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세 도시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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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클레지오는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알게 된 작가다. 개인적으로 노벨문학상에 큰 의의를 두지 않은 편이지만, 이목이 집중되는 터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스스로 채우기도 전에 지인으로부터 르 클레지오의 책을 선물 받았다. 그 가운데 <성스러운 세 도시>를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무척 얇은 책이라고 얕보았다가 고역을 치르고 말았다. 100페이지가 안 되는 책이었기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었다. 무수히 흩어져 버린 언어를 부여잡을 길이 없어 책을 다 읽고도, 도무지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겠노라 다짐하며 책꽂이에 도로 꽂아 버렸다.

 

  책장에 묵혀 놓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펼쳐들었을 때, 오히려 득이 되는 책을 만나게 된다. <성스러운 세 도시>와의 첫 만남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시간에 흐름에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책을 묵혀 두었다. 이미 한 번 읽은 뒤라 다시 도전해 볼 양으로 6개월 쯤 지난 후에 책을 다시 펼쳐 들었지만 절반 정도 읽다가 다시 덮어 버렸다. 그렇게 책이 내게 온지 1년 쯤 되어 다시 펼쳤을 때는 세 번째로 만나는 셈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째 만남에서도 이 작품과의 조우는 실패로 끝났다. 줄거리를 가늠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한 문장에서도 의미는 수십 개로 갈렸다. 그런 문장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은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총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성스러운 세 도시>는 지명도 낯선 샨카, 딕스카칼, 슌폼을 향해가는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지명과 묘사를 통해서 문명과 닿지 않는 곳이라는 것과 남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역자 후기를 보고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짐을 알았지만, 그 이상을 얻어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신성의 언어를 아름답게 흩뿌려놓는 작가'라는 찬사도 내게는 낯설 정도로 언어의 흩어짐만 경험한 셈이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무수히 뻗어 있는 가지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저자가 작품 속에 녹여놓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꼭 그 의미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독자가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도 여전히 무리였다.

 

  차라리 그의 문장을 이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문장 자체에 의의를 두고 읽어간다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문장을 읽어보면 묘사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다. 조금씩 마음을 뺏겨 몇 문장을 더 읽어나가다 보면 평소에 문학을 읽으며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이 소설의 매력인데 그 이야기들이 어디를 향하는 지 알 수 없었고, 문명을 멀리한 그들과 나는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숭고함과 신성함을 세상에 찌든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으로 읽어야 이 소설이 온전히 들어올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는 생각이었고, 세 번째의 만남에서도 큰 수확을 얻지 못해 여전히 남아 있는 아쉬움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문장을 느끼고 줄거리를 이해하며 따라가기보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다보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지쳐버릴 것이다. 때로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보다 만남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언어의 흩어짐으로 온전한 만남을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언어의 흩어짐이 수려한 흩뿌려짐이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있음에 희망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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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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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제목에 마음이 끌렸으면서도 몇 장 떠들러 보고는 책을 도로 덮어 버렸다. 도무지 저자의 문체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였다. 쉰을 넘긴 저자는 고등학교 때 독일로 이주한 건축가로 대전 엑스포 때 스위스관 설계 및 기획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가정주부로써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소개가 독일에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는 독일인 남편과 아들과 딸을 간략한 소개와 함께 책의 포문을 열었는데, 평범하지만 비범한 무언가가 엿보였다. 그런 엿보임에 응하듯 가족의 생활방식을 풀어냈는데, 순수한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문체가 낯설어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책을 방치하다 이 책에 관심을 보인 지인을 만나면서 다시 책을 펼치게 되었다. 내가 문체가 낯설고 젠체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했더니, 교포라서 그런 것 같다고 적응하면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독일로 건너간 지 30년이 넘었는데, 내 입맛에 맞는 문체를 기대했던 것이 욕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하고 지인이 충고를 받아들여 문체에 대한 곤두섬을 자제시켰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책이 술술 잘 익혔고, 문체에 감춰졌던 글의 본질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진 첫 단락을 읽으면서, 이 책의 내용이 끝까지 그런 형식으로 이어질 거라는 섣부른 판단이 본질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독특한 가족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젠체한다고, 너무 드러낸다고 괜히 트집을 잡았다. 책의 끝까지 그 문체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사소한 것을 무시하니 책의 진가가 드러났다. 저자는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고, 독특한 시선으로 보자면 정말 독특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 기준이 모호하기에 각자가 느끼는 느낌대로 판단해 나가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될 것 같았다.

