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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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화장>을 읽고,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벽하다는 느낌은 단편소설의 완성도보다 문체에 관한 감탄이 더 짙었다. 문장과 문장을 아우르는 공백의 미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의 글에서 군더더기를 느낄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글이 남긴 여운을 느끼다 그제야 저자의 프로필을 보았고, 내가 느낀 완벽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충분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문장이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해 온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경험을 빗대어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었다. 단 번에 그의 문체에 빠져 문학선집을 섭렵했건만, 단시간에 너무 많은 작품을 소화시켜서인지 그의 문체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틈틈이 발행되는 그의 작품을 만나면서도, 처음 느꼈던 그 열정을 끌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한동안 그의 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다, 본격적으로 만나고 싶어 꺼내든 책은 <공무도하>였다. 온라인 카페에서 인기리에 연재 될 때에도 꿋꿋이 종이 책으로 나오기를 기다려 사인 본까지 받고도, 한참을 책장에 묵혀둬야 했다. 책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 틈에서 길을 잃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의 작품이 스스로 내게 다가올 때를 기다린 것이다. 그 때에 맞춰 온 것이 <공무도하>이므로, 저자와의 오랜만의 조우를 성공리에 이끌고 싶었다. 그냥 책을 읽으면 읽는 것이지 성공적인 조우라는 거창함을 들출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권의 책과 만나는 것도 적절한 시기, 읽는 이의 마음 상태, 주변 환경이 밑받침 되어야 온전히 들어옴을 경험한 사람은, 저자와의 만남을 앞둔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책의 시작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연의 재해가 한꺼번에 밀려오듯이 여기저기서 무너지고 깨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절망적이 되어갔다. 뚝방이 무너져 마을이 휩쓸리고, 지하철이 잠기는 것을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재해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불안함이 그대로 밀려왔다.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그것을 취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TV화면을 통해 지켜보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불안함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클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으며 현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독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불안감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다. 불안과 절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긴 했지만, 감정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은 저자의 위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많은 정보를 인터넷과 TV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처럼, 책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곳곳의 소식을 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등장시킨 인물들이 전해주는 세상 소식이나 삶의 표상들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불안감이 내 안에 계속 포진해 있는 상태에서도 그들이 행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흐름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런 인물들은 신문기자 문정수, 에디터 겸 디자이너 노목희, 노목희의 고향 선배인 장철수였다. 그들로 인해 수없이 얽히고설키는 인연과 세상의 소식들은 때로는 평이하면서도 격정적이어서 이유 없는 한숨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사람 사는 모습일 수도 있고, 자연스런 삶일 수도 있는데 그 주변을 맴도는 나는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모르겠다. 문정수는 기자생활을 한 저자를 생각나게 했고, 장철수는 격동의 시류를 갈아타지 못한 아류의 표본으로 비춰졌다. 문정수와 관계를 맺고 미술교사에서 출판사로 이직한 노목희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인물로, 결국 스르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정수의 직업이 기자인 만큼, 그가 일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독자에게 전해졌고, 신문기사로 쓰였으며, 노목희에게 전달자로 직접 전해졌다. 그 일들은 기사화시킨 것보다 훨씬 진하고 노골적으로 전해졌으며, 신문으로 접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이면이 드러나 있었다. 이면의 드러남을 문정수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는 자들이 색다른 감흥을 느껴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실체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를 계속 엄습했던 불안감이 실체를 드러냈음에도 또렷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은 흩어져 버렸다. 곳곳에서 들려오던 정보와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행보는 낱낱이 흩어져 아무 것도 쥐어지지 않은 빈손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바라봄은 어느 것이 주목할 만한 삶이라는 주됨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그렇게 끝이 났다. 굵은 줄기를 잡아낸다는 것이 무모할 정도로 흐름을 보여주었던 글이었기에, 흩어짐이 야속하지 않았다. 다만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따져 물을 수 없는 허무함이 책의 끝에 잠재해 있었다. 흩어짐 가운데 조금이라고 후련함을 던져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덧없음을 한탄할 새도 없이 그들은 인생의 틈바구니로 잠식해 버렸다. 그 잠식이 더 이상 그들에게 허무함을 안겨주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살아갈 것 같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 위로해야 할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할지 여전이 내겐 의문으로 남아있다.

