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teen_포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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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무실에 매일 매일 책을 들고 다니는 나로서는 갑작스런 시간을 때울 읽을 책이 없으면 당황스럽다. 사무실에서 책을 읽기보다 대부분 리뷰를 쓰는 터라, 종종 읽을 책을 빠트리고 올 때가 많다. 그래봤자 늘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책을 읽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리뷰를 써야 할 책만이라도 소화해도 감지덕지다. 그런데 늘 예기치 못한 복병은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어제 갑자기 사무실 인터넷이 고장 나 버렸다. 인터넷이 안 된다는 것은 리뷰를 쓸 수도 없고(한글 프로그램에 쓸 수 있지만, 블로그에 써야 익숙하다.), 자질구레한 검색은 물론 갑자기 무인도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럴 때 읽을 책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낭패 중에 낭패다. 한참 무엇을 할까 당황하다 책상 서랍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미니 북 '4teen'이 떠올랐다. 2년 전에 온라인 서점 이벤트로 받은 미니 북인데, 설마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혹시 몰라 사무실에 가져다 놨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참 구구절절하다 싶지만, 그렇게 읽게 된 '4teen'은 오랜만에 이시다 이라와 조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작가라 더 기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14살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서 그 동안의 편견을 좀 내려놓고 싶었건만. 잊힌 이시다 이라의 분위기가 그대로 되살아나 버렸다. 한적했던 소쇄원에 앉아 <렌트>를 읽던 이질감. 그때의 낯섦이 스멀스멀 올라와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낯선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더라면 이 책을 마저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14살 소년들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생각하자 오히려 저자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같은 학교 친구 인 나오토, 준, 다이, 기타가와는 늘 뭉쳐 다닌다. 그들이 뭉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포르노 잡지 덕이었다. 조로증에 걸린 나오토,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준, 뚱땡이 다이, 모든 게 보통인 기타가와(책 속의 나)는 각자의 캐릭터대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을 뿜어내기 바빴다. 포르노 잡지를 본다는 공통점으로 뭉친 만큼 그들의 관심사는 온통 성(性)의 호기심에 맞춰져 있다. 옮긴이는 이들이 '발정'의 시기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여자인 내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의 내면을 순수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이상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발정기의 분산 방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떤 식으로 발산하는지 몰라도, 일본이라는 다른 문화권의 아이들이 갖는(포르노 잡지라는 공통점으로 모인 특수한 상황이므로, 이 아이들로 인해 모두 다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없기에) 생각과 행동들이 충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첫 이야기가 병원에 입원한 나오토를 위해 특별한 생일 선물을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용돈을 모아 원조교제를 하도록 만들어준다. 그것도 병원에서 하게끔 만들고, 친구들은 핸드폰을 통해 친구의 첫 경험을 엿보려 한다. 그러나 나오토의 질병으로 섹스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조용히(배려의 마음이 있었다.) 핸드폰을 닫는다. 이런 식으로 14살 소년의 이야기는 그들의 호기심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을 가지면서도 도를 넘는 소재들이 많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거기다 14살의 소년들이 당면하기엔 좀 벅찬 내용들도 종종 보였다. 매 맞는 유부녀를 구출(?)하는 준의 이야기, 거식증 소녀와 사귀게 되는 기타가와, 임신한 여고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다이, 그들의 비밀 여행의 경로들이 과연 이들이 14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가 갖고 있는 틀(편협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에서 많이 벗어났다. 책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보다 이들이 이런 곳에만 시선을 두지 않기를 바랐는데, 후반부로 가면서 저자는 14살 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고충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고충이라는 것이 버거워 보이기는 해도 아직은 소년의 마음을 잊지 않아 아주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의사를 만나 인생의 단편을 느끼며, 학교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그랬다. 또 자전거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타가와가 '변한다는 게 무섭다.'는 말처럼, 지금의 모습과 마음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있었다. 모두들 평범해 보이는 외적인 시선 속에서도 되레 평범하기가 더 힘든 각자의 고충을 안고 있었기에, 그들의 마지막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조로증 때문에 수명이 짧은 나오토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치장에 갇힌 다이를 향한 뜨거운 우정의 비춤이 있어 그들의 세상을 향한 뿜어냄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청소년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청소년보다 어른이 되어 그 시절 갖았던 내면을 고백하지 못한 이들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쉬우나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이런 고백이 건강한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른이 되고, 생각이 바뀌면서 기타가와가 말했던 '변함'을 느끼고 회의가 들지라도 이때의 경험이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여성인 내가 온전히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발정'의 시기를 공감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건 아이이건 내면 속에 자리한 근본적인 생각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네 명의 아이들의 내면도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들의 욕망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은 사실이다. 이런 내면을 가진 아이들도 있다고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탈자

