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벵이의 노래>를 리뷰해주세요.
굼벵이의 노래
황원교 지음 / 바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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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연이 아름다운 계절에는 좀 더 현실적인 책이 읽고 싶어진다. 현실적인 책에는 여러 장르가 있겠지만, 수필이나 산문이 현장 독서에 안성맞춤이다. 한 구절을 읽다가 그대로 고개를 들면, 책 속의 세상이 펼쳐지는 자연 앞에서 늘 내 존재가 작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경이로움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그런 시기에 내게 적절히 와준 한 시인의 산문집. 우선 국내 작품을 마주한 사실이 반가웠다. 생소한 작가였지만 오랜만에 산문을 읽으며 파릇하게 피어난 봄과 함께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책장을 열자마자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었다는 저자 소개 때문이었다. 순간 자연을 만끽하며 읽을 수 있는 산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지만, 책을 향해가는 내 손길을 멈추기 싫었다. 신체적으로는 정상인 내가 갖게 되는 편견에 저자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자는 생각에 짤막한 산문 몇 편을 읽다보니, 역시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발견할까 두려워 피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지극히 소소하고도 진솔한 저자의 내면이 펼쳐졌다. 오히려 한 문장씩 읽어나가다 보면, 소박한 언어의 유희에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저자이기에 마우스 스틱으로 이 글을 써나간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갔다(가족이 받아 적어줬는지도 모르지만). 모음과 자음의 조합을 해나가면서 문장을 만들어야 했기에 정신을 흩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가장 적절한 단어들을 써나가야 했기에 이토록 문장들이 여리고 꼼꼼할 수밖에 없으리라.  


  언어의 유희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저자의 처지도 잊은 채 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20년이 넘도록 누워서 삶을 연명해야 했던 저자의 내면은 결코 평안하지 못했다. 한참 혈기왕성할 서른의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고, 자신을 7년 동안 병간호 해주던 어머니마저 급작스레 돌아가시자 식구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특히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너무도 죄스러워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치욕적이었지만, 제 목숨 하나 맘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흘릴 것은 눈물뿐이었다. 동생 내외와 연로하신 아버지, 어린 조카들 덕에 최악의 황폐함은 면했지만, 늘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갖는 죄스러운 마음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네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있는 글의 곳곳에서 그런 저자를 만나노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의 신세가 처량하면서도 크나큰 공감이 들지 않은 것은 지켜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보다 히스테릭한 글이 아닌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글을 통해 독자와 교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글 앞에서 그를 이해한다, 안타깝다는 섣부른 마음을 드러낼 수 없음은 당연했다.  


  총 네 단락으로 나뉜 글은 일상에서의 소소한 경험과, 자신의 인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주제별로 묶다보니 시간순서가 조금씩 얽히기도 했지만, 부담 없이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글들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어그러질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차마 꿋꿋이 삶을 살아준 저자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몸이 불편할 뿐, 나보다 더 충실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아(혹독한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부끄러울 뿐이었다. 감히 처지를 뒤바꿔서 생각해 볼 수 없었고, 구경꾼으로써 훔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느지막이 아내가 생겼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행복해 보여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지켜보는 것이 참 쉬우면서도 무거워지는 시간이었다. 특별한 인생이면서도 평범함이 흘러 나왔기에 느끼는 평안함도 많았다. 자신의 처지를 보며 드러내는 고뇌는 보통 사람들이 갖는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마음들이 어찌 그 뿐이겠는가. 제한된 삶의 영역에서 오는 당연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누구나 그러한 마음들을 갖고 살아가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보다 조금 신체가 자유로울 뿐, 오히려 더 주눅 된 삶을 살아가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용기가 될 수 없겠지만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으니 지금처럼 꿋꿋하게 삶을 향해 나아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지극히 보통사람인 우리가 더 살맛이 난다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 보고 싶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언어의 유희와 한 전신마비 시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누구나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마음이 조금 불편해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극히 정상적인 것에 대해.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타오르는 것은 산뿐만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우리들 마음속의 또 다른 희망이란 것을.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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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버핏과 함께한 점심식사 - 오마하의 현인에게 배우는 가치 있는 성공을 위한 6가지 지혜
고수유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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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퇴근길에 카페에 들렀다. 오랜만에 커피 한 잔과 쿠키를 곁들인 풍성한(?)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고 돌아왔다. 커피값이 그다지 저렴한 편이 아니라서 자주 가지 못하는 카페에 들른 이유는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워렌 버핏과 함께한 점심식사>를 읽고나니 무언가 잡힐듯 말듯한 느낌을 정리하고 싶어 카페에 들른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책 내용을 떠올리며, 체크해 놓은 부분을 종이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손으로 직접 써보니 의미전달이 새롭게 되는 것 같았고, 다시 한 번 그 내용들을 파악해 보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겨진 질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꿈꿔야 하는가. 내용정리를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카페로 향한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멤돌던 생각이었다.