 

  책을 읽을 때, 제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공무도하>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도, 책 내용과 연관시키지 못할 정도로 지나쳐 버리기 일쑤인데 왜였을까.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라는 문구가 계속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사랑을 느낄 여지도, 겨를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왜 자꾸 그 말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나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들은 결국 뭍으로 올라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강도 건너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터전을 전전하는 사람들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흐름에 맡긴 것인지 따져 묻고 싶지 않다. 그들이 뭍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어 줄 밖에는.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강 너머를 바라보며 뭍 속으로 따라가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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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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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일상의 여유가 생겨, 먼저 한숨 자고 일어나 밀린 책들을 읽었다.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혼란이 일 정도로, 최근에 책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책 한권을 꺼내 읽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를 집어 들었다. 최근에 소설만 읽어서인지 다른 장르로의 여행이 필요하기도 했고, 최근들에 여행 책이 많이 출간되는 것에 관심이 갔다. 이 책을 꺼내든 계기는 남미에 대한 동경보다 책 제목이 주는 의미가 내게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현재 내 마음상태와 비슷한 제목을 지닌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찾고 버릴 수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길 바랐다.

 

  책의 겉표지에 적힌 '출간 즉시 영화화 확정'이라는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뜨악했었다. 여행 책을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보니,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을 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만나게 되는 책 속의 내용을 상상하게 되었다. 혼자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남미를 떠올리니,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이 속에서 뭉텅뭉텅 떨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사람들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다들 무언가를 피해 오거나, 버리러 오는 사람들이었고, 개중에는 찾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가 말한 여행의 두 가지(잊기 위해서, 자신 안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기 위해서)의 목적 가운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속했다. OK김만이 사랑하는 로사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날아왔을 뿐, 불행을 자신이 옮긴다고 생각하는 로사, 사진작가 원포토, 방송작가인 나작가, 스스로를 가시고기라 생각하는 박벤처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온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12월 23일부터 12월 31일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현재의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들이 뿜어내는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삶의 표상이었다. 다들 마음 깊이 상처를 안고 찾아온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여행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켰다. 처음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펼쳐질 때는 과연 여행 책인지, 소설인지 헷갈렸던 게 사실이다. 책 속에 실린 사진들을 구경하면서 남미의 매력을 느낄 거라 생각했던 내게, 사진은 뒷전이었고 스토리를 읽어나가기 바빴다. 제각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왜 다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떤 결말을 맞을 것인지 조마조마했다. 사랑하는 로사를 찾기 위해 중요한 일을 버리고 비행기를 탄 OK김, 막장드라마 작가라는 비난을 피해 온 나작가, 사랑하는 연인을 잊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한 원포토, OJ여사 게스트 하우스에 이미 진을 치고 있는 박벤처는 서서히 얽히고 있었다.

 

  그들이 얽히는 계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공간적 배경과(OJ여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르는 것도) 여행자라는 동질감이 끌어낸 계기가 컸다.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인 OJ여사의 게스트 하우스는 독특함 그 자체였다. 철저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을 느끼려는 주인을 따라, 그 곳에 머물게 되는 주인공들도 어느새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제각기 사연을 안고 온 사람들인 만큼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OJ여사였다. 그리고 OJ여사의 생활방식과 사고에 따라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 버리고자 하는 것들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 나작가와 원포토가 그랬고, 로사를 찾아 온 OK김, OK김을 떠나온 로사가 그랬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나를 이끌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익숙해 질 때쯤 배경으로 펼쳐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어느 정도 눈길을 던질 수 있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져서 인지, 뻔 한 결말이 예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소설책으로, 영화의 시나리오 배경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매력을 져버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OJ여사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내면이 어떠하든 간에, 도시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광하는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친근했다. 한인 타운을 거닐면서 지구 반대편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하고, 전혀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남미의 사람들로 인해 색다름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면서 자신을 되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피처로 삼아온 곳에서 미약한 가능성을 끌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다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떠나온 두 남녀가 있었으니, 영화 같은 이야기면서도 여행의 묘미를 한껏 살려 주고 있는 이 책이 특별하게 다가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책 속의 주인공들과 얽히면서 이들의 이야기가 실화인지 여부를 따지기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배경과 맞물리는 구성이 돋보였다. 마음에 힘겨움을 가득 안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도, 새로운 도시를 알아가는 새로움도 함께 부어주었다. 그들이 이동할 때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물의 간단한 소개와 사진은 물론, 그들의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는 지까지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 같다는 느낌은 허구적인 면으로 다가오는 것이 많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듯 책의 중간 중간에 드러난 짧은 산문들은 여행지에서 느낄법한 마음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랬으니 여행 책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독특함이 이 책을 한 호흡에 읽게끔 나를 이끌었던 것 같다. OJ여사의 간단한 후기로 그들의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식들이 반갑고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를 가져다 준 책이라기보다, 과정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한 책이었으므로 그들이 부디 그곳에서는 많은 고통을 안고 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두툼한 책을 이렇게 순식간에 읽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없이 읽다 보니, 어느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행은 끝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통 보아온 여행책의 모습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이 펼쳐진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소설처럼 영화처럼 독특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의외로 괜찮네!'라고 혼자 읊조릴 정도로 여행 책이 이런 형식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신기했다. 저자가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마케팅 관리도 했다는 경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과 함께 실린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 책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람의 삶의 단상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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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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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임에도,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은 순전히 겉표지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자화상이 실려 있었고, 고흐의 눈빛이 한 없이 고독해 보였다. 그 눈빛을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충동적으로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관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 겉표지에 고흐의 자화상이 실려 있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헤르만 헤세의 몇몇 작품을 읽는 동안 작품에 우울한 기운이 깃든 것 같아 즐겨 읽는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겉표지를 보고 책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계면쩍을 정도다. 
 

