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우첼로 - 원근법을 사랑한 화가 내 손안의 미술관 7
엘케 폰 라치프스키 지음, 노성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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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우첼로를 알게 된 것은 존 버거의 글 때문이었다. 존 버거의 책을 읽다 파올로 우첼로의 그림을 비평하는 글을 보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너무나 궁금해서 바로 책을 주문했다. 그러나 내 책장에 쌓인 수많은 책들의 운명처럼, 책을 구입한지는 2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카라바조>를 읽고 나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샘솟아 꺼내 들었는데 그 긴 공백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재미나게 읽어 버렸다. '내 손안의 미술관' 시리즈를 두 권을 읽은 상태에서 세 번째로 마주해서인지 독특한 구성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을 통해 파올로 우첼로를 알았다기보다,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흘러가는 가운데 파올로 우첼로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내 손안의 미술관' 시리즈는 화가가 중심 선상에 있긴 하지만 화가만 콕 집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훑고 지나가면서 어떠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그림을 그려 나갔는지를 꿰어 맞추듯이 풀어 나간다. 파올로 우첼로에 대해서 온전히 알아가길 원했던 독자라면 이러한 구성에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 있다. 나 역시 이 시리즈를 처음 대했을 때 그랬고,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단편적으로 한 인물에 대해서 끌어내기보다 주변 환경과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를 보여 주는 것은 독특한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화가의 인생 전반에 걸친 많은 것들을 한 권의 책을 읽어도 부족한데, 오히려 조연이 되고 있으니 자칫 방심했다간 화가의 행방을 놓칠 수도 있다.

 

  책의 시작은 파올로 우첼로와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 그의 등장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 가운데 유명한 <산로마노 기마전투> 연작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시작한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우첼로였기에 그 당시의 피렌체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거대한 <산로마노기마전투>를 주문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부터 책은 시작된다. 당시 피렌체에서 큰 상인이자 은행가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시에나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 상황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전쟁 상황을 사실적으로 남기고 싶어 했던 코시모는 원근법에 뛰어나다고 소문난 우첼로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걸고 싶은 그림의 특징을 쭉 설명해 가면서 그림에 필요한 모든 것에 아낌없는 후원을 하겠다고 말한다. 쟁쟁한 화가들이 많았던 피렌체에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우첼로가 코시모의 눈에 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바로 원근법에 의한 화법이 새로운 회화 시대를 열어가고 있던 때에 원근법을 잘 살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우첼로는 <산로마노 기마전투>에서 원근법에 의해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술의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근법에 의한 그림을 그린 것이 우첼로가 최초가 아니었음에도 원근법과 기하학을 이용해 실감 있게 그려낸 화가는 우첼로가 독보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기베르티 공방에서 7년 동안 수학한 그는 말이 없고, 고집쟁이였으나 한 번 무언가에 빠지면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있었다. 우첼로는 원근법에 순식간에 매료되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그림을 그린다. 실전보다 이론에 중점을 둔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원근법과 기하학 등 다양한 이론을 제대로 섭렵하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자질 부족을 의미했다. 공방에서 수학하더라도 지금과는 무척 다른 공부가 많았지만(자질구레한 일들만 몇 년씩 거듭하기도 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원근법에 의한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기한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첼로의 그림세계에 대한 많은 설명보다 그 시대를 통째로 끌고 가는 분위기 덕에 원근법과 피렌체, 당시의 예술에 대한 분위기 접근이 더 용이할지도 모른다. 우첼로의 그림보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비교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았고, 15세기 피렌체의 모습을 엿보는 시간도 많았다. 저자는 우첼로의 그림을 보려면 제대로 읽을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 그림 보는 법, 그림을 읽는 법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할 인상주의에 대한 그림이 드물었기에 주로 인물이나 건축물에 대한 그림이 많았다. 원근법이 새롭게 대두된 만큼 원근법에 자연물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우첼로의 그림을 읽는다는 것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중세미술을 어느 정도 답습하고 그 안에 자신의 그림방식을 집어넣긴 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건데 조금은 뻣뻣하고 두루뭉술한 그림들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는 내가 15세기의 원근법을 보고 감탄을 터트리기엔 무리가 있으나, 당시에는 파격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파올로 우첼로가 그린 피렌체의 대성당 벽화인 기마상을 보고 뒷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감탄하며 원근법을 공부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15세기 초와 중부의 미술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우첼로의 그림은 미술사에 또 다른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조롱을 받기도 하고,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원근법을 너무나 사랑한 우첼로의 열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정됐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파올로 우첼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더라도, 우첼로가 살았던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당시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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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6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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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하릴없이 뒹굴다 보면 3면이 책으로 둘러싸여서 그런지 온통 책 밖에 안 보이는 방 구조에 늘 흐뭇하다. 그러나 시선이 한정 되어 있어서인지 나의 눈높이가 닿는 책장에만 눈길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조만간 책장의 책들 위치를 좀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 만날 보는 책만 보고 있으니 안 읽었으면서도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에 반해 자꾸 쳐다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 손을 뻗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책장의 책들을 바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의 시선이 자주 가는 책장의 책들은 산문, 미술, 순서를 지켜서 읽어야 할 책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 책장에서만 골라보는 책들이 많아졌는데, 오랜만에 미술에 관해 모아둔 책들에 시선을 돌렸다. 오랫동안 미술 장르에 관한 책을 읽지 못해서인지 보는 것만도 반가웠다. 여러 책들을 꺼내서 훑어보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구입한 <카라바조>를 읽기 시작했다.
 

