 상뻬

4. 시차의 눈을 달랜다 - 김경주

5. 나하고 얘기 좀 할래? - 울리케 담

6.~10. 꼬마 니콜라 시리즈 1~5 - 르네 고시니/장 자끄 상뻬

11. 노 맨스 랜드 - 에이단 체임버스

12. 공항에서 일주일을 - 알랭 드 보통

13. 뉴욕 스케치 - 장 자끄 상뻬

14. 너는 모른다 - 정이현

15. 갈매기의 꿈 - 리차드 바크

16.~17. 프로즌 파이어 1~2 - 팀 보울러

18.~22. 돌아온 꼬마 니콜라 시리즈 - 르네 고시니/장 자끄 상뻬

23. 나는 멋지고 아름답다 - 김세진 외

24. 4월의 물고기 - 권지예

 

------------------------------------------------------24권

 

 

2월에 읽은 책

 

 

25. 무도회가 끝난 뒤 - 레프 톨스토이 외

26.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임영태

27. 열린다 성경 생활 풍습 이야기 (상) - 류모세

28. 몽해항로 - 장석주

29.~31. 안나 카레리나 1~3 - 레프 톨스토이

32. 각별한 마음 - 장 자끄 상뻬

33. 덕혜옹주 - 권비영

34. 행복을 주는 그림 - 크리스토프 앙드레

35. 에드바르크 뭉크 - 장소현

36.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 루이스 세풀베다

 

--------------------------------------------------- 12권

 

 

3월에 읽은 책

 

 

37. 소외 - 루이스 세풀베다

38. 성스러운 세 도시 - 르 클레지오

39. 정성 - 김철호

40. 붉은 조각달 - 로즈메리 웰스

41. 생일 - 장영희

42. 유언 - 산도르 마라이

43. 괴짜 사회학 - 수디르 벤카테시

44. 축복 - 장영희

45.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바바라 오코너

46. 핫 라인 - 루이스 세풀베다

47.~49. 앙코르 꼬마 니콜라 세트 - 르네 고시니/장 자끄 상뻬

50.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임혜지

51. 세 친구 - 박수현

52. 세계 도서관 기행 - 유종필

53. 타샤 튜더, 인형의 집 - 해리 데이비스

54. 메두사의 시선 - 김용석

55.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장소현

56. 피테르 브뢰헬 - 로제 마리 하겐, 라이너 하겐

57. 슬림독 밀리어네어 - 비카스 스와루프

58. 테헤란의 지붕 - 마보드 세라지

59. 좋은 이별 - 김형경

60. 문명의 우울 - 히라노 게이치로

61. 외면 - 루이스 세풀베다

 

----------------------------------------------------25권

 

*붉은색 - 좋았던 책

*서평을 아직 쓰지 않은 책 - 문명의 우울, 외면

 

 

- 3월의 목표는 매일 한 권씩 읽고, 한 편씩 리뷰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지켜지려면 매일 매일의 컨디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책의 두께도 신경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힘들었던 3월이었던만큼 그냥 책 속에 빠져 살았다.

좋은 책을 많이 만난 것이 큰 수확이다.

 

3월에는 36권의 책이 생겼고, 독자 모니터에 참여해 문학동네에서 받은 책이 17권이다.

3월에 여기저기 주변사람들에게 책을 나눠 준것도 20권 정도 되는 것 같다.

3월에 책 값으로 들어간 돈은 15,000원이 넘지 않았다.

30권이 들어오고, 20권이 나가도 책장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냥 열심히 읽고, 나눠 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2010년도에 생긴 책!!

(아직 안 읽은 책)

 

 

673.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이덕형

674.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 구드룬 파우제방

675. 다산의 아버님께 - 안소영

676. 아내의 슬리퍼를 신은 남자 - 뱅상 드 스와르트

677.~678. 빌레트 1~2 - 샬럿 브론테

679.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 마루야마 마사오

680.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 오에 겐자부로

681. 풀밭 위의 식사 - 전경린

682. 강산무진 - 김훈

683. 센티멘털 - 히라노 게이치로

684. 왼손잡이 - 니콜라이 레스코프  

685. 꿈을 빌려드립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686. 구덩이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687.~688. 불린가의 유산 1~2 - 필리파 그레고리

689. START! 트위터와 미투데이 - 박정남

690. 다산어록청상 - 정민

691. 연애의 사생활 - 김정미

692. 책탐 - 김경집

693. 그림 형제 최악의 스토리 - 루이스 세풀베다, 마리오 델가도 아파라인

694. 집중력의 탄생 - 매기 잭슨

695. 이름 뒤에 숨은 사랑 - 줌파 라히리

696.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697.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 이지성