  고흐의 자화상만큼이나 책 제목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클링조어의 여름에서 고흐의 여름을 떠올릴 수 있었고, 특히나 강렬한 그림을 그려냈던 아를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기다 '클링조어'라는 인물의 마지막 여름이라고 하니, 고흐가 숨을 거두었던 7월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고흐와 잔뜩 연관을 시키며 책을 펼쳤건만, 이내 혼미해지고 말았다. 고흐와 비슷한 인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 하더라도 고흐와 비슷한 삶의 단상이 펼쳐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이질감 보다, 어지럽게 펼쳐지는 내면의 드러남 때문이었다. 내면이 처절히 파괴되어 가고 있음에도 그림을 그리려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어느 정도 비슷했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클링조어의 내면은 고흐와 닮아있으면서도 달랐다.

 

  짧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줄거리를 찾아내기가 힘이 들었다. 글을 읽는 순간 흩뿌려져 버렸고, 클링조어의 내면을 알아간다는 점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 수렁의 끝은 죽음이었고, 과정에는 클링조어의 고통과 열정, 저자의 내면을 빗댄 고흐의 삶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얇은 책을 읽었음에도, 속도는 더디기만 했고, 읽고 난 후에도 또렷해지는 기분은 덜했다. 오히려 온통 어지럽혀진 곳에 발을 디디고 온 느낌이었고, 책을 덮고 나서도 혼란스러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묘사에 대한 세세함이 지나치면서도 흐름을 간파할 수 없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저자의 문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글 안에서 펼쳐지는 클링조어의 피폐해져가는 모습은 광기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클링조어는 술과 여자가 늘 포함된 그의 일상에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가득 머금은 채, 오로지 그림으로 표출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클링조어의 내면이라고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았는데, 역자해설을 통해 저자가 이 작품을 쓸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게 되었다. 헤세는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정신적인 고통이 엄청났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 거듭되는 가정사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헤세가 새로운 곳에 정착을 하면서 개인적인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 가운데 쓴 작품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고, 문체의 독특함, 고흐와 클링조어에게 부여된 혼란스러움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클링조어를 단 한 사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고갱을 생각나게 하는 클링조어의 친구나, 자연스레 고흐를 떠올리게 만드는 클링조어의 행보는 저자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광기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목도한 기분. 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클링조어의 행보를 제대로 간파할 수 없는 가운데,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한 사람의 인생을 덤덤히 지켜보는 시선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무지가 나를 온통 지배했다. 풍류를 즐겼던 이태백을 좋아하는 친근감이(이태백이 특히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 아님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클링조어란 인물은 끝끝내 나와 일치되지 못했다. 관찰자의 입장도 실패하고, 나의 내면을 빗대어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 클링조어였다. 겉표지에 고흐의 자화상이 실린 것이 궁금해 집어 든 한 권의 책은, 혼란스러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클링조어, 고흐, 헤르만 헤세의 세 인물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다. 한 없이 자유로운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나의 탓일 것이다.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어서인지, 클링조어가 보낸 마지막 여름에 관한 에피소드와 세밀한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클링조어 혹은 고흐, 저자와의 만남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농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지막'이 주는 삶의 끝자락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엔 부족할지 모르나, 예술과 버무려진 내면의 광기는 낯설면서도 간과하기 힘들었다. 이 작품을 통해 저자는 이해와 동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닿지 못한 세계의 끝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광기로만 치부하느냐, 예술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으로 보느냐는 오로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 무한함의 가능성 속에서 한 자락의 위로를 이끌어 낸다면 그것보다 값진 경험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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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 나를 사랑하게 하는
이무석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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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눈이 탱탱 붓도록 운 일이 있었다. 나만 상처를 입으면 괜찮을 텐데, 나로 인해 타인까지 상처를 입을까봐 그게 겁이 나고 두려웠다. 그 과정에서 나를 한없이 깎아내렸던 것은 물론, 내게 주어진 환경과 현재의 상황들을 무척 비관했었다. 오해가 풀리고 도리어 위로를 받고서야 마음이 진정 되었지만, 잠시나마 내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 일 때문에 무척 마음이 상해있을 때, 책장에서 <자존감>이란 책을 발견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장르 문학을 뽑아냈을 내게, 유난히 또렷한 시선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아무래도 그때 나의 마음상태 때문에 자연스레 이 책에게 마음을 뺏긴 것이리라.
 

