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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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책만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세상에, 입 소문을 타고 전해져 오는 책들을 마주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책을 읽고 싶기는 하고, 또 책을 구입하자니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울 때 스스로 그 책이 찾아와주면 너무 고맙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내게 올 때 다시 한 번 그 고마움을 경험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찾았나 싶어 뒷면을 열어 인쇄 부수를 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초판이 2008년 10월인데 내게 온 책은 2009년 12월에 발행 된 33쇄 본이었다. 이렇게 많이 찍어낼 정도로 사랑받고 있던 책을 이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입 소문에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경험한 셈이다.

 

  손에 책이 쥐어지는 느낌이 너무 산뜻해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고, 책 제목처럼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개를 훔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 읽어 나갔다. 갑자기 아빠가 사라져 버리고, 차 안에서 엄마와 남동생과 생활해야 하는 조지나의 관심은 온통 집세를 구하는 것에 맞춰졌다. 집세를 내지 못해서 쫓겨난 조지나의 가족은 아빠를 원망할 틈도 없이 비좁은 차 안에서 생활해야 했고, 엄마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에 절어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라 제대로 된 생활을 해 나가지 못하자 조지나와 동생 토비의 몰골은 점점 흉해져갔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시선과 친한 친구의 따돌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지나는 어떻게 하면 개를 훔칠 수 있을 것인지에 골몰한다.

 

  그러다 차창으로 날아든 한 장의 전단지를 보게 된다. 오래 된 전단지였는데, 강아지를 찾아주면 500달러의 사례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단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조지나는 강아지를 찾아주는 조건으로 충분한 돈을 낼 수 있는 주인을 물색하게 된다. 강아지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했고 부자여야 했다. 그때부터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개시되었고, 하루하루 계획을 세우며 행동에 임한다. 그렇게 동생 토비와 함께 강아지를 물색하다 번듯한 집에 살며, 주인에게 무척 사랑받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한다. 나름대로의 계획을 통해 그 강아지를 훔치는 데 성공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숨겨둘 곳부터 먹이 등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따라왔다. 그럼에도 조지나는 포기하지 않고, 소신껏 뒤처리를 해 나간다.

 

  조지나는 꿈꾸고 또 꿈꾸었다. 강아지를 훔치면 전단지가 붙을 것이고, 강아지를 찾아주는 척 해서 500달러의 사례금을 받아 집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강아지를 훔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전단지는 보이지도 않았고, 급기야 개 주인하고 맞닥뜨려 강아지를 찾아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고 만다. 열한 살 소녀인 조지아가 강아지를 훔쳐서 집을 구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허술할 뿐만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했다. 차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조지나의 가족에게 처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기에 조지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꼬여가는 현실 앞에서 조지나의 심경은 더 복잡해져만 갔다.

 

  자신이 훔친 강아지 윌리의 주인은 강아지를 끔찍이 아꼈지만 돈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조지나는 초조해지면서도 점점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나쁜 짓을 했고 강아지 주인인 카밀라 아줌마를 슬프게 만들었다는 사실 앞에 사례금 따위는 이미 떠나가 버렸다. 거기다 윌리를 숨겨 둔 숲의 허름한 집에서 만난 무키 아저씨와의 대면 때문에 더 힘들었다. 무키 아저씨는 노숙자의 행색을 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무키 아저씨에게 윌리의 존재를 얼버무리긴 했지만, 조지나의 부추김으로 카밀라 아줌마가 붙인 전단지가 붙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지나를 질책하지 않았으며, 비유적인 말로 충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몰래 차동차를 고쳐주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조지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집을 구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지나는 윌리를 카밀라 아줌마네 집으로 데려다 준다. 너무나 사랑스런 강아지였기에 정이 잔뜩 들어 버린 터라 윌리의 귀향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밀라 아줌마에게 가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한다. 아줌마는 잘못을 되짚어 주긴 했지만 그런 조지나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준다. 그 부분에서 나는 헛된 망상을 꿈꾸었다. 모든 사정을 다 들은 카밀라 아줌마가 조지나네와 함께 살 거라는 희망. 그러나 그건 나의 바람일 뿐이었고, 현실은 냉정하지만 희망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지나의 엄마는 살 집을 구했고, 고생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조지나는 지금껏 자신과 함께 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적은 노트에 개를 훔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글을 적음으로 행복감에 젖은 채 황당한 계획은 마무리 된다.

