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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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재촉하는 비라고 하기엔 강풍을 동반하고 있어서인지 풀어지려는 마음이 주춤해진다. 포근함을 맛볼 수도 없고, 무엇보다 요즘의 나를 짓눌렀던 무기력감이 날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옷차림이 가벼워졌지만, 그와 반대로 마음만은 한껏 짓눌려 있다. 한 해를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 현재 나의 위치에 대한 흔들림,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열망까지 더해져 2월은 썩 유쾌한 나날을 보내지 못한 것 같다. 한 해의 계획을 세운지 한 달여가 지나지 않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실망스럽지만, 마음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방황하고 또 방황할 뿐이다. 공교롭게도 나의 방황에 한껏 불을 지펴준 소설이 있었으니, 오래전부터 꼭 읽어보고 싶었던 <안나 카레니나>였다. 나의 열망과는 달리 무기력감의 한가운데서 마주한 소설이 되고 말았고, 1600페이지를 웃도는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마음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유독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근접할 수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하는 연유도 있었고, 아직 그의 전집을 완독하지 못한 터라 그 이후에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려는 나름의 다짐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찬사를 무시하기 힘들었고,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책을 마주하는 것이 살짝 겁이 날 정도로, 톨스토이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어느 정도 익숙하더라도, 작품이 익숙하지 않은 작가를 만난다는 것에 저자의 유명세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톨스토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정도로 짧은 단편집을 읽었을 뿐, 그의 작품을 온전히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 소설을 읽었다는 후련함보다, 내가 가졌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또렷해져 혼란스러웠다.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평가 중, 나의 호기심을 떨어뜨렸던 것은 이 소설이 '상류사회 소설'이라는 데 오는 거부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의 작품에서 만난 하층민들의 삶을 많이 보아서인지, 같은 시대의 소설임에도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접근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그 이유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소설을 읽는 내내 주관에 따른 내면의 벽을 깨뜨리지 못한 것을 통감했다. 각각의 인물에 대한 내면의 묘사,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배경, 촘촘히 짜인 구성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꼈으나 도무지 인물과 책 속의 배경으로 빨려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은 소설속의 인물이 전부임에도,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낯설었다. 게다가 여러 사람의 심중 속으로 파고드는 내면 묘사 때문인지, 오히려 그들을 어느 선상에 올려놓고 평가절하를 하고 있었다. 이 선에서 더 이상 깊숙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단정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마음껏 활개 치지 못하고, 흐름을 읽히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읽어내려 간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발표했을 당시, 많은 비평가들은 탐탁지 않은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와 달리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라는 의견과 함께 '이 작품이 상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 현실에 충실한 소설' 이라고 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는 한 번 더 정독한 이후에 또렷해질 것 같고(무기력감으로 만족할만한 집중력을 가지고 읽지 못하였기에), '동시대 현실에 충실한 소설'이라는 데는 공감하는 바이다. 책의 배경이 된 시대를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어(사회적으로나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당시의 러시아 모습을 상상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여러 작품에서 만난 19세기 러시아 사람의 특징이, 톨스토이의 작품과 여전히 결부되고 있지 않아 다양한 삶의 군락을 넓히는 데 개인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주인공은 '안나 카레니나'이며, 그녀의 등장이 있기 전까지 주변배경은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8부로 구성된 <안나 카레니나>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인물의 성정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고, 사회적 흐름이 반영되어 있어 방대한 소설속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게 되었다. 안나가 소설의 전반부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와 얽히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도 세세했기에 '안나 카레니나'가 주인공이라고 단정 짓기는 무리였다. 게다가 안나가 오빠인 오블론스키의 외도로 인해 충격에 빠져 있는 올케 돌리를 위로 차 등장했을 때, 여덟 살 난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 이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터인데, 여덟 살의 아들의 존재는 그녀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증거하고 있었으므로, 무엇이 그녀를 사건의 중심으로 이끌어갈지 궁금했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 돌리의 동생인 키티와 그녀를 사랑하는 레빈, 키티에게 구혼하기 직전인 브론스키의 모습이 그려졌었다. 키티는 두 남자를 모두 사랑하지만, 브론스키가 자기에게 적절한 상대라는 것을 알고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런데 돌리를 위로하러 온 안나를 보고 브론스키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로 인해 키티는 깊은 상처를 받고, 레빈은 키티의 거절로 인해 시골로 내려가 버렸고,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카레니나 부인을 따라 모스크바를 떠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카레니나와 브론스키, 카레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의 갈등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갈등 이외에도 키티와 레빈, 오블론스키와 돌리 등 많은 등장인물이 얽혀있기에 어느 한 곳에만 중점을 두고 읽어나갈 수 없었다. 크게 안나와 브론스키, 키티와 레빈, 카레닌으로 나뉘어 이야기가 전개되었기에 그들 모두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구성에서 방대함 때문에 굵직한 사건이 드러나고, 반전이 일어날 때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인물의 세세한 내면 묘사로 인해 독자에게 침착함을 부여해서인지 소설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안나가 카레닌에게 브론스키와의 불륜을 고백하고 그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버릴 때도, 상처를 극복한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시골을 내려갈 때도, 돌리로 인해 안나를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카레닌의 다짐 앞에서도 모두 덤덤할 수 있었다. 잠잠한 호수에 파문이 일었다가도 다시 고요해 지듯이, 소설의 흐름에 짐짓 놀라면서도 다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각각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은 불편한 재회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소식을 들으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레빈은 키티와의 결혼으로 행복과 신앙, 자신의 일에 대한 갈망을 충족하고 있는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 카레닌의 문제는 쉽게 일단락 지어지지 않았다. 카레닌과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임에도(그들의 관계 정리나 그들 사이의 아이의 문제만 보아도), 카네닌 사이에 태어난 아이 문제와 안나의 복잡 미묘한 내면 갈등으로 인해 이혼은 쉽지 않았고, 그런 상태를 견뎌내는 것은 모두에게 힘이 부쳤다. 안나의 삶은 브론스키와의 재회로 다시 사랑이라는 충족을 이끌어낸 듯 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결혼생활로 인해 행복과 지지부진함 사이를 수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안나를 보고 있다 도리어 내가 지치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는 것에 실망하기도 했다. 타인과 사랑을 하고 온전한 관계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일상에서의 행복을 찾는 것도 잃는 것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갈 뿐이었다.