  미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오로지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관련된 책을 잔뜩 구비하고 있다. 세 칸의 책들에 빽빽이 꽂힌 미술에 관한 책들은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하다가, <카라바조>를 시작으로 다시 나의 관심을 받고 있다. <카라바조>를 읽으니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 며칠 동안 열심히 책장을 둘러 봤지만, 역시 꺼내다 넣어다를 반복할 뿐 한 권의 책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미술에 관심을 돌린 것이 내심 반가울 뿐이다. 책도 재미있었고, 오랜만에 그림을 실컷 구경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읽기와 보기를 병행하는 미술 책이 한 권씩 나를 거쳐 갈 때마다 내 안에 쌓인 것은 무엇인지 공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우선은 이런 관심 안에서만 만족하기로 하고, 다시 일어난 관심을 좀 더 지켜가기로 했다.

 

  종종 한 사람의 삶을 알아가다 보면 희열보다는 안타까움이 많이 들 때가 있다. 그가 좀 더 나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마음속의 열정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더라면, 자신을 잘 다스렸다면 좋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다. 카라바조 역시 그랬다. 카라바조는 그가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이고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인 그는 당시에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그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불한당 같은 행동을 많이 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다른 화가들로부터 질투심을 많이 불러 일으켰다. 거기까지였다면 인간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싸움쟁이에 주정뱅이인 그는 감옥에 갇히는 일이 많았고, 결국 감옥에서 탈출해서 떠돌다 로마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타살일 가능성도 높다고 하는데, 그만큼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못해 역경에 역경이 거듭 그를 둘러싸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만큼 그의 화가로서의 능력도, 그에 관한 기록도 오랫동안 기억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도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 했겠지만,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그에 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있기까지는 3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9세기 말 비평가 로베르토 롱기 덕분이라고 하는데, 발레리의 비서였던 앙드레 버른 조프루아는 "한마디로 말해, 르네상스 직후 카라바조와 더불어 근대 회화가 시작되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어느 시대에 활동을 했든, 어떠한 사연을 가지고 있던 지간에 먼저 그의 그림을 보면 발레리의 비서의 말이 과찬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요즘에야 회화에 대한 사람들이 시각이 많이 넓어지고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의견을 내 놓을 수 있지만, 카라바조가 어떤 시대에 활동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의 그림을 본다면 익숙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롱기는 "그가 없었다면 리베라, 베르메르, 조르주 드라 투르, 그리고 렘브란트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마네의 그림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뒷날 바로크 예술이라 이름 붙는 시기의 정점인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던 시대에 활동했던 카라바조는 천재성과 동시에 파문을 몰고 다니는 화가였다.