미니북 20 페이지

 

마치 페퍼민트 검을 씹는 듯한 기분이었다. -> 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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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이어령 창조학교 Creative Thinking Academy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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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어령님의 <젊음의 탄생>을 즐겁게 읽은 터라 신간이 나왔다고 하기에 관심이 갔다. 독특한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주었기에 인상이 남아 있던 참이었는데, 이번 신간의 제목은 <생각>이었다. <젊음의 탄생>에서도 '생각'의 다름을 느껴서인지 제목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어떠한 생각이 담겨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식중에도 머릿속에서 늘 활동하고 있으니, 어떤 생각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늘 하는 생각에서 무언가를 캐낼 수 있다면 좋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책을 펼치는 손길은 가벼웠다.
 

  나의 바람을 알고 있는 양, 책의 첫 머리는 '생각을 캐내는 것' 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생각의 보석을 캐내기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이념들을 머리와 가슴 속에 주입 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저자는 사고가 틀 속에 갇히지 않길 바라며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단순히 생각을 꺼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삶에 적용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총 열 세 가지의 생각의 발상의 나뉨으로 저자만의 독특한 생각의 세계는 그렇게 열렸다.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박학다식함에 늘 혀를 내두르곤 한다. 나무의 몸통에서 가지가 뻗어 나가듯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갈래로 생각이 뻗어 나가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다양한 지식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늘 신선한 생각으로 생각지 못한 것들에서 발상을 찾아내는 것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에서나 지금껏 뿌리박힌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 벗어나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 책의 중점이었다. 저자가 풀어놓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새로운 접근방식이 신기했다. 본질을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시선과 뒤집어진 생각의 시도는 삶의 역경에서 돌파구를 찾는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자의 색다른 생각 가운데는 재미있는 소재도 많았다.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세 마리 쥐의 변신, 거북선 등이 그랬다. 시금치를 먹을 때마다 힘이 솟는 뽀빠이 덕에 시금치 섭취량이 늘었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과잉 섭취 했을 때 비만증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을 유발 시킨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람들은 시금치를 먹는 뽀빠이 신화가 아직까지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한다. 거기다 성경에 등장하는 낙타도 마찬가지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 라는 말은 오역이라고 한다. 글자 한 자 차이로 밧줄(아람어로 밧줄은 'gamta')이 낙타(gamla)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뽀빠이가 시금치 대신 비타민이나 홍삼을 먹고,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보다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라고 설교를 한다면 비유가 자연스러워 지겠지만, 엇박자의 힘을 빌린 이미지와 상징성은 상실할거라고 말하고 있다. 거북선 또한 당시 일본의 군선에 대해 제대로 배웠더라면 거북선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거라고 한다. 거북선의 하드웨어적 발명보다 왜군의 전법에 대응한 소프트웨어 전술적 산물이며 승리였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생각의 다른 접근은 다양하게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부터 국내외를 돌아보며 생각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소재까지 두루 섭렵해 나갔다. 그러나 저자의 독특한 생각의 소재에는 '우리 것',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너무 많았다. 자칫 우월주의에 빠질 수 있는 우리의 전통 문화나 대대로 내려오는 위대한 업적들이 반복되었는데, 온고지신의 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조금 동떨어진 생각을 유발시킬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기술이 만연한 시대에 생각의 발상을 전환시키려 그러한 예를 든 것은 좋으나 연속된 소재에 약간의 식상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분명 저자의 생각이 신선하고 독특한 것이 많았으나, 나에게 인식된 생각의 변화는 부족했던 것 같다. 다양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이하게 흘러간 이념의 뒤집힘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일일이 밥까지 떠먹여 줄 수 없는 노릇이므로 저자의 생각을 엿봄으로써 독자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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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파스타 만들기 일공일삼 50
샤론 크리치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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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겨우 오늘 내게 온 책을 블로그에 올리고 나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도 짜증이 가시질 않았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어 더 한심해졌다. 자꾸 머리맡에 대충 던져둔 내게 온 책 세권이 걸리적거려 평상시 나 답지 않게 다른 쪽으로 책을 휙 던져 버렸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아 눈에 안 보이게 책을 치워 버리려 책을 집어 든 찰나, 세 권의 책 중에서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알랭 드 보통 신작도, 궁금했던 아베 코보의 책을 제치고 샤론 크리치의 책이 눈에 밟혔던 이유는 무엇일까. 겉표지의 저 순박한 웃음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샤론 크리치의 책을 읽고 나면 늘 기분이 좋다는 느낌이 생각나서였다.
 