 

  그런 안나만 지켜보는 것이 소설의 전반이었다면 진작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변화를 주었고, 당시의 사회적 이슈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여지없이 드러냈기에 안나로부터 잠시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인물들의 관심에 따라 달리 보이는 사회적 현상과 시대적 배경은 종종 지루함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당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이해라는 것이 사회적 관념을 꿰뚫어보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 두루뭉술한 흐름 읽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인물들과 얽혀 들어가는 관계가 더 촘촘해졌다고 생각한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레빈이었는데 그가 농장에서 농사를 지어서인지, 농노에 관해서, 경제관념에 관해서, 후에는 신앙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성장을 보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안나의 생활과 내면세계가 막바지에 달할 때쯤, 소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나는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더니,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치고 만다. 안나가 돌리를 만나기 위해 역에 도착했을 때, 열차에 치인 사람을 목격한 것이 복선을 깔듯, 운명의 장난처럼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의 순간보다 죽음을 향해가는 순간의 묘사가 더 많았듯이,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브론스키와 카네린, 돌리와 키티 등 다른 인물의 생각은 깊게 드러나지 않았다. 브론스키는 전쟁터에 나가고, 그들의 아이는 카레닌에게 전해졌다. 안나의 죽음이 소설의 끝을 말하고 있대도, 그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레빈의 삶에 대한 모색'으로 소설은 마무리 지어진다.

 