 

  첫 단락에서는 저자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각각의 삶과 한데 어우어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살기도 하는구나!'란 감탄이 아닌, 트집을 잡다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 가족을 바라보면 이해 못할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성격은 달라도 이상(理想)이 같은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보여주었다. 최대한 자원을 아끼기 위해 집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궁상을 떤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딱히 나빠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가 만족해하는 일상을 보며 관찰자의 입장을 지키기로 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아이의 교육에 대한 글들이 나온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고, 어떤 사례가 있었으며, 어떠한 결과를 나았는지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살고 있으니 독일의 교육과 우리나라의 교육을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밝히고,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식자랑 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저자 또한 자랑을 안 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자랑을 하는 것을 보며 또 트집을 잡고 싶었다. 자기가 격은 것을 드러내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자랑 이면에는 부모의 노력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참견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다음에 내게 아이가 생기면 참고하고 싶은 교육법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둘 정도였다.

 

  세 번째 단락을 읽고서야 이 책을 끝까지 읽기를 잘했노라고(더 이상 문체에 거슬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이라고 하면 히틀러의 집권당시의 나치 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독일 내에서는 '나치'라는 단어가 민감하게 작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독일에 상주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나치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개인의 의견일 수밖에 없고,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들의 많은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늘어뜨림보다 그 이후에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어떠했는지,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는 역사의 과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학살에 대한 기억만으로 독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오를 딛고 일어서려는 독일을 지켜볼 수 있어 약간의 편견을 벗을 수 있었다. 저자가 독일에 살고 있어 좀 더 의식이 편중된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국민들의 의식을 지켜볼 수 있었기에 자기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독일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거기에서 사유를 그치는 것이 아닌, 일본과 우리의 관계를 되짚어보는 부분도 경각심을 깨쳐 주었다. 독일과 비교하면서 일본은 역사 청산을 하지 않는다고 늘 목소리를 높이지만, 독일에서 만난 일본기자와의 에피소드로 인해 한 역사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비교적 차분하게 독일의 일례를 들어가며 일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우호적인 해결책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내 놓기도 했다.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 그동안 시사에 너무 무관심 했다는 생각과 함께 저자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다양한 시선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으로, 너무 솔직한 그녀의 생각을 듣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쩌면 오래도록 책장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한 권의 책은 지인의 관심으로 인해 깨어나게 되었고, 첫 이미지와는 다른 우호적인 만남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다행이며, 첫 느낌으로 한 권의 책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가족의 안위와 행복 또한 끔찍히 여기는 저자를 통해 너무나 다양한 인생을 맛본 기분이다.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는 만큼,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안에도 주제가 많이 갈리기에 가족 안에서만 의의를 두며 틀에 가두지 않으려 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의 시각이 한껏 넓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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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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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라는 조직이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대도,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로 다가오면 괜히 멀게 느껴진다. 처음 <괴짜 사회학>의 책 제목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괴짜라는 단어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긴장을 늦출 수 있었지만, 사회학의 전체적인 느낌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아마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마주한다는 생각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겨우 책 소개를 보고 나서 긴장감을 풀 수 있었고, 저자의 독특한 연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회학이라고 해서 연구실에서 행해지고 그 안에서 발견 된 것들을 읊어 댈 거라 생각했는데, 저자는 그 모든 것을 과감히 떨친 후 최악의 빈민가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연은 이후로 10년 동안 계속 된다.

 

  저자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사회학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만큼,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며 고전적인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한 개인의 선택은 어떻게 발전되는가?','인간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저자는 호기심이 꿈틀거렸다고 한다. 실제로도 사회학 분야는 '양적·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는 입장과 흔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삶을 연구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저자는 후자를 선택하고 연구에 임했다. 대학원 1년 차에 도시 빈곤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평소에 관심 있었던 대학부근의, 시카고에 있는 미국 최악의 빈민가인 로버트 테일러 홈스로 들어간다.