698.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 호시노 미치오

699.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이야기 - 가와시마 고타로

700. 안네의 일기 - 안네 프랑크

701. 천사 바빌론에 오다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702. 비밀성서 - 시배스천 배리

703. 야생초 편지 - 황대권

704. 볼랴뇨, 로베르토 볼라뇨 - 호르헤 볼피 외

705.~709. 꼬마 니콜라 1~5 - 르네 고시니/장 자끄 상뻬

710. 칠레의 밤 - 로베르토 볼라뇨

711. 소셜노믹스 - 에릭 퀼먼

712. 파타고니아 - 브루스 채트윈

713. 세상의 혼 - 크리스토퍼 듀드니

714.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 김진

715. 에디슨도 반해버린 엉뚱한 발명 연구소 - 김현화 외

716. 심플 스토리 - 잉고 슐체

717. 더 탑 - 온대호

718. 1984 - 조지 오웰

719. 세한도 - 박청상

720. 통조림공장 골목 - 존 스타인 벡

721. 황금구슬 - 미셸 투르니에

722.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 대리언 리더

723. 고령화 가족 - 천명관

724. 풍경과 상처 - 김훈

725. 전봉건 시전집 - 전봉건

726. 마지막 숨결 - 로맹가리

 

*소장책 권수 - 13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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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4-01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장책 권수를 정확하게 정리하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
저도 정리하는 책이 많아서, 그렇게 책이 많을 것 같지는 않은데, 도전해보고 싶네요.

하루에 한 권 읽고, 한 권 리뷰 쓰기. 계획을 저도 3월에 세웠던지라 (저는 심지어 한 권 아니고, 두 권 -_-;;) 읽는건 그렇다쳐도, 한번 읽고 리뷰 쓰지 못하겠는 책들도 있었던지라 쉽지가 않더군요.

소장권수와 책 들고남은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안녕반짝 2010-04-12 13:14   좋아요 0 | URL
엑셀로 정리하면 편하겠지만, 전 그냥 리스트를 홈피에 올려놓고 책이 오거나 나갈때마다 수정 한답니다. 전 책 리스트 1년에 한 번 정리하거든요! 2년 전에 책장을 보면서 일일이 타이핑 해서 만들어 놓은 리스트에 책 들어오고 나간 걸 수정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걸 한 번 정리하려니 3일 걸리던데,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매일 매일 수정한답니다!

저도 올해는 한 권씩 읽고 한 편씩 리뷰를 쓰려고 하는데, 묵직한 책들을 만나면 그게 불가능 하더라구요. 전 읽다만 장편 읽자고 이달에 계획을 세워서 <아리랑> 읽고 있는데, 이런 책들은 하루에 한 권 읽기가 힘들어요. 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책 내용을 보면 쉬면서 읽지 않으면 정말 불가능 하더라구요.
 
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이별>은 오래 전 지인에게 받은 책이었다. 이 책을 받을 당시만 해도 이별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책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리고 이 책을 꺼내야 할 일이 닥쳤음에도 마주하기가 겁났다.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이별을 잘 견디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고, 다시는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언가 위로가 필요했다. 그제야 이 책을 꺼내면서 나의 마음이 달래지 길 바랐고, 한 구절 한 구절 소중하게 읽으면서 이별의 아픔을 견디고자 했다. 실로 많은 도움이 되었고,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이별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서정주 시인의 <신부>에 나오는 신부처럼, 이별을 맞닥뜨리면 '모든 감정을 조용히 내려놓은 채, 날마다 낡아가는 것. 그것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나 역시 이별을 한 후에 내가 낡아가기를 기다렸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 될 거라 생각했다. 그 과정이 힘겹다는 것은 알았지만 견디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삶에서 익숙한 감정에 속함에도, 우리 정서에 투영된 이별은 늘 의젓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저자는 이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애도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고, ''애도 작업'은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뿐 아니라 슬픔과 관련된 감정의 단계를 거치면서 심리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통틀어 이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에겐 이 책을 읽는 것이 애도 작업의 한 과정이었다.

 

  이별을 잘 하지 못하고 묵혀 둘 때, '새롭게 만나는 이별 앞에서 더 깊이 절망하고 더 오래 슬퍼하며', '애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모든 감정이 일시에 솟구쳐 오르는 것에 대해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별을 외면하고 지나간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래왔고, 또 다시 그 일을 반복하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 책과의 만남은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이게 했다. 내가 닥친 이별을 잘 이겨내지 못한다면 얼마의 시간동안 절망해야 하며, 내 자신을 방치해야 하는지 두려웠다. 저자가 말한 이별은 여러 가지여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에 초점을 맞춰 읽어나갔다. 저자의 경험과 많은 책들의 인용, 심리학자들의 연구 등 많은 사례로 이별과 애도 작업에 대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저자도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애도 작업에 대해 깨달아가고, 치유해 가는 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알고 나자 나를 엄습하는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가 밀려왔다.