 

  조지나에게 처해진 현실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학교생활과 내면을 보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 친구에게도 솔직하게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구하기 위해 강아지를 훔칠 생각을 한 조지아가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내면의 벽을 친 채 모든 것을 단념하고 현실에서 도피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조지나는 도망가지 않았고, 현실을 철저히 받아들였고 잘못 된 방법일지언정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잘못을 뉘우쳤으며,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온 현실에 만족했다. 조지나는 강한 아이었다. 허점투성인 그 아이의 노트를 볼 때부터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더 값진 것이 돌아올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경험이 그 아이의 내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자리해, 건강하고 올 곧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쨌든 팍팍한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한 조지나가 무척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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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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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에 쌓아둔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다시 꺼냄으로써 저자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모든 작품이 소설인 줄 알고 있던 나의 무지를 깨치듯 자전적 에세이와 기행문, 짧은 이야기들이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가 모두 좋은 경우에 독자는 풍부한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어, 이런 작가를 만나면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욕심까지 들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독서를 통한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이런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접함으로써 생각의 뻗어감이 마냥 즐거울 정도로 현재 나의 독서는 무척 즐겁다.

 

  <소외>는 저자가 소설가로써 뿐만이 아닌 사회 비평가, 다큐를 다루는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준다. 제목처럼 소외된 것들에 대한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외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알더라도, 막상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광범위함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책은 저자가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해서 수용소의 한쪽 구석의 돌멩이에서 처절한 글을 보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이 책이 어떠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에 소외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을 수 있었고, 저자가 쓴 이야기 이외에도 수많은 소외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런 소외를 관심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임을 조금씩 인식해 갔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는 짧은 이야기들은 분명 존재하고, 존재해 나가는 사람들의 단상이었다. 단지 그들의 삶에 관심 갖지 않았으며, 함께 뒤엉키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자신의 인생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삶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냐는 핑계도 소외된 이야기들 앞에서는 부끄럽기만 했다. 너무나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입김을 불면 책장의 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도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이야기들이 소소하더라도 행복하고, 기쁨에 넘친 이야기들이 많았으면 나의 마음이 이토록 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듯, 지켜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향연에 동참할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세계 각지의 이야기를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향연을 느끼기에 바빴다. 너무 광범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지명의 낯섦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알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중간쯤 들어서, 정치적인 주제로 글이 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는 저자의 다른 작품마다 녹아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는 순간, 이야기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소외된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소외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분명 관심을 갖고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행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한 이야기들도 많았다. 환경파괴에 대해, 공동으로 이뤄가야 할 자연에 대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다. 그것들을 지켜보면서도 먹먹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누구의 사연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런 자들을 돌아봐 달라고 호소해야 할까. 흩어져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서 나 역시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돌멩이에 적힌 문구처럼, 내가 잊힌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움만이 엄습해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물질의 풍요가 아닌 질적인 풍요로움을 간직하며 살고 싶었던 나의 바램들은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주목받지 못해서 서글프다는 마음보다, 이것이 인생이고 삶이라는 관념이 밀려오자 잠시 긴장의 끊을 놓쳐 버린 것 같다. 그것을 놓쳐 버렸다고 해서 뒤처진 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 한 없이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옮긴이는 저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보다는 제도권 밖에서 진한 인간미를 풍기는 일상생활 속의 영웅들을 더 선호했다.' 고 말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이야말로 제도권 밖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같은 제도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해진 기분이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기보다, 제도권 밖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보듬으며 살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산이 흩어져 버린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의 이 다짐까지 흩어져 버릴까 살짝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러모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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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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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을 읽고, 저자의 흔적을 더 느끼고 싶어서 <유언>을 구입했다. <열정>처럼 하룻밤 이야기를 담고 있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9월에 구입해놓고 여태껏 방치하다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이렇게 무엇에 홀린 듯 읽게 되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책장에 묵혀둔 시간들이 민망할 때가 많다. 아직 소화할 단계에 머무르지 못해 묵혀둔 책들도 많지만, 너무나 많은 책들의 쏟아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쌓아두는 경우가 더 많다. 신간에 정신이 팔리다가도 나의 관심사대로 모아둔 책들을 종종 꺼내서 읽게 되면, 내 책장의 책들이 참 풍부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유언>을 읽고 나서, 세계 문학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이미 내 책장 안에 열려 있음을 깨달았다. 손만 뻗으면 각 나라의 대표 작가를 만날 수 있고, 마음껏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유언>을 읽을 때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특성까지 생각하며 읽으며 비슷한 나라의 저자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 독서를 하며 책장에서 연관된 책을 찾아 볼 때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쌓아둔 책들이 고마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끝까지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도르 마라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두고, 두 번째 작품을 손에 쥐며, 이 작품이 괜찮으면 전작을 하겠노라고 마음먹었건만. <유언>의 주요인물인 라요스의 방자함에 저자까지 야속해지고 말았다.