 

  카라바조의 화풍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빛의 처리다. 명암법의 효과를 발견하게 해준 인물은 조바니 지롤라모 사볼도라고 추측하는데, 그런 인물과의 만남에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덧붙이니 훌륭한 그림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다. 빛의 화기인 렘브란트의 미래를 점쳐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명암처리가 뚜렷해, 무척 사실적인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순탄치 못했던 삶이 너무나 안타깝다. 경제적인 이유, 명예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다 결국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그였기에 그의 그림들은 익숙하면서도 무언지 모를 어둠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리기도 했는데, 아프거나 늙고 지친 자신의 모습이 많았다. 그림 속에 묻히듯이 드러나 있는 자신의 존재를 그만큼 슬프게 그려낸 화가가 있었던가. 카라바조의 화풍이 일취월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산 그를 보는 시선이 촉촉해 질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난 파문도 많았지만, 충격적인 그림 때문에 일어난 파문도 많았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의 주선 가운데 교회에 쓰일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는데,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그림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많아 논란에 논란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나의 식견이 짧아서 그림 속에 어떠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당시의 배경에 어울릴법한 그림인지 아닌지를 설명을 들으면서도 확연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의 그림이 파격적이라는 생각보다 무척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종교화에는 신성적인 면이 어느 정도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꼭 그렇게까지 팍팍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카라바조는 그들과의 타협을 잘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몇 점의 종교화 덕에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질 때도 있었지만, 그나마 황금기였던 그의 짧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그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한 성장을 보이지만 그는 삶을 빨리 마감하는 쪽으로 인생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그의 고난은 그칠 줄을 몰랐으며, 따지고 보면 그의 고난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좀 더 보살펴 주고, 자신을 다스렸더라면 훌륭한 그림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재조명 되어 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이후에 나타난 화가들의 발자취를 캐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됨됨이를 알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평가보다, 작품 속에 녹아든 삶에 대한 광기와 치열함, 천재성을 발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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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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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는 휴가다운 휴가를 못 보내서인지, 여름에 대한 추억이 없다. 바닷가로 수련회를 다녀오긴 했으나, 날씨가 흐리고 추워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와서인지 휴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분위기가 완연한 요즘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보내버린 여름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이런 생각을 일깨워 주었던 것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무지개> 때문이었다. 휴가지에서 읽었으면 주인공 에이코의 심경을 더 이해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성큼 다가온 가을에 낯섦을 느끼는 소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이코의 이야기는 타히티 섬에서의 여행으로 시작된다. 맑고 투명한 바다에서 돌고래와 헤엄치며 '예쁘다'를 연발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제대로 보내지 못한 여름에 대한 개탄이 터질 만도 하다. 거기다 누구나 휴가지에 가면 한 번쯤 꿈꾸는 것이 로맨스이므로, 여름에 읽었다면 에이코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에 좀 더 깊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붉은 태양과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는 에이코 대신, 가을을 향해가는 쓸쓸함 한 가운데 있어서인지 공감을 느끼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거기다 에이코가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가는 방향을 나름대로 예측할 수 있어서 나와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타히티의 보라보라 섬에서의 에이코는 혼자 여행 중이었다. 자연을 만끽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가면서, 현제 마주하고 있는 휴양지에서의 일상과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일기를 보듯, 한 사람의 인생을 보듯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세세하게 펼쳐나가는 에이코의 이야기는 타히티 섬의 분위기 때문인지 날씨만큼 나른해 지고 있었다. 얼핏 사랑 이야기라고만 전해들은 <무지개>란 작품 속에서 저자가 어떤 식으로 그 얘기를 풀어갈지 궁금하면서도, 흩어지는 내용 때문에 감을 잡지 못해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할지 몰랐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면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하고, 타히티의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에이코의 내면의 세계를 지켜보기로 했다. 