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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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침대에서 책을 읽다 스르르 잠드는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는 기쁨이야말로 애서가들이 좋아하는 일상이 아닐까. 그런 행복에 경계를 주는 일은 책이 너무 지루해서 잠이 든 경우다. 애석하게도 <죽음의 중지>가 그랬다.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단번에 각인된 저자였기에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집어 들었지만, 이런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떠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 것인지 궁금했건만, 소설은 초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시작한 첫 문장은 강렬했지만, 딱딱한 문체와 대화를 구분하지 않은 경계는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첫 문장은 말 그대로였다. 새해를 알리는 종이 친 순간부터 죽음은 사람들에게 오지 않았다. 이 일은 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곧바로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에게도 생명이 유지되었다. 전국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 했지만, 현실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되었다. 죽음이 오지 않은 것은 자연의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원활함이 제약되는 것은 곧 혼란을 뜻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할 곳은 어디일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병원과 장례협회였다. 병원은 공급이 넘쳤고, 장례협회에는 수요의 부족으로 생계를 위협당했다. 또한 교회의 입장도 편치 않았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신의 존재가 자연스러워 지는데, 죽음이 없는 세상은 신이 존재하기에 거북스러운 곳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 나라. 그 나라의 혼란을 짐작하지 못하다가 하나씩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내 머리속은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그 나라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상상의 나라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혀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병원과 교회, 장례협회의 혼란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 외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저자는 일일이 기록하길 거부했다. 나라일을 맡고 있는 몇몇 인물들과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하고 있는 몇몇 기관의 대표자들의 심경으로도 충분한지, 제 멋대로 뻗어가는 상상의 나래를 잠시 차단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 차단이 유쾌할 리가 없다. 전국을 돌며 혼란을 목격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대표격들이 맞고 있는 현실만 바라봐도 참담함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생각지 못한 복병들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왜 죽음이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지, 어떻게 손을 써야 다시 원활한 자연의 생리를 따를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죽음에서 비켜가 있는 혼란의 대국에 작지만 변화를 일이킬 만한 일이 일어난다.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은 이렇게 버티는 삶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판단하고, 자신을 국경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국경 너머는 여전히 죽음이 존재했고, 그 방법이야말로 작은 돌파구를 제시하는 일인 것 같았다. 노인의 가족은 아버지와 아픈 손자를 함께 국경에 묻고 돌아온다. 국경을 넘는 순간 생명은 꺼져버렸기에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일은 순식간에 퍼졌고, 목숨만 붙이고 있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먼저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댔고, 주변 국가의 불만을 샀으며, 그 일을 처리해주는 마피아의 손길이 닿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행해진 죽음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이전의 공급처럼 원활한 죽음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죽음이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혼란에 빠진 나라, 혼란에 빠진 독자를 구원(?)하듯 죽음은 이내 다시 찾아왔다. 몇 달간의 죽음의 중지에서 다시 죽음이 재계될 것이라는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온지 알 수 없는 자주색 편지. 그 편지는 죽음을 전달하는 메신저였고, 편지를 받는 자는 일주일이 지난 후에 죽게 된다. 죽음이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찾아왔기에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죽음은 자주색 편지를 통해 랜덤으로 찾아왔고, 그 편지를 누가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저승사자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 것일까?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고상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걸까. '죽음(편지를 보낸 행위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시점에서, 소설은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탄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잠시 뒤로한 채, '죽음'의 입장에서 죽음이 보여 진다.

 

  '죽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사람으로도, 저승사자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뼈로만 이루어진 존재. 죽음의 편지를 일일이 쓰고, 순식간에 편지를 보내는 인물로 생각해야 할까. '죽음'이 인간들에게 죽음을 주는 가운데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죽음의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의 편지가 다시 되돌아 온 일.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편지로 인해 그 사람의 생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49살에 죽어야 했을 독신의 첼로리스트는 50번째의 생일을 맞이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은 첼로리스트를 관찰한다. 그가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 그에게 죽음이 왜 비켜갔는지 뼈로 이루어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죽음'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으로 인해 급격한 혼란을 맞고 있었다.

