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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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좀처럼 읽기가 쉽지 않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런 작가가 한두 명이겠냐 만은, 그 안에 J.M.쿳시도 그 안에 포함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익숙한 작가가 아니라, 어디선가 낯이 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서 화려한 수상경력에도 여전히 낯설었던 반면, <포>라는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그제야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3년에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에서 로빈슨 크루소에 관한 작품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가운데 <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낯이 익었던 것이고, 저자의 이름이 가물가물 해질 때쯤 끊어질 뻔 한 인연의 실을 잇게 되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J.M.쿳시의 작품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첫 작품을 마주하고 나서 약간의 긴장이 일었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작품도 아니고,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하니 새롭게 만난(작품이 아닌, 개인적인 정보로) 저자와의 인연을 놓쳐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소개를 통해서 세 개의 단락으로 각각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과연 내가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J.M.쿳시라는 작가와의 만남을 잘 이뤄낼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거기다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책의 판형이 커(A5), 다른 책들과 어울리지 않는 크기에 잠시 어리둥절하면서도, 책을 읽다 보니 크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싣자면 세로로 책이 긴 것이 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아 크기의 독특함을 잊어 버렸다.

 

  책의 독특한 구성 때문에 처음에 이 책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무척 고민이 되었다. 세 개의 이야기가 페이지마다 끊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뒤 페이지와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흐름을 적당히 나누기가 무척 곤란했다. 각자 나름대로 읽는 방법을 고수해 나갔겠지만, 철저하게 순차적으로 읽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터라 에세이를 먼저 읽고, 두 개의 이야기를 역시 차례차례 읽어 나갔다. 그런 방식이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어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비교적 딱딱한 에세이와, 일흔이 넘은 작가가 아파트의 세탁실에서 아름다운 여인 안야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안야의 이야기까지 곁들어 있어서 이야기가 섞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이런 구성을 지닌 책을 만나면 읽기가 번거로워 짜증이 나기 십상인데, 오히려 J.M.쿳시의 책은 읽어나갈수록 안정감이 생기고, 특유의 리듬감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슈와 철학적 담론들에 관한 에세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두 단락의 이야기에 치중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한 분야의 이야기에 냉소적인 반응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했고,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일흔이 넘은 작가 세뇨르 C가 안야와 만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해 가는 이야기, 안야 또한 세뇨르 C를 만남으로써 변화되어가는 모습이 딱딱한 에세이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내가 수용할 수 없는 딱딱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수없이 얽히고설켜 읽기에 혼란을 주고 가는 구성에 내내 잡혀 있다 보니 세 가지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안에 들어왔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것을 발견할 때의 그 짜릿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했다.

 

