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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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정작 아는 것은 없고, 막상 철학에 관한 책이라도 볼라치면 이해가 되지 않아 금방 책을 덮어 버리곤 한다. 문학에 편중되어 있는 독서에 조금이나마 윤활유 역할을 하고자 종종 인문서적을 펼치는데, 마주할 때마다 지식의 한계를 느끼곤 한다. 지식의 한계를 대학 공부를 통해서 조금 채워 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해 그 시도는 실패했지만,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요즘에서야 스스로 지식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순한 정의임에도 이제야 깨닫는 나는 배움에 있어서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낀다.

 

  <메두사의 시선>을 마주할 때만 해도 약간의 희망이 있었다. 내가 자신 없어 하는 인문에 관한 책이었지만, 책도 그다지 두껍지 않아 읽어볼만 하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런 마음으로 초반을 읽어 나갈 때는 알듯 말듯 한 난해함 때문에 이 책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한 페이지를 읽을 때도 평소의 독서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오랜시간 정독하며 책을 읽었음에도 여전히 숨이 가파 오른다. 신화와 철학과 과학이 버무려진 이 책은 웬만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완전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지식이 없었을 뿐더러, 철학과 과학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 하리. 한마디로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책임에도 묘한 매력으로 책을 끝까지 놓을 수도 없었다.

 

  인문서적에 관해서는 개인적인 분류가 뒤따른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정독하며 생각하며 읽으면 이해가 되는 책,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책으로 분류한다. <메두사의 시선>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중간에 속한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루에 조금씩 정독하면서 읽어 나갔고, 어떤 날은 저자의 글이 흥미롭게 다가오다가도 어떤 날은 언어의 흩어짐을 경험하기도 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이 책을 이해하거나,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읽기였다. 그러나 신화를 바탕으로 철학과 과학을 적절하게 요리할 줄 아는 저자의 역량을 느꼈고, 그 세계가 무한히 뻗어 방대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라면 제대로 아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이번 기회를 통해 안다는 의미로 재미있게 접했다. 신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포된 메시지를 끄집어 내 다른 학문과 연결 짓는 포용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재미나게 읽던 그리스 신화마저 엉켜들어갔고, 신화에서 뻗어나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저자 나름의 사유까지 이해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다. 먼저 그리스 신화라도 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저자는 신화를 읽으면서 동식물 기록이 담긴 자연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면 재미와 의미가 배가될 것이라고 했다. 둘 모두 변화와 변신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도 왠지 신화 읽기가 식상하게 느껴질 것 같았는데, 아이들에게는 복잡하게 얽힌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변주곡처럼 들리는 반면, 삶에 틀에 습관화된 의식 때문에 어른들은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어쩌면 나의 내면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원. 결국 신화도, 철학과 과학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건져낸 것이 없다는 허망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케케묵은 이야기도 아니고, 밀접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끌어내는 많은 예시들과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식견은 광활한 우주 가운데 미미한 존재로 자리 잡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내 자신의 존재가치부터, 존재 안에 내포된 수없이 뻗어나가는 의미와 가능성을 조명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글의 특징상 많은 인용문이 들어가고 주석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인용문을 그렇다 치더라도 주석을 배제한 채, 부록으로 설명을 덧붙여서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책에 주석까지 주르륵 달려 있었다면, 안 그래도 글이 어려워 쭉쭉 읽지 못하는데 주석을 읽느라 지쳐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이 철학 에세이라고 말하면서 지식으로 쓰는 글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지식이 없는 내가 읽는데 힘이 들었는지 몰라도, '사건의 역사'의 서술을 하지 않고 저자가 의도한 글쓰기로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것을 '역사'를 쓰는 한 방법일 수 있다고 했고, 세계에 대한 관심, 개념, 분석, 유비, 은유 등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성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었고 핵심 메시지다. 통째로 아우르지 못하고, 글쓰기의 방법에서 헤매버려 저자의 메시지를 제대로 통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만난 덕에 아주 미미하게나마 이런 책을 소화해 나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인문학의 매력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게 해 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넣어 리뷰를 쓸 날을 기대해보며, 힘겨웠지만 흥미로웠던 <메두사의 시선>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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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 튜더, 인형의 집 - 마법 같은 작은 세상
해리 데이비스 지음, 공경희 옮김, 제이 폴 사진 / 윌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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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오자마자 청소, 빨래,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등등 대대적인 집 청소를 했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힘들었음에도 되돌아보니 깨끗해진 집 때문에 마음이 뿌듯해졌다(곧 조카 네 명이 집안을 휩쓸고 돌아다녔지만.). 내 방으로 돌아와 책 정리를 간단하게 한 후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을 켜봤자 블로그와 온라인 서점 밖에 둘러 볼 곳이 없기에 바로 컴퓨터를 끄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내 블로그 음악이 나를 이끌었다. 잔잔한 피아노곡들로 이루어진 배경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제야 쌓였던 피로가 풀어진 듯 했다. 내친김에 이런 분위기에서 책이나 읽자 해서 꺼낸 책이 오늘 도착한 <타샤 튜더, 인형의 집>이었다. 출간 소식을 좀 늦게 알아 이제야 내 책장으로 들인 책인데, 지금 분위기에서 펼치면 제격일 것 같았다.