  누군가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해 질 것 같은 기분.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 들어 간접위로라 할지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럴 때 만난 책인 만큼, 책 속의 한구절한구절이 내게 가깝게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좀 더 내 자신과 깊이 있게 만나고, 내가 경험했던 감정을 잘 추스르려면 저자가 제시하는 키워드를 잘 받아들여야 했다. 그건 바로 열등감이었다. 누구나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열등감. 그 열등감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펼치는지, 또한 성격의 형성과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사례를 통해서 비춰주고 있었다.

 


  의학박사이자 국제정신분석가인 저자는 열등감이 조건이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잘못된 관점으로 인한 열등감으로 어떻게 삶이 부서지고 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외모, 학력, 집안, 능력에 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만 의식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정도였다. 열등감으로 인해 일상의 어려움이 닥치니 저자에게 상담을 의뢰했겠지만, 그들이 이야기가 나와 거리가 먼 타인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런 사례들 속에는 내가 의식하고 있지 못한 열등감, 의식하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감이 내제되어 있었다.

 

  다양한 열등감을 지닌 사람들의 사연을 알아가다 보면, 공통분모로 작용하는 것이 눈에 띄기도 했다. 바로 유년시절에 자리한 성장과정의 배경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나타난 열등감의 대부분은 어릴 적에 가정 내에서 비교당하거나, 학교에서의 안 좋은 추억, 강박감 등이 원인으로 작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하면서 그런 경험이 없을 순 없지만,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거나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열등감이었다. 열등감을 건강하게 이겨낸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열등감이 뱉어내는 후유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열등감에 휩싸이면 자존감도 낮아지고,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갖가지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저자와 만나 이야기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자존감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열등감을 없애고 자존감을 높여나가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이면 충분히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례도 많았다. 고졸이라는 학력이 부끄러우면 학교를 다니면 되지만, 그것이 쉬운 방법이 아니므로 관점의 문제를 해결하면 되었다. 외모에 자신 없는 부분이 있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라도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했다. 그런 시도를 조금씩 하다보면, 자신감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연스레 자존감도 높아져 삶의 질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극도의 열등감에 휩싸여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이 저자를 찾아왔지만, 그 이후에 달라진 모습을 통해 충분한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며,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포함된 몇몇 가지 열등감(고졸인 학력, 타인의 시선 신경 쓰느라 당당하지 못한 언행)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고졸에 대해서 한 때 열등감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대학을 가서 남들과 동등해 진다는 생각보다 공부가 하고 싶어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시선 때문에 당당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며 고쳐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무조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타인과 툭 터놓고 이야기 하거나,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가 내게도 필요했다. '진짜 자기' 파악하고 만나려는 노력이 있는 한, 열등감에 휩싸인 절망적인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최소한 자기의 문제점을 찾았다면, 그 문제해결을 위해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인식이 시도의 발판이 될 것이므로, 조금씩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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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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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문학에 협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게, 이름을 들어봄직한 작가의 신간은 마냥 반갑기만 하다. 아직 저자의 작품을 한 권도 만나지 못했더라도,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읽고 싶은 욕망이 인다. 오래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이기호의 소설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음에도 여태껏 못 만나고 있다가 신간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기존 작품을 읽지 않아 어떠한 변화를 꾀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는 없더라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저자에 대한 소문은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책은 그야말로 너무도 순식간에 읽어 버릴 정도의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어느새 책장을 덮고 있는 내가 낯설 정도로 눈의 피로를 급격하게 상승시키는 읽힘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뒤에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건져 오르는 것이 없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며 풀어나가야 할지 그것도 고민되었지만, 내게 와닿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계속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줄거리를 캐내는 것도, 이런 부분이 맘에 들고, 저런 부분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내가 책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간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과연 나는 책 속의 인물들을 제대로 만나기나 한 것일까?

