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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이야기 ㅣ 네버랜드 클래식 19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타샤 튜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시공주니어에서 나온 <네버랜드 클래식 시리즈>에 푹 빠져 있다. 어릴 적에 이미 읽었을 법한 명작들을 이제야 만난 탓이다. 분명 나의 어린 시절에도 세계 명작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제목만 많이 들어봤을 뿐, 읽은 작품이 없다.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읽지 않았다. 가끔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그런 작품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간략하게 나와 있어서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도 나름 학급도서를 섭렵하고 있던 나인데 왜 그런 책들을 읽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희미하게 감지해 낸 기억의 정체는 '이질적이다'라는 느낌이었다. 당시에 책을 통해 다른 나라 문학을 접한다는 사실이 익숙지 않았고, 너무나 다른 이야기의 정서는 다르다는 이유로 밀쳐내기 바빴다. 그런 기억을 가까스로 끌어내자 잊고 지냈던 동화를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네버랜드 클래식 시리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로 마주한 시리즈는 <세라 이야기>이었다. 우리가 <소공녀>로 알고 있는 제목은 일본어 번역본의 잘못된 제목이라고 한다. 그것도 새로운 사실이었지만, 드디어 <세라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어린 시절에 읽은 기억이 없기 때문에 무無에서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색달랐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즐거웠다. 어른이 되어서 읽기에 현재의 시선이 많이 포함될 거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책 속에 빠져 완전히 딴 세계를 만끽하게 되었다.
세라는 모든 소녀들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한 소녀였다. 예쁘고, 착하고, 순수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세라의 교육 때문에 아버지는 인도에, 세라는 런던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장교인 아버지와 함께 인도에서 살다가 일곱 살이 되자 민친 선생의 명문 여학교에 오게 된다. 자꾸만 'ㄴ'을 떼어 버리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민친 선생의 여학교는 세라에게 살가운 곳이 되어주지 않았다. 세라가 나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똑똑한 것 때문에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있었지만, 민친 선생은 세라 아버지의 재산 때문에 세라를 학교의 자랑거리로 여긴다. 민친 선생이 세라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늘 불편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해 절대로 나오려 들지 않은 인간의 선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세라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불편함을 세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대로 드러내고, 호되게 당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라는 학교에서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아버지가 마련해준 독방과 하녀,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을 하며 학교 수업에도 열심이다. 그러나 세라는 민친 선생이 아버지의 재산 때문에 자신을 추켜 세워주는 것을 알았고, 다른 부자 아이들과 친해지기보다 약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더 갔다. 설거지 심부름을 하는 베키가 그랬고, 어수룩한 어먼가드, 고집불통 로티가 세라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지금껏 다른 이의 관심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세 아이들은 세라에게 빠져 들었고, 세라는 흠이 없어 시샘을 살 정도로 선한 마음을 진심으로 드러내며 인간관계를 맺어 갔고,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세라의 특기는 '상상하기'였다. 세라의 현재는 '공주'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와 떨어져 있었기에 혼자서 견디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아빠가 사준 인형 에밀리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고, 모든 사물에 생명체를 불어 넣음은 물론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꾸려갔다. 그런 세라의 상상력을 비웃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의 세라의 독특한 상상력의 부산물을 즐기기에 바빴다. 세라는 이야기를 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자신이 상상한 내용을 그럴 듯하게 들려주었기에 세라가 이야기 할 때면 늘 아이들이 북적였다. 그런 능력이 부족한 것 없었을 때는 괴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세라가 상상놀이를 할 때면 측은하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라에게 닥친 시련은 아버지의 부재였다. 다이아몬드 광산의 투자 금이 날아가고, 병을 앓다 돌아가신 아버지.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는 민친 선생의 기숙사에서 겪은 고생보다 더 힘들었다. 그러나 세라는 긍정적인 사고로 시련을 극복해 나갔고, 그 가운데서 힘이 되어 준 것은 아이들과 민친 선생의 비난을 받았던 '상상하기'였다. 자신이 입고 있는 형편없는 옷가지와 다락방의 추위와 외로움은 상상하기를 통해서 견뎌낸다. 하루아침에 '공주'에서 하녀로 신분하강을 한 세라는 특유의 성숙함으로 대처하지만, 때때로 아이이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마주할 때면 지켜보는 나조차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여전히 세라 편이 되어 주었지만, 민친 선생의 구박과 온갖 시련은 때때로 세라가 견디기에 버거울 때가 있었다. 세라는 어른의 사랑을 원했고, 힘들고 고단한 생활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배부름과 아늑한 방이었다.
그런 세라의 바람은 현실로 드러났다. 아버지가 친구에게 투자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몇 배의 이익이 되어서 돌아왔고, 도망간 줄로 알았던 아버지의 친구가 세라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는 세라도 아버지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세라가 머물고 있는 다락방의 옆으로 이사 온 병을 앓고 있는 '인도 신사'는 하인으로부터 종종 소식을 듣는 세라가 친구의 아이인 줄 몰랐고, 세라를 생각하며 다락방의 소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들이 마주했을 때 무척 놀랐지만, 그렇게 다가와 준 서로가 무척 고마운 존재일 뿐이었다. 세라는 이제 다시 '공주'가 되었다. 자신의 삶에 시련이 닥쳤을 때 더 빛을 발했던 '상상하기'는 현실로 이어졌고, 밝고 명랑하고 천성이 베풀기 좋아하는 세라의 본 모습을 찾게 되었다.
어릴 적에 읽었다면, 분명 세라도 나의 로망이 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아이에다 착하고, 시련까지 극복하는 아이라면 늘 부족하다 여기는 자신을 대입해 보지 않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질투가 날까 싶으면, 아이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일상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한 결말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세라에게 푹 빠져 웃고 울고 행복해 했다. 이 나이가 되어서 읽으니 때 묻은 어른의 생각이 자꾸 비집고 올라 떨쳐내느라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세라의 순수함과 착한 마음씨,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좇고 싶은 마음은 간절할 정도였다. 하루하루 세상의 어떤 이면을 보고 살아가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세라 이야기. 세라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굴곡을 통해 어른인 나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