  <안나 카레니나>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백과사전급'이라는 의미로 통용될 만큼, 방대하고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가족의 행복을 밑바탕에 두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 내용이 평화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가 많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자면 불행에 더 가까운 소설이고, 희망보다는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느껴졌다. 그 가운데에 안나가 있었고, 그녀의 삶이 부서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안타까움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어버렸다면, 급격히 우울해졌을 내 기분을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를 것이고,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앞으로 향할 것이며,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나보다 앞서 치열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를 재조명해보며, 현실에 대입할 때에 이 소설의 가치는 빛날 것이다.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을 탐닉하면서 '삶'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찾는 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아 마음이 한껏 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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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마음 - 장 자끄 상뻬의 장 자끄 상뻬의 그림 이야기 11
장 자크 상뻬 지음, 이원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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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 초부터 내게 친숙한 작가가 있다면 단연 장 자끄 상뻬다.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소장하고 있지만, 유독 <꼬마 니콜라>시리즈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야 만나서인지도 모르겠다. <꼬마 니콜라> 시리즈 권수가 좀 되다보니 삽화로 참여한 상뻬이인데도 오랜 시간 만난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작품을 섭렵해 가는 가운데, 오랜만에 그의 신간을 만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무조건 구입했음에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제야 책을 펼쳤다. 상뻬의 삽화집을 아끼다가 늦어졌다는 핑계가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책을 보고 혼자서 키득댔다. 요즘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데, 상뻬의 삽화집으로 인해 숨겨졌던 밝은 감정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상뻬의 삽화집이 대형 판으로 재출간 되면서 기쁘면서도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그 소식을 일찍 알았더라면, 최근에 구입한 작은 판형 대신 대형 판을 구입했을 거라는 데 오는 아쉬움이었다. 대형 판이 비싸긴 하지만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작품까지 재출간 되어서, 그 책으로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데생집은 대형 판으로 볼 때와 작은 판형으로 볼 때의 느낌이 무척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발간된 상뻬의 신간이 대형 판으로만 출간되어서 상뻬의 작품을 기다린 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겠지만, 상뻬를 알고자 하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되기도 한다.

 

  상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대형 판으로 만나게 된 신간은 무척 즐거웠다. <각별한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겉표지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책을 받았을 때, 마치 마당에 고추를 널어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 속에 들어있는 상뻬의 데생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을지 겉표지부터 궁금하게 만들더니,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각별한 마음>이라는 다소 추측하기 힘든 제목 아래, 상뻬식으로 다양하게 그려진 <각별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일탈과 익살, 독자가 보는 데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이면의 독특함까지 모두 들춰내고 있었다. 대부분 데생 속 인물들의 대화 내용이 실려 있었지만, 대화가 실려 있지 않아도 나름대로 상상해 볼 수 있고, 그림과 대화가 엇나가는 엉뚱함도 맛볼 수 있었다.

 

  상뻬가 그려놓은 데생에서 그런 대화를 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엇나감이 독자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고, 즐거움을 선사해 주기도 했다. 전화응답기의 황당함과 복잡한 미술관에서의 로맨틱, TV속의 자신을 비평하는 일, 자신의 책을 홍보하는 일 등, 상뻬의 복잡하고 세세한 데생 속에서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의 일상이 모두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 없대도, 우리와 문화가 다르고 생활방식이 달라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한 박자 돌아서 오는 것이 미국식 유머라면, 장황함과 엉뚱함이 숨어있는 것이 프랑스 유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뻬의 익살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런 유머가 아니더라도 큼지막한 책에 그려진 상뻬의 데생과 그 안에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는 무궁무진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상뻬의 데생집의 제목이 정해져 있다곤 하지만, 일관된 느낌을 남긴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너무도 다양하게 펼쳐지고, 느낌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책을 보는 작가이기에(책을 읽으면서도 어떻게 느낌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개인적인 압박감을 빗대어) 정말 즐겁게 마주한 책이었다. 그렇기에 상뻬의 데생집이 '이러이러하다' 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상뻬의 데생집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기쁘고,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의 작품을 느끼고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하다. 그가 그려내는 데생으로 인해 굳이 말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상호간의 공감을 느끼고, 이면의 느낌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앞으로도 그의 데생집이 계속 발간되길 바라는 마음이며, 다양한 활동으로 독자들과의 만남이 잦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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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 민음의 시 161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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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리움이 밀려오는 밤이면, 시집을 꺼내게 된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채워졌다 해도 내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문학중 하나는 시(詩)다. 몹시도 고단하고 쓸쓸함으로 채워지던 마음을 부여잡던 밤, 시집을 꺼냈다. 위로를 얻으려 펼쳤다고 하지만, 내 자신조차도 무엇을 얻으려 시집을 집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마음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펼친 시집이었건만, 시집을 읽는 내내 그리움이 더 짙어지고 말았다. 시집 가득 잠재해있는 그리움과 내가 가진 그리움이 맞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시를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과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것, 모든 것을 시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 등등 나름대로 많은 의견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 틈바구니에서도 또렷이 정의되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을 짧은 언어라 할지라도, 누가 봐도 수긍할 수 있도록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시집을 만날 때마다 하나로 단정 지어지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늘 어리둥절해 진다. 몇 권의 시집을 읽었다고 해서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낯익었다 싶다가도 낯선 시집을 만나면 새로움이 샘솟는다. 그래서 더더욱 시를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시의 세계에서 여전히 입문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해설을 해주신 문광훈님은 '시는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생생하게 기억하며 정확하게 기억하면서 인간과 그 주변을 돌아본다.' 라고 했다. 장석주 시인의 시는 문광훈님의 '시'에 부합하는 시였다. 모든 시인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해도, '인간과 그 주변을 돌아본다.'는 것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의문이다. 아무래도 시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깊게 들어가 버리는 '인간과 그 주변'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몽해항로>에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일상의 자잘함을 모두 시로 승격시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웃에게 떠들지 못할 소소함을 시로써 펼쳐놓고 있었다. 그런 시들을 마주하면서, 시에 대한 어려움을 떨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의 일상의 자잘함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2부 앞부분에서는 곤충과 동물들에 대한 짤막한 시들이 나온다. 모기에게 남의 피를 빨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평생을 손발 빌며 산 파리에게 남루하다는 씁쓸함을 던진다. 달팽이에게는 '사는 것 시들해/배낭 메고 나섰구나.'라고 안쓰러움을 내비치는 시들을 보며, 보통 사람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는 것을 통감했다. 1부의 <뱀을 밟다>에서는 '풀섶에서 일어난 가벼운 접촉 사고다.(중략)/너를 밟은 건/실수였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딱 치며 '올 커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논두렁을 걷다 뱀을 밟은 기억이 있었기에, 내 발길질에 놀라 똬리를 푸는 뱀에게 이제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시에는 너무 놀라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친 기억밖에 없고 종종 에피소드로 읊어댈 뿐이지만, 이 시를 빌어 나 또한 그 뱀에게 사과고하는 바이다.