 

  거기서 저자는 대학원생 초보티를 팍팍 내는 질문을 쏟아내 비웃음을 샀고, 농축 코카인을 파는 블랙 킹스 보스인 제이티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만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서로에게 깊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대학에서 공부까지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회활동의 한계에 맛본 후 빈민가에서 마약을 파는 제이티와 사회학을 공부하는 저자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저자가 연구하는 학문과 제이티가 속한 조직이 무언가를 새롭게 이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10년 동안의 경험을 기록한 이 책을 읽어가면서 무엇을 정의하려 하거나 결론을 내리기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 그대로 '기록'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딱한 용어들의 나열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발견된 것들을 지지부진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 한 편의 소설처럼 모험담처럼 펼쳐지는 기록은 걸러지지 않은 채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를 느끼게 해주었다.

 

  저자가 처음 과제를 위해 조사를 나갔을 당시에 그렇게 오랫동안 로버트 테일러 홈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제이티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이티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고, 저자 또한 제이티의 삶과 그곳의 일상이 궁금했기에 일련의 묵인 하에 만남이 지속될 수 있었다. 제이티는 저자가 사회학도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전기문을 쓰는 것으로 착각했다. 저자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고 대신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해 나간다.

 

  로버트 테일러 홈스는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구급차와 경찰을 불러도 오지 않는 곳, 사회적인 혜택은커녕 오히려 갱단이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며 생활을 영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의 사람들이 정의감으로 불타올라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그곳의 보스는 제이티였고, 그 아래 수많은 갱단 조직원들에 의해서 아파트에 입주해 있는 사람들이 관리 되며 어느 정도의 상납이 이루어졌다. 그 안에서는 마약 거래, 매춘, 도박, 장물 매매 등 불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 불법행위들이 경찰과 국가에 의해 제어 된다는 것은 꿈꿀 수도 없었고, 불법 행위로 인한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은 꿈꿀 수도 없는 곳이 바로 로버트 테일러 홈즈였다.

 

  저자는 그곳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된다. 제이티 대신 일일 보스가 되어 보기도 하고, 보스들의 모임에도 가보며, 총격전의 현장에도 있었고, 제이티의 영역 안에 있지만 또 다른 권력이 행해지고 있는 베일리 부인의 동네에서도 생활하게 된다. 그곳의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중립적인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모두 기록해야 했기에 저자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의도가 개입되지 않았지만 공유되지 않는 사적인 정보들이 저자에 의해 제이티에게 알려지면서, 다른 사람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그 경험을 통해 약자에 속한 자들과 그 위에 군림한 권력자들의 생활이 어떻게 엉켜 가는지를 철저히 지켜보게 되었다. 저자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들과 함께했지만, 그 상황을 어찌할 수 없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요 관찰자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연구가 끝이 보일수록 처음 시작과는 다르게 조금씩 시들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해 갔지만, 그곳의 생활을 알아 가면 갈수록 처참한 환경만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저자가 이제는 그곳을 떠나야하며,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카코 주택공사에 의해 그곳이 철거되는 것으로 저자의 연구도, 그들의 만남도 끝이 났다. 오랫동안 그곳이 삶의 터전인 냥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고, 교수직을 얻은 저자도 그곳을 떠났다. 종종 제이티를 만나긴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조금은 씁쓸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인생에 제이티가 큰 의미로 다가온 만큼 제이티도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말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제이티도 언제까지 갱단에 몸을 담고 있지 않을 것이고, 저자도 새롭게 주어진 삶에 충실할 것이므로 예정된 헤어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저자가 전통과 관습을 깨고 과감히 빈민가에 들어가 10년 동안 경험한 것은 단순한 자료의 의미만으로는 남지 않을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음은 물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소외 받는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가 나름대로 일궈놓은 이 자료를 통해서 사회학자뿐만이 아니라 정부와 같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떠한 관심을 보여야 하는지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전환시켜 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들을 방치하는 순간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균형을 잃어갈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상은 앞으로도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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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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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되뇐다. 괜찮다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최면을 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친 마음을 위로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이 조금만 멀리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말 그대로 소망일뿐이기에, 시간마다 나 자신을 다독여본다. 이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사람이 힘이 들면 그것을 펼치기보다 더 안으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현재의 나도 그렇다. 평소에 즐겨하던 자질구레한 소일거리도 흥미를 잃었고, 어떤 것도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활자를 읽기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무조건 시간만 때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독서도 시들해질 무렵, 리뷰를 남기기 위해 이미 읽은 <축복>을 꺼내 들었다. 책을 들춰봐야 기억을 더듬을 수 있기에, 다시 읽는 다기 보다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메모지를 붙여 놓은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게 되었고, 아무 방어도 하지 않은 채 내 마음을 툭 건드려 버리는 시들을 만나고 말았다. 이미 읽은 책이기에 별 생각 없이 펼쳤을 뿐인데, 무심코 펼친 책에서 위로를 얻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이 다친 뒤라서 그런지 읽을 당시에는 큰 감흥 없이 만났던 시들이 나를 한없이 파고들었다. 마치 나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어루만져주고 힘을 주는 시들에 한없이 무너져 내렸을 뿐이다.

