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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파스타 만들기 ㅣ 일공일삼 50
샤론 크리치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겨우 오늘 내게 온 책을 블로그에 올리고 나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도 짜증이 가시질 않았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어 더 한심해졌다. 자꾸 머리맡에 대충 던져둔 내게 온 책 세권이 걸리적거려 평상시 나 답지 않게 다른 쪽으로 책을 휙 던져 버렸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아 눈에 안 보이게 책을 치워 버리려 책을 집어 든 찰나, 세 권의 책 중에서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알랭 드 보통 신작도, 궁금했던 아베 코보의 책을 제치고 샤론 크리치의 책이 눈에 밟혔던 이유는 무엇일까. 겉표지의 저 순박한 웃음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샤론 크리치의 책을 읽고 나면 늘 기분이 좋다는 느낌이 생각나서였다.
나의 기분을 달래 줄 책은 이 책 밖에 없겠다 싶었지만, 여전히 찜찜한 기분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누워서 책을 펼쳤다. 아이들 책이 여서 글씨도 큼지막해서 부담도 없었고, 여차하면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덮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샤론 크리치 특유의 흡인력으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그리곤 울다가 웃다가 혼자서 별의 별 짓을 다하며 책을 덮었을 때에는 내가 왜 짜증을 내었는지, 내가 요즘에 하고 있는 고민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경험한 것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거기다 아이들이 읽는 거라고 잘 쳐다보지 않은 책에서 느낀 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책 속의 소녀 로지도 나만큼이나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단짝 남자 친구 베일리가 로지에게 "그렇게 잘난 척 좀 하지 마, 로지!"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동갑에다 비슷한 날짜에 태어나 옆집에서 지금껏 같이 자란 베일리에게 그런 말을 들은 로지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단짝인 베일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왜 베일리가 자신에게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로지의 기분을 알아채고 토렐리 할머니는 로지에게 수프를 끓여 준다. 재료를 다듬는 것부터 수프를 만드는 과정에 로지도 함께 하면서 할머니는 정확한 때에 로지에게 질문을 던졌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로지의 기분을 달래주었을 뿐 아니라 미각까지 행복하게 해주었다.
로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왜 베일리가 로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베일리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로지는 그런 베일리를 많이 도와주었고, 좋아했으며 소중한 단짝으로 생각했다. 베일리는 로지처럼 글자를 읽을 수 없어 점자책을 보는데, 베일리를 기쁘게 해 주려 1년 동안 힘겹게 점자책 읽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베일리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자책을 읽었을 때 로지는 베일리에게 잘난 척 그만 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문을 꽝 닫아 버린 베일리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 기분이 언짢아 있을 때 토렐리 할머니는 로지가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또한 로지가 베일리에게 한 행동과 베일리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베일리는 점자책을 읽는 것이 로지가 할 수 없는 것 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는데, 자신 앞에서 너무 쉽게 읽어 버렸기에 상실감이 컸던 것이다. 할머니의 위로로 베일리에게 사과를 하러 간 로지에게 베일리는 점자로 된 '미안해'란 쪽지를 건넨다. 그 부분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잠시나마 베일리가 보는 어둠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로지는 베일리에게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었다. 다른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악을 쓰고 울었던 것이나, 재닌이라는 여자애가 이사 왔을 때가 그랬다. 베일리에 대한 로지의 생각은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좋아하는 베일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다른 여자 애한테 관심을 두는 것이 싫었다.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어린 아이들이지만 둘의 알콩달콩 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로지의 질투는 때론 도가 지나칠 때가 있었으므로 늘 토렐리 할머니의 중재가 필요했다.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뛰어났고, 아직도 이탈리아 말을 섞어서 대화를 하셨다. 그런 할머니에게도 현재 로지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인 파르도를 두고 미국으로 떠나 왔을 때, 그의 사고 소식, 그의 사촌의 등장으로 인한 삼각관계 등 그 모든 이야기를 로지와 베일리에게 들려주었다. 늘 요리와 함께였고, 그 둘의 대화가 필요할 때마다 할머니는 자리를 비워 주었다. 할머니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는 로지와 베일리의 일상은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지나갔고, 할머니로 인해 행복의 맛이 진해져 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도 무척 가슴 아팠다. 먼 타국에 떠나와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그들은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쾌활했고, 지혜도 있었으며, 요리 솜씨가 좋았다. 훌륭한 요리로 손녀와 손녀의 남자친구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꼭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소설을 보는 것 같아 나도 저런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특히 로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베일리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 때도, 질투심에 눈이 멀었을 때, 질투를 유발한 친구를 초대하기에 이르렀을 때도 모두 토렐리 할머니의 이야기와 요리가 있었다. 할머니 또한 로지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때로는 회한의 눈물을, 때로는 자기 고백으로 인해 상처 치유와 지혜를 드러내기도 한다. 로지는 할머니가 들려 준 '아기' 이야기를 듣고,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쓰잘때기 없는 걱정과 고민거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가 준비한 파스타로 이웃들과 가족과 함께 파티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짧지만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행복한 파스타 만들기>는 나를 울리고 웃겼으며,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일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알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이 무엇인지 수면 위로 띄우지 못하고 있을 때 옮긴이가 조목조목 짚어 주어 도움을 주었다. 첫 째는 장애인을 보통 아이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고 두 번째는 세상에는 나, 친구, 질투심, 경쟁같이 사사로운 문제보다 중요한 기본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로지와 베일리, 토렐리 할머니와 그 외의 인물들을 통해 저자는 옮긴이가 말한 사실들을 너무나 잘 보여 주었다. 거기다 토렐리 할머니의 요리와 이탈리아 말들은 또 다른 즐거움이 주었으니 나의 찌뿌듯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로지와 베일리의 성장과 우정, 끈끈하게 이어질 것 같은 사랑까지 너무나 순수해 보여서 되레 내 마음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어른들은(나를 포함해) 상대방을 볼 때 조건, 외모, 배경으로 판단하기 일쑤인데 로지를 비롯해 베일리를 보는 사람들이 시선이 좋았다. 그런 로지의 마음을 알아주는 베일리도(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장애를 보지 않고 순수한 베일리를 보는 로지가 너무나 예뻐 보였다.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이 있을지라도 둘의 우정과 사랑이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도를 넘은 생각까지 해본다(역시 어른인 나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좋아하며, 결론에 귀결시키려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둘이 너무 예뻐 보이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