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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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씩 봄기운이 찾아오는 이때, 많은 솔로들의 갈망은 연인이 생기는 것이다. 겨우내 움츠렀던 몸과 마음이 흐물흐물 해지면 기분도 들뜨는 법. 따스한 햇볕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쬐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드는 봄. 그러나 왜 이렇게 사랑이 힘든 것일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것일까. 사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려 하기 때문일까. 조건을 보고, 외향을 보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사랑타령을 하는 것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속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고, 조금은 쉽게 사랑이 다가오는 것 같아 좀 허탈했다. 그의 소설에는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오랫동안 연애 한 번 못해본 솔로들에게 염장을 지르기에 충분한 설정이 많았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가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녀.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아니었다면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꼼짝도 안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게 되는 페이. 그러나 그녀(교코)는 별 반응이 없었다. 멋쩍어서 그대로 공원을 나오지만 두 번째 만남도 그 공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녀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글로 대화를 이어간다. 평범하면 평범하고 특별하면 특별하달 수 있는 그들의 첫 만남을 지켜보며 내가 살짝 분개했던 이유는, 우리집 근처에 자리한 제법 알려진 공원때문이었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심심찮게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왜 나는 그런 상황이 되어보지 못했냐며 말도 안되는 억지를 꾸역꾸역 뱉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순전히 느낌만으로 상대방과 사귀게 되는 상황이 부러웠다. 내가 페이라면 교코와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분개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상황에 너무 몰입한다 싶어 안정을 취하기로 하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페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그의 직업을 조금 눈여겨 본다면, 교코와 너무 다른 세계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코와 함께 하면 소리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는데, 정작 그는 소리가 난무하고 그 소리로 많은 것을 이뤄 나가는 세계에서 묻혀 살고 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교코에서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그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교코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교코가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져 가고, 홀로 남겨진 교코는 보통 사람이 겪는 일상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상벨 소리, 윗층에서 떠드는 소리, 관리인의 주의 등 교코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런 일이 교코에게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던 페이는 조금씩 교코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소리를 좇으며 살면서도 교코와 지내는 시간을 통해 미개척지를 발견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페이가 하는 일은 사무실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해외로 취재를 갔으며, 일에 찌들려 살기가 일쑤였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조금씩 교코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교코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도 일어나고, 일은 바빠지고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일이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면 낼수록, 교코에게 지쳐가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모님께 교코도 소개 하고, 교코가 자신의 집에 늘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내면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눈치를 챈 교코가 자신에게 그런 힘든 마음을 풀어 달라고 말한다. 그 말에 언뜻 위로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나 처지가 교코에게 별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운을 잃어간다. 그런데 그런 교코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연락이 닿지 않고, 그녀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페이의 어머니는 교코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잘 부탁한다는 내용을 썼다고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 뒤로 교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코의 집을 찾으러 헤메기를 여러 날. 어머니로부터 또 전화가 걸려온다. 교코가 편지를 썼다고. 자신이 연락을 끊은 것은 어머니 편지 때문이 아님을 전해달라 했다고. 페이는 교코를 찾아 집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내고, 그 동안 힘겹게 취재한 방송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그토록 전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연인에게는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지만 방송이 나가기 전에 그녀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우연처럼 보이는 묘한 상황이 교코가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페이의 심경 변화와 교코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늘어 갈수록 불안했다. 무언가 어긋나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초해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연락이 끊겼던 교코와 연락이 닿고, 작은 에피소드로 마무리 되는 상황 앞에서 허탈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말을 하지 못하는 교코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 일은 작은 에피소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반쯤 내려 앉았던 가슴이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철렁 주저 앉아 버려 끓어 올릴 수가 없었다. 허탈하고, 허망하고, 특별한 사랑을 말하는 듯 하면서도 평범한 사랑으로 점철되어 가는 과정에서 진이 빠져 버렸다. 페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 사람을 긴장시키더니, 이렇게 마무리 지을 수 있냐는 핀잔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순탄한 사랑, 평범하지 않은 교코와의 순수한 교류 같은 것을 원했는지는 몰라도, 요시다 슈이치식의 사랑에 조금 지쳐간다. 무언가를 말할듯 말듯 머뭇거리면서 얼버무어 버리는 그의 소설이 조금씩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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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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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일본 소설을 안 읽어서인지, 조금씩 일본 소설이 그리워지고 있다. 그러다 요시다 슈이치의 책을 읽을 기회를 얻어, 가장 먼저 <동경만경>을 꺼내 들었다. 제목을 많이 들어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읽고 난 후의 허탈감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깊은 밤, 몰아치듯 읽어버린 소설의 뒤끝이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랑에 관한 명쾌한 답이 없었기 때문일까. 사랑에 대해 명쾌히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대리만족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무언가 가슴 벅찬 이야기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은 내면의 허영일지도 모르겠다.