  나의 기분을 달래 줄 책은 이 책 밖에 없겠다 싶었지만, 여전히 찜찜한 기분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누워서 책을 펼쳤다. 아이들 책이 여서 글씨도 큼지막해서 부담도 없었고, 여차하면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덮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샤론 크리치 특유의 흡인력으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그리곤 울다가 웃다가 혼자서 별의 별 짓을 다하며 책을 덮었을 때에는 내가 왜 짜증을 내었는지, 내가 요즘에 하고 있는 고민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경험한 것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거기다 아이들이 읽는 거라고 잘 쳐다보지 않은 책에서 느낀 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책 속의 소녀 로지도 나만큼이나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단짝 남자 친구 베일리가 로지에게 "그렇게 잘난 척 좀 하지 마, 로지!"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동갑에다 비슷한 날짜에 태어나 옆집에서 지금껏 같이 자란 베일리에게 그런 말을 들은 로지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단짝인 베일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왜 베일리가 자신에게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로지의 기분을 알아채고 토렐리 할머니는 로지에게 수프를 끓여 준다. 재료를 다듬는 것부터 수프를 만드는 과정에 로지도 함께 하면서 할머니는 정확한 때에 로지에게 질문을 던졌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로지의 기분을 달래주었을 뿐 아니라 미각까지 행복하게 해주었다.

 

