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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갈망이 일어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좀처럼 읽기가 쉽지 않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런 작가가 한두 명이겠냐 만은, 그 안에 J.M.쿳시도 그 안에 포함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어 익숙한 작가가 아니라, 어디선가 낯이 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서 화려한 수상경력에도 여전히 낯설었던 반면, <포>라는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그제야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3년에 <TV, 책을 말하다>란 프로그램에서 로빈슨 크루소에 관한 작품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가운데 <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낯이 익었던 것이고, 저자의 이름이 가물가물 해질 때쯤 끊어질 뻔 한 인연의 실을 잇게 되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J.M.쿳시의 작품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첫 작품을 마주하고 나서 약간의 긴장이 일었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작품도 아니고,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하니 새롭게 만난(작품이 아닌, 개인적인 정보로) 저자와의 인연을 놓쳐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소개를 통해서 세 개의 단락으로 각각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과연 내가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J.M.쿳시라는 작가와의 만남을 잘 이뤄낼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거기다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책의 판형이 커(A5), 다른 책들과 어울리지 않는 크기에 잠시 어리둥절하면서도, 책을 읽다 보니 크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싣자면 세로로 책이 긴 것이 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아 크기의 독특함을 잊어 버렸다.
책의 독특한 구성 때문에 처음에 이 책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무척 고민이 되었다. 세 개의 이야기가 페이지마다 끊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뒤 페이지와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흐름을 적당히 나누기가 무척 곤란했다. 각자 나름대로 읽는 방법을 고수해 나갔겠지만, 철저하게 순차적으로 읽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터라 에세이를 먼저 읽고, 두 개의 이야기를 역시 차례차례 읽어 나갔다. 그런 방식이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어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비교적 딱딱한 에세이와, 일흔이 넘은 작가가 아파트의 세탁실에서 아름다운 여인 안야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안야의 이야기까지 곁들어 있어서 이야기가 섞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이런 구성을 지닌 책을 만나면 읽기가 번거로워 짜증이 나기 십상인데, 오히려 J.M.쿳시의 책은 읽어나갈수록 안정감이 생기고, 특유의 리듬감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슈와 철학적 담론들에 관한 에세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두 단락의 이야기에 치중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한 분야의 이야기에 냉소적인 반응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했고,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일흔이 넘은 작가 세뇨르 C가 안야와 만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해 가는 이야기, 안야 또한 세뇨르 C를 만남으로써 변화되어가는 모습이 딱딱한 에세이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내가 수용할 수 없는 딱딱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수없이 얽히고설켜 읽기에 혼란을 주고 가는 구성에 내내 잡혀 있다 보니 세 가지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안에 들어왔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것을 발견할 때의 그 짜릿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했다.
옮긴이는 J.M.쿳시의 소설이 바흐의 음악처럼 대위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대위법은 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나 성부를 동시에 결합시켜 대화 상태를 구축하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대위법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모르는 나에게 옮긴이의 설명은 정확한 정보가 되어 주기도 했지만, 이미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말고 메모지를 꺼내 '서로 다른 변주처럼 흘러가는 글. 만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음악.'이라고 휘갈겨 써 놓았다. 그 메모를 보고 옮긴이의 설명을 들으니, 정확한 용어를 모르더라도 그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독자의 역량에 놀란 것이다. 옮긴이는 음악과는 달리 세 개의 글을 동시에 읽을 수 없으므로 읽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는데, 세 개의 글이 마구 뒤섞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읽어보려 애를 썼다. 아마도 내가 휘갈겨 썼던 메모처럼 세 개의 글이 어떤 음악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세 개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안에 안착하지 못했다고 해도, 저자가 흩뿌려놓은 메시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즐겁게 읽지 못한 딱딱한 에세이에서도 나름대로 사유를 들을 수 있었고(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세뇨르 C가 안야를 타이피스트로 고용하면서 그녀에 대한 건전한(?) 감정의 변화, 안야 또한 세뇨르 C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흐름을 타고 가는 것이 꼭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 책의 구성은 읽기 사나웠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도 그다지 유쾌하다고 할 수 없다. 세뇨르 C는 늙고 병들어 가고 있는 작가에 불과했고, 안야는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안야의 애인은 세뇨르 C의 내면을 제멋대로 추악하게 비난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는 세뇨르 C(안야의 기록으로 인해 독자는 세뇨르 C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앎에도)의 안야에 대한 생각은 천진난만하게 펼쳐질 뿐이다. 안야의 애인이 세뇨르 C의 재산을 노리는 장면이나, 그를 추악한 노인네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도 세뇨르 C의 에세이와 안야에 대한 글은 담담하게 흘러갈 뿐이다. 정치적 이슈들로 가득한 글 가운데 격정인 감정이 치우친 글이 드러나도, 그것은 안야와 애인사이에 드러나는 일과는 무관했으며, 세뇨르 C는 여전히 세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늙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세뇨르 C의 에세이는 안야가 타이핑 한 내용들이었고, 안야의 생각에는 종종 그 에세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논쟁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랬기에 세 개의 글은 다른 색깔을 지니면서도 하나의 틀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복잡하지만 따로 따로 읽어갈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을 제 멋대로 휘저어 놓더라도, 이 독특한 구성의 이야기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담담하게 이어가는 에세이 아래는(글의 구성 상)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또 다른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것은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갔다. 세 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일면서도, 읽기가 좀 복잡했을 뿐,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단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읽기의 불편함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서도 나의 생각대로 흘러가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뒤엉킴 속에서 다시 차분하게 만들어 준 이야기의 힘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름대로 저자와의 첫 만남을 어느 정도 잘 치러낸 것 같아, 얼른 다른 작품을 찾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