 

  이 책을 본 순간 대충의 스토리가 머릿속에 그려졌음에도 워렌 버핏과 어떠한 점심식사를 했는지 궁금했다. 날로 나른해져가는 따스한 햇살을 쬐며 둥그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 그런 욕망이 나를 일깨웠을지라도 어떠한 내용으로 채워졌는지 알고 싶었다. 워렌 버핏이라면 워낙 유명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그와의 점심식사라는 제목에는 의구심이 들었다. 알고보니 저자는 워렌 버핏과의 섬심식사가 거액에 낙찰되었다는 기사를 접한 후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워렌 버핏과 점심식사'라는 모티브를 제외한 전체 스토리는 저자의 창착물이라는 설명과 함께.

 

  의외로 재미있게 읽히는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니, 오히려 평상시의 책 읽는 속도보다 더 천천히 읽고 있었다. 주인공 박찬우라는 남자와 나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어 보였는데, 그는 우리의 '분신이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박찬우라는 인물이 어떤 상황에 처해졌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는 미국의 유명한 대학을 나와 소신껏 선택한 광고회사의 유능한 팀장으로 팀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늘 열심히 일을 했지만 갑자기 순조로웠던 일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국장 승진에서 탈락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와닿은 문제는 팀원들과의 갈등이었다. 자신을 잘 따르던 팀원들이 갑자기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자신이 승진에서 탈락하자 그런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모함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 처해진 박찬우는 우연한 기회에 워렌 버핏에게 이메일을 쓰게 된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고 쓴 메일이지만, 막상 점심 식사를 제안하는 워렌 버핏의 메일이 오자 무척 당황한다.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삶과 일에서 성공할 수 있을가요?"라고 물었기에 박찬우를 초대한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볼 때 그리 유쾌하지 않았으므로 박찬우는 휴가를 내고 워렌 버핏을 만나러 오마하로 날아간다. 

 

  그렇게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가 이루어졌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인 워렌 버핏과 6번의 점심식사라니. 소문대로 워렌 버핏은 소박한 차림으로 나타났고, 그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콜라, 아이스크림을 만찬으로 즐겼다. 늘 박찬우의 얘기에 먼저 귀를 기울였고, 문제점이 무엇인지 짚어주었으며 좀더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다양한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삶과 일에서 성공하고 싶은 한 청년에게 워렌 버핏은 자신이 겪어온 경험을 통해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의 점심식사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남은 기간 동안 박찬우는 워렌 버핏이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으며 자신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파악해 가며 귀한 가르침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워렌 버핏과의 만남이 쌓여갈수록 쏟아지는 생각들도 많았고, 배워가는 것도 많았다. 워렌 버핏의 명성에는 철저한 노력, 공부, 겸손,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무언가 특별한 비밀이 숨겨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싱거울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충고들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거쳐온 한 사람의 성공한 인생이 있었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명성과 부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만드는 열정, 하루가 즐거워질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사랑은 기본적인 것에서 흘러 나왔다. 박찬우는 매주 만날 때마다 일과 인생에 대한 가르침이 맞물려가고 있음을,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깨달아갔다.