 

  저자는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던 중, 몸이 아파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영미시 연재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희망적인 시들을 많이 고르게 된 것 같다는 저자의 말이 떠오르면서, 비로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당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데,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혹은 타인을 위로하고자 희망적인 메시지를 고른다는 것은 내 경험으로도 녹록치 않다. 저자 또한 목전에 둔 치료의 고통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계속 해 나갔다는 사실이 대단했다. 그렇게 연재한 시들이 위로가 될 거라는 희망이, 타인을 거쳐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내게도 닿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생일>에 이어 그동안 이름만 들어온 시인들의 시를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반가웠다. 시를 많이 읽지 않아 시의 내용은 전혀 모른 채, 시인과 제목만 기억하고 있던 시들을 직접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유명세에 비해 나에게 감흥을 일으키지 않은 시들도 있었고, 명성답게 마음을 움직이는 시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희망의 다양함이 고루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준비를 마친 시들 같았다. <축복>의 제목의 이면에는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단순하게 희망만 잔뜩 노래하는 시들로 채워졌다면, 아마 금세 시들해졌을 지도 모른다. 삶의 다양한 굴레를 드러내는 시들을 보며, 왜 희망이 축복일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생일>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부분에만 원문을 참고했고, 번역된 시와 저자의 짤막한 해설,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만끽했다. 그 어울림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내게 와 닿았고, 희망이라는 싹이 이렇게 곳곳에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토로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좋은 구절은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책상머리에 써 붙여 놓고 싶은 시들을 만날 때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두려움도, 특히나 영미시에 대한 이질감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했다는 낯섦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문학의 한 가운데 존재했던 사람들이 써 내려간 '희망'으로 결속된 시는 앞으로 내가 살아내야 할 삶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나의 다친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던 시는 에드거 A. 게스트의 <끝까지 해보라>란 시였다. 특히나 '네가 근심거리로 가득 차 있을 때/희망조차 소용없어 보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일들은/다른 이들도 모두 겪은 일일 뿐이다.' 라는 부분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왈칵 눈물이 나게 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시였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서 마주한 시가 현재의 내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읽을 당시보다 지금이 더 감명 깊게 다가왔다. 그렇게 메모지를 붙여 놓은 시들을 다시 훑어보며, 복잡한 나의 마음을 잠시 잊은 채 시가 주는 위로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문학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조금만 손을 뻗으면 나를 다독여 줄 거리가 많다는 것 또한 깨닫는 경험이었다. 마음이 다쳤을 때는 모든 것이 민감하게 작용한다. 그럴 때 시를 만났고, 시로 위로받고 희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없는 감사가 인다.