  옮긴이는 J.M.쿳시의 소설이 바흐의 음악처럼 대위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대위법은 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나 성부를 동시에 결합시켜 대화 상태를 구축하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대위법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모르는 나에게 옮긴이의 설명은 정확한 정보가 되어 주기도 했지만, 이미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메모지를 꺼내 '서로 다른 변주처럼 흘러가는 글. 만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음악.'이라고 휘갈겨 써 놓았다. 그 메모를 보고 옮긴이의 설명을 들으니, 정확한 용어를 모르더라도 그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독자의 역량에 놀란 것이다. 옮긴이는 음악과는 달리 세 개의 글을 동시에 읽을 수 없으므로 읽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는데, 세 개의 글이 마구 뒤섞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읽어보려 애를 썼다. 아마도 내가 휘갈겨 썼던 메모처럼 세 개의 글이 어떤 음악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세 개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안에 안착하지 못했다고 해도, 저자가 흩뿌려놓은 메시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즐겁게 읽지 못한 딱딱한 에세이에서도 나름대로 사유를 들을 수 있었고(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세뇨르 C가 안야를 타이피스트로 고용하면서 그녀에 대한 건전한(?) 감정의 변화, 안야 또한 세뇨르 C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흐름을 타고 가는 것이 꼭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 책의 구성은 읽기 사나웠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도 그다지 유쾌하다고 할 수 없다. 세뇨르 C는 늙고 병들어 가고 있는 작가에 불과했고, 안야는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안야의 애인은 세뇨르 C의 내면을 제멋대로 추악하게 비난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는 세뇨르 C(안야의 기록으로 인해 독자는 세뇨르 C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앎에도)의 안야에 대한 생각은 천진난만하게 펼쳐질 뿐이다. 안야의 애인이 세뇨르 C의 재산을 노리는 장면이나, 그를 추악한 노인네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도 세뇨르 C의 에세이와 안야에 대한 글은 담담하게 흘러갈 뿐이다. 정치적 이슈들로 가득한 글 가운데 격정인 감정이 치우친 글이 드러나도, 그것은 안야와 애인사이에 드러나는 일과는 무관했으며, 세뇨르 C는 여전히 세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세뇨르 C의 에세이는 안야가 타이핑 한 내용들이었고, 안야의 생각에는 종종 그 에세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논쟁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랬기에 세 개의 글은 다른 색깔을 지니면서도 하나의 틀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복잡하지만 따로 따로 읽어갈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을 제 멋대로 휘저어 놓더라도, 이 독특한 구성의 이야기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담담하게 이어가는 에세이 아래는(글의 구성 상)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또 다른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것은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갔다. 세 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일면서도, 읽기가 좀 복잡했을 뿐,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단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읽기의 불편함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서도 나의 생각대로 흘러가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뒤엉킴 속에서 다시 차분하게 만들어 준 이야기의 힘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름대로 저자와의 첫 만남을 어느 정도 잘 치러낸 것 같아, 얼른 다른 작품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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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끼를 든 아이 독깨비 (책콩 어린이) 4
데이비드 알몬드 지음, 데이브 맥킨 그림, 김민석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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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청소년 책을 좋아해서 무조건 읽는 편임에도, 책 제목과 겉표지 때문에 잠시 망설여졌다. 책 제목도 무시무시한데, 겉표지의 소년이 무언가에 포효하는 모습이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전에 같은 출판사의 다른 시리즈가 괜찮았던 기억이 나 읽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약간의 고민을 하고 집어든 책에서는 나의 망설임이 그럴 만도 했다는 수긍이 들었다. 책 속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겉표지보다 무시무시(?) 했고, 내용 또한 쉽게 읽고 지나칠 수 없는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손도끼를 든 아이'는 그 이야기를 쓴 소년 블루이기도 했고, 누구나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 또한 블루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손도끼를 든 아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었다.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분출할 줄 몰라 내면에 꽁꽁 가둬두다 보면, 어느새 '손도끼를 든 아이'는 나도 인식하지 못하게 크게 자라기 마련이다. '손도끼를 든 아이'가 책 속에서처럼 더 이상 야만인으로 살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 아이가 삐뚤어지지 않게 성장하도록 잘 다독여야 하며,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블루는 갑자기 아빠를 잃고, 내면 가득한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아빠가 세상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데, 친구의 괴롭힘까지 당해내야 했으니 블루의 내면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점점 커가는 것 같았다. 블루는 선생님의 조언을 팽개치고 <손도끼를 쓴 아이>를 쓰기 시작한다. 지금보다 어릴 때 쓴 글이라 맞춤법이 틀린 곳이 많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한 야만스러운 소년이 등장한다. 그 소년은 숲 속에서 생활하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랐으며, 자신을 본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고 무척 난폭했다. 그러나 손도끼를 든 아이의 이야기는 거기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블루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됐다. 이를테면 자신을 괴롭히는 호퍼를 이야기에 등장시켜 호퍼가 어떤 아이인지, 어떻게 복수를 하는지가 그려졌다.

 

  블루는 손도끼를 든 아이의 이야기를 엄마와 동생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는 아이는 블루였고, 이야기 속의 소년은 블루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갔기 때문에 고통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었다. 이야기 속에 자신과 여동생을 등장시켜 소년의 마음을 흥미롭게 하기도 하고, 호퍼를 등장시켜 분노하게 하기도 하지만, 호퍼를 미워한다고 아이를 통해 살인을 할 순 없었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찾아가 복수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는데, 블루는 손도끼를 든 아이를 통해 호퍼에게 해코지를 한 번 했을 뿐이다. 그것이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호퍼가 그 뒤로 얌전해지고 블루가 그 일을 호퍼에게 발설함으로써 잠시 이야기속의 세계와 블루의 세계가 혼동되기도 했다.