 

  어째 소설의 흐름이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나라의 지루함을 지켜보다 꾸벅꾸벅 졸던 내게 '죽음'의 행동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지만,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반전이었다. 책은 거의 끝나가는데, '죽음'은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주는 일에 직접 나서고 있었으니 결과에 주목하면서도 상반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또 졸고 말았다. 상상력이 풍부한건지, 단순한건지 알 수 없지만 잠들기 전에 읽은 책 내용은 나의 꿈에서 연결되기 일쑤였고 나는 '죽음'과 첼로리스트의 꿈을 꿨다. 그리고 꿈에서 깨자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갔고, 나의 집중력은 최상의 상태를 발휘했으며 이전의 지루함은 떨쳐 버린 채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를 예상할 수 없지만 결코 순탄하게 흐르게 두지 않을 것을 짐작한 저자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처럼, 로멘스 소설을 읽는 듯 끝 부분을 읽어 나갔다.

 

   그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힘겹게 읽어간 소설은 모두 사라지고, 죽음을 주려는 '죽음'과 '죽음'을 사랑하게 된 첼로리스트의 이야기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꿈을 꾸고 나서야 무엇에 홀린 듯 읽어나갔던 일은 물론, 죽음이 사라졌다 다시 온 나라의 일은 현실과 혼동 되었다. 생뚱맞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 '죽음'과 죽음을 비켜간 첼로리스트라니. 혼란에 빠뜨렸던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의 유무를 뭉뚱그리는 것도 아닌 결말 앞에 망연자실 할 뿐이었다. '죽음'이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그를 사랑하게 된 다음 날, 역시 책의 시작과 함께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소설은 끝이 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었지만, 개인적인 경험 앞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로 비춰졌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 통제된다는 유무를 확인한 셈으로 치기엔 무언가가 석연치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듯한 '죽음'의 행동.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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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를 리뷰해주세요.
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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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를 간단히 보고,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두 명의 장애인 아들을 둔 아빠. 그가 쓴 글이 어쩐지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한 동정심이 일었다. 단순하게 장애인 아빠를 향한 측은함이었기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참 많이 부끄러웠다. 멀리 갈것도 없이 내 주변의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 많았기에 얼마나 편협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가진 것은 아니다. 장애인 아들을 둔 아빠의 심경을 뼈저리게 느낀 것도 아니다. 다만 두 아들과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었다.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동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렇게 쓰는 것은 과하지 않냐는 편견이 들어 있었다. 그런 편견이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처절하게 깨져 버렸는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책 속의 주인공만 살펴보더라도 그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장애 아이들을 가졌다고 막연한 측은함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 '이해한다'는 말이 아닐까. 동정심도, 이해도 아니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대해야 할지 난감해 질 것이다. 아빠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을 그대로 좇는다고 하면 좀 도움이 될까. 아빠는 아이들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다 못해 익살을 부리고 있었다. 그 익살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배꼽을 잡으며 웃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익살의 뒤끝은 씁쓸하기도 했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음을 알기에 부렸던 익살이기 때문일까. 실컷 웃다가도 결국 울고 마는 아픔이 느껴졌다.

 