 

 

오탈자

 

5쪽 12째 줄

 

골랐나 봐요. - 문장부호 ”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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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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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출간 될 즈음에 서점에서 책을 읽고 온 기억이 난다. 그때는 서점에서 새 책을 읽고 오는 즐거움에 빠져 있던 터라, 줄거리가 흩어질까 봐 집에 바로 와서 리뷰를 썼다. 그때 쓴 리뷰를 읽어보니, 정말 짧고 줄거리조차도 부족한 내용인 것이 단박에 드러나는데도 솔직함이 배어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읽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가 뭣해 열심히 다른 책을 읽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전작하게 되면서 이제야 구입하게 되었다. 얇은 책이라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었고, 기억을 더듬듯 꼼꼼히 읽어나갔다. 두 번째로 읽으니 어렴풋이 내용이 기억나면서도, 약 5년 전에 읽었을 당시에는 무척 생소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통해서 남미 문학이 여전히 낯선데, 그의 작품 중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작품이었으니 생소할 만도 했을 것이다.

 

  최근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이미 읽은 작품을 마주하면서도 무척 설다.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될지, 내용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기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핫 라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파타고니아가 있었고, 마푸체 인디오가 등장했다. 저자는 '예민한 후각의 소유자'인 마푸체 인디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핫 라인>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저자가 만난 마푸체 인디오와의 짧은 만남으로 <핫 라인>이 탄생했다는 것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푸체 인디오의 활약상이 그 만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신선하면서도 강렬했다.

 

  시골 형사 카우카만은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파타고니아에서 가축 도둑을 체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인디오라는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가축 도둑을 쫓는 일은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형사라기보다는 산 속에서 뒹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문명과는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거칠긴 해도 오랜 경력으로 인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감각도 뛰어났다. 그러던 중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을 부상 입히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카우카만 형사는 가축도둑을 잡는 과정에서 거친 처단을 한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지위 때문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일로 인해 자연 속에서 가축 도둑을 체포하는 일을 하던 형사는 수도인 산티아고의 성범죄 부서로 좌천된다.

 

  카우카만이 산티아고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여자 형사들만 있는 성범죄 전담반에서. 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숨쉬기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파타고니아에 두고 온 애마와 장비들과 광활한 자연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자신이 일할 곳을 돌아본 후 하숙집으로 가는 도중, 택시기사 아니타를 만나게 된다. 이미 카우카만의 일이 언론에 보도 된 터라 그녀는 카우카만을 알고 있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카우카만은 아니타와 점점 가까워지고, 그녀가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상처는 카우카만이 일하고 있던 성범죄 전담반에 찾아 온 한 부부에 의해서였다. <핫 라인>이라는 폰섹스 방을 운영하고 있던 부부는 며칠 전부터 끔찍한 전화가 걸려온다며 카우카만을 찾아왔다. 카우카만은 그 부부가 들려준 테이프를 듣고,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카우카만은 폰섹스 방을 운영하는 부부의 말처럼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들이 끔찍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누군가 꾸며낸 소리라고 생각했고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준 것은 아니타였다. 아니타는 그 소리를 듣더니 피노체트 독재 기간 때 행해진 고문소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에 직접 수용소에 있었던 아니타는 그 모든 것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카우카만은 아티나의 말로 인해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독재기간 때 연관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더더욱 그 사건을 조사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일개 형사가 건드리기에는 너무나 큰 거물이었다.

 

  폰섹스 방을 운영하는 부부의 집으로 찾아간 카우카만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해 한 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에 나선다. 전화를 걸고 카우카만의 목숨을 위협한 것은 칸테라스 장군이 시킨 짓이었다.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도 카우카만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카우카만을 손봐주고 싶어 안달을 부리다 되레 카우카만에게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칸테라스 장군은 사람들을 고문한 소리를 통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카우카만이 협상을 내놓자 덥석 물어 과거의 죄가 방송국의 주파수를 통해 퍼져 나가고 만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아니타의 수고로 독재 기간에 가족과 연인을 잃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 이후에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타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짧은 소설을 통해서 칠레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에 서슴지 않았으며,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등장시켜 상처가 씻기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저자 또한 피노체트 독재로 인해 망명생활을 한 터라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칠레가 가진 과오를 조금이나마 바로잡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이 상처를 가진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듯이, 카우카만과 아니타를 비롯한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들끼리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이 집단을 떠날 수 없고, 속해있는 위치를 떠나 살 수 없듯이 그 안에서 행해지는 역사의 흔적을 서로 품어줄 수밖에 없다. 역사의 과오가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했더라도 공존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를 지나서 언젠가 잘못된 것은 분명히 바로 잡힌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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