 

  그리움을 달래려다 도리어 시인이 드러낸 그리움과 마주치고 말았다는 나의 고백이 드러났던 시는 <청산에 살다>였다. 시조를 읽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무위도식하는 삶을 현대판(?)으로 그려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소망가운데서도 나의 감정을 건드렸던 것은 그리움이었다. 자연이 아무리 삶을 위로해 준다고 해도, 그리운 사람 하나 곁에 있는 것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곳곳에 그리운 이가 다녀가면 온 몸과 일상에 붙어있는 후유증이 드러났다. 그리운 이가 곁에 있는 것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분위기가 드러나는 시를 읽을 때마다 그래도 그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비단 시인에게만 던지는 소망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집을 덮었을 때는 잠들기에 그리 깊은 밤이 아니었음에도,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어지럽게 펼쳐진 꿈속을 헤맸고, 몸을 뒤척이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머리맡에 놓인 시집을 보면서, 나를 어지럽게 한 것이 너였다며 가벼운 면박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몽롱해 정신을 차릴 수 없으면서도, 결국 나를 위로해 준 것이 시였음을 깨닫고 있었다. 북받치는 서운함과 그리움이 범벅이 되어버린 가운데, 약간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 때문이었다. 다시 들춰보아도 어제의 간절함과 위로가 다시 샘솟지 않음을 알기에, 비슷한 일상이 찾아오는 날에 다시 펼쳐볼 것을 다짐했다. 그렇게라도 내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길 바랐다. 타인의 삶에 어떠한 간섭을 하지 못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이에게 언어로 위로를 실어 나른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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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 : 생활풍습 이야기 상(上) - 성경의 비밀을 푸는 생활풍습 이야기 열린다 성경
류모세 지음, 최명덕 감수 / 두란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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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알게 된 것은 <성전 이야기>를 읽게 되면서였다. 성경에 얽힌 이야기가 너무나 재밌고, 신선해서 여기저기 입소문을 내고 다닐 정도였다. 이후로 나올 시리즈를 기다리다 <생활풍습 이야기>가 2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먼저 <상>권을 집어 들었다. 읽으면서도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신앙을 가진 지인들에게 또 다시 입소문을 퍼트렸다. 그랬더니 현재까지 출간된 시리즈를 모두 사달라는 사람이 3명이나 되었고, 3세트를 주문해주고 나니 꼭 내가 이 책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단지 책이 좋아서 설명했을 뿐인데, 세트로 구비할 줄은 몰라 내가 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도 그분들을 따라 나부터 빠진 책들을 채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리즈 소설도 아닌데, <열린다 성경> 시리즈를 기다리게 되는 것은, 성경읽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내용으로 인해 온전히 성경을 읽는다고, 모든 부분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초배경이 없이 성경을 읽었을 때의 좌절감을 알기에, 이렇게 도움이 되는 책을 통해 성경과 가까워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본다. 새로운 시리즈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성경을 읽고 아직 접하지 못한 시리즈 내의 다른 책을 봐야했음에도, 늘 게으름을 피우다 새로 나온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생활풍습 이야기>였고, 두 권으로 되어있어 다양한 성경배경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로 마주한 책이라 부담감이 없어서인지, 너무 재미나게 읽고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내심 뿌듯해 했다.