 

  그런 만남이 이어질때마다 내 안에서도 무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미뤄버린 일, 지루한 일상, 망상으로 그쳐버리는 꿈. 그 모든 것이 관심좀 갖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워렌 버핏이 박찬우에게 충고해준 것들이 나에게 온전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본에 충실한 충고였기에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6주간의 만남은 끝나기 마련이었고, 그 만남은 알차게 채워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만남을 지켜본 내게 과연 무엇이 남을까.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 책을 읽은 의미가 무엇일까. 많은 생각들이 오갔기에 퇴근길에 카페까지 들렀건만, 한 권의 책을 정리하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카페에서 정리한 내용은 내게 와닿는 글을 옮겨 놓은터라 협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메세지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메세지 안에는 워렌 버핏의 일대기가 채워져 있었고, 박찬우가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에 대한 그림도 그려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구경꾼으로 남아 있었다. 유명한 멘토와의 점심식사가 현실로 이뤄지기는 어렵겠지만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차를 한 잔 하며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를 갉아먹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에 대한 해답이 필요할 때, 워렌 버핏과 점심을 먹는다 생각하고 고민을 호소해 보길 바란다. 한 편의 소설처럼 촘촘히 짜인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조그마한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구경꾼으로 남지 않았다는 자신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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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설에 빠지다 - 금오신화에서 호질까지 맛있게 읽기
조혜란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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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시 한 번 내 책장의 위력에 놀라고 말았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이 500권이나 되니 따지고 보면 결코 긍정적인 위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 속에 언급된 책을 내 책장에서 바로 뽑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오랜만에 맛보는 뿌듯함을 느꼈다. 다른 책에서 언급된 책을 대부분 메모하거나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하는데, 쌓아둔 책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 수고스러움이 가볍게 떨쳐졌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깊은 밤에 책장 여기저기서 책을 뽑아 내느라 분주한 손길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옛 소설에 빠지다>를 읽으면서 내책장에서 뽑아낸 책은 <옥루몽(5권)>,<열하일기(3권)>,<남한산성> 이었다. 언급된 책들이 그 외에도 무척 많았지만, 내 책장에 잠자고 있는 이 책들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런 연결됨은 참 오랜만이었다. <옛 소설에 빠지다>에서 연결된 독서를 <넓게 읽기>라 명명하고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이미 그런 독서의 매력을 알기에 오랜만에 조우한 시간이 기뻤다. 이 책을 덮고 내 책장에서 골라낸 책들을 한가득 쌓아놓고 보니, 책을 덮음으로 단절되어 버리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책들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 중에 먼저 집어든 책은 <옥루몽>이었다. 약 3년전에 1권을 읽고 이야기가 끊긴 채 방치하고 말았는데, <옛 소설에 빠지다>에서 간략한 옥루몽의 스토리를 읽고나니 2권을 서슴없이 펼칠 수 있었다. '열하일기'와 '남한산성'까지 읽고나면 <옛 소설에 빠지다>의 즐거움을 한껏 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나왔던 고전이 내 책장에 꽂혀 있어서 잠시 흥분했지만, 그런 흥분은 <옛 소설에 빠지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고전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국내 고전에 관해서는 등한시하며 말로만 떠들었던게 사실이었다. 한 고전소설 연구자의 안타까움에서 한 권의 책으로 재탄생(여기에 실린 해설은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됐던 글이라고 한다.)되었기에 나 같은 독자들에겐 가뭄의 단비처럼 해갈이가 되어 주었다. 이 책에는 몇개의 장르로 분류를 해서 13편의 고전소설을 싣고 있는데, 어떻게 한 권의 분량으로 나올 수 있을까 의아했다. 원문이 다 들어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맛보기에 좀더 살을 붙인 요약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원문 전체를 읽다보면 안그래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고전에 더 멀어질 것 같았다. 이 책에는 원문을 보며 즐길 수 있는 여지는 남겨놓은 스토리가 수록되어 있었고 <천천히 읽기>라는 덧붙임을 통해 소설에 대한 해석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깊이 보기>를 통해 발췌해 놓은 원문도 살펴보고 간략한 느낌을 만날 수 있다.

