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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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를 포함해 좋아하는 작가를 열손가락이 부족하도록 나열하면서도, 좋아하는 시인을 꼽을라치면 한 없이 손가락이 초라해진다. 도무지 생각나는 시인도 없을 뿐더러, 유명한 시인의 작품이라 해도 온전히 이해한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란 장르를 어려워하는 것이고, 느낌을 남기려고 해도 언어의 능력 부족에 개탄하는 것이리라. 그런 내게 드디어 좋아하는 시인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이 등장했다. 오래 전 <사라진 손바닥>을 읽고 염두에 두고 있던 시인이긴 했으나, 한 작품밖에 읽지 않아서 좋아하는 작가 반열에 올리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다 <사라진 손바닥>의 느낌이 그리워, 시인의 다른 작품을 구입했다. 그 작품은 <어두워진다는 것>이었고, 시를 읽으면서 한 없이 내 마음을 파고드는 언어의 유희에 어쩔 줄을 모를 정도였다.
 

  학창시절, 시를 음미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음에도, 막상 시집을 마주하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더군다나 시집을 펼쳐놓고 글자를 읽어나가기 바쁜 나에게 나희덕님의 시는 음미가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해주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읽는 이에게 그대로 스며들어 버리는 흡착력 때문에, 시집을 덮고 난 후에 공중에 떠도는 시를 기억해 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분명 속도를 늦추고, 두어 번씩 반복해서 읽었음에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적어도 나의 마음을 건드렸던 시구에 메모지를 붙여 놓을 법도 하건만, 휑한 시집을 보니 내가 과연 시집을 읽은 것인지 의심이 되었다. 거기다 발문을 읽어도 나희덕님의 시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나의 능력 밖이었기에, 나의 갸웃거림은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시를 다시 읽다 어슴푸레 내가 가졌던 의문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좋은 시구에 메모지를 붙이지 못하고, 기억나는 시가 없다는 것에 당황했던 이유가 드러난 것이다. 자연스러움. 너무나 자연스러워 내가 표현해내지 못한 것들을 이질감 없이 드러냈기에 눈치 채지 못한 것이었다. 가령 <빗방울, 빗방울>이란 시에서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사선이다/세상에 대한 어긋남을/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이란 표현이 그랬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에 부딪히는 비를 보면서 시인처럼 느꼈음에도 이렇게 표현할 감각이 내게는 없었다. 거기다 그렇게 느꼈다는 동질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술렁술렁 읽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해도, 읽는 이로 하여금 장애물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막힘없이 시가 흘러갔던 것이고, 내 안에 흡수된 시를 다시 꺼내는 것이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시를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녀의 시에 대한 느낌이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질거림으로 남아있는데,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발문을 쓴 이성호님의 표현을 빌려 '모든 사물을 향해 열려 있는 그의 감각과 사랑에 있다.' 란 말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밖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감각을 지닌 시인들의 시각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해도, 더 남다른 능력을 지닌 그녀를 추켜세울 뿐이다. 모든 사물을 향해 열려있는 감각뿐만 아니라, 막힘없는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 나처럼 시에 무지한 독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었는지 모른다. 종종 리듬을 타지 못해 답답한 마음만 안겨주는 시를 만날 때가 있다. 짧은 언어로 풍부한 의미를 내포해야 하는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를 만날 때는 본질의 막힘을 경험하고 소통이 끊겨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나희덕님의 시는 표현을 위한 단어의 나열이 아닌, 본질을 꿰뚫어 그 너머를 보여주는 시를 써 내고 있었다.

 

  이제 겨우 손가락 하나를 펼쳤을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을 나열할 때 나희덕 시인을 가리키는 펼침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집을 만나게 될지, 과연 손가락을 더 펼칠 좋아하는 시인이 생길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나희덕님의 작품이라도 전작하면서 시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보자고 다짐할 뿐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두루뭉술한 느낌을 이렇듯 명확하고 청명하게 밝혀주는 시인이 있는 한, 그녀의 능력을 빌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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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치타가 달려간다 - 2009 제3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0
박선희 지음 / 비룡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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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국내 청소년 문학의 출간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척 흐뭇해진다. 청소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거의 국외 작품 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 청소년 문학에 대한 관심과 그 작품을 읽으면서 얻는 즐거움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거기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비룡소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만나게 되어서 마냥 좋았다. 표지도 너무 사랑스럽고, 블루픽션상까지 수상해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책이 도착해서 잠깐 살펴볼까 한 것이 그날 다 읽을 정도로 흡인력이 굉장했다.
 