 

  연애 소설보다 로멘스 소설을 더 좋아하는 것은 과정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연애소설을 많이 읽거나 로멘스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연애소설은 결말에 더 관심이 쏠리고 로멘스 소설은 과정에서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 로멘스의 세세함이 연애소설에서는 듬성듬성 있거나, 훌쩍 뛰어넘어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연애소설을 읽다보면 허탈할 때가 많다. 지극히 개인적인 편가름이라고 해도 차라리 과정을 즐기는 로멘스가 더 나은 것이 그런 연유이다. <동경만경>은 연애소설이다. 무언가 확 달아 올라 정점에서 끝나는 소설도 아니고,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거나 선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만남이에도 익숙한 사랑, 권태기가 엿보이고 무덤덤한 사랑 얘기에 가까웠다.

 

  미팅 사이트로 알게 된 료스케와 료코. 둘의 첫만남은 너무 싱거웠다. 온라인 상으로 알게 되어 첫 만남임에도 차 한잔 마시고 모노레일을 타고 그걸로 끝이었다. 료스케는 료코에게 끌렸지만, 료코는 자신의 감정을 내비추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더라도 도무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시간의 흐름에 맡겨 버렸고, 타인의 끈질긴 물음에 의해서 조금씩 마음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극적인 상황일 때조차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서로의 직업, 과거의 사랑, 나이같은 것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마음을 굳게 닫고 두려워 하고 있었다. 사랑하면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 서로에게 '빠지'는게 아니라 '탐닉'의 대상만 되었던 연애기간동안 내내 그들의 마음에 멤돌던 그림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을 더 열지 못한 인물은 료코였다. 미팅 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귀는 동안에도 본명과 직업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에 고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 료스케의 전 애인이 그 사실을 말해주기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료스케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그것 보다 더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갈팡질팡 했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조차 무미건조하게 다가오는 그들에게 감정을 터트리는 것은 두려움으로 치닫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 같았다. 회자정리를 두려워 하는 마음이 그들 뿐이겠냐만은 서로에게 표현할 수 없었다. 말로 하게 되면 실재로 그렇게 되버릴까봐 두려워 했다.

 

  그들의 직장만 봐도 그랬다. 료스케는 도쿄만에 인접해 있는 화물선적 창고에서 일을 하고, 미오(료코의 본명)는 거기에서 1킬로 남짓 거리의 빌딩에서 일을 한다. 바다 때문에 우회 해야지만 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일터처럼, 그들의 사랑도 한참을 우회해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주듯 두 곳의 거리가 새로운 노선의 개통으로 가까워지고, 조금씩 두 사람의 마음도 가까워 진다. 끓어오르는 사랑도, 무 자르듯 날선 이별도 없었지만 조금씩 긍정적으로 다가가는 그들의 마음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을 말해 주었다는데서 오는 무력감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책 속에는 두 사람만의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료스케의 첫사랑부터 좋아하지 않는 여자친구과의 교재, 친구 커플의 권태기가 가득한 사랑, 미오의 제대로 된 사랑이 없는 것부터 그 둘을 배경으로 씌여지는 또 다른 소설까지 사랑은 흔하고 넘쳐났다. 그러나 뚜렷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상이 늘 똑같이 흘러가는 착각이 드는 것처럼, 늘 내 곁에 자리한 익숙함이 내재된 사랑이었다. 깊은 열정이나 끌림은 없었지만,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사랑의 모호함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그래서 더 허탈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지극한 현실임을 앎에도 환상을 품게 되는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고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사랑할 가치가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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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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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행 기차를 타고 목적지를 한 시간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이 책을 꺼냈다. 기차를 타자마자 읽던 책이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기도 했고, 잠깐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묘한 흡인력이 있어 지하철 안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중간중간 민망한 대사와 묘사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을 뿐, 마치 내가 19살이 되어 세상을 향해 막 도약하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현재 29살인 내가 느끼기에 너무나 오래된 과거가 되어 버린 19살의 청춘. 그때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고, 무엇을 갈망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다.