 

  생활풍습 이야기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성경배경에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를 보고서야 내가 생각한 생활풍습이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시대에 옷감은 무엇이며, 빨래는 어떻게 하며, 어떤 방법으로 고기잡이를 했는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갖게 되는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현재에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 2000년 전 성서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저자를 통해서 현지의 소리를 들은 듯 했다. 현재의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2000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없지만, 국내보다 그곳에서 흔적이 더 많기에 피부에 더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열린다 성경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을 읽으면서 지나쳤던 단어 하나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온다는 사실일 것이다. 성경을 읽는데 그 단어의 의미가 큰 흐름을 방해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허투로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읽다보면 이렇게 상세하게, 이런 어휘가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들이 있었다.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얄팍한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숨겨진 의미를 알고 나면 그런 생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새로움을 알게 된다. 일례로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라고 하면 바울의 전도여행에 관련된 여인으로 생각을 그쳐 버렸다. 그러나 자색 옷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당시의 사람들이 입는 옷감의 색깔로 신분을 알게 되는 등 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냄과 동시에 예수님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에 분포된 말씀을 중심으로 생활풍습을 풀어가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모든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올 정도로 읽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무래도 성경이 주는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나 사람 사는 향기와 하나님의 뜻이 어우러져서인지 재미와 평안함, 그리고 은혜가 함께 버무려졌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다는 것에서 어떤 부분을 잡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당시의 교육방법, 옷감의 재료와 세탁, 화장품과 향신료까지 그야말로 생활 곳곳에 숨겨진 하나님이 뜻이 참 달콤했다.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거나, 지나치기 일쑤였던 성경 안에 감추어진 의미가 이렇게 신선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성전 이야기>를 통해서 이미 경함한 바 있지만, 좀 더 친숙한 생활 속으로 파고든 이번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굳이 출간된 순서로 읽는 것 보다, 은혜가 닿는 대로 읽고 싶은 순서로 시리즈를 만나보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다.

 