   세 번째 엄마를 맞고,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 그런 상황을 모두 수용하는 여동생이 있는 강호의 등장은 출발부터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 출발이 싫다고 그것을 뚫고 나오지 못하면 영영 틀에 갇혀 버린다는 것을 다른 책을 통해 알고 있기에, 번잡한 사무실에서 이 책을 꺼낸 것은 어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문학의 대부분은 안 좋은 분위기부터 시작해 조금씩 밝게 밝혀 나가기에 초반의 뚫림이 중요하다. 아마 집에서 혼자 읽었다면, 우울하다고 책을 덮어 버렸을지 모르나 시끄러운 곳에서 책을 꺼냈고, 초반을 잘 이겨내고 읽어나갔기에 책장은 막힘없이 넘어갔다. 거기다 독특한 책 제목이 내용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었는데, 주인공 강호가 탄 오토바이가 파랑색에다 마치 치타 같아서 그런 제목이 주어진 것을 보고 빙그레 웃음이 났다. 오토바이 하면 무조건 인상을 찌푸리던 나였는데, 그런 오토바이를 치타와 연관시켜 귀여운 겉표지를 이끌어내는 저자의 상상력이 돋보였다.

 

  강호는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알바 하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동생 강이 마음에 걸렸지만, 불가피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삶에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은 강호는 그렇다고 거친 아이는 아니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고, 학교 선생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반 친구들이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 모습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강호를 보면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등학생의 나이에 세상의 이치를 너무 빨리 깨달은 것 같아, 남은 인생이 충분히 바뀔 수 있음에도 가능성을 부어주는 사람이 없어 암울하기만 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선생에 '님'자를 붙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김세욱 선생님을 만나고, 기타 연습을 하게 되면서 강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처음으로 벅차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강호에게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기도 했던 도윤이가 전학을 온 것이다. 외고에서 전학을 와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강호와 닮은 점이 없는 도윤이는 반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그런 도윤이를 바라보는 강호도, 강호를 바라보는 도윤도 4년 전의 일 때문에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활발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호와 소극적이고 공부만 하는 도윤이가 어울리게 된 것은 판이하게 다른 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둘을 갈라놓은 것은 도윤의 엄마였다. 도윤을 엘리트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강호에게 모진 말을 했고, 강호는 그것에 대한 복수로 도윤을 왕따 시켰다. 정확하게는 도윤 엄마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홀로 되어 버린 도윤에게 다시 다가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도윤은 갑자기 변해버린 강호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엘리트 의식에 젖혀 있는 엄마의 숨 막히는 틀 안에서 겨우겨우 견디고 있었다.

 

  그런 강호와 도윤이 친해지는 것은 무리였다. 강호에게 다가가고 싶은 도윤과 4년 전의 죄책감이 은연중에 밀려오는 강호였으니 악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강호와 도윤은 그 만남으로 인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강호는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어딘가에 소속되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었고, 도윤은 공부만 강요하는 답답한 엄마에게서 벗어나 친구를 사귀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것에 해방감을 느낀다. 사사건건 얽히게 되고, 부딪히면서 점점 사이가 멀어지는 듯 보이던 그들이 결국 마음을 터놓게 되는 것은 학교 밴드부 결성 때문이었다. 강호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진이경 선배를 중심으로 강호와 도윤까지 다섯 명으로 구성된 학교 밴드부는, 김세욱 선생님이 담당을 맞아 힘겹게 허락을 받아냈다. 진이경 선배 덕에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게 된 그들이었지만, 곧 도윤의 엄마로 인해 해체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도윤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밴드부 일원이, 무엇보다 강호가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엄마에게 반항하면서까지 자신의 자리를 넓히는 도윤이 처절해 보이면서도, 늘 자신이 연약하다고 한숨짓던 모습을 뒤로한 채 그 과정을 뚫고 나오는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학교에서의 밴드부 결성도 무산되고, 도윤이 공연을 위해서 키보드 반주를 하는 것은 너무 많은 부딪힘이 있었고, 강호는 첫 등장과 마찬가지로 가정환경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풍겨내는 이야기에는 무언가 따스한 것이 있었다. 책을 일어나갈수록 빤한 결말이 보이고, 어떠한 분위기를 이끌어낼지가 예상이 되면서도 비교적 담담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차분해졌다. 어른들이 봤을 때, 나쁜 것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들이 등장(폭주족, 주유소 알바, 클럽, 학교에서의 반항 등) 했음에도, 우울하거나 거칠게 그려지지 않은 것이 안심이 되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가진 이들이라고 해도, 그것들이 해방구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씁쓸했을 정도였다. 밝은 이야기가 아님에도 담담한 그들을 보면서 애늙은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들에게 젊음까지 뺏어가 버린다면 남겨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 보였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아이들, 도움이 되는 어른들이 많지 않았지만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도리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청소년 문학을 읽으면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되면서 자연스레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 책 속의 자유분방한 아이들이나, 억압된 환경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이 도리어 힘이 되었다. 그래서 청소년 문학을 자꾸 읽게 되는데, <파랑치타가 달려간다>도 그런 분위기를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다만, 비슷한 구조에 놓인 이야기의 소재와 구성이 약간 진부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는 내내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닌자 걸스>가 연상되었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제각각 다른 인격체를 가지고 있기에, 소설을 비교하는 것도 무리일수 있겠으나 두 책의 분위기가 흡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과업의 큰 면이 공부이고, 무조건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회나 부모들의 인식사이에서 아이들이 답답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아이들에게 공부는 그만큼 중요하고, 그 중요함을 벗어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시선은 싸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아이들의 기를 펴기도 전에 틀에 가둬버리는 어른들, 그 답답함을 뚫고 나오지 못해 자아를 잃어버린 아이들의 모습이 보여 가엾을 뿐이었다. 최소한 그런 어른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과연 나의 아이가 생기면 그럴 수 있을까란 생각에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는 이런 아이들이 있는 한, 적어도 희망은 남아있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인다.