에이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엄마와 할머니 이야기, 자신이 일한 레스토랑, 그리고 어떻게 해서 타히티 섬에 오게 되었는지를 차분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다카다라는 한 남자가 등장했는데, 처음엔 그와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에이코가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다카다가 그 상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다카다와 에이코의 상황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다카다는 에이코가 일하는 타히티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낸 식당의 오너였고, 에이코는 어머니를 여읜 후 요양이 필요해 다카다의 집에서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둘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중점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너와 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조금씩 다카다에게 마음을 쏟아내는 그녀라 할지라도 타히티에서 줄곧 생각나는 사람이 다카다씨 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온통 자연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가다 자신이 일한 일터와 타히티가 연관되어지면서 다카다가 등장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에이코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다카다씨를 좋아하고 있다고, 그와의 추억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에이코가 마주한 사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곳에서의 사랑이나 헤어진 여인을 생각하는 조금은 청승맞은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다카다씨에게 마음이 쏠릴 거라고, 그를 떠올리고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타히티로 왔노라고(꼭 와보고 싶었다는 갈망도 있었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에이코의 사랑 이야기는 한 번쯤 꿈꿔보는 낭만적인 사랑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너의 집에서 집안일과 동물들을 돌보는 사이에 이미 오너와의 교류를 느꼈으면서도 오너가 그렇게 사랑고백을 할 거라 생각할 수 없었고, 에이코가 풀어낸 그 모든 이야기처럼 차분하게 둘의 사랑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너의 내면에 감춰진 사랑, 그리고 욕망, 에이코를 향한 뜨거운 마음들을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고,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냐고 타박을 드러낼 정도로 무언가가 어색했다. 그에 대응하는 에이코의 태도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어색함을 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추측대로 흘러가서 이미 한 번 뻗쳐진 편견을 거둬들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하룻밤의 꿈을 꾼 듯 몽롱했다. 에이코와 다카다, 그리고 타히티 섬 곳곳에 묻어있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흔적과 흘러간 시간들을 경험하러 온 듯한 에이코의 고백 앞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였다. 오히려 예상대로 흘러간 것에 대한 묘한 안도감과 휴양지에서 읽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교차할 뿐이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타히티 섬 여행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떠올렸다고 했는데, 즉흥적으로 일어난 생각을 이렇듯 한 편의 소설로 써내는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코의 자잘한 일상, 소소하면서도 편안한 생각과 삶의 흐름은 일본 문학의 묘미를 느낌과 동시에 낯섦을 안겨 주었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바나나 소설다움으로 굳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바나나의 소설을 깊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 속에는 에이코와 다카다의 사랑을 맘 기쁘게 축복해 주지 못하는 나를 만나고 말았다. 이제야 조금씩 상대방을 보면 나와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시각이 생긴 내게,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조금 장황스러웠다고 생각된다. 역시 사랑을 하려면 상대방을 단박에 알아보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타히티에서의 짧은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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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ABC 타샤 튜더 클래식 8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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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는 것만큼 설레는 것이 있을까. 가끔 현존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고전의 향연도 만만치 않지만 동시대에 같이 숨 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쏟아낸 글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 되어 준다. 그런 작가들이 몇몇 있는데, 그 가운데 좀 독특한 타샤 튜더 할머니도 포함된다. 작년에 고인이 되셨지만, 타샤 할머니가 쓰고 그린 동화책들이 한 권씩 발행이 되면서 또 다른 기다림이 되었다. 타샤 할머니의 삶에 관한 책은 이미 탐독한 터라 동화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내게는 무척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지금껏 동화책을 구입해 본 적이 없었는데, 타샤 할머니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동화책을 처음으로 구입해 보았고, 읽고 조카를 주기보다 내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종종 꺼내 보는 기이한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타샤 할머니가 알려주는 알파벳 책이 발행되어서 너무 기뻤다. 겉표지도 너무나 예쁜 핑크였고 그 안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화책 가운데서 이렇게 여성스러운 향기를 풍기는 책은 쳐다보지 않던 내가 타샤 할머니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생각하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쳐 보니 애너벨의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타샤 할머니는 아이들이 인형 애너벨과 노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꼬마 숙녀들만을 위한 알파벳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화책은 인형을 좋아하는 꼬마 숙녀들에게 최고의 책이 될 것이고, 나처럼 여성스럽게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독자라면 담 넘어 불구경 하듯 멀뚱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타샤 할머니의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구경만으로도 충분했다. 애너벨이 어떠한 알파벳을 알려주는지 잠시 제쳐둔 채, 타샤 할머니가 그린 애너벨과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흐뭇해졌다.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여기에 나온 알파벳이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올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의 알파벳은 애너벨이 만들어 낸 단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알파벳으로 만들 수 있는 단어가 무수한 만큼, 애너벨이 만들어 낸 단어들은 애너벨의 세계에 적합한 단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생소한 단어가 많았다. 영어 단어에 원래 약한 나여서 이 짧은 알파벳 책을 보면서도 헉헉 댔을 정도여서 잠시 내가 한심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타샤 할머니의 말처럼 꼬마 숙녀들을 위해 만든 이야기니 단어 몇 개 모른다고 한심해 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단어를 굳이 모르더라도 타샤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 얼추 연결 지어 볼 수 있었다. 그림으로는 알지만 단어의 뜻을 모를 때는 사전에서 찾아보면서 읽었다. 처음에는 타샤 할머니의 그림에 빠져 있다가 타샤 할머니가 언급한 단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 단어를 찾아 읽으니 영어 공부도 약간 되는 것 같아 혼자 뿌듯해 했다.