 

  손도끼를 들고, 포악하고 말이라곤 제대로 할 줄 모르며,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난폭한 아이가 점차 블루와 일치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내면 속의 또 다른 자아가 똬리를 틀고 어딘가에 손도끼를 든 소년처럼 자라나며, 맘껏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가 아니었을까? 생생한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소년이 얼마나 난폭한지, 그리고 소년의 눈에 비친 호퍼와 블루 자신과 여동생, 그 밖의 사물들이 어떻게 비추는지 상상력을 덧대어 주기도 했다. 과연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어떠한 느낌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친 이야기와 삽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블루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아빠를 잃은 슬픔, 자신의 가족에게 처한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고통을 당해본 자만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책 제목에 겁먹고, 삽화의 거친 면을 염려했던 것은 블루의 고통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블루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블루의 현실을 통해서 조금씩 블루를 이해하게 되었고, 블루 안에 자리한 고통을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많은 상처를 안고 삐뚤게 자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드러냄이 오히려 건강해 보였고, 구경꾼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블루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블루가 성장함에 따라 손도끼를 든 소년의 모습은 바뀌어 갈 것이다. 손도끼를 든 소년이 블루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소년은 블루의 곁에 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과 블루는 함께 성장해 갈 것이고, 그 둘의 만남이 잦고, 서로를 보는 시선에 벽이 사라질 때쯤 완벽한 재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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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이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8
아모스 오즈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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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임에도 한 편의 로맨스를 꿈꾸며 잠이 들곤 한다. 소설 속에서 멋진 인물을 발견했거나, 언뜻 TV에서 본 매력적인 사람이라든가, 순간적인 호감(말 그대로 길지 않은 호감)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여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그런 나를 보고 있으면 철딱서니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꿈에서라도 로맨스를 이뤄보고 싶은 욕망에 가엾어지곤 한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환상적인 사랑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말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좋아하는 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 이상야릇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주인공은 바로 11살 소년 숌히였다. 말 그대로 숌히는 같은 반 소녀 에스티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정확히 말하면 묵으려는 찰나 숌히의 아버지가 데려오긴 했지만). 그러나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숌히가 에스티네 집에서 묵는다는 것은 아니고, 숌히에게 주어진 기나긴 하루의 끝자락에 선물을 받는 듯, 숌히는 에스티와 잠시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숌히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영국군이 주둔해 있어 몹시 흉흉했고, 어린 아이들에게도 영국군과 말이라고 섞을라치면 첩자로 통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숌히가 당면한 현실은 풍족하거나, 자유롭거나, 화목하다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에게 괴짜삼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삼촌에게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받는다. 귀한 선물을 받은 숌히는 여자용 자전거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자전거를 타고 뽐내며 거리를 달린다.

 

  그러나 숌히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은 그 자전거를 타고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자전거만 있다면 아프리카 대륙을 끝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누구나 꿈꿔볼 수 있는 평이한 꿈일지 몰라도, 숌히가 처해있는 상황에서는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는 꿈으로 비춰졌다. 부모님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다른 아이들도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그랬기에 숌히는 자전거를 타고 꼭 아프리카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집을 떠나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친구 알도에게 간다. 알도의 집은 부자였지만, 부모님이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기에 알도의 흥미를 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알도네 집으로 몰래 자전거를 가져 간 숌히는 알도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알도는 여행보다 숌히의 자전거가 탐이 났는지, 숌히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기차놀이 세트와 교환하자고 한다. 숌히는 얼떨결에 자전거와 기차세트를 교환해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 자신을 괴롭히는 고엘과 마주치고 만다.