 

  이렇듯 한 편의 소설에 다양한 맛보기가 곁들어 있어서인지 고전소설을 읽고 난 뒤의 맛은 달콤했다. 고전소설의 특징상 읽기에는 무리가 없을지 몰라도 읽고난 후의 뒷감당은 난처한게 사실이다. 익숙치 않은 문학이기에 독자 혼자만의 해석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란 무리다. 각자의 해석을 매력으로 하는 것이 문학이라곤 하지만 고전소설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도움말이기에 뒷맛이 씁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넘겨 버렸더 것, 약간의 미심쩍음이 있었던 장면과 스토리를 하나하나 짚어주며 되새김질 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고전소설에도 여러 장르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비슷해 보이는 스토리 가운데서도 각자의 특징을 살려 재미있게 읽히는 내용들이 흥미로웠다. 

 

  이 책에는 <사랑, 사랑이로다>,<전쟁, 그 참상에 대하여>,<양반 남성들의 판타지, 그 이면>,<비수처럼 꽃히는 통찰과 깨달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들어봄직한 소설이 많을거라 생각했던 나는 대부분 생소한 작품에 기가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생소했기에 신선하게 읽을 수 있었고, 어떠한 방해(수업용으로 외운 내용이라든지)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맥락과 분위기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능력밖에 안되지만 놀라움과 감탄, 스토리의 한계가 버무러진 고전소설은 의외의 재미를 안겨 주었다는 말을 번복하게 된다. 글이 씌여진 시대를 감안하고 읽었을 때의 놀라움, 파격적인 설정, 스토리의 탄탄함은 그야말로 신선한 묘미였다. 그에 반해 시대적 배경을 뛰어넘지 못하는 스토리와 비슷비슷한 결말은 큰 반향을 일으켜 주기엔 무리여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저자의 말마따나 재미있게 읽긴 읽었지만 그 느낌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권선징악의 결말을 잘 보여 주었다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구구절절 스토리를 읊어대는것 또한 석연치 않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요약 소설과 다양한 해석과 도움말을 만나게 되면, 고전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거라 생각한다.

 

  한 때 외국의 고전들을 읽으면서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발하는 문학작품들이 존재하는 것에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럴때마다 왜 우리에겐 그런 고전이 없는지, 있다고 해도 고리타분하고 지루한지 늘 그게 불평이었다.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어야 하겠지만, 거의 외국어에 가까운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고전소설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동감하는 바이다. 오늘날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씌여지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읽힘이 발전하다 보면 원작의 참 맛을 찾아 읽는 손길도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그런 행위들이 모이고 모여 우리 고전을 즐겨 읽는 독자들이 늘어날 때에 사랑하는 마음도 저절로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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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그래픽 노블)>를 리뷰해주세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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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경험이었다. 한 단편을 세 번에 걸쳐서 읽은 일은. 영화화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피츠제럴드 단편을 출간했다. 국내 독자들도 갑자기 쏟아진 여러 출판사의 번역물 중에서 어떤 작품을 읽어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급격한 부흥을 일으켰다. 내가 먼저 접하게 된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는 피츠제럴드의 다른 단편도 실려 있는 두툼한 책이었다. 처음엔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가 단편인지 모르고 읽었다가 잠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단행본으로 나온 이 책에는 그래픽 노블과 단편 소설이 따로 실려 있어 똑같은 내용을 세 번 읽게 된 것이다.