  장애 아이들을 둘 씩이나 둔 아빠의 심정을 이해 하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통해 토로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힘겨웠던 짐을 독자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수 있다면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동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라고 했듯이, 소설이라고 하지만 책을 통해 알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고백이 아닌, 익살맞고 적절한 무게를 지녀야 했으니 또 한 번의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두 아들을 똥강아지라고 부르며, 평범한 일 하나조차 할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심정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까지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저자가 간직한 것이 고통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아마 그 두 감정이 버무려 졌으리라), 그런 감정을 무시한 채 웃을 수 없었다. 모두들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면 심각해지기 때문에 웃으면서 얘기해 보고 싶었다던 저자. 실재로 아이들이 많이 웃게 해주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조차 왜 그렇게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두 살 터울인 마튜와 토마를 보면서 저자는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런 아이들을 낳은 자신을 자책 하기도 하고, 아이들로 인해 받게 되는 어려움을 숨김 없이 털어 놓는다.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 감추지 않았고, 아이들과 함께 갖을 수 없는 꿈과 평범한 일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들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한 면에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 내제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막연한 사랑으로 둘러치지 않고, 눈물과 동정심을 호소하지 않는 저자의 글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두 아이들과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태어났을 때부터 드리워진 상당한 무게의 짐은 충분히 덜어내지 못했다. 덜어낼 수도 없고, 덜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튜가 척추 수술을 받고 3일 만에 숨지자, 오히려 잘됐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태연해야 했던 저자. 그런 저자가 책을 통해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많은 짐이 덜어졌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두 아이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다. 마튜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기에 더욱더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빨리 읽어 버린 사실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세월을 지내왔고, 적절한 선을 유지하려 애쓰는 저자의 글을 다른 나라 얘기 인듯 읽어 버렸다. 그러나 마음이 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블랙유머를 읽는 거라면 좋았을 것을.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경험이 진득하게 녹아든 이야기들은 보통사람들이 무시하며 아무런 상관 없이 지나쳐가는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런 보통 사람인 나를 덜 부끄럽게 만들어 준 저자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대면해준 저자의 노고가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메세지를 남겼을 거라 생각한다. 장애인을 보면 측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보통 사람과 좀 다를 뿐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아이를 갖게 되더라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유쾌할 수 있는 저자도 감사했고, 아빠를 웃겨줄 수 있는 마튜와 토마도 고마웠다. 장애 아이들을 두었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도 똑같은 인간이기에 많은 고뇌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좀더 힘을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들보다 자신을 위해. 지금껏 잘해 왔다는 용기와 함께.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장애아이를 가진 부모의 솔직한 내면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장애인에 대한 무작정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어느 누구라도 읽어봐야 할 책이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장애아의 아빠는 웃을 자격도 없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진 아빠는 곱빼기로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한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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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터>를 리뷰해주세요.
스웨터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선물
글렌 벡 지음, 김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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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나약한 면을 안고 살아가기에 실수라는 것을 한다. 그리고 후회라는 것도 한다. 인생에서 관록이 생기는 것은 어쩜 그런 후회를 줄여온 단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젊은 날의 치기는 흔하디 흔하다. 열두 살 에디는 점점 후회가 깊어지는 행동과 말을 일삼으면서도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는 아이였다. 불러올 파장을 알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는 일을 줄일 수 있겠지만, 마음 속으론 브레이크를 당겨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에디는 멈추지 못했다. 에디도 처음부터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넉넉하지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빵집 아들로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살았다. 아빠의 빵집을 돕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평범한 열두 살 소년 모습 그대로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 모든 것이 행복이었음을 에디는 너무 빨리 깨달아 갔다.

 

  엄마가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생한다는 것은 에디는 충분히 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는 꼭 자신이 갖고 싶었던 자전거를 선물로 받고 싶었다. 일 년 동안 자전거를 받기 위해 살았다 할 정도로 착하고 유순하게 굴었다 자신한 에디는 꼭 그 자전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그러나 엄마가 에디에게 준 선물은 스웨터였다. 그것도 엄마가 손수 뜬 스웨터였다. 오로지 자전거만 기대하고 있었기에 스웨터를 받은 에디는 심통이 났다. 자전거를 사줄 수 없는 형편과, 그토록 자전거만을 바라며 지내온 시간이 분하고 억울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서도 에디와 엄마의 공백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가 다가가려 해도, 에디는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기에 더 심통을 부릴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댁에 가서도 아슬아슬하게 심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피곤한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할아버지도 지친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에디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에디는 그제서야 괜한 심통을 부렸다고 후회하지만, 이미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에디가 탄 차는 사고가 난다.

 

  거기까지가 에디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불행은 오지 않을 것이며, 에디의 고집이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의 치기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가 편안히 책을 읽어나가도록 두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란 추측을 무참히 깨트리며 에디의 엄마는 사고로 죽는다. 그때부터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 내용이 그저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은 뒤집혔고, 앞으로 에디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빠를 잃고, 그 상처도 치유되지 않았는데 엄마까지 잃어버리다니. 자신의 고집으로 차를 몰다 엄마가 돌아가시다니. 에디는 이제 세상을 믿지 않았고, 자기 곁의 사람들도 다 떠나갈 것이라며 더더욱 못된 아이로 성장해 갔다.

 

  할아버지 댁에서 살게 된 에디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자신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자책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엄마가 죽은 것을 할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막말을 일삼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친구를 부러워했다. 할아버지가 그런 에디를 변화시키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자신의 상처 속에서, 세상을 향한 불신에서 도무지 돌아설 줄을 몰랐다. 올바른 행동과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키지 않았으므로 예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엄마 아빠에 대한 그리움보다 온통 엇나가는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어 더욱 심술을 부렸다. 언제든지 손을 내밀면 도와줄 사람이 있고,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무척 사랑한다고 할아버지가 아무리 말해도 에디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는 듯한 말을 해주는 이웃집 농장의 러셀 할아버지가 더 편안했다.