 

  고엘에게 순순히 기차세트가 들어온 경로를 설명해 주었지만, 고엘은 자신을 과시해 기차세트와 셰퍼드를 교환하게 만든다. 말도 듣지 않는 셰퍼드와 기차세트를 바꾸게 된 숌히는 결국 개마저 도망가 버리자, 망연자실해서 계단에서 울고 만다. 풀밭에서 연필깎이 하나를 주웠지만,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했다. 그 모습을 에스티의 아버지가 발견하게 되고, 숌히는 적당히 둘러대서 에스티의 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스티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고 연필깎이마저 에스티가 가져가 버렸지만, 에스티와 많은 대화를 통해 그들은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가지 않았노라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해갔다며 저자는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이 허무할 수도 있고, 당시의 이스라엘의 분위기를 상세히 묘사한 책 내용에 어떤 것이 중점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아마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라면 그 낯섦과 혼란스러움은 더 가중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거의 다 읽어와서인지 이 작은 소설을 마주하는 것이 무척 기뻤다. 아모스 오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국내에는 인지도가 낮다는 옮긴이의 말에 동감을 하면서도,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거기다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기질과 그 당시의 배경에 이질감이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거리, 아모스 오즈의 다른 소설에서 비춰졌던 요소의 언급을 발견하는 것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고엘이 숌히에게 영국군의 첩자라고 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숌히는 던롭 하사와 언어를 배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지하실의 검은 표범>이란 작품에서 상세히 나왔기에, 그런 연결과 발견이 아모스 오즈의 작품을 즐기는데 재미를 가중시킨 것이다. 또한 어린나이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고충을 실토하는 장면이나, 알도가 자신의 집에 걸린 그림과 높은 직위에 있는 친척을 자랑하자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왕이셔'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신간이 나왔다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주문할 만큼 아모스 오즈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번역본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종종 지칠 때가 있는데(그 이외의 책들이 충분히 채워주고 있다 해도.), 이렇게 우연히 신간 소식을 알 때처럼 기분 좋은 것도 없다.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져서 미처 번역되지 못한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바로 구입해서 읽고 싶고, 한권씩 쌓여서 책장 가득 채워놓고 뿌듯해하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으로도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노라고 언급할 만큼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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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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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며,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음에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친숙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고, 언젠가는 읽고 싶다는 기약 없는 다짐만 하고 있었다. 어떠한 작품을 첫 작품으로 읽게 될 것인가에 고민할 틈도 없이, 내게 먼저 안긴 작품은 <벨아미>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와서 먼저 마주하게 되었는데, 두툼한 두께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왠지 금방 읽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예상은 빗겨가지 않았고 거리낌 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하지만 중간 중간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편협하게 흘러가는 주인공 벨아미의 행보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남자, 벨아미로 불리는 뒤루아의 첫 등장은 몹시 궁색했다. 하사관으로 지내다 퇴역한 그는 철도회사에 다니며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 파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이 두툼한 책에서 어떻게 활개를 칠지 기대가 되면서도 몹시 안쓰러웠다. 남자라면 성공하고 싶은 욕망, 부에 대한 욕망이 불타오르는 법인데, 그가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잘나 보이고 풍요로워 보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거머쥐고, 신분 상승을 꿈꿔볼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던 찰나 신문사에 다니는 옛 전우 포레스티에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다. 그의 도움으로 신문사에 취직하게 된 그는 서투른 출발자의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신문사의 생리와 귀족사회의 병폐를 속속들이 알아가게 된다. 정부(情婦)를 취해 부와 권력을 거머쥐려는 뒤루아는 포레스티에를 통해 알게 된 드 마렐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육체의 쾌락과 물질에 대한 욕구를 조금씩 해소시켜 간다.