 

  나의 예감을 꿰뚫듯, 오랜만에 찾아온 타샤 할머니의 책은 고적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귀에 감기는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차분해지는 마음을 향해 타샤 할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는 인형들의 세상이 들어왔다. 타샤 할머니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에 관해 조금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타샤 할머니가 만든 인형의 세계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워낙 다방면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재주가 있는 타샤 할머니라서, 이렇게 분권으로 책이 나올 정도다. 타샤 할머니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거니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타샤 할머니는 어릴 때 엄마로부터 선물 받은 인형을 통해 작고 오밀조밀한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타샤 할머니가 직접 만든 인형을 통해 자녀들과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음은 물론,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도 교감이 되었다. 타샤 할머니는 정교하기 짝이 없는 인형들의 세계를 즐겁기 때문에 만들어 갔다고 했는데,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남자 인형 새디어스를 만들고, 여자 인형 멜리사를 만든 후 결혼을 시키면서 또 다른 세계의 포문을 열었다. 인형들의 결혼식은 <라이프>지에 실릴 만큼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인형의 집 안주인은 엠마다. 엠마라는 인형을 만들고 나서 돌하우스의 안주인이 바뀐 것이다. 타샤 할머니의 분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쏙 빼닮은 엠마는, 타샤 할머니의 결혼생활에 대한 안타까움과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잠시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타샤 할머니는 네 자녀를 두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진 못했다.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이혼을 한 뒤 혼자서 네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냈다. 그래서인지 멜리사가 안주인에서 물러난 것도 타샤 할머니의 분신인 엠마가 새디어스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에서 타샤 할머니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타샤 할머니에게 남편의 빈자리가 흠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독특한 삶에 매료되어 살아왔다. 엠마와 새디어스를 통해서 결혼생활의 행복을 갈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인형들의 세계임에도 타샤 할머니는 현실을 반영한 또 다른 세계의 이면을 보여준 셈이었다.

 

  인형들의 집을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실재인지, 미니어처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그만큼 타샤 할머니의 손길이 묻어난 작은 세계는 철저히 타샤 할머니의 집과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고, 타샤 할머니의 손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간 결과였다. 엠마와 새디어스가 생활하고 있는 집은 코기 코티지를 축소해 놓은 것이었다. 부엌, 침실, 서재, 염소 헛간 등 코기 코티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의 집은 타샤 할머니의 단순한 취미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애정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 수 없었을 것이고, 완벽한 인형의 집이 탄생하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인형의 집의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꼼꼼히 둘러보면서 감탄밖에 터트릴 것이 없었다. 또 인형들의 세계지만 무척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엠마와 새디어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기자기 하면서도 장인들의 정성이 빚어낸 분위기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타샤 할머니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인형의 집으로 새로 태어난 또 다른 세계는 그렇게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타샤 할머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쳤기에 이런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샤 튜더, 인형의 집>을 다 둘러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평소의 속도라면 더 빨리 읽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타샤 할머니의 흔적을 대충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고, 인형의 집을 구경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했다. 그 세계에서 엠마와 새디어스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바랐다. 타샤 할머니는 더 이상 뵐 수 없지만, 할머니의 흔적이 배어있는 인형의 집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색다른 세계를 열어주었으면 했다. 늘 그렇듯, 타샤 할머니의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그리움이 짙게 묻어난다. 그래도 타샤 할머니가 남겨준 흔적을 이렇게나마 조우할 수 있으니 그것에 감사하면서, 오늘 밤에는 인형의 세계의 행복감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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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서관 기행 - 오래된 서가에 기대 앉아 시대의 지성과 호흡하다
유종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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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할 말이 많아진다.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거의 등산과 다름없는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다. 도대체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건지, 올 테면 와보라는 심산인지 한 번 오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곤 한다. 최근 들어 도서관 옆에 18층 아파트가 들어섰는데도 3층인 도서관이 더 높은 것을 보고, 또한번 도서관의 위치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리적인 위치와 접근성에 있어서는 많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게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에 대한 평가다. 지방 소도시의 도서관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세워질 도서관에 대해서는 도서관과 시민이 친해지게 만들어주는 노력이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간절하게 일곤 한다.