 

  저자는 경험과 많은 사례들로 좋은 이별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는 한 편, 꼭지의 마무리에는 이별 레시피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그 모든 방법이 나에게 맞는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방법들이었기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많았다.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해주는 방법과 직접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 각자의 상황에 맞게 골라서 대입하면 될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독서와 음악듣기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고 있어서 어느 정도 이별을 받아들이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별'이라는 포괄적인 의미 안에서 내게 맞는 상황만 찾으려고 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광범위한 이별에 관한 나열 때문인지 이 책이 온전히 내게 들어왔다고 할 수 없었다. 무언가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분명 위로가 되고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큰 울림은 없었다.

 

  어쩌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의 실패나 슬픔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경험을 살렸기 때문에 더 와 닿는 것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내면의 어둠을 더 많이 봐버려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독서는 도피하기 위한 방책의 의미가 더 짙은데, 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많은 부분 극복하고, 많은 독자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었기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무엇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아마도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내 마음이 온전히 위로되고, 슬픔이 싹 가시길 바라는 넘치는 기대 때문이었나 보다. 고통을 맞이하고 이겨내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고, 저자 또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이별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이 책의 모서리를 보면 메모지가 수십 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움이 되겠다 싶은 부분과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체크해 두다 보니, 책을 덮었을 때는 온통 메모지 투성이었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이 책이 필요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이별과 순리적인 이별에 당면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이 책을 꺼내서 도움을 받는다면 지금과 다른 울림이 다가 올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별한 후에도 충분한 애도 작업을 통해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발견만으로도 내가 겪고 있는 이 감정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제대로 애도하지 않고 억지로 꿰어 맞추듯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 책에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랜 시간 슬픔을 담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애도 작업 중에 있다. 저자가 알려 준 방법들도 시도해 보고,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생각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결코 혼자가 아니며 이런 감정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과 시간을 충분히 갖고 내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마음을 많이 울리지 못해서 아쉬웠다는 푸념이 뒤섞여도, 이 책을 통해 애도 과정에 대한 개념을 깨닫지 못했다면 나의 일상은 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애도 작업이 여전히 필요한 시점이므로 건강한 방법으로 이겨내길 바랄 뿐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인 좋은 이별일 것이고, 그 과정 뒤에는 좋은 날들이 올 거라 믿기 때문에 오늘도 억지로라도 용기를 쥐어 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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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의 지붕
마보드 세라지 지음, 민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기분을 바꾸고 싶을 때는 마음과 반대인 것들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가령 기분이 우울하다면, 밝은 곳을 산책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고 싶어 한다. 그런 억지가 통하지 않을 때는 차라리 현재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방법을 통해 나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며 한껏 만끽한 뒤 빠져나오곤 한다. 요즘 나의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아 퇴근 후에는 오로지 독서에만 집중하고 있다. 현실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독서에 열중한다는 것을 앎에도 쉽게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우울한 기분에서 빠져 나올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중에 내게 다가온 책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테헤란의 지붕>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장소설이라는 말에 혹해서 읽게 된 책인데, 성장 소설 안에 국한되는 그 이상의 것을 만나고 말았다. 성장통의 아픔과 함께 정치적 상황까지 맞물린 암울함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었다. 암울함만 드러냈대도 전혀 탓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을 내세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함은 물론 역사의 현장을 처절할 정도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몸부림을 쳐봐도 그들이 마주한 현실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열일곱 살 소년 파샤는 단짝 친구인 아메드와 지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테헤란에서는 무더위를 피해 지붕에서 자는 것이 흔하다고 한다. 해마다 지붕에서 떨어진 사망자가 급증해도 그들에게 지붕은 또 다른 삶의 공간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희로애락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파샤와 아메드가 매일 밤 만나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곳도, 짝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만나는 곳도 지붕이었다. 그만큼 테헤란에서는 지붕이라는 공간이 집이라는 한정된 곳을 벗어난 오픈 된 공간으로써, 모든 것을 바라보며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파샤조차도 지붕에서 보내게 될 수많은 시간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울지 알지 못할 정도로, 공간의 특이성과 삶의 흐름은 이상하리만치 맞물리고 있었다.

