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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의 글을 좋아하지 않지만, 신간이 나올 때마다 지나칠 수 없는 작가 공지영. 블로그에 연재 됐을 때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다가 책으로 출간되자 그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책 소개만 접하고 책을 손에 쥐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았다. 불편한 책 내용과 저자의 문체에 대한 기억이 얽혀 기분 좋은 출발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을 방치하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정면으로 마주했다. 책을 꺼낸 시각은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책을 덮었을 때는 새벽 3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책에서 손을 떼는 순간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이상야릇한 안도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좋아할 수 없는 작가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고, 우울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것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불편한 내용을 불편하게 풀어냈다는 데서 오는 불편함과 답답함은 새벽의 고요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휘감았다. 불쾌한 감정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결국 꿈자리까지 어지럽게 만들었고 차라리 한바탕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일었다. 그러나 머리맡에 놓인 흔적으로 남겨진 책을 보니, 아무런 해결책 없이 모든 것을 독자에게 떠넘겼다는 또 다른 불쾌감(저자에 대한 억지스런 불쾌감)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불편한 감정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서 오는 약자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농아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의 전말을 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인권을 부르짖고, 잘못됨을 알고 공공연히 떠들어 봤자 권력과 돈 앞에 진실이 무너진 과정만 보아왔는데. 그 사건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둠의 세계와 예고 없이 맞닥트려 버린 불편함도 한 몫 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었을 성폭력과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받은 고통을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그런 자격도 없음을) 확신했다.
책의 시작은 안개와 한 남자가 등장한다. 생계를 위해 가족은 서울에 두고 홀로 무진 시에 내려온 남자 강인호. 실직상태를 보다 못한 부인의 주선으로 특수학교 기간제교사로 일하기 위해 내려오는 길이었다. 거리는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강인호가 무진에서 겪게 될 일의 전말을 알리기라도 하듯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들과 자애학원. 결국은 첫 날 만나게 되는 안개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안개 속만 거닐다 그는 서울로 떠난다. 책의 시작에서 나타난 안개, 중간 중간 무진의 특징을 제시하듯 등장하는 안개. 그 안개의 숨은 의미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한 진실의 감추어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만큼은 안개의 두터움을 느낄 새도 없이 한 가닥의 엷은 안개만으로도 충분히 진실이 가려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고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강인호는 자애학원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한 매체 물로 등장한다. 출근 첫 날부터 모욕적이고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학교에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기에 아이들을 믿고 아이들의 말을 믿어 주었다. 그로 인해 무진에서 인권 센터 간사로 있는 서유진과 함께 자애학원의 문제를 언론에 폭로한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진실이 드러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바로 수그려 들것이라는 예감을 만들어 주는 과정에 불과했다. 뒤로 드러나는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 또 다른 선생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이들에게 가한 성폭력의 진실은 그들이 가진 세상의 권력과 물질 앞에 나뒹굴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실감하게 했다. 그들의 뒷수습도 영향이 있었지만, 뻔 한 상식 앞에서도 상식을 뒤엎는 그들의 행태가 묵과되는 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인간 말증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다가도 멈칫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자살하고, 세상을 향한 두려움에 쌓여있어도 도와주는 사람보다 거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이 고백한 사실 앞에 분노를 터트리며 앞장을 서려다가도 조금씩 뒷걸음질이 쳐지고 말았다. 홀연히 서울로 떠나버린 강인호는 소설 속에 등장한 나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무엇인가 끓어오를 듯 치솟다가도, 삶의 권태를 느끼며, 현실에 순응해 가는 인물. 어쩌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사람들보다 과감하게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속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은 강인호에게(또 다른 나에게) 실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도피자라고 외칠 수 있을까. 지금껏 고통당한 아이들의 입장보다 지켜보는 내 입장만을 밝힌 것만 보더라도 내 위치도 그렇게 떳떳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미 가해자의 편으로 돌아선 세상은 피해학생과 그들을 도왔던 몇몇 인물들만 덩그러니 놓아둔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가고 있다.
그렇더라도 희망을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진부한 표현이 나를 일으켜 세워 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온통 우울하고 어두운 책 내용 앞에 저자도, 그 일이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도, 뒷걸음질 쳐버린 강인호란 인물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었다. 그러나 진정한 가해자들이 비난의 화살 밖에 서 있는 것에 놀랐고, 쉽게 잊혀 버렸다는 사실 앞에 당황할 뿐이었다. 진실이 드러나도 진실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싸잡아 몰아 붙여 버렸지만, 아이들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고 도우며 가해자들을 묵과하지 않으려는 소소한 세력이 있다. 서유진, 최목사, 연두엄마, 통역청년. 서유진의 편지로 소식을 접하게 된 강인호도 어쩌면 그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이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들만큼은 무진에서 아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몹시 게으르다'고 했던 저자의 말처럼, 그 진실이 언제 제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진실이 결국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진실의 드러남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피해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없다면 이 소설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므로(알 수 없는 권태와 죄책감에 시달릴게 뻔하다.), 되레 그들에게 내가 위로 받고 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