 

  도서관의 지리적인 위치와 내 방에 소장된 책들 때문에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새삼스레 다시 도서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세계 도서관 기행>이란 책 때문이었다. 책을 펼쳐들기 전까지 세계의 멋진 도서관의 경관을 중점으로 다룬 책이라 생각했었다. 각 나라의 도서관의 독특한 풍경들을 한 권의 책에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오산이었다. 현재 국회도서관 관장직을 맡고 있는 저자는 세계의 도서관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들을 최선을 다해 전해주었다. 세계의 도서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감명 깊게 다가온 적이 없을 정도로, 각 나라의 역사가 들어있는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 마주한 도서관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이 도서관의 탄생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었다. 건물부터 보관하고 있는 장서의 양까지 방대하기 그지없는 이 도서관은 역사의 한 토막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성경을 통해 배웠던 인물들의 등장과 에피소드를 도서관을 통해 만날 수 있어서인지 첫 만남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여행한 도서관의 순서는 책의 순서와 좀 다르지만, 이집트를 거쳐 유럽의 도서관을 향해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거치는 여정이었다. 대륙별로 구분을 해 놓아서인지 동선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고, 각 나라별의 도서관의 특징을 비교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집트,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등 대표적인 도서관을 보면서 느낀 점은 크기부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열람실 위주의 국내의 도서관과는 달리, 희귀본부터 각 나라의 중요 문헌까지 훑어볼 수 있는 자료의 양은 숫자로 표기 해줘도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만큼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단순하게 지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책을 빌리고, 공부하러 간다는 개념을 떠나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혀 있는 도서관이라는 위치가 생각보다 큰 것에 놀랐다. 각 나라의 유명 인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인생을 배우고, 현재의 위치를 만들어 준 곳이 도서관이었다는 자랑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도서관이 단순히 책이 소장 되어 있는 곳의 의미로만 생각되어 지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나라의 고위 지도자들이 도서관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 도서관의 질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과연 저런 곳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포근한 분위기의 건축물들이 많았다. 물론 그 나라의 도서관이 다 그렇게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대표적인 도서관을 소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서관에 대해 그런 애정을 쏟는다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수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시민들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며, 세계에 펼쳐진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겉과 속이 모두 꽉 찬 도서관들을 보면서 직접 가서 구경하고 싶어 괜히 몸부림이 쳐졌다.

 

  저자는 서문에 국내 최초로 러시아 도서관을 조명했다는 것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러시아 도서관에 관한 소개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도서관을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설다. 이 책에서 상당부분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는 러시아 도서관은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위용을 자랑하는 도서관이 여럿 되었다. 19세기 세계 문학을 이끌었던 쟁쟁한 작가들이 대거 배출된 나라인 만큼 책을 사랑하고, 도서관에 관한 애정이 남달랐다. 예술도서관이 있는 것이 독특했고, 모스크바 대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이 도서관을 비롯해 유명인사 배출과 대학의 우수함을 자랑하며 경쟁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해서인지 러시아 도서관에 관한 소개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 같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톨스토이의 문학이 나와 잘 맞지 않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예술적인 면모와 정치사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도서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넘쳐났다. 도서관 기행이라고 해서 단순하게 건물을 둘러보고, 장서를 파악하며, 어떤 희귀본이 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에 도서관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주하고, 애정을 쏟고, 지식을 채워가는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마치 세계사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듯, 도서관에서는 지나온 역사가 저장되어 있었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 대해서도 차곡차곡 정보를 쌓아가고 있었다.