 

 

*오탈자

 

144쪽

이제 열어덟밖에 안 됐구나!" - 열여덟

 

166쪽

키보드만 있으면 당장 들려줄 수 있느데." -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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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마음을 놓다 - 다정하게 안아주는 심리치유에세이
이주은 지음 / 앨리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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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식구들이 모두 잠든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때쯤이면 노곤해지는 몸을 붙잡고 이대로 꿈나라로 직행하기엔 뭔가 아쉽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으레 한쪽 벽을 꽉 채운, 읽어야 할 책들을 보면서 마치 서점에 온 듯이 뒤적거리며 읽을 책을 찾아낸다. 그렇게 책 사냥에 걸려든 책들은 어떠한 규칙이 있다기보다, 그날의 기분과 취향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늘 어떠한 책이 손에 쥐어질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어제 밤의 책 사냥에서 내게 선택되어진 책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였다. 작년에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책인데, 저자의 두 번째 책이 나올 때까지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제야 읽고 싶어져 꺼내들었는데, 의외로 흡인력 있게 다가와 아쉬운 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졸려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까지 책을 읽고, 사무실에서 틈틈이 남은 부분을 읽어 나갔다. 두 편의 그림과 함께 실린 글의 단락이 읽기 쉽게 나뉘어 있어, 아무 때나 펼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과 일상이 뒤섞인 세계는 그렇게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내가 타인과 대화 할 때 주로 책 이야기가 대부분인 것처럼(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무척 지루해 하지만), 저자는 모든 이야기의 주제를 그림과 결부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 좋아한다고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저자처럼 통찰력을 발휘해서 그림을 해석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몇 줄 안 되는 느낌을 남길라치면, 그것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이렇듯 그림에 대한 느낌과 일상을 자유자재로 버무려 놓은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기간 공부하고 땀 흘려 온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봐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평소에 내게 부족했던 것들을 채워나가 듯, 저자의 글과 일상이 연결 된 그림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똑같은 그림을 보고 있음에도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림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전혀 다른 해석을 드러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터라, 그림을 먼저 보고 글을 읽었음에도 저자의 시선에 많은 부분을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뭐든지 대충대충 보는 성격인지라, 그림의 두루뭉술한 느낌만 기억한 채 저자의 해석을 대입해보면 내가 놓쳐 버린 것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과 세상의 많은 것들을 연결시키고 있어, 그림이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저자 주변의 소소한 일상, 타인을 통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불러내는 그림과의 연결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저자는 그림을 놓고 대상을 풀어나가거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 그림을 합쳐서 펼쳐놓기도 했다. 그런 서술방식은 평소에 그림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기에 적합했다. '사랑, 타인, 나' 라는 주제로 분류해 그림을 흡수하고 있었으므로 특별한 거부감이 없지 않는 한, 누구든지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그림에 중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림과 연결되는 삶의 잔상은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말들이 많았다. 어쩜 나의 마음을 저렇게 똑 같게 표현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내면의 드러냄은 그림 이상의 위로를 던져 주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라는 길을 제각각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으로 끌어내는 힘, 그림에 흥미를 끌게 만드는 유도, 누구나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써내고 있는 것만도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사유를 드러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심리 치유 에세이' 라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부분이 그림에 할애되어 있어 약간의 아쉬움을 토로해 보는 것이리라.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을 읽어서인지 눈만 높아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대한 해석에 감탄하면서도 더 깊이 있는 글을 바라는 것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더 저자의 두 번째 책이 궁금해진다. 내가 아쉬워하는 깊이의 사유가 두 번째 책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또한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독자의 시선이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 싶다. 저자가 봤을 때 읽기만 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많다고 투덜거릴 수도 있겠으나, 언제나 게으른 독자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더 많이 채워주기를 바라는 욕심쟁이라는 것을 얼른 간파했으면 좋겠다. 그런 저자를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독자라고 해도,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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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린이들 - 이기웅 사진집
이기웅 / 열화당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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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힘겹게 쥐고 있던 책을 다 읽고 나면, 나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어진다. 그 보답이라는 것이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아무거나 꺼내서 읽는 것인데, 내 눈에 들어온 책은 이기웅의 사진집이었다. 사진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전문 작가들의 사진을 볼 때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드러내 보였을까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까봐(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마찬가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걱정을 무시하고 있다.) 망설여졌다. 막상 사진집의 사진들을 보고 나니, 나의 염려가 헛된 걱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같은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기본은 보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집이기 때문에 글로 인한 소통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다행히 소설가 조세희님의 머리말이 실려 있어, 이 사진을 찍은 시점의 사회적인 상황과 그들의 내면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의 시대적 배경에 그런 모습이 숨어 있다는 것이 개탄스러워, 사진 속의 비춰진 아이들의 천진난만함과 무척 대조되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나에게 그 시대의 배경을 상상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짧은 글 속에는 당시의 각박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인해서 내면의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했던 당시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내게는 벅찬 일이다.