 

  뒤루아가 마렐 부인과 쾌락을 추구하고, 신분 상승을 꿈꾸려 할 때만 해도 그를 부정한 남자라고 탓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의 무르익은 잘못된 사회 분위기 탓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도덕심은 팽개쳐 둔 채 정부(情婦)를 두고, 부와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로 들끓는 파리에서, 뒤루아 자신도 그러지 말란 법이 어디 있냐는 듯이 태연스럽게 다른 이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분명 잘못된 모습임에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흡수되어 갔다. 그러나 뒤루아는 마렐 부인을 차지하고 나자 어떻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저명한 귀족부인들의 눈에 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생각한 뒤루아는, 마렐 부인에게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부인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마렐 부인과의 밀회를 통해서 자신이 무척 매력적이고 많은 부인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뒤루아는 그것을 한껏 이용한다. 마렐 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취직시켜 준 포레스티에의 아내 마들렌에게까지 서슴없이 접근한다. 포레스티에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자 뒤루아는 열렬한 사랑고백을 통해 마들렌의 마음을 사로잡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마들렌을 순수하게 사랑했다는 마음보다 그녀로 인해서 신분상승을 꿈 꾼 그는 마렐 부인을 쉽게 져버리고, 포에스티에의 자리(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를 차지하고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 뒤루아가 이런 모습을 보였을 때에도 그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그다지 심해지지 않았다. 한 번의 분륜, 한 번의 결혼은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지켜보면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의 그릇된 본성이 적나라함이었다. 자신이 밟아온 행보를 되돌아보기는커녕, 순간적인 욕구와 미래의 자신만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인간이 계속해서 여자들을 꿰어 낼 수 있는 것, 직장에서도 승진하는 것, 그리고 부와 권력을 계속해서 거머쥐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뒤루아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가 궁금해 책을 읽어 나갔지만, 중간쯤부터는 '이 남자에게 장애물이란 없다.'란 확신이 들어 독서열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뒤루아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보지 않는 것도 내키지 않아 끝까지 읽어나갔는데, 그의 뒤틀린 내면과 비약적인 성공에는 내리막길이 없었다.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돈과 여자 권력에 물들어가는 뒤루아는 마들렌 부인에게서도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자신의 외모와 언변으로 모든 여자를 꿰어낼 수 있다 생각한 그는 신문사 사장인 왈테르 부인까지 정복해 나간다. 이내 사장 부인에게 질려 하면서도 마들렌과의 결혼 생활, 마렐 부인과의 계속적인 불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새로운 여자에게 손길을 뻗친다. 바로 왈테르 부인의 딸인 쉬잔이었으며, 쉬잔과 결혼하기 위해 마들렌의 불륜 현장을 증거삼아 이혼까지 한다. 마들렌의 유산 50만 불까지 챙긴 뒤루아는 갑자기 갑부가 된 왈테르 사장의 배경이 무척이나 탐이 났던 것이다.

 

  이쯤 되면 선악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뒤루아가 분명 파멸할 것이라고, 언젠가는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를 하며, 아니면 자신이 관계 맺어온 여자들에게 뒤통수라도 맞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루아는 실패를 모르는 성공을 이어갔고, 아름다운 여성, 돈, 권력 모두를 쟁취해갔다. 그런 그에게 자기반성을 기대하기란 힘들었고, 타인의 비판을 새겨들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엔 온통 세상의 방탕함만이 차지하고 있어 그가 버린 여자들에 대한 애증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뒤루아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당연했고, 저자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캐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의 생생한 묘사로 인해 마치 당시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듯 했고, 객관적인 서술에 독자인 내가 어디까지 도덕적 잣대를 그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그 당시의 분위기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가늠하기 전에 뒤루아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씁쓸한 탄식만 읊조릴 뿐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뒤루아의 행동이 당시의 사회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자기 기만적인 동조를 이끌어 낼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분명 뒤루아의 행동과 내면은 그릇된 것으로 가득 찼으며, 그를 심판할 수 없대도 비난 할 여지는 충분했다. 뒤루아를 통해 알게 된 당시의 사회 구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차지였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닮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현재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뒤루아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뒤루아처럼 행동하고 사고한 듯 어떠한 보람을 느낄 것인가. 그렇게 타락하고 메마른 본성을 가진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뒤루아를 통해 자신의 내면들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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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에 책이 있다 - 사물, 여행, 예술의 경계를 거니는 산문
안치운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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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은 것 같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 낯선 환경 등을 떠올려 볼 때, 먼저 드는 감정이 두려움여서인지(적어도 내게는) 이왕이면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낯섦'이라는 것이 새로운 도전거리를 주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닮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나는 '낯섦'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독서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게 낯선 작가나 낯선 장르, 심지어 낯선 출판사까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과감히 낯섦을 뚫고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을 해보면 의외로 괜찮은 책을 만날 때가 많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독서도 충분히 매력을 발산하고 있지만, 종종 곁길로 들어가 새로움을 맛볼 때의 그 짜릿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안치운'이란 저자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는 수필이 제격이라 용기를 내어 집어든 책이었으나, 글을 읽기 전에 잘 알지 못하는 저자의 글이라는 것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필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해도 연극계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의 글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곁길로 들어가는 새로움과 가을이여서 수필이 제격이 아닌,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 있는 글은 어느 때 읽어도 진솔하다는 느낌에 순식간에 가려졌다. 그래서인지 낯선 작가와 장르에 도전해 볼 용기를 얻었고, 꼭 새로움을 맛보지 못하더라도 도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 몰랐던 타인에 의해 도리어 내가 마음을 열게 된 글들을 만나는 것만큼 행복한 독서가 있을까?