 

  타샤 할머니의 다른 동화책과는 다르게 이 책에서는 단어를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해석과 함께 원 단어를 실어 놓아서 단어를 찾아보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를 테면 'C는 조심스레 꺼내는 Cloak' 이렇게 나와 있기 때문에 Cloak이 무엇인지 그림으로는 알지만 정확한 뜻을 몰라 찾아보게 되었다. 아이들도 나처럼 그림을 보며 단어를 추측해 보며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형식은 타샤 할머니의 다른 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샤 할머니만의 독특한 테두리 그림 안에는 타샤 할머니가 드러내고자 하는 단어의 사물과 함께 원문의 문장이 실려 있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애너벨과 아이들이 함께 사물을 드러내는 그림과 함께 예시를 들었던 해석이 실려 있었다. 그림 속의 애너벨과 아이들은 흑백과 컬러로 나타나기도 하고, 애너벨이 주인공으로, 아이들과 함께 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타샤 할머니가 탄생시킨 애너벨, 그런 애너벨과 함께 노는 아이들, 그 모습을 그리는 타샤 할머니의 모습까지 투영되어 상자에 상자를 열고 계속 꺼내보며 덧입힐 수 있는 모습이 상상 되었다.

 

  그렇게 인형들의 세계에 빠지다 보면 다음 단어가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면서도, 알파벳의 마지막 단어 'Z'가 나오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애너벨과 이어주는 타샤 할머니만의 독특한 단어와 그림이 펼쳐진 가운데 애교스러운 문장도 있었다. 알파벳 'X'에서는 'X는 알맞은 말을 못 찾은 글자 X' 라는 문장이 그랬다. 애너벨과 타샤 할머니의 세계에서 현실적인(?) 귀여움을 발견하기도 해서 더 풍요로운 시간이었다. 타샤 할머니가 알려주는 알파벳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애너벨과 알파벳의 세계, 그리고 타샤 할머니만의 세계가 펼쳐지므로 언제든 책을 펼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을 볼 때마다 타샤 할머니의 책을 읽으면서 쌓아 온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이렇게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늘 감사할 따름이다. 꼬마 숙녀를 위한 동화책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타샤 할머니를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책들이기에 이 만남을 앞으로도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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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 the World : 힐 더 월드 -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지구행복 프로젝트
국제아동돕기연합 UHIC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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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꿈꾼 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도울 때 머뭇머뭇 거리다 작은 것 하나도 도와주지 못한 나를 발견하면서도,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 지는 것 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봉사활동을 할 수 있지 않냐' 는 사람들 말에, 국내에서는 내가 누릴 것을 다 누리느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합리화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두고 전혀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것이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용기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한 때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는데, 종종 그런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TV를 보다가도 그런 나라의 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는 핑계로 피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내게 도착한 한 권의 책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온갖 생각들을 다시 다 끄집어 내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내가 보지 못한 세계,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는 처절할수록 더 피하고 싶어진다. 어느 정도 심각성을 알면서도 제대로 알기를 거부하고,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우울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쉽게 잊어버리기 일쑤다. 같은 인간이면서 그렇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은 그네들의 탓이 아니냐고 되레 성을 낼 때도 있다. 이 책에서 만난 그들이 그랬다. 갖가지 이유로 굶주리고, 질병에 힘들어하고, 생명이 천시되는 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빽빽하지 않은 글은 사진보다 더 처절했다. 