 

  <슈피겔>지는 '<유언>은 <열정>에서처럼 기다림과 좌절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라고 했다. 한 줄의 의미가 이토록 명확하게 다가온 적이 없을 정도로 주인공 에스터가 기다렸던 라요스는 좌절을 넘어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해대고 있었다. 이십 년 만에 만나는 옛 연인인 라요스의 전보는 에스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많은 표현을 하지 않고, 어떠한 원망도 없었지만 내심 그녀를 만나러 온다는 라요스의 의중이 무엇일까 설렘으로 기다렸던 것이 사실이다. 왜 이십년 간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 그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라요스를 기다리는 가운데, 모든 사연은 무덤덤하면서도 낱낱이 펼쳐졌다.

 

  라요스는 에스터의 오빠의 친구로, 둘은 깊이 사랑했었다. 그러나 라요스는 언니와 결혼해서 떠나 버렸고, 그 이후로 친척인 누누와 함께 작은 집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누누와 근근이 살아가는 에스터는 중년에 이르렀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라요스가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치기 전까지, 그리고 조카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세 통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에스터에게 이런 잔인한 일 닥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읽어가면서 짜증을 다스리지 못해 한숨을 쉬게 된 책이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이 최초가 될 것이다. 짧은 책임에도 간결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유희적으로 엮어가는 가운데, 에스터와 라요스의 과거와 편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너무나 진부하게 펼쳐졌다. 무엇보다도 이십년 만에 연인 앞에 나타나 뻔뻔함을 넘어서는 라요스 덕분에 나의 짜증은 배가 되고 말았다.

 

  이십년 만에 옛 연인이 찾아온다고 하면 어느 누가 설레지 않겠는가. 또한 무슨 말을 하러 오는지 온갖 추측을 하게 되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고 해서 누가 비난을 던지겠는가. 에스터의 고백을 통해 라요스가 거짓말쟁이에다 위선적이고, 얼마나 가식적인 허풍선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언니와 결혼해서 떠난 라요스를 에스터는 용서하고 있을까. 용서를 떠나 과연 그를 이해하며, 다시 한 번 이야기 할 기회가 생길 때 둘은 소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라요스와 대화할 시간을 고대하고 고대했는데, 그의 입에서 들려오는 내용은 지난 과거의 용서와 화해, 앞으로의 행보가 아닌, 에스터가 살고 있는 집의 물질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이었다.