 

  가을 들어 더욱 쓸쓸해진 마음 때문인지 저자가 머리말에 쓴 글귀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기억의 불안과 부재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롭다.' 라는 말이 꼭 나에게 하는 것 같아 잠시 멈칫 하면서도, 그 뒤를 이어 '현실이 남루할 때 생은 과거에 지배된다는 것을 절로 깨닫는다.' 까지 내 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나는 기억의 불안함에 외로워하고, 과거의 나를 떨치지 못해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기가 늘 껄끄러웠는데, 저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리말에서부터 독백 같은 내면을 흘려, 독자에게 마음의 세워진 벽을 허물어 주었다.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저자의 글은 한 사람의 내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삶을(각자의 방향은 다르겠지만) 일상과 예술, 문화와 얽어 한쪽으로 기울어진 단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 연극계인지라 연극에 대한 소견과 자신의 경험담을 다루었지만, 어느 곳 하나 젠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객관성이 부족해 독자를 불편하게 했던 글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저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자랑할 만한 것인 것 같은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연극 공부를 해오고 현재도 연극인으로 불리면서도, 현실의 연극을 개탄하고 자신이 몸담아온 '연극'에 후회 깃든 혼란스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있어,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찾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수필을 읽고 느낌을 남길 때 가장 난감한 것은 어떤 글이 담겨 있냐를 내비치는 것이다. 단락이 나누어 있어 간략한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에 담긴 무게를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있지 않다는(신간이기에) 색다른 기분과 안타까움이 교차할 정도로 깊이 있고 평정을 유지한 글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거기다 책 속에 글이 갇힌 것이 아니라 저자와 글, 그 글을 읽는 독자, 글을 통해서 다른 것과 이어지는 연결고리의 폭 넓은 관계를 보았다. 저자의 글을 읽는 동안 책 속에 언급된 다양한 책들을 만나고 싶어 검색을 해 본 것이 내게는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파리에 유학 가서 만난 책들, 공부를 위해 읽은 책들, 자신이 만난 책들 중에서 좋았던 책들을 많이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함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고, 저자가 그 책을 통해 얻은 것들이 내게도 스며드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가 언급한 책들은 대부분 절판된 책들이어서(다행히도 그 가운데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와서 반가웠다.). 그 책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저자의 글이 평정을 유지했다고 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저자의 개탄을 살펴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렇게 밝은 사유(思惟)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에게 익숙한 연극을 통해서 삶을 비유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작품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발랄함을 갖추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통해 우울하거나, 삶의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는 푸념은 번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솔한 글로 인하여 내가 당면해 있는 현실을 또 다른 시각을 바라볼 수 있어 위로가 되었다. 나만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위로, 내게 펼쳐진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답답하면서도 설렌다는 희망, 인생의 끄트머리에 가서도 후회라는 것을 과감히 할 수 있다는 거칠지 않은 절망의 가능성 모두가 내게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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