 

  똑같은 내용을 세 번 읽었다고는 하지만, 느낌이 조금씩 달랐다. 먼저 만난 피츠제럴드 단편집에서의 '벤자민 버튼'과 이 책의 '벤자민 버튼'은 번역이 조금 달랐고, 그래픽 노블은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을 질감을 통해 만난 경험이었다. 이 책에는 그래픽 노블이 먼저였고, 다음에 단편이 실려 있어서 상상력의 제약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먼저 단편을 읽고 그래픽 노블을 만났기에 세세한 비교를 해가는 재미가 있었다. 세 번 모두 제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채 다가왔지만,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는 변함이 없었다. 70살의 나이로 태어난 벤자민 버튼은 거꾸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의 부모님은 재정적,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터라 벤자민 버튼의 탄생이 기쁠 리 없었다. 병원에서 한바탕 난리를 일으키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이슈가 될 정도로 시끄러운 탄생이었다. 신생아들이 가득한 곳에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의 부모도 부모지만 독자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태어남을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벤자민 버튼 자신이며, 가족들이 앞으로 펼쳐질 거꾸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벤자민의 아버지 로저 버튼은 노인의 몰골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아이로 받아들였다. 인생이 거꾸로 펼쳐진다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런저런 투닥거림이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갔다. 벤자민이 18살이 된 해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18살로 보지 않아 처음으로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경험한다. 그 이후로 벤자민은 보이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다짐한다. 사교계에서 만난 몽크리프 양 앞에서도 자신의 실제 나이를 말하지 않고, 겉으로 보여지는 엄청난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나 벤자민은 자신이 점점 젊어진다는 것을 눈치챈다. 부인이 나이들어감에 따라 매력을 잃어 갔지만, 자신은 점점 젊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실제 나이와 신체 나이 가운데 펼쳐진 삶은 확연하게 드러났고 그에 따라 주관이 달라졌다. 나이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지고, 과거의 모습을 생각하다(거꾸로 거슬러 올라온 이력) 퇴짜를 맞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심지어 자신의 아들조차도) 벤자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벤자민 자신도 거꾸로 펼쳐지는 인생 앞에서 속수 무책이듯,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당연했음은 자명했다.

 

  벤자민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삶에 의외로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든지간에 비교적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잘 따랐다. 주변의 충고도 적절히 들어가면서(단, 젊음을 멈추라는 충고만 빼고) 신체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는 실제 나이에 따라 행동했다가 부딪힌 뼈 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현실에 충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벤자민은 거꾸로 된 삶을 살았고, 자신의 손자와 유치원을 같이 다니다 갓난아이로 돌아가 죽음을 맞는다. '우리네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맨 처음에 오고 최악의 순간은 맨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 영감을 받아 이 단편을 구상했다는 피츠제럴드.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 뒤집힌 한 사내의 삶을 지켜보긴 했지만, 과연 그러한 순간들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남들과 달랐기에 외톨이 삶을 살아간 벤자민 버튼이 가여울 뿐이다.

 

  벤자민 버튼의 인생을 이해한 이가 있을까. 자신 조차도 자신이 거꾸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주어진 신체나이에 맞춰 살기 급급했는데. 그의 부모, 자식, 부인도 이해해 주지 않은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의 삶은 독특했지만 서글플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신체나이에 맞게 사고도 따라갔다는 사실일까. 70세의 노인으로 태어났지만 그에 맞는 사고력이 있었고, 나이가 점점 어려질수록 정신연령도 맞춰졌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쇠퇴해지는 것처럼 벤자민 버튼도 나이가 줄어들수록 과거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억이 지워졌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 그가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갓난 아이의 죽음이 잠시 서글플 수도 있겠으나, 그가 70세의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났던 것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태어남과 죽음은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삶의 꾸려짐으로 판가름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독특한 소설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부터 영화화 하려 했었다고 한다. 주목을 받지 못해 그의 생전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후 86년이 지난 2008년에 영화화 되고 여러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는 모습을 과연 상상할 수 있었을까. 미국 현대 문학 작가로 재발굴 되고, 그의 작품이 새로운 관심을 받는 것은 좋을 일이다. 그러나 특정한 작품이 영화화 되었다고 너도 나도 출간이 되는 것보다 지속적인 관심으로 그의 많은 작품들이 독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독특한 소설이다. 삶을 재조명 해 볼 여지를 품고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독특한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그만 방향을 돌려서 남들처럼 늙어가야죠. 장난이 지나치잖아요. 더는 재미도 없어요. 처신을 똑바로 하시란 말입니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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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겉 알베르 카뮈 전집 6
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을 탐독하다보면, 꼭 전작해보고 싶은 작가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작을 실현할 수 있는 작가와 아직 내공이 부족해 이상으로 남아있는 작가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는 후자에 속했다. 고등학교 때 문학을 읽는답시고 <이방인>과 <전락>을 읽었지만,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전작하고 싶은 작가의 대열에 올려놓고도 읽을 엄두를 못냈는데, 그의 책을 사들인 것은 다른 책에서 언급된 이유도 있었고, 절판되려는 낌새가 보여서였다. 그렇게 한 권씩 사다보니 19권의 전집 중 9권을 모았지만, 섣불리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었다. 책을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다 겨우 내 손에 쥐어진 작품은 <안과 겉>이었다.