  로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왜 베일리가 로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베일리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로지는 그런 베일리를 많이 도와주었고, 좋아했으며 소중한 단짝으로 생각했다. 베일리는 로지처럼 글자를 읽을 수 없어 점자책을 보는데, 베일리를 기쁘게 해 주려 1년 동안 힘겹게 점자책 읽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베일리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자책을 읽었을 때 로지는 베일리에게 잘난 척 그만 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문을 꽝 닫아 버린 베일리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 기분이 언짢아 있을 때 토렐리 할머니는 로지가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또한 로지가 베일리에게 한 행동과 베일리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베일리는 점자책을 읽는 것이 로지가 할 수 없는 것 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는데, 자신 앞에서 너무 쉽게 읽어 버렸기에 상실감이 컸던 것이다. 할머니의 위로로 베일리에게 사과를 하러 간 로지에게 베일리는 점자로 된 '미안해'란 쪽지를 건넨다. 그 부분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잠시나마 베일리가 보는 어둠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로지는 베일리에게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었다. 다른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악을 쓰고 울었던 것이나, 재닌이라는 여자애가 이사 왔을 때가 그랬다. 베일리에 대한 로지의 생각은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좋아하는 베일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다른 여자 애한테 관심을 두는 것이 싫었다.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어린 아이들이지만 둘의 알콩달콩 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로지의 질투는 때론 도가 지나칠 때가 있었으므로 늘 토렐리 할머니의 중재가 필요했다.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뛰어났고, 아직도 이탈리아 말을 섞어서 대화를 하셨다. 그런 할머니에게도 현재 로지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인 파르도를 두고 미국으로 떠나 왔을 때, 그의 사고 소식, 그의 사촌의 등장으로 인한 삼각관계 등 그 모든 이야기를 로지와 베일리에게 들려주었다. 늘 요리와 함께였고, 그 둘의 대화가 필요할 때마다 할머니는 자리를 비워 주었다. 할머니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는 로지와 베일리의 일상은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지나갔고, 할머니로 인해 행복의 맛이 진해져 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도 무척 가슴 아팠다. 먼 타국에 떠나와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그들은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쾌활했고, 지혜도 있었으며, 요리 솜씨가 좋았다. 훌륭한 요리로 손녀와 손녀의 남자친구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꼭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소설을 보는 것 같아 나도 저런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특히 로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베일리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 때도, 질투심에 눈이 멀었을 때, 질투를 유발한 친구를 초대하기에 이르렀을 때도 모두 토렐리 할머니의 이야기와 요리가 있었다. 할머니 또한 로지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때로는 회한의 눈물을, 때로는 자기 고백으로 인해 상처 치유와 지혜를 드러내기도 한다. 로지는 할머니가 들려 준 '아기' 이야기를 듣고,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쓰잘때기 없는 걱정과 고민거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가 준비한 파스타로 이웃들과 가족과 함께 파티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짧지만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행복한 파스타 만들기>는 나를 울리고 웃겼으며,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일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알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이 무엇인지 수면 위로 띄우지 못하고 있을 때 옮긴이가 조목조목 짚어 주어 도움을 주었다. 첫 째는 장애인을 보통 아이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고 두 번째는 세상에는 나, 친구, 질투심, 경쟁같이 사사로운 문제보다 중요한 기본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로지와 베일리, 토렐리 할머니와 그 외의 인물들을 통해 저자는 옮긴이가 말한 사실들을 너무나 잘 보여 주었다. 거기다 토렐리 할머니의 요리와 이탈리아 말들은 또 다른 즐거움이 주었으니 나의 찌뿌듯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로지와 베일리의 성장과 우정, 끈끈하게 이어질 것 같은 사랑까지 너무나 순수해 보여서 되레 내 마음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어른들은(나를 포함해) 상대방을 볼 때 조건, 외모, 배경으로 판단하기 일쑤인데 로지를 비롯해 베일리를 보는 사람들이 시선이 좋았다. 그런 로지의 마음을 알아주는 베일리도(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장애를 보지 않고 순수한 베일리를 보는 로지가 너무나 예뻐 보였다.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이 있을지라도 둘의 우정과 사랑이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도를 넘은 생각까지 해본다(역시 어른인 나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좋아하며, 결론에 귀결시키려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둘이 너무 예뻐 보이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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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 - 영화광 가네시로 가즈키의 열혈 액션 드라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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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참 <춤추는 대수사선> 영화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영화 속 무로이란 인물에 환상을 품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가네시로 가즈키의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일본작가 중에서 드물게 전작하는 작가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무로이씨에게 잠시 관심을 돌려 줄 것이 왔다 싶어 들뜬 마음으로 책을 손에 쥐었는데, 제목이 어딘가 많이 낯익었다. 얼마 되지 않아 <춤추는 대수사선>에 SP 글자를 새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왔던 것이 생각이 났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다 싶어 이 책의 정보를 찾아보니 <춤추는 대수사선>의 원작 시나리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 순간 무척 흥분하고 말았다. 그래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는데, 이런 흥분을 보다 못한 몇몇 분들이 <춤추는 대수사선>의 원작 시나리오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SP> 드라마 감독을 맡았다고 알려주었다. TV 드라마로 히트 친 것은 맞지만, <춤추는 대수사선>과는 관련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왜 그렇게 김이 빠지던지. 가네시로 가즈키, <SP>, <춤추는 대수사선>이 3박자를 이루어 나를 즐겁게 해주는 줄 알고 있다가 맥이 풀리는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화는 잘못된 정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인 만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품을 모두 읽고,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작가 중 한명이기에 새로운 작품 앞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 전에 출간된 것이 <영화처럼>이라는 소설이었으므로, 그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지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나리오라니. 거기다 TV 드라마로 만들어졌었고, 히트까지 쳤다고 하니 무척 궁금했다. 책을 읽기 전 배경 인물들을 보며 여전히 <춤추는 대수사선>의 인물들과 겹쳐지는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만 두 작품이 상관이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겹치는 이미지는 어쩔 수 없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와 <SP>의 이노우에가 그랬다. 무로이와 연결시킬 인물을 탐색했지만(처음엔 오카타와 연결시켰지만, 오카타의 양면성에 마음을 돌렸다.) 결국 실패했고, 책을 읽어 보니 그런 비교가 얼토당토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SP(Security Police, 요인경호관)의 일은 말 그대로 경호를 하는 일이므로 어떤 사람들을 경호하고, 그 안에서 이노우에가 어떠한 활약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가 될 것 같았다.