 

  에스터는 조카를 통해 라요스가 언니와 결혼식 전에 에스터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쓴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터를 질투 한 언니가 그 편지를 빼돌렸고, 결국 라요스는 언니와 결혼하고 에스터 곁을 떠나 버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어긋난 운명에 몸부림쳐질 정도로 답답했는데, 나를 짜증스럽게 만든 것은 라요스의 태도였다. 가보로 내려오는 반지를 빼돌린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그것을 찾으러 왔으며, 에스터의 마지막 보루인 작은 집을 차지하러 왔다. 그것도 부족해 에스터에게 오히려 빚진 것처럼 행세했고, 새로운 연인의 빚 때문에 에스터를 찾아온 것이다. 오히려 전달되지 않은 편지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말았더라면, 어긋나버린 운명에 한탄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달되지 않는 편지는 분노조차 일으키지 않았고, 라요스의 밑바닥만 더 드러냈으며, 그런 라요스를 위해 모든 것을 줘버리는 에스터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하고, 유언처럼 라요스가 해달라는 것을 모두 해 줘버린 에스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 죽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세상에 관해 모든 것을 초탈한 듯, 홀연히 라요스에게 집을 넘기는 모습이 답답했다. 잇속을 챙겨서 자신의 앞길을 닦아놓아도 시원찮을 판에, 해달란 대로 모두 해주는 에스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요스와 에스터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은 확연히 드러났고, 둘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다르게 살아왔기에 옛 마음을 다시 살린다는 것도 허무맹랑했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내려지던지 간에 서로가 사랑했다는 기억만 부여안은 채, 둘이 하나 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렇더라도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소설 속에 녹아 있는 또 다른 가치를 떠나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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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조각달
로즈메리 웰스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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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환장을 한다.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더 멀어질수록 나를 끈질기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그 시절의 추억들이다. 그 추억이 무엇이 간대 나를 성장 중이라고 말하며 계속 머무르게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문학을 통해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메우려 하는 하는지도 모르겠다. <붉은 조각달>을 읽게 된 연유도 그랬다. 작가며 출판사가 모두 낯선 상황에서도 '성장소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무척 예쁘다는 첫 이미지 이외에도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나는 것이 감지됐는데, 자꾸 올라오려는 그 슬픔을 애써 무시하며 눌러 버렸건만, 결국 그 슬픔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쉴 틈 없이 꼼짝 않고 책을 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잠시 시선을 돌려 버리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열여섯 살 소녀 인디아의 슬픔을 놓쳐 버리고 구경만 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이 책의 배경이 전쟁이라는 사실, 그리고 미국의 남북 전쟁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했던 샤프스버그 전투가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성장소설이라고 해도 책을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풀어낼 곳조차 없는 남모를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흐트러지는 이 마음을 가누려 애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둘 곳 없다고 이 책을 피해버렸다면, 잊힌 전쟁에 관한 진상은 결코 내게 와 닿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전쟁의 안타까움을 전하기 위해 <붉은 조각달>을 썼다고 한다. 12년 간 남북 전쟁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서 한 권의 책을 썼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 지면서도, 한 소녀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의아했다. 그러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어, 오랜 시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전쟁의 참상을 어떻게 펼쳐낼지 궁금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일어났던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작부터가 마음 아팠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자는 마치 전쟁의 참상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태연하게 인디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차분함 때문에 전쟁이 배경이 된 소설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인디아의 주변을 살피며 그 소녀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에만 관심이 갔다. 트림블 가의 아들인 에모리와 실험실에서 지식을 탐하는 것을 보고 인디아가 대학에 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앎에도 전쟁의 배경을 배제하고 훌륭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바랐다. 에모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인디아의 재능은 빛났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삶의 잔상 속에서도 그들의 꿈이 이뤄지길 바랐다. 그들에게 처해진 환경이 너무 눈에 띄지 않았기에, 혹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흘러갔기에 이후에 처해질 고난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기는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12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흔적을 남기듯, 너무나 평이하게 흘러가다가 고통은 점진적으로 커져만 갔다. 제발 그만 두라고, 더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은 잔인하다고 스스로 되뇔 때까지 전쟁의 잔인함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12살이었던 인디아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빠와 엄마 남동생, 정신이 오락가락 하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잔잔한 행복도 잠시, 전쟁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닥쳐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더라면 한 무더기의 고난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 북군과 남군의 대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전쟁은 그들의 피부에 조금씩 와 닿더니, 급기야는 피부를 뚫고 나와 그들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과학자를 꿈꾸는 에모리는 병사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도록 의학의 수준을 끌어 올리려 하지만, 전쟁 중에 그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총알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단순한 질병으로 인해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갈 때는 할 말 조차 잃어 버렸다. 인디아의 아빠도 그런 질병을 앓고 있어, 에모리에게 도움을 청해 약을 받았지만 아빠는 이미 전쟁터로 떠난 뒤였다.