 

  이렇듯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고, 국내에는 어떤 도서관이 있으며 어떠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비교할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국내에도 조금씩 움트고 있는 도서관에 관한 관심이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게 했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지식을 나눌 수 있는 도서관이 많아지길 진정으로 바랐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여러 나라에 퍼져 있는 우리의 귀중한 고서들이었다. 약탈과 빼돌림 등 여러 경유로 흩어진 귀중한 서적들은 세계 각국에 퍼져 있었고, 그것들을 다시 되찾아 오기란 무척 힘들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과 프랑스에 흘러들어간 서적들이 가장 안타까웠고, 국보급의 책들이 그런 과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씁쓸했다.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가 없듯이, 어느 나라나 그런 고충은 잠재해 있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그 나라의 책들과 문자와 언어를 가장 먼저 없애려는 것처럼, 그런 노력까지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저런 도서관이 없다는 것과 내 주변에 훌륭한 도서관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하지만 도서관 구경에서 끝나지 않고 그 나라의 흔적을 둘러보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흥미롭고 뿌듯한 경험이었다. 도서관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고 지식을 갈구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장서 수는 1.18권이라고 한다. 내 방에 쌓여 있는 책들이 1인당 장서수를 늘려주길 바랐고,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라고 더 이상 한숨짓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책을 읽고 지식을 탐하는 순간에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쓰이고 있다. 작은 행위로 인해 보이지 않는 지식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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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 - 박수현 교육소설
박수현 지음 / 다산에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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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터라 <세 친구>가 도착하자 책장에 꽂을 겨를도 없이 바로 펼쳐 들었다. 성장소설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겉표지와 제목을 보고 있자니, 괜히 흐뭇하면서도 '교육소설'이라는 문구에 경계태세를 갖췄다.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인데, 거기다 교육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니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재미는 재미대로 못 느끼고, 교훈은 교훈대로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앞선 걱정이었다. 그래도 소설이 주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어 '교육소설'이라는 문구를 배제하고 책을 펼쳐 들었고, 한 호흡에 책을 읽어 버렸다.

 

  책을 읽고 나서 주인공인 인서, 창희, 정우와 같은 학년인 조카에게 책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중 2가 된 조카에게 거창한 말을 건네며 책을 주기보다 책을 읽고 스스로 느껴가도록 유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성장 중인 조카에게 분명 유익한 소설이 될 거라는 생각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을 건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 친구>를 읽고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고, 책을 덮은 후에도 책의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자잘한 사건들, 그 안에서 오고간 대화, 조금씩 느껴가고 실천해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애 어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갑작스런 시련이 닥치면 누구나 마음의 방어벽을 치게 마련이고 방황하고 된다. 특히나 성장 중인 아이들에게 어른조차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닥치면 평생 마음의 상처를 갖게 된다는 것을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중학교 2학년인 인서에게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과 엄마와의 헤어짐, 이모와 함께 살게 된 환경들이 기꺼울 리 없었다. 이 상처가 풀리지 않는다면, 인서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거란 걱정이 앞섰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빠를 잃었다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엄마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버렸고, 친하지도 않은 이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러웠고, 자신에게 닥친 변화가 너무나 버거웠다.

 

  이모 집으로 옮기던 날, 이모는 인서에게 자잘한 규칙들을 알려주면서 아무리 곤란한 이야기라도 털어놓으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 이모에게 손만 뻗으면 인서의 마음을 풀어 놓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인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더 감추고 움츠러들고 싶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엄마조차 그렇게 허망하게 외국으로 떠나 버린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인서의 곁에는 모범생인 정우와 뚱뚱하고 잠만 자는 창희가 있었다. 그 친구들에게 조금 기대면 좋으련만. 인서의 틀어져 버린 마음은 그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기 급급했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정우에게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자는 제안을 하고, 인서를 생각해서 정우는 실행에 옮긴다. 그러다 오토바이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우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가출을 해 버린다.

 

  잠만 자고 먹을 것만 밝히는 창희는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음에도, 인서는 그런 창희를 자신의 짜증으로 상처를 준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꼬이고 얽혀 들어갈 때,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협박 문자를 보내 자신을 찾아온 정우를 데리고 이모에게 자초지종을 말한다. 이모는 인서와 정우가 일주일동안 고민한 일을 몇 시간 만에 해결해줬고, 그때부터 조금씩 인서의 마음에는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을 내미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 현재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며 알아가려는 기미가 보였다.

 

  인서에게 이모의 존재는 그때부터 새롭게 두각을 드러낸다. 인서가 삶에 대해, 고통에 대해 질문을 할 때도 차분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인서가 도움의 손길을 뻗치면 언제든지 도움을 주었다. 인서는 그동안 이모가 자신을 방치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모는 인서가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었다. 엉망인 자신의 방을 이모와 함께 치우며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된 것도, 인도에 있는 아빠가 후원했다는 아이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습관에 대해 중요한 이치를 깨달은 것도, 엄마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이해하게 된 것도 이모 덕분이었다. 정우와 창희를 통해서 사회의 따뜻함과 팍팍함도 경험하게 된다. 창희한테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상처를 주고 제대로 사과조차 못했는데도, 창희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할머니와 손자를 돕게 된다.