 

  파샤가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소설의 배경이 된 1970년대의 이란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이란은 친미 정권 팔레비 왕조가 비밀경찰 사바크를 앞세워 반정부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던 암흑의 시기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인권 탄압이 있었음에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파샤의 동네에서, 테헤란 대학 정치학과에 재학 중인 '닥터'라고 불리는 청년의 죽음이었다. 현 정권에 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시바크에게 붙잡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사건은 파샤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닥터가 잡혀 가던 날, 지붕위에서 그의 약혼녀 집에 있는 닥터를 바라봄으로써 경찰에게 알려줬다는 죄책감이 파샤를 괴롭혔다. 닥터가 잡혀가기 오래전부터 약혼녀 자리를 짝사랑해 온 파샤는 많은 감정이 내면을 흔들고 있었음에도, 닥터를 존경하고 좋아했기에 자리에게 어떠한 고백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처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닥터가 잡히기 전, 파샤는 아메드와 그의 여자 친구 파히메의 도움으로 자리의 집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치 꿈을 꾸듯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에 파샤는 닥터가 죽은 뒤 미안함과 죄책감이 날로 커져갈 수밖에 없었고, 늘 꿈에서 닥터를 만나 모든 것을 고백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터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힘겨웠는데, 닥터의 부모님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무엇보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자리가 분신자살 하는 것까지 봐야 했다.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하던 자리가 그런 일을 자행했다는 것은 파샤에게 닥터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책의 시작은 파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어떻게 조각난 기억을 더듬어 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의 중간 중간 병원에서의 파샤의 모습을 따로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울함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 기억의 조각은 자리가 분신자살 하던 날로 맞춰진다. 그러나 기억을 되찾은 파샤에게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를 짝사랑했던 애틋한 마음, 닥터의 죽음, 거기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리의 죽음까지 열일곱 살 소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들이었다. 고통의 드러남은 처절했고, 온전히 독자에게 전해져 함께 울며 가슴 아파 하며 팍팍하고 부당한 현실에 애통해 했다. 그럼에도 자리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고통이었다. 힘겹게 이어 온 실이 툭 끊기듯, 자리의 죽음은 파샤에게 앞으로 남아 있을 삶의 희망을 꺾을 만큼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 파샤에게, 힘겨운 일을 당한 닥터의 부모님이나, 자리를 잃은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동네 이웃이었다. 삶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움츠러들면서도 끈끈해져 갔고, 그 안에서 인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파샤가 닥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피를 흘렸던 곳에 장미나무를 심어 줄 때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 돌봐 주었고, 당면한 현실에 울분을 토할 때마다 자상한 아버지는 파샤에게 에둘러서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또한 파샤에게 아메드가 가장 큰 힘이 될 정도로 둘의 우정은 깊었고,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러울 만큼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 것이 감사했다.

 

  그런 와중에도 소설과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 준 것은 아메드였다. 언제 어디서나 익살로 사람들을 웃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아메드를 보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좀 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그 나이에 걸맞은 고민을 하면서 즐겁게 보내면 좋으련만, 보통 어른들이 겪기에도 힘에 부치는 일들은 그들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런 현실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저자는 너무나 글로 잘 풀어내서 가슴이 절절하면서도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사건과 내면이 촘촘히 엮어가는 과정이 너무도 충실해 대충대충 읽을 수 없었고, 마치 파샤가 된 기분이 들 정도로 뛰어난 묘사와 표현력은 내가 당면한 절망감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파샤가 바라는 그 한 가지는 독자의 내면을 뚫고 올라와 나의 희망이 될 정도였다. 목숨을 내 놓아도 아깝지 않을 자리를 다시 찾아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 하지만 현실은 파샤의 꿈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소설이 끝나 버렸다면 절절한 가슴을 부여안은 채 몇날 며칠을 마음 아파했을지 모르겠다. 암울하고 팍팍했던 역사의 한 시기를 읽느라 한껏 늙어버린 기분이 들 정도로 절망감을 맛보았기에, 저자가 파샤에게 준 선물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것은 파샤에게 희망을 넘어 앞으로 펼쳐질 캄캄한 인생에 한 줄기 햇살을 비춰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기치 못한 반전을 바라보며 그동안 촘촘히 엮어온 흐름에 약간의 구멍이 생겨 버린 것 같다고 못된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며칠 후,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잠시 파샤에게 가졌던 냉소가 얼마나 나쁜 마음이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지, 내 경험과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저자가 파샤에게 준 선물은 나에게도 큰 희망이 되었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이 같이 싹트고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셈이다. 이런 많은 깨달음에도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로 기억하고 싶다. 뜨거웠던 청춘을 상징하는 사랑. 그 사랑이 온전히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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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꼬마 니콜라 세트 - 전3권 앙코르 꼬마 니콜라
르네 고시니 지음, 장 자크 상뻬 그림, 이세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꼬마 니콜라 시리즈를 순서대로 만나지 못해 뒤죽박죽되고 말았지만, <앙코르 꼬마 니콜라>로 인해 대장정이 마무리 되었다. 시리즈의 첫 책인 <꼬마 니콜라>를 해적판으로 먼저 만나, 제대로 된 책으로 다시 구입했다. 그 책만 다시 읽으면 <꼬마 니콜라> 시리즈는 온전히 틀이 갖춰지는 것 같다. 순서대로 읽지 않아서 조금 헛갈리긴 해도, 어느 책에서건 니콜라의 모습은 한결 같아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앙코르 꼬마 니콜라>에서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고, 니콜라는 변함이 없는데도 내게 닿은 마지막 시리즈라서 그런지 괜히 성숙해진 느낌이 들곤 했다.