 

  총 5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이노우에가 SP 훈련을 받을 때의 이야기는 따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가 경호인만큼 의뢰인을 경호하면서 얽힌 일들을 그려내고 있었는데, 시나리오라서 그런지 소설처럼 완벽하게 읽히지 않았다. <SP> 드라마를 보았다면 모를까, 드라마를 본 적이 없는 내가 시나리오만 보고 그 모든 것을 상상하기란 녹록치 않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이노우에의 비상한 능력과 독특함을 감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에피소드가 펼쳐질 때마다 그 낯섦을 마주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 갈 뿐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을 글로 써냈다고 생각해 보자. 장면을 봤다면 글로 써냈다고 하더라고 상상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장면을 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독자인 내가 상상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영화를 찍는 사람들, 배우들에게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글로 씌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내게 어려웠다.

 

  가장 곤욕을 치렀던 것은 인물의 파악이었다. SP들의 정기적인 출현으로 대강의 인물을 파악했다지만,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장소와 상황, 주변 인물들이 변하는 것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화면으로 비춰진 영상이라면 장면의 이어짐으로 인해 필요한 것들만 받아들일터인데, 모든 것을 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거기다 액션 장면이 많았기에 그야말로 곤역이 아닐 수 없었다. 업치락뒤치락 하는 것까지 일일이 읽어내야 한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확인하는 것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장면의 변화도 많았고, 경호의 일 외에 이노우에의 어릴 적 트라우마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궁금증이 나다가도 일순간 짜증이 일기도 했다.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일들은 계속 나오고, 작가의 개인적인 주석까지 읽다보니(재미있는 부분이 많았음에도) 나만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의욕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시나리오의 특징 상 책의 페이지는 순식간에 넘어갔는데, 그렇기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바이다(줄거리도 포함해서).

 

  SP의 경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호도 이노우에가 등장하면 큰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을 저자의 의도라고 해도, 그들이 경호한 사람들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사건이 꼭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의뢰인은 내각 총리대신을 비롯해, 도쿄도지사, 전 총리대신을 비롯해 증권 조작으로 신변을 위협받는 증권사 직원도 있었다. 의뢰인의 모습이 비춰지기 전에 늘 어딘가에서 그들을 노리는 일당들의 모습이 그려졌고, 중요한 시기마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악을 감지하며, 일반인들보다 시각이 좀 다른 이노우에는 늘 그들을 먼저 발견한다. 좀 털털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능력과 소신을 드러내며 일을 처리하는 이노우에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동료와 계장 오카타는 늘 그를 신뢰하는 편이었다. 저자는 그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종종 부각시키기도 했는데, 그들의 목숨을 걸고 의뢰인을 보호하는 것이 임무인 만큼 그들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힘든 일을 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나리오라는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무언가 한 가지를 부각시키며 볼 수 없었다. 저자의 시선도 아닌, 이노우에의 시선도 아닌, SP 자제의 시선에서도 볼 수 없었기에 그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하나의 덩어리로 두루뭉술하게 내 머릿속을 굴러다닐 뿐이었다.