  인디아는 에모리가 준 약을 아빠에게 전해주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옥수수 밭이 순식간에 말끔하게 베어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끔찍한 샤프스버그 전투의 잔상을 목격하게 된다. 수많은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붉은 조각달이 떠 있는 신비로운 광경까지 목도하는 인디아를 보는 순간부터 희망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아빠가 살아서 돌아올 거라는 믿음, 전쟁이 끝나면 에모리와 함께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한 마을에서 북군과 남군의 병사가 갈리는 애매모호한 현상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북군이 승리하고 전쟁이 끝나 평화가 깃들고, 남군은 패배했지만 노예제도가 없어질 거라는 역설적인 긍정조차도 무의미할 정도의 잔인하고 또 잔인한 전쟁의 참상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과연 그곳에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전쟁의 참상은 고난 받을수록 깊어지는 그들의 신앙과 극명하게 비교 되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건만 아빠는 결국 떠나가고, 인디아의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삭막한 외삼촌네 집으로 들어간다. 인디아에게 더 이상 아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 그들뿐이랴.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식으로, 연인으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덧없이 쓰러져 간 남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에모리와의 연구 자료마저 같은 동네의 청년에 의해 불살라지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 절망을 맛본 인디아에게 힘을 내라는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대학을 갈 수 있는 도시로 가라는 위로도, 에모리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란 한 줄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디아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 모든 일을 감내하고 희망을 놓지 않았고, 북군 장교를 돕기도 했으며, 에모리와 극적으로 만나고, 마음속에 품은 뜻을 펼치기 위해 도전하고 있었다.

 