 

  그 일에 동참하게 하게 되면서 알바도 해보고,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돕고, 꼭 돈이 아니더라도 도울 수 있다는 방법을 알게 되며, 사이가 나빴던 창희와 정우도 사이가 좋아진다. 세 아이는 사건을 통해 경험하게 되고, 경험을 통한 깨달음으로 서로에게 부족한 것들을 메워가기 시작한다. 모범생인 정우는 즐겁게 공부하는 방법을 인서에게 배우고, 창희는 정우를 통해 공부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인서는 두 친구들과 이모를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고통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모가 정말 힘들었을 때, 자신을 사랑하기로 한 다음에 다시 일어섰다고 했던 것처럼, 인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존감을 높여 가면서 서서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간 되었다고 한다. <습관>도 중요한 교훈이 되어 주었지만, 한정된 제목으로 가두기에는 너무 많은 교훈이 들어 있어 <세 친구>라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아이들이 깨달은 것을 실천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 스스로 내딛는 모습을 보며 어른이면서도 많이 부끄러웠다. 하나의 습관을 들이지도 못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며,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모습이 현재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주인공이 청소년이라는 것도, 교육소설이라는 타이틀도 나를 들여다보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신의 꿈을 찾아 나아가는 것처럼, 내가 가진 꿈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노력이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용기를 안겨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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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세 도시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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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클레지오는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알게 된 작가다. 개인적으로 노벨문학상에 큰 의의를 두지 않은 편이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터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스스로 채우기도 전에 지인으로부터 르 클레지오의 책을 선물 받았다. 그 가운데 <성스러운 세 도시>를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무척 얇은 책이라고 얕보았다가 고역을 치르고 말았다. 100페이지가 안 되는 책이었기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었다. 무수히 흩어져 버린 언어를 부여잡을 길이 없어 책을 다 읽고도, 도무지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겠노라 다짐하며 책꽂이에 도로 꽂아 버렸다.

 

  책장에 묵혀 놓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펼쳐들었을 때, 오히려 득이 되는 책을 만나게 된다. <성스러운 세 도시>와의 첫 만남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시간에 흐름에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책을 묵혀 두었다. 이미 한 번 읽은 뒤라 다시 도전해 볼 양으로 6개월 쯤 지난 후에 책을 다시 펼쳐 들었지만 절반 정도 읽다가 다시 덮어 버렸다. 그렇게 책이 내게 온지 1년 쯤 되어 다시 펼쳤을 때는 세 번째로 만나는 셈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째 만남에서도 이 작품과의 조우는 실패로 끝났다. 줄거리를 가늠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한 문장에서도 의미는 수십 개로 갈렸다. 그런 문장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은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총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성스러운 세 도시>는 지명도 낯선 샨카, 딕스카칼, 슌폼을 향해가는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지명과 묘사를 통해서 문명과 닿지 않는 곳이라는 것과 남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역자 후기를 보고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짐을 알았지만, 그 이상을 얻어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신성의 언어를 아름답게 흩뿌려놓는 작가'라는 찬사도 내게는 낯설 정도로 언어의 흩어짐만 경험한 셈이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무수히 뻗어 있는 가지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저자가 작품 속에 녹여놓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꼭 그 의미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독자가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도 여전히 무리였다.

 

  차라리 그의 문장을 이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문장 자체에 의의를 두고 읽어간다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문장을 읽어보면 묘사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다. 조금씩 마음을 뺏겨 몇 문장을 더 읽어나가다 보면 평소에 문학을 읽으며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이 소설의 매력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를 향하는 지 알 수 없었고, 문명을 멀리한 그들과 나는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숭고함과 신성함을 세상에 찌든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으로 읽어야 이 소설이 온전히 들어올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는 생각이었고, 세 번째의 만남에서도 큰 수확을 얻지 못해 여전히 남아 있는 아쉬움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문장을 느끼고 줄거리를 이해하며 따라가기보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다보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지쳐버릴 것이다. 때로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보다 만남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언어의 흩어짐으로 온전한 만남을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언어의 흩어짐이 수려한 흩뿌려짐이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있음에 희망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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