 

  거기다 이 시나리오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드라마도 아직 결말이 아지 않았고,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피소드 하나가 끝날 때마다 미진함이 느껴져서 허무하기도 했는데, 오카타의 양면성이 드러나는 시점에서 시나리오는 끝이 난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찾다보니 광적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결말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을 냈다고 하는 분도 있어 되레 위로가 되었다. 결론이 났다면 모를까 드라마를 찾아 볼 용기도 나지 않았고, 시나리오라는 장르에 답답함이 느껴져 가네시로 가즈키 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광이라는 저자의 말마따나 곳곳에 그의 애정과 노력이 보여 경의가 표해지기도 했다. 영화의 장면을 상상하며 글로 써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저자는 즐겁게 임했겠지만.) 인식하게 되었을 뿐, 시나리오를 써 낸 저자가 마냥 신기했다. 그의 팬으로써 색다른 경험을 한 것은 좋았으나, 드라마를 찾아 비교해 보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은 나에게 안개와 같은 탁함이 존재할 것 같다. 순전히 나의 취향과 읽기의 문제였다고 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마음이 뒤집어질 수 있도록 언젠가는 이 작품의 영상을 만날 날을 기대하며, 가네시로 가즈키와의 색다른 여행을 마친다.

 

 

오탈자

 

p. 23

 

사사키 "의아한 듯 구청에서 일하는데도 밤에 저렇게 급한 일이 생기나요?"

"의아한 듯"은 괄호가 들어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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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가가 형사 때문이었다. <붉은 손가락>을 읽고 가가 형사가 인상 깊이 남아 있었는데, 마침 '가가 형사 시리즈'가 출간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가 형사가 처음 등장하는 <졸업>을 먼저 선택했다. 기회가 된다면 나머지 시리즈도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어서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책들은 멈춤 없이 읽을 수 있기에 손에 닿기만 하면 순식간에 읽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긴 시간을 방치해 버렸다. 막상 책을 꺼내서 읽고 보니 어떻게 이런 책을 오랜 시간 방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책을 읽고 나자 '대단하다','재미있다'라는 감탄사 보다 눈이 팽팽 돌았다. 평상시에도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데 책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과하게 눈을 굴리며 읽었더니 어지러울 정도였다. 차분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사건의 중심에서 탄력을 받으니 그 흐름을 좇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차분한 문체였음에도 오히려 그런 차분함에 감질 맛이 나서 더 빨리 좇아가려 애를 썼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범인을 예상했지만 예기치 못한 실체가 드러나 조금 놀라기도 했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유의 인간미가 느껴져 비교적 순응하여 받아 들였다. 대학 생활 4년을 마무리 하는 졸업이라는 시점을 앞 둔 7명의 친구들은 결국 4명만이 남은 채 씁쓸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고등학교 동창에다 같은 대학을 다니는 7명의 친구인 가가, 사토코, 나미카, 도도, 쇼코, 와코, 하나에는 자주 어울려 다니며 우정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커플이 형성이 되었는데 도도와 쇼코, 와코와 하나에가 커플이었고, 책의 시작에는 가가가 사토코에게 고백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가가와 나미카는 검도 부원이었고, 와코와 하나에는 테니스 부에서 활약을 펼칠 정도로 운동에 소질을 보이는 친구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대학 생활도 쇼코의 죽음으로 혼란을 거듭해 간다. 여학생들만 기숙하는 백로장에서 쇼코는 그은 손목을 싱크대에 담근 채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옆방에 기숙하는 나미카였고, 쇼코의 죽음은 자살로 판명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쇼코의 피를 닦은 흔적과 다른 방에 기숙하는 여학생이 쇼코 방을 방문했을 때와 나미카가 방문했던 모습이 달랐기에 타살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고 있었다.