  철저히 남북 전쟁 당시로 독자를 끌어들였음에도 현재 진행형으로 끝을 맺은 소설에 잠시 멍해지기도 했다. 더 이상 파괴될 것이 없었기에 전쟁의 끝이 보였지만, 그 이후의 삶이 궁금했기에 여전히 진행 중인 결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저자가 인디아의 삶을 단정 지어준다고 해서 단정 지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에모리와 같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재회하기만을 바랐다. 인디아 뿐만이 아니라 전쟁의 폐해를 겪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똑같은 참상이 일어나질 않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바램과는 다르게 현실은 여전히 전쟁과 기근,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서도 아이들이 자라나고, 희망을 품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기에 그 참상을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막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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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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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기 전, 책장을 보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계획해본다. 그냥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으면 좋겠지만, 우선순위를 무시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본다. 그러나 마음속의 계획은 늘 그렇듯 지켜지기 보단 어기기가 더 쉬운 법이다. 읽어야 할 책과 관심 있어 구입한 책들이 뒤엉켜서 책장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책장 정리를 했다.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을 손이 잘 닿는 책장에 빼놓고, 최근에 구입한 책들도 따로 분류해 놓았다. 그렇게 정리를 해 놓으니 읽어야 할 책 순서가 한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책들을 방치해 두었는지, 관심 있다고 구입한 책들마저도 신경 쓰지 못한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정리 된 책장을 보면서 문득 <생일>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고(故)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가 아니라 '영미시산책'이라는 이유로 주요 목록에서 배제해 두었었다. 어쩌면 같은 해에 암으로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과 김점선 화백의 마음이 녹아있는 책이라서 선뜻 손을 뻗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분이 같이 작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책(김점선님의 말을 빌려)이 만들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제는 그런 결과물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과 두 분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다 한 밤중의 책 정리로 인해 다시 눈에 띄게 되었고, 아련한 마음을 품은 채 영미시가 주는 낯섦을 호기심으로 바꾼 다음에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생일>인 것을 보고 조금은 의아했다. 생일이라고 하면 '태어남'이란 의미가 뿌리박혀 있기에 더 이상 생각이 뻗어 나가지 못했다. 서문을 보고서야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목이 참 맛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할 때의 그 설렘과 기쁨, 달랠 길 없는 그리움조차도 다시 태어남으로 포장한다는 뜻이 내게도 가깝게 다가왔다. 그 때문에 잠시 우리의 시가 아닌 영미시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어떠한 시들이 실려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거기다 상식으로 알아두어야 할 거장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하니, 국외 시에 무지했던 내게 조금이나마 알은체 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영미 시라고 하더라도 책 제목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랑에 관한 시이므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다. 영어 원문과 함께 교수님의 번역이 실려 있는 시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욕심내어 원문까지 읽어 보았다. 한 줄 읽고 해석을 보며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해석이 들어맞는지를 따져 보았는데, 얼마 안가 단어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읽는 것인지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서 원문 전체를 다 읽지 않고, 번역 시를 먼저 보며 '이런 표현은 영어로 어떻게 쓰였을까' 란 궁금증을 일으키는 문장만 원문을 보았다. 그렇게 읽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느낄 수 있었고, 짤막하게 실린 시인의 생애와 함께 온전하게 시를 맛보게 해 주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모 일간지에 칼럼으로 실린 것들이라고 한다. 당시에 원고를 담당했던 기자분이 계절마다 제목을 붙여 주었다고 하는데, 그 제목과 함께 김전선 화백의 그림을 느끼고, 교수님의 시에 대한 칼럼을 맛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조화였다. 시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을 때, 제목이나 그림, 칼럼을 통해서 이해를 도왔기에 각각의 존재만으로도 시를 돋보이게 하고 다채롭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의 절절함을 느낌과 동시에 이런 다양함을 맛보며, 거장들의 시를 음미한다는 것은 참 산뜻한 기분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어렵게 다가온 나 같은 독자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이 손길이 뻗어 있는 것 같아, 영미 시임에도 즐겁게 읽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사람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껏 많이 읽지 않은 국외 시집을 살펴보면, 번역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혹은 시의 함축적인 의미 때문에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최대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 이 시집으로 인해 그런 어려움을 많이 해소시켰다. 교수님도 '시를 번역하는 사람은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셨지만, 나 같은 독자들조차도 시라는 문학은 알려고 하면 할수록 오묘하면서도 감질거리는 매력을 던져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영미 시의 매력을 느꼈음은 물론, 한 편의 시가 다양하게 표현 될 수 있다는 사실(특히나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통해)에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마음의 절절함이 느껴졌던 시, 공감을 이끌어 냈던 시, 신선함을 던져 준 시, 잔잔함 파문을 일으킨 시들이 내게 다가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녹아 있는 시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읽어 버린 것이 민망할 정도다.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영미 시집이 남아 있어 다행이면서도, 이런 만남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허전하다. 시를 읽는 내내, 장영희 교수님과 김전선 화백의 흔적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음이 절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분들의 평안함을 빌었다. 좋은 책을 남겨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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