 

  이 책에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나'란 인물과 시설에서 만난 '시봉'이다. 그들이 만난 시설이란 곳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드나들고, 쾌적한 환경이라고 볼 수 없기에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하지 않았다. 복지사들에게 얻어터지고, 약을 먹지 않을 땐 어질어질 하고, 포장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은 '시설의 기둥들'이란 이름으로 그곳에서 풀려나게 된다. 포장하며 써 넣은 글 덕분에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시봉의 집으로 향한다. 시봉의 집엔 그의 여동생과 동거중인 '뿔테안경'이 있었다. 그곳의 분위기도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동네 구경을 하며 소일거리를 삼던 그들은 '환자'였고 무언가 좀 많이 부족해 보이는 시설의 기둥들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시설에서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시설의 반장 역할을 맡은 '나'가 자신 있었던 것은 복지사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사과를 대신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없는 죄까지 만들어가며, 일일이 보고를 하고, 얻어터지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그것이 새로운 일거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한 것은 뿔테안경이었다. 하지만 남이 대신 해주는 사과로 돈벌이가 될 리도 없었고, 사과의 원인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나'와 시봉이 첫 고객으로 삼은 것은 동네의 과일가게 주인과 정육점 주인이었다. 무척 친한 사이인 그들을 닦달하다 사이를 더 갈라놓고 말았다. 뿔테안경이 전단지를 만들어 고객을 확보하려 했고, 정식적인 첫 고객은 절름발이 아이가 태어나자 부인과 아이를 떠난 중년 남자였다. 그 남자가 그들에게 부탁한 사과를 부인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다 '뿔테안경'이 어이없는 사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거기다 '나'는 시봉에게 '죄'를 지은 채, 복지사들에게서 혼자만 도망쳤고, 시봉의 여동생을 향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가려는 시도에서 책은 끝이 난다.

 

  그 모든 이야기는 현실에서의 그들, 시설생활 가운데서의 그들, 그리고 사과를 위해 만난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죄'의 이유를 듣다보면 얼핏 그럴듯해 보여 혹시 나도 새로운 죄를 짓고 사는 건 아닌지 의아할 정도였다. 정육점 주인에게도 사과의 빌미로 '반찬을 더 집어 먹는다', '공을 높이 올렸다'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고 있었지만,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더 많아진다는 논리에 자칫하다간 빠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행동과 일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시설에서 정상적이지 못했던 시간들과 맞물리면서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시설로 들어온 지도 알지 못하는 '나'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원장도 찾아가고, 아버지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 아버지란 존재가 실은 자신과 같은 시설에 있었던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도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지 않아, 김빠지는 결말 앞에서도 의연(?) 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시봉이 격은 일들은 분명 가볍지 않고 시봉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독자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이 저자의 익살과 재기 발랄함인지는 몰라도, 등장인물들로 인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느 것에도 무게중심을 두고 싶지 않은 가벼움과(소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무게가 있음에도)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혜경님은 해설에서 카프카의 <소송>에서의 주인공 요제프 K가 직면했던 상황(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 채 죄를 인정하고 자백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했다. '나'와 시봉이 시설에서 그랬고, 다른 원생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사과를 대신 해준다는 명목으로 찾아다닌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알 수 없는 '죄' 때문에 괴로워했고, 그들은 그 '죄'를 찾아내서 사과를 하고, 상대방이 받아들여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수긍할 수 있는 '죄'인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오로지 일방통행으로 행해지는 사과의 오류였다.

 

  이 소설은 Daum에 일일 연재된 소설이라고 한다. 아무리 인기 있는 작가가 연재를 해도 종이책으로 발간 돼야 읽는 나로서는, 한 번도 연재를 보지 못한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골격만 빼고 새로 다시 썼다고 하니, 그것 또한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래저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보다는 '나'와 시봉이 하는 사과의 의미, 시설 안에서의 자아의 잃어버림, 현실에 섞이지 못하는 불순물 같은 존재인 주인공들로 인해 내가 직면하게 되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했던 사과의 생뚱맞음처럼 나에게 '죄'를 묻는다는 것과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사과'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그것 또한 난처하다. 오히려 '죄'를 더 지으며,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나를 마주하는 것이 더 익숙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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