 

  모두들 쇼코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가운데 연인인 도도는 정신을 놓고 있었고, 고등학교 은사인 미나미사와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지만, 쇼코와 가깝게 지낸 만큼 사토코는 쇼코의 사건을 해결해 보려 이리저리 조사를 한다. 가가도 자기 나름대로 사건을 조사하며 해결해 보지만 여전히 드러난 것이 없어 미궁 속을 헤맬 뿐이었다. 그나마 가가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냉철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쇼코의 죽음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펼쳐 나간다. 그러나 쇼코의 죽음이 가시기도 전에 나미카의 죽음이 연달아 닥쳐 모두의 혼을 빼놓는다. 나미카의 죽음은 더 이해할 수 없었는데, 미나미사와 선생님 집에서 다도회를 하던 중 나미카는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다도회에서 설월화 게임을 하던 중 나미카는 죽음을 당했고, 범인은 다도회에 참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일 터였다. 그러나 다도회에 참여한 사람은 친구들과 은사님이었는데, 도대체 누가, 왜 나미카를 죽였을까.

 

  가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건의 해결이 더 빨리 진행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가가는 그 자리에 없었고 사토코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것으로 추리해 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나미카는 사토코가 찻잔을 돌린 후 사망했기 때문에 가장 의심을 받고 있었다. 연달아 일어난 두 친구의 죽음 앞에 충격도 충격이지만, 범인이 친구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은 더 괴로웠다. 쇼코의 사건도 미궁에 빠진 채였는데, 나미카까지 죽자 가가와 사토코는 두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해결되지 못할 것 같았고, 실재로 범인이라면 그들 그룹을 잘 아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그들을 용의자로 생각하며 바라본다는 것이 더 힘들었다. 가가만이 냉정하게 생각하고 추측해 나갔지만, 이번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다도회에 빠진 이상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 느낌이었다.

 

  저자는 사건의 실마리 해결을 위해 여기저기 복선을 깔아 놓았다. 그 복선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날카로우면서도 반듯한 가가의 인물됨을 참조한다면, 그런 분위기에 어긋난 작은 행동과 말들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인물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작은 특징들로 조금씩 추측해 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기에 쇼코를 죽인 범인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고, 그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서 범인의 밝혀짐보다 그 과정을 풀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드러나므로 왜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꼭 알아야 했다. 분명 사건의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설월화 게임에서 중요한 단서들이 흘러나왔을 텐데도 나는 별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림까지 그려가며 그날 있었던 설월화 게임을 설명해 주고, 부연 설명도 따랐지만 읽는 내내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설월화 게임을 이해하기에는 내 머리 회전은 둔했고, 가가가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가가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작은 단서들을 시발점 삼아 하나씩 구체화 해 갔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설월화 게임의 트릭을 발견한 후, 범행에 사용됐던 그 복잡한 과정을 추리해 나간다. 가가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가가의 뒤를 좇는 것만으로도 흥분 되었다. 그러나 복잡하게 풀려가는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진 후에는 씁쓸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친구였다는 사실과 오랫동안 쌓아온 우정이 흔들린 것은 물론, 배신과 복수가 뒤얽힌 할큄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친구들의 내면의 비틀어짐, 한 순간의 실수와 욕심 때문에 세 명의 친구들은 목숨을 잃어 버렸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떠나 그들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공감이 가면서도 너무 허무했다. 한때의 열병처럼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청춘의 덫은 그들을 끝내 파멸의 길로 끌고 가고 말았다.

 

  가가 교이치로의 활약상과 형사로써의 자질,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서 키워진 인물상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역시나 그 배경은 유쾌할 리가 없었다. 사회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교훈을 잊지 않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많은 것처럼, 가가라는 인물에 만족을 느끼면서도 가가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안타까웠다. 특히나 이 작품은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회로 막 발돋움 하려는 현실에 놓인 청춘의 비극을 다루고 있기에 안타까움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가 교이치로를 주목하지 않기란 여전히 힘들다. 그가 다른 소설에서 어떠한 활약을 펼치는지, 그의 사랑, 집안 내력, 형사가 되는 과정 등이 궁금하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 과정을 차근차근 다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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