그곳의 상황을 분노에 차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무척 차분하지만,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하는 글이었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쉬어서 읽을 정도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글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조사하고, 봐오는 과정 속에 있었으면서도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또 다른 감동이 일 정도였다. 독자에게 호소를 하고 있지만 감정의 밑바닥으로 끌고 가지 않고 자발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글에서 드러나는 실상은 믿지 못할 정도였다.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굶주림과 질병의 실태는 심각할 정도지만 원인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어리석은 싸움, 선진국에 의한 짓밟힘,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원조가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너무나 쉽게 파괴하고 있었다. 정말 그런 일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날까 싶을 정도로 믿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내용들이었다. 당장 내가 과연 이런 사람들의 실체를 보고 있으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그 무기력감에 자칫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찰나, 그들을 돕는 단체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여지고 있었다. 나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만 닦달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듯, 직접 현장으로 뛰어들고 구호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거기다 환경과 동물, 자원, 변화하는 자연현상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하게 실려 있어 죄의식은 덧입혀진 반면, 내가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 내심 안심이 되기도 했다.

 

  오존층 파괴가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는지, 멋을 내기 위해 입는 밍크코트가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살상하는지, 공정무역을 통한 상품을 구입할 때마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 나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현장에 뛰어들 수도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휩쓸리게 버려두지 않고 작은 실천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고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 생각하니 끊임없는 자극이 나를 에워쌌다. 예전에 음식점을 갈 때마다 남은 반찬을 싸오는  한 의사의 사연을 TV에서 보고 난 후(북한을 방문한 그 의사는 땅을 파먹은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절대 음식을 못 버리겠어서 반찬통을 들고 싸 오는 것이라고 한다.), 나 또한 음식을 함부로 못 버리게 되었다. 거기에 물 아껴 쓰기, 공정무역을 거친 상품 구입하기, 육류 섭취 줄이기 등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실현해 나가면 책을 읽는 내내 죄스러웠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천은 강요가 아니지만 어떠한 현상을 보고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이성을 가진 인간임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이 단독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 함께 주어진 것들을 다른 생명체와 나누며 돕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 작은 실천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실천은 개개인의 의지에 달렸지만,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마음 아픔을 느끼고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작은 움직임에 동참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가 아침마다 양치할 때 물을 컵에 받아쓰고, 이 책을 읽은 다른 이가 그것을 따라한다면 작은 움직임이 모여 적지 않은 효과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보면 '내 생애 가장 친환경적인 일주일'이란 코너가 있다. 일주일동안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보낸 후기가 실려 있는데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과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씁쓸한 자유를 주는 지에 대해 나와 있다. 그만큼 쉽지 않겠지만 조금씩 자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을 때 더 이상 인간을 비난하지 않으며, 내 자신을 자책하지 않고, 가진 자에 대한 분노가 그것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에 동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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