  이렇게 성경과 연관된 책을 만나면, 왠지 성경을 읽고 이 책을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온전히 책 속으로 빨려 들지 못할 뿐더러, 성경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저자도 서문에 밝혔듯이 억지로 영적인 메시지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과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발상만 이루어진다면 메시지는 자연적으로 따라온다고 했다. 또한 이 책을 재밌게 읽고, 성경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고 해서 지식으로만 채우려고 하면 안 될 것이다. 귀만 커지고, 머리만 커지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행동할 수 있는 지식을 알아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따라올 것이다. 늘 말씀과 함께하며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할 때에 우리의 삶이 더 빛을 발하듯,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다 성경>시리즈도 그에 부합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에, 많은 신앙인들이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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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새벽 2시를 향해가고 있는 시각, 당신이 있어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다. 한없이 벅차오르는 가슴을 가눌 길이 없어, 지금 당장 이 문자를 보지 못할 것임을 앎에도 전송 버튼을 눌렀다. 눈가를 훔치며 보낸 문자라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뜨거워지고, 한 존재에 대해 한없는 애정이 샘솟았다. 청승맞다고 해도 좋을 행동을 하게 된 것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독특한 제목의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라는 책을 읽은 뒤였다.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데서 오는 거리감을 충분히 좁혀주었고, 어디선가 대필을 하며 하루를 일으키고 있을 한 남자가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한 남자의 일생과 슬픔을 느껴버려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단조롭고 덤덤하게 이어지는 남자의 일상과 추억의 추켜올려짐은 여기저기 얽혀 있었다.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남자와 추억 속에 존재하는 남자는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같은 인물로 보기 힘들었다.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른들에게도 유년시절이 있고 청춘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힘들 듯, 중년에 머무른 한 남자의 현재와 과거의 회상의 연결을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시작에 등장한 남자의 일상은 특별할 것이 없는,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대필을 하며, 자잘한 원고를 쓰는 주인공은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과 일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심심하게 다가왔으면서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어, 시작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그를 바라보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분주하게 마음을 놀리면서도 일상을 덤덤하게 이겨내고 있는 주인공의 독백이 길어지면 그의 실체를 모두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실체를 가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직감하면서도 도시의 구석에 웅크리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평범함을 엿보고 싶었다.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겠다 싶은 조짐이 보였던 것은 독특한 의뢰인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기억하지 못하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써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며 찾아온 노인이 있었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등장에 주인공이 그의 이야기를 소설화함으로써 무언가 이변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노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에도 한 남자의 흔적을 좇아 소설을 써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물과 인물이 좀 더 또렷한 양상을 띠지 못하고 사그라진 것이 아쉬웠다.

 

  그의 일상을 좇으면서도 의뢰인들에 의해 그의 지난한 삶이 뒤바뀔 거라며 무작정 기대를 걸었다. 소설이므로 그 정도의 기대를 해도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각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필을 업으로 삼고 있긴 하나, 도리어 직업을 빌미로 자신의 인생을 대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중언부언 털어놓고 있었지만, 글이 아닌 생각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들이라 대필 업의 주인이자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혼자서 힘겨운 하루를 살아가며, 생계를 위해서 글을 쓰는지, 살아온 날들을 불쑥 떠오른 회상들로 대체하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남의 인생의 글만 써주면서 느끼는 자괴감이 느껴져서가 아니라 그런 일련의 과정들로 충분히 자신의 삶을 말했다고 생각했다. 아내를 빈자리, 유년시절의 추억, 가족의 이야기, 시골에서 살았던 추억들을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온 힘을 다해 그리움을 말하고 있었다.

 

  현재 자신의 생활과 위치에서 서서히 아래로 훑고 지나가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향해 추억을 반추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물큰하게 전해지고 있어, 새벽 2시가 가까워져 가는 시각에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아내의 빈자리를 조금씩 드러내는가 싶더니, 아내와 함께 한 세월을 모두 곱씹었다. 주인공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내를 잃은 슬픔은 더 진해졌고, 그 기억과 맞물리거나 연관 없는 주인공만의 기억들도 함께 들추어졌다. 기억의 근본바탕은 슬픔과 그리움이었다. 유년시절의 추억들을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였고, 아내에 대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내와의 추억이 묻어난 곳에서 아내를 떠올리는 남자, 원래 아내가 없었던 듯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 그 남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슬픔이 전이되어 전혀 다른 성격의 눈물을 훔치곤 했다.

 

  남자의 직업이 대필하는 것이어서인지 글에 관한 내용도 자주 언급되어 또 다른 흥미를 일으켰다. 소설 안에 쓰인 대필할 때의 방법들이 드러나 있어 글쓰기에 참고해도 될 듯 했다. 그런 일상 속에서 그냥 한 남자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한 그 남자의 앞날이 지금과는 다르게 평이하게 흘러간다는 보장이 있었으면 얼마나 다행스러웠을까. 남자가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동네에 아내와의 추억이 많이 묻어 있었고, 조금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내에 부응하듯 남자의 눈에는 죽은 사람들이 보였다. 죽은 사람의 모습은 그 동네에서만 보였고, 소설의 끝자락에서는 죽은 이들과의 조우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시 속에 머무르고 있는 고독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려도 되는 걸까? 그렇게 지나쳐버리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것. 우리의 내면에도 그런 아픔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함에도 제대로 된 교류를 가져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울면서 걸어가는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마따나 이 소설이 "교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움과 슬픔이 더 진해지더라도 한 편의 소설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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