 

  이상한 몰골을 하고 있는 러셀 할아버지는 에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단지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에디는 러셀 할아버지 앞에서 엉엉 울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할아버지의 말을 조금씩 귀담아 들었다. 에디가 할아버지댁에서 가출해 폭풍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람은 러셀 할아버지였다. 아무도 자신에게 오지 못한 상황, 어떤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셀 할아버지는 에디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에디가 그 폭풍우를 뚫고 나올 수 있도록 에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에디 자신 뿐이었다. 러셀 할아버지의 말들은 익숙한 충고였지만, 난관에 봉착한 에디에게 그런 에디를 바라보고 있는 독자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에디가 무엇을 회피해 왔는지, 두려움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면서 에디의 부모님은 에디를 위해 그런 두려움을 극복해 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에디는 충분히 고통을 느꼈기에 갇혀진 내면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며, 삶을 좀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엇나가는 에디를 지켜보는 것도 슬슬 지쳐가던 차에 제대로 된 깨달음이 왔으니 마음 놓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안심까지 저자는 무참히 깨트려 주었다. 정말 다행일 수 밖에 없는 반전이었지만, 에디를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 눈물이 나도록 독자를 내버려 뒀다는 생각에 조금 심통이 났다. 심통이 나는 것을 보고, 에디가 깨달은 것을 진정 깨닫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를 풀리면서 허탈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에디에게 닥친 불행을 보며 마음 아파 하고, 실재로 그런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보다, 왜 똑바로 서지 못할까라고 질책할 때가 더 많았다. 에디가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나왔던 고통이 나의 폐부를 찔렀기에 다행스런 현실이 허탈하면서도 씁쓸했으리라. 에디의 고통이 나에게도 이미 존재하기에 마음이 더 아파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고통의 벌판에서 잘 이겨냈으면 한다. 자꾸만 어긋나는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나 혼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하면서 동류의식을 갖었으면 한다. 에디를 도와주었던 러셀 할아버지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서.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내면의 상처를 엇나가게 하다 치유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자아를 찾기에 혼동스러운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인생이란 길을 걸어가면서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일은 말이다, 그 여행을 이어갈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믿는 거란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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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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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드 보통 책을 1+3 이벤트 할 때 구입했건만, 달랑 한 권 읽고 방치해 둔 상태다. 조금 어렵기도 했거니와 도통 책을 열어볼 기회가 닿지 않았다. 조금씩 보통 책을 모으면서도 <우리는 사랑일까>만 유독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을 기회가 닿아 내심 반가웠다. 이 책으로 인해 보통과의 재회를 불태우길 어느정도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책은 '어렵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어서인지 책을 펼치면서도 긴장 되었다. 읽다가 덮어버리면 어쩌나, 어렵다라는 인식이 더 강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초반부터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철철 넘치고 있었으므로.

 