 

  무거운 마음은 잠시 밀쳐둔 채, 사진 속의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글로 인해서 마음이 무겁다고 사진을 보는 마음까지 무거워 지라는 법이 없었으므로, 편하게 사진집을 열었는데 초반부터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가 보기에도 나의 어릴 적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의 사진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이 찍힌 시기와 장소를 책 뒤편에서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당시의 내 또래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지역은 달랐지만, 나의 성장과 무척 비슷한 배경하며 모습에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내가 성장했던 지역의 근처에서 찍은 사진도 있어 어린 시절의 추억에 파묻히기도 했다.

 

  그 어린 시절 추억이라는 것은 촌스럽고, 지저분하고, 순수하다는 이름으로 가려진 또 다른 모습이었다. 멈춰진 사진을 통해 내면을 속속들이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순간의 표정과 같이 비춰진 배경으로 인해 아이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의 나의 어린 시절을 제멋대로 대입해 짐작하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사진을 통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이 나쁘지 않았다. 국내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현재의 내 또래이거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일 터인데 현재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이일 때의 저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을까, 아니면 빛바랜 사진처럼 과거의 모습은 묵혀두고 현실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넘겨지는 사진은 사진 자체만으로 삶의 연속성을 거쳐 오는 것 같았다.

 

  국내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동질감이 가장 많았기에, 타국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낯선 감이 없지 않았다. 같은 동양권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이질감이 덜했지만,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이국의 아이들은 그들의 과거를 추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멋대로 상상하는 것은 쉬웠으나, 전혀 다른 문화권의 아이들은 그 모습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생활반경에 따른 문화와 다른 배경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는 사진에 찍힌 그대로의 모습을 보며 그 순간의 존재를 느껴갔다.

 