 

  카뮈 전집 no.6을 달고 있지만, 비교적 초기 작이다. 카뮈의 나이 22살 때인 1935~1936년 사이에 씌여진 글로 아주 적은 부수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절판이 된 후에 재판을 거절했던 것은 '예술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품게 된 선입관 때문에' 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어떠한 선입관을 가졌기에 재판을 거절했는지 이 책을 읽고도 정확히 알지 못해 의아했던게 사실이다. 자신의 초기작에 대한 부끄러움 내지는 부족함에 대한 겸손이라고 생각할 뿐, 그의 작품을 전작하기로 마음 먹은 나는 마냥 감격할 뿐이었다. 작품의 제작은 오랜 고역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글을 써나가면서 점철되어지는 사고의 확장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안과 겉>에 대한 출판은 더 미루졌는지도 모르겠다.

 

  6편의 산문은(서문 포함) 카뮈의 경험과 들음, 생각이 어우러진 글이었다. 얼핏 수필로 구별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카뮈의 세계를 따라가다보면 그의 깊숙한 사고의 언저리에 머무는 기분이 들곤 했다. 글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사건과 동떨어지기도 하는 성찰의 깊이 혹은 사고의 나열은 감성을 풍부하게 일깨워 주기도 했다. 내가 완성시키지 못했던 자잘한 생각의 스침을 굳건히 만들어 주기도 했고, 타인의 생각을 탐한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도 덧대어 주었다. 친구들과의 여행기나 다른이에게 들은 이야기 속에서도 카뮈의 감성은 늘 충만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일상의 흔적 속에서도 '글이란 이렇게 탄생되는 구나'를 연발하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만 초기작이라서 좀더 다듬어지지 못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서투름에 대한 자괴심이었음을 깨달을 뿐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무척 행복했다.

 

  카뮈의 책을 읽고 느낌을 남긴다는 것은 책을 집어 든 순간부터 무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나의 내공의 부족함을 알기에 카뮈의 책을 읽는 것 자체에 큰 의의를 두었던게 사실이다. 어떤 작가가 유명하고, 어떤 작품이 유명하냐를 따지기 보다 나와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 기본기에 충실해 나에게 맞는 작가와 작품을 탐독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지만, 카뮈 같은 작가는 읽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느낌을 남기는 것은 더 큰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드러내는 본질의 언저리만이라도 멤돌면 감사하련만. 단순한 읽기에 치중한 독서라 내 안에 멤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카뮈의 전작을 읽어보기로 다짐하고 소소한 출발을 했다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벅참 그 자체였다.

 

  분명 두껍지 않은 책이었음에도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두께와 책 내용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카뮈의 작품보다 작품 해설이 더 어려웠다. 서문부터 긴장했지만, 오히려 작품 하나하나의 다가가면서부터 긴장감은 풀어졌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양의 작품해설은 기껏 카뮈에게 다가간 용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읽으면 되고, 작품해설에 큰 비중을 두지 않기에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읽어나가면 되지만, 그렇다고 안 읽고 넘어갈 수 없어 조금 힘들었다. 앞으로 18권의 책을 더 읽어나가야 하는 나로써는 카뮈와의 지속적인 만남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한 권씩 정독하면서 카뮈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는 이 마음은 무얼까. 오랜 바람에 한 발짝씩 내미는 발걸음의 즐거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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