  최근들어 읽은 연애소설은 좀 가벼워서 무게감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읽게 된 <우리는 사랑일까>도 연애소설이지만, 타인의 사랑을 지켜보는 구경꾼에 머무르도록 독자를 놔두지 않는다. 사랑을 갈망하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또 다시 사랑을 한다는 간단한 스토리지만, 그 안에 내제된 것은 무궁무진했다. 이를테면 연애를 하면서 갖게 되는 고뇌와 외로움, 상대에 대한 신뢰의 유무를 거침없이 끌어내고 있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적절한 비유와 독특한 예시로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런 감정을 갖었다는 사실이 지극히 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했다. 보통 특유의 철학 사상을 접목 시키며 사랑에 대해, 내면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유쾌했고, 소설 속에 거침 없이 그림과 도표를 인용하는 것도 신선했다.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그만의 세계를 이뤄나갔기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벼운 연애소설과 지지부진한 연애소설을 살짝 버무려 줄 수 있는 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는 갈망. 그것을 '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통해서 어느정도 갈증 해소를 하게 되었다. 나 또한 여자이기에 주인공 앨리스의 시선에서 풀어 나가 더 많은 공감을 했을지는 몰라도, 빤한 스토리를 이렇게 승화시키는 저자의 역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도중 지인에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이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했더니, 소설가 김연수님의 말을 빌려 '알랭 드 보통은 틴 에이저(Teenager)의 우상이고, 수잔 손택이야 말로 경지에 오른 소설가'라고 말해 주었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않아 김연수님의 말을 제대로 옮겼는지 모르겠지만(곡해하지 않기를), 거침없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김연수님 때문에 킥킥대고 말았다. 그 말을 한 지인에게 수잔 손택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자, 좀 어렵다는 말이 들리기에 그렇다면 틴에이저의 우상인 알랭 드 보통에 푹 빠져 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런 일화에 부응하듯 보통의 소설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고, 틴에이저의 소설을 승격(?)시킨 보통씨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연애를 하지 않은 시기에 그런 착각에 빠지기 쉽다. 어느 날 문득,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 나타나서 깊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라는 환상.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기다림에 지쳐 있던 앨리스에게 그야말로 완벽한 애인이 나타난다. 우연히 파티에 갔다가 만난 에릭(에릭을 만나는 설정이 너무 빤하긴 했지만)과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그들은 연인이 된다. 런던에서 광고회사를 다니는 앨리스와 금융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물질적, 개인적 위치까지) 에릭의 만남은 시기적절했고, 잘 어울렸다. 앨리스의 매력이 소소할 정도로 에릭은 완벽했다. 외모, 물질, 직업까지 남들 앞에 내놓으면 저절로 목에 힘이 가는 애인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알아가면 갈수록, 무언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눈에 띄었다라기 보다 내면적으로, 느낌으로 알아차렸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책의 시작에 '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란 말이 나왔다.'라고 했듯이 앨리스의 내면과 생각에 점점 어긋나는 사람이 에릭이었다.

 

  에릭을 사랑하면서도 점점 자신의 시선에서 엇나가는 그에 대한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앨리스를 공감하기도 했다. 사랑일까 아닐까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였고 앨리스가 나아고자 하는 길을(대화의 길이든 미래의 길이든) 자꾸 차단시킨다는 것에서 혼란스러워 했다. 똑똑하고, 매너있고 겉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에릭은 앨리스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모호해져 갔다. 앨리스가 늘 자신이 '에릭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란 말을 자주 했듯이 에릭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큰 일에 대수롭지 않아 했고, 작은 일에 열을 내며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에릭을 쳐다보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을 헤메는 것과 같았다. 그와의 미래는 아무런 희망도 비추지 않았고, 길도 펼쳐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쉽게 결단할 수 없는 것은 에릭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분에서 많은 연인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발전을 자꾸 차단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의 존재 자체로도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앨리스는 점점 에릭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했고, 후자에 속한 사람은 필립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결국 에릭과 헤어지고 필립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나지만, '사랑일까'라는 물음에 정확한 답이 없다라는 사실에 반박할만한 무엇가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에릭과 앨리스의 만남은 흥미로웠지만, 금새 결말을 예고하게 만들었기에 장황하고 생뚱맞기도 한 저자의 사랑에 대한 해석과 고견 때문에 책을 읽는 재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끌어 모으고 뱉어내느라 책이 길어졌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세밀한 심리묘사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일 정도의 표현들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진부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사랑. 알랭 드 보통의 독특한 시선으로 인해 그야말로 새로운 시각으로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진부보다는 시니컬하게, 열정보다는 담담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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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에인션 러브>를 리뷰해주세요.
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책의 띠지에는 '반드시 두 번 읽고 싶어지는 소설' 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게는 그런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독특한 구성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라,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내가 쌓아온 이미지가 한 순간 무너져 내려 허탈했다. '속였다' 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속았다'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책의 반전은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책의 구성을 알고 읽는다면 재미없을 것 같고, 아예 모르자니 내가 느낀 허탈감이 전해질까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Side A를 읽어나갈 때의 속도감을 기억한다. 첫사랑의 설레임이 그득한 추억을 더듬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장은 쉴새없이 넘어갔다. 우연히 미팅에서 알게 된 마유와 스즈키의 사랑이 조금씩 성장하며 하나가 되어 가는 애틋함이 전해져 왔다. 그 순수함에 빠져 한없이 환상을 품어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 솔직담백한 그들의 모습이 예뻐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Side B에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종종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받곤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서의 그 서늘함이란. 내가 지금껏 읽어온 이야기와 만들어온 인물들의 이미지, 책의 분위기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멍함이 나를 지배했다. 해설을 읽고, 내가 느낀 혼란스러움을 가늠하긴 했지만 뒤죽박죽 엉망이 된 소설의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 많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혼란스러워 '완전판 해설'을 찾아 읽어보았다. 결코 짧지 않은 해설을 처음엔 궁금증이 풀려간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세세히 지적되고, 숨겨진 의문이 풀려 갈수록 소설이 조각조각 찢겨진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하나의 이야기에 반전도 모자라서, 이렇게 수 많은 조각을 드러내고 있다 생각하자 원래의 형태는 사라져 버렸다. 흩어지고 분리되어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의 이미지의 세계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종종 느꼈던 '엇!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설명해주는 것은 좋지만, 추리소설을 방불케하는 구성과 복선에 개끗이 속아 넘어간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간단한 해설이 뒤따랐을 때만 해도,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스토리가 해체되고 나자 내가 간직한 이야기는 이미 다른 이야기가 된 후였다.