  그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추측하는 것이 어떻든 간에, 사진 속에 담긴 아이들을 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아이들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미리 엿볼 수 없으니, 나의 삶을 회상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 회상으로 인해 현재의 나의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진에 대한 글을 남기는 것이 애초부터 나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뜻밖의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어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아무래도 꾸밈없는 사진을 찍은 작가의 시각과 사진속의 주인공이 순수함의 상징인 아이들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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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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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을 끄고 몸을 뒤척여도 도무지 일어날 기력이 생기지 않는다. 왜 이렇게 몸이 무겁기만 한 건지, 어젯밤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거창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몽롱함에 취해 현실의 나를 분간할 기운조차 얻을 수 없다. 10분쯤 이불 속에서 웅크리다 벌떡 일어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향했고,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양치질을 하다 보니 그제야 어젯밤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5시간이 넘도록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그것만도 피곤해 쓰러질 법 한데 다른 책을 꺼내 새벽 1시를 넘기며 읽었다. 그랬으니 이렇게 나른하고, 몽롱한 기운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잠들기 전에 읽은 하루키 소설이 피곤함과 마구 뒤섞이면서, 도대체 어떤 내용을 읽은 것인지 한참을 떠올려도 공허만이 뇌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꿈에 아오마메와 덴고가 나온 것 같다. 그것이 소설의 내용인지 꿈의 내용인지 확실치 않아도, 그 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떻게 등장해 어떤 이야기를 흘리고 갔는지 기억이 날 리 만무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 둘의 존재가 들어찬 것은 확실했다. 잠들기 직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꿈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我)여도, 이처럼 강렬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야기는 실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지, 그 둘의 진전된 만남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망설여진다. 1권에 이어 2권을 읽고, 책 내용이 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음에도 그 둘에 대해 할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몸을 들인 그들을 따라가느라 힘에 겨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1권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1Q84의 세계는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서슴없이 다가왔고, 그 세계를 알고 있는 인물의 등장과 기이한 현상들로 인해 독자인 나도 그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만나는 것에 좀 복잡한 사연이 깔려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는데, 의문의 1Q84 세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둘의 공존은 이어질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두 개의 달이 떠 1Q84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해도, 1984년과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느 선까지 현실로 인정하고 어디를 1Q84로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후카에리가 쓴 <공기 번데기>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후카에리와 덴고가 세상에 드러냈기 때문에 리틀 피플은 점점 그들을 좁혀오고 있었다.

 

  많은 궁금증이 '선구'의 리더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 되지만, 아오마메가 리더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도 리틀 피플의 조임을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오마메와 덴고의 주변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복선을 감지한 것이다.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누군가 보낸 경고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또한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고, 덴고 곁의 후카에리는 애매모호한 말만 들려 줄 뿐이다. 아오마메도 마찬가지였다. '선구'의 리더를 살해하기 위해 주변 정리를 하면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잠시 우정을 나누었던 아유미가 죽자 번민을 느낀다. 겨우겨우 덴고의 존재만 남겨놓은 채 그 일(리더를 죽이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며, 자신을 잊기 바빴다.

 

  분명 아오마메와 덴고가 만날 거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20년 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던 그들이 서로를 그렇게 갈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오마메는 덴고를 마음 깊숙이 사랑하고 있었지만 덴고는 띄엄띄엄 기억했을 뿐이었고, 2권에서 갑자기 아오마메에게 마음을 많이 내어주는 것에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내가 갖았던 의문과 많은 궁금증은 선구의 '리더'를 통해 설명 되었고, 왜 그들이 만나야 하고 이어져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오마메는 리더를 죽이러 간 자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리더는 이미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오마메에게 조건을 내걸어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자신은 리틀 피플의 목소리를 듣는 자이며,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아오메마와 덴고는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었으며 1Q84의 시간성 속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1984년에 살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두 사람이 1Q84의 세계에 들어 왔기 때문에 만나야 하지만, 자신이 살아있다면 덴고는 목숨을 잃는다고 말한다. 후카에리와 덴고가 <공기 번데기>에 리틀 피플의 이야기를 썼고, 그들은 리더가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더의 몸은 이미 죽음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오마메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덴고를 살릴 수 있다면(더구나 리더도 죽음을 원하고 있었으니), 거래는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리더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연기(延期)하고 싶은 연민이 아니라, 그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삶이라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1Q84년의 시간성 안에 들어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갈구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니.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공기 번데기의 모습이 그들에게 보이기 시작하고, 리틀 피플의 존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옴을 느낄 때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그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도). 그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떠 오른 이상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 관심이 가면서도, 여전히 리틀 피플의 존재와 풀리지 않는 의미는 수두룩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해도, 이미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1Q84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증은 많이 남아있다.

 

  후카에리를 통해 아오마메가 덴고를 찾아 낼 것이라고 했고, 또 아오마메가 숨어 있는 빌라의 놀이터에서 두 개의 달을 보고 있는 덴고를 봤기 때문에 둘의 만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이 순조롭게 이뤄질 것 같지 않고, 그들을 둘러싼 너무나 광활한 세계에 어떻게 손을 뻗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왜 그렇게밖에 만날 수 없는지 안타까운 마음보다, 그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할 뿐이다. 둘의 존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해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 투성이고, 평이한 결말로 이끌어 가지 않을 거라는 느낌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그들과 또 다른 세계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켜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만 들 뿐이다. 하지만 아오마메와 덴고는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고,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으니 그 이외의 복잡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 둘의 행보에 주목하려 한다. 3권이 내년에 나온다는 말에 기다리기 싫어 불만을 토로했건만.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 안에서 아오마메와 덴고, 1Q84의 세계가 아주 오래 머무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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