 

  다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앙코르 꼬마 니콜라>에서도 니콜라는 익살맞고, 철없고, 장난꾸러기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니콜라의 주변 상황에 익숙해서 인지 학교, 집,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변인물도 이쯤 되면 이름과 특징을 외울 수 있었고, 어느 장소에 가면 무엇이 있고, 어떤 이가 등장하면 대충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니콜라를 비롯한 책 속의 등장인물들과 배경이 되는 곳이 무척 친숙하게 느껴져, 책을 덮을 때는 아쉬움이 일었다.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니콜라와 주변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음에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나를 엄습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만나온 니콜라와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지 내키는 대로 책장에서 꺼내 보면 되지만, 어떤 책을 꺼내 보아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흥분과 재미는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 같다. 얼른 읽어 버리고 싶으면서도 아껴 읽고 싶은 모순이 존재하는 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한 권씩 정독하며 읽었는데, 니콜라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주변의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푹 빠지게 된다. 니콜라다움에 웃고, 니콜라와 친구들의 어쩔 수 없는 익살에 황당해 하고, 주변 어른들의 진부함에 괜히 통쾌해 지기도 했다. 니콜라와 친구들이 있으면 어디서나 말썽이 일어났고, 그들이 학교를 벗어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학교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이라도 할라치면 골치 아파 하는 어른들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천진난만한 아이들에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지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그런 아이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걸러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해 거침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웃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헛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어른 나름대로 가진 생각의 틀에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어른들이 이상해 보였다. 나도 그런 유년시절을 지나왔고, 어른인 현재를 살아가고 있기에 두 상황이 모두 수긍이 가면서도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와 친구들의 시선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유년시절에 터트리지 못한 억압을 대신 터트려 준다는 거창한 의미가 포함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이 어떠한 협박을 해도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떼를 쓰는 모습이 당차보이면서도 어린애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맘껏 뛰어놀고, 자신들이 가진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이웃, 선생님과 또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엉켜 지내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듯 독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부러움이 일기도 했다. 또래집단에서의 자존감도 내세우고, 늘 싸우고 비방하다가도 금세 친해지는 모습도 그들다웠다. 니콜라가 친구들 중에서도 먹보인 알세스트를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빼뜨리지 않고, 잘난 척 하는 아냥이 밉다고 하면서도 그의 익살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조차도 보기 좋았다.

 

  르네 고시니의 스토리 속에 인물들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그런 인물들에 독특한 매력을 집어넣어 가상의 인물로 창조해 낸 상페의 만남은 자꾸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다. 글로만 그들을 상상하려 했다고 생각하면 무척 밋밋했을 이야기가, 상페의 데생으로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 변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으며, 언제 어느 때 들여다보아도 그대로 간직되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책 속의 어른들도 언제나 주어진 삶에 진부해 하면서도 아이들의 시선으로 비춰지는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 오히려 안심이 되곤 한다. 그들이 변하는 것보다 현재의 자리에서 생활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 더 즐거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니콜라 시리즈에 어떠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줄거리를 읊어댄다고 해서 그들의 모습을 다 드러낼 수도 없거니와 니콜라 시리즈를 읽으면서 수많은 이야기가 뒤엉켜 두루뭉술한 분위기밖에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일상생활 도중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기도 했고, 이런 모습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도리어 힘이 나곤 한다. 책을 펼쳤을 때 변함없는 그들처럼, 내 마음 속에도 그들의 모습은 책 속에서 만난 모습 그대로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에게 희로애락을 선사해준 니콜라 시리즈가 존재해 준다는 것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이 마음이 오래 간직되어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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