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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평점 :
따뜻한 침대에서 책을 읽다 스르르 잠드는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는 기쁨이야말로 애서가들이 좋아하는 일상이 아닐까. 그런 행복에 경계를 주는 일은 책이 너무 지루해서 잠이 든 경우다. 애석하게도 <죽음의 중지>가 그랬다.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단번에 각인된 저자였기에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집어 들었지만, 이런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떠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 것인지 궁금했건만, 소설은 초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시작한 첫 문장은 강렬했지만, 딱딱한 문체와 대화를 구분하지 않은 경계는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첫 문장은 말 그대로였다. 새해를 알리는 종이 친 순간부터 죽음은 사람들에게 오지 않았다. 이 일은 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곧바로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에게도 생명이 유지되었다. 전국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 했지만, 현실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되었다. 죽음이 오지 않은 것은 자연의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원활함이 제약되는 것은 곧 혼란을 뜻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할 곳은 어디일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병원과 장례협회였다. 병원은 공급이 넘쳤고, 장례협회에는 수요의 부족으로 생계를 위협당했다. 또한 교회의 입장도 편치 않았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신의 존재가 자연스러워 지는데, 죽음이 없는 세상은 신이 존재하기에 거북스러운 곳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 나라. 그 나라의 혼란을 짐작하지 못하다가 하나씩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내 머리속은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그 나라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상상의 나라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혀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병원과 교회, 장례협회의 혼란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 외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저자는 일일이 기록하길 거부했다. 나라일을 맡고 있는 몇몇 인물들과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하고 있는 몇몇 기관의 대표자들의 심경으로도 충분한지, 제 멋대로 뻗어가는 상상의 나래를 잠시 차단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 차단이 유쾌할 리가 없다. 전국을 돌며 혼란을 목격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대표격들이 맞고 있는 현실만 바라봐도 참담함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생각지 못한 복병들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왜 죽음이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지, 어떻게 손을 써야 다시 원활한 자연의 생리를 따를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죽음에서 비켜가 있는 혼란의 대국에 작지만 변화를 일이킬 만한 일이 일어난다.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은 이렇게 버티는 삶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판단하고, 자신을 국경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국경 너머는 여전히 죽음이 존재했고, 그 방법이야말로 작은 돌파구를 제시하는 일인 것 같았다. 노인의 가족은 아버지와 아픈 손자를 함께 국경에 묻고 돌아온다. 국경을 넘는 순간 생명은 꺼져버렸기에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일은 순식간에 퍼졌고, 목숨만 붙이고 있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먼저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댔고, 주변 국가의 불만을 샀으며, 그 일을 처리해주는 마피아의 손길이 닿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행해진 죽음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이전의 공급처럼 원활한 죽음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죽음이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혼란에 빠진 나라, 혼란에 빠진 독자를 구원(?)하듯 죽음은 이내 다시 찾아왔다. 몇 달간의 죽음의 중지에서 다시 죽음이 재계될 것이라는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온지 알 수 없는 자주색 편지. 그 편지는 죽음을 전달하는 메신저였고, 편지를 받는 자는 일주일이 지난 후에 죽게 된다. 죽음이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찾아왔기에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죽음은 자주색 편지를 통해 랜덤으로 찾아왔고, 그 편지를 누가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저승사자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 것일까?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고상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걸까. '죽음(편지를 보낸 행위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시점에서, 소설은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탄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잠시 뒤로한 채, '죽음'의 입장에서 죽음이 보여 진다.
'죽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사람으로도, 저승사자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뼈로만 이루어진 존재. 죽음의 편지를 일일이 쓰고, 순식간에 편지를 보내는 인물로 생각해야 할까. '죽음'이 인간들에게 죽음을 주는 가운데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죽음의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의 편지가 다시 되돌아 온 일.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편지로 인해 그 사람의 생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49살에 죽어야 했을 독신의 첼로리스트는 50번째의 생일을 맞이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은 첼로리스트를 관찰한다. 그가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 그에게 죽음이 왜 비켜갔는지 뼈로 이루어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죽음'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으로 인해 급격한 혼란을 맞고 있었다.
어째 소설의 흐름이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나라의 지루함을 지켜보다 꾸벅꾸벅 졸던 내게 '죽음'의 행동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지만,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반전이었다. 책은 거의 끝나가는데, '죽음'은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주는 일에 직접 나서고 있었으니 결과에 주목하면서도 상반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또 졸고 말았다. 상상력이 풍부한건지, 단순한건지 알 수 없지만 잠들기 전에 읽은 책 내용은 나의 꿈에서 연결되기 일쑤였고 나는 '죽음'과 첼로리스트의 꿈을 꿨다. 그리고 꿈에서 깨자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갔고, 나의 집중력은 최상의 상태를 발휘했으며 이전의 지루함은 떨쳐 버린 채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를 예상할 수 없지만 결코 순탄하게 흐르게 두지 않을 것을 짐작한 저자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처럼, 로멘스 소설을 읽는 듯 끝 부분을 읽어 나갔다.
그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힘겹게 읽어간 소설은 모두 사라지고, 죽음을 주려는 '죽음'과 '죽음'을 사랑하게 된 첼로리스트의 이야기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꿈을 꾸고 나서야 무엇에 홀린 듯 읽어나갔던 일은 물론, 죽음이 사라졌다 다시 온 나라의 일은 현실과 혼동 되었다. 생뚱맞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 '죽음'과 죽음을 비켜간 첼로리스트라니. 혼란에 빠뜨렸던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의 유무를 뭉뚱그리는 것도 아닌 결말 앞에 망연자실 할 뿐이었다. '죽음'이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그를 사랑하게 된 다음 날, 역시 책의 시작과 함께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소설은 끝이 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었지만, 개인적인 경험 앞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로 비춰졌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 통제된다는 유무를 확인한 셈으로 치기엔 무언가가 석연치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듯한 '죽음'의 행동.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