 

   Side A와 Side B는 양면의 성격을 띈 것이 아니라, 동시진행형이었다. 이 책을 읽어가는게 가장 큰 포인트이기 때문에 처음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연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Side B를 읽어나가면서 기분이 점차적으로 가라앉았다. Side A에서 그렇게 애틋하고 순수했던 스즈키와 마유는 스즈키의 발령으로 원거리 연애를 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야 하는 스즈키와 매주 마유를 보러 내려와야 하는 고충을 이해못한 바는 아니다. 조금씩 지쳐가고 순탄치 않게 흘러가는 마음이 비져나온 것은 어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처럼 잘 드러맞는 것이 원거리 연애만한 것이 있을까. 스즈키의 사무실에는 매력적인 미야코라는 여성이 있었고, 마유와 비교하면 할수록 조금씩 마유가 멀어지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미야코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고, 마유가 임신을 하고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날 수록 스즈키는 점점 변해간다. Side A에서의 순수하고 다정다감했던 스즈키가 아니었다.

 

  거기서 눈치를 챘으면 좋았으련만. Side A에서의 스즈키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다른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고, 사랑도 언제든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스즈키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유에게 한 없는 연민을 느꼈고, 변해가는 스즈키를 이해하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이를 떼고, 스즈키까지 잃어가는 상황을 마유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상상만 해도 우울하기만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미팅, 단체로 놀러갔던 눈부신 바다, 첫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씁쓸함을 자아냈다. 그런데 조금씩 의심의 싹을 뿌려놓던 책의 결말에서 그 모든 것을 다 뒤집어 버렸다. 미야코가 스즈키를 '다쓰야'라고 부르며, 책에는 나와 있지 않던 마유와의 추억을 떠올린 스즈키의 회상. 스즈키는 스즈키였지만, Side A에서의 스즈키가 아니었고, 마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Side B의 스즈키가 양다리를 걸쳤다면, 마유도 양다리를 걸쳤다. 성이 같은 스즈키라는 두 남자였기에 이 소설은 가능했다. 또한 중복되는 시기가 있었기에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고, 한 사람의 스즈키라고 생각했으며 마유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마유는 Side B의 스즈키와 먼저 사귀었고, 원거리 연애가 시작되고 우연히 미팅에서 또다른 스즈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단순히 순서가 뒤바뀐거라고 생각했지만, 해설을 보니 그제서야 곳곳에 뿌려졌던 의심의 씨앗들이 정상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독특한 소설임을 인정하며, 철저히 계산된 복선과 구성에 저자의 노고를 인정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처음 갖었던 마유와 한명의 스즈키에 대한 이미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기에 어떤 이야기로도 기억할 수 없다. 오히려 Side B의 스즈키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Side A의 스즈키가 순수하고 속았다는 느낌, 마유의 능수능란함의 기교를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한 편의 연애소설이 추리소설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반전의 묘미보다 고통이었음을 고백한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독특한 소설이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추리소설을 좋아하거나, 독특함의 묘미를 즐기기를 좋아하는 독자.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쓰야?"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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