 

  요즘의 19살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별로 그려지는게 없다. 모든 것이 배제된 채 '고3 = 대학' 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게 현실이다. 힘든 고3을 보내보지 않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주위에서 쏟아지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런 상황에서 자아를 찾고, 꿈을 찾고, 19이라는 청춘의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무리일게다. 하지만 그런 팍팍함과 살벌함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소설이 있었으니 바로 <동정 없는 세상>이다. '한 번 하자'로 시작해서 '한 번 하자'로 끝나는 동정童貞을 떼어버리고 싶은 준호의 갈망(?)으로 채워진 소설이라고 한다면 조금 무리일까. 한참 끓어오르는 성욕에 대한 호기심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친구들 사이에서 준호의 고민은 거듭되어 간다. 그 고민은 표면에 드러난 가장 민감하고 강렬한 것 같지만, 이면에 들어차 있는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고3이기에 대학진학과 미래에 관한 걱정은 당연히 따라오는 걱정이다. 확실한 목표가 없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짐을 보탠 걱정은 나날이 늘어갈 뿐이지만. 비교적 공부에 대해 압박을 주지 않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서울대를 나와서 10년째 백수인 명호씨(외삼촌)와, 그런 외삼촌과 자신을 먹여 살리는 숙경씨(엄마). 명문대를 나온 명호씨가 집에서 놀고 있는 현실을 매일 마주하며 살기에 그런 압박감이 덜할 수도 있다. 홀로 자신을 길러온 숙경씨는 지금껏 자신 곁에 있어준게 고맙다며 대학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박식하고 다정다감한 명호씨를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희미하게 알아가지만, 여전히 철이 없는 19살 준호는 '그것'이 하고 싶었다.

 

  포르노라면 자신의 컴퓨터로 질리도록 보고, 동정을 떼었다는 친구들 얘기도 들어 보았지만 세세한 부분은 가르쳐 주지 않아 준호의 욕망은 날로 치솟고 있었다. 자신의 여자친구 서영과 어떻게든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만날 때마다 '한 번 하자'고 하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싫어'였다. 도무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욕망은 준호를 괴롭혔고, 친구들과 명호씨와도 얘기를 해보았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 직접 경험을 해봐야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영과 늘 그 일로 투닥거리다 서영이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준호는 매춘가를 향한다. 그곳까지 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만 뼈저리게 경험하고 뛰쳐나온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매번 찔러대기로 의사를 묻던 준호는 서영에게 'OK' 사인을 듣는다. 그 길로 서영의 맘이 변할까봐 노심초사하며 여관으로 직행했지만,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첫 경험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려 준호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준호가 아니었다. 수능도 끝난 시점이긴 했지만 대학에 대한 걱정,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 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준호의 관심은 한 번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준호의 끈질긴 노력 끝에 서영과의 첫 경험을 하고, 진정으로 서로가 준비되어 있을 때에 몸과 마음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정同情없는 세상일지라도, 동정童貞을 떼어버린 준호는 그제서야 삶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대학을 가야 겠다는 마음,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은 서영과의 첫 경험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호씨는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만화가게를 열고, 서영은 서울대에 특차로 합격하고, 친구들의 노선이 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준호도 결정을 해야 했다. 명호씨가 어렴풋이 알려준 데로 따가가보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책 제목의 '동정'에 대해서 생각한 것은 당연히 동정同情이었다. 동음이의어의 다른 뜻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책을 읽어서 헤갈리기도 했다.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 없는 세상>은 조금 특별했다. 고3이라는 위치에 처한 상황을 동정떼기로 현혹(?)하면서 10대의 갈망과 고뇌를 유쾌하게 다뤘다고 할 수 있겠다. 머리속에 온통 '그것'으로 가득찬 준호를 보며 철딱서니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정이 이는 것은, 색깔은 다를지라도 치열한 십대를 거쳐온 경험이 있다고 하면 좀 진부할려나. 하여튼 준호를 지켜보면서 그의 욕망이 충족되어 기쁘다든가, 생각을 하며 살기로 해서 기특하다는 마음보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10대들이 내면의 고충을 좀더 건강하게 표출하면 좋겠다. 준호의 행동과 생각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면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좀더 솔직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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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이탈리아인 비서관 새로운 셜록 홈즈 이야기 2
칼렙 카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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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가 너무 강렬해 저자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보았다. 국내에는 셜록 홈즈 탄생 120주년을 기념한 기획작품밖에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한 권이라도 번역되어 있는게 어디냐머 바로 책을 주문했다. 도무지 눈길을 뗄 수 없는 흡인력에 이끌려 순식간에 읽었다. 저자가 셜록 홈즈의 팬이라는 사실이 나에까지 미쳐 셜록 홈즈의 활약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코난 도일의 책을 세트로 주문하고 싶어 안절부절 견딜 수가 없다. 지름신이 강령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코난 도일, 뤼팽 등 전설로 내려오는 추리소설의 캐릭터가 있지만, 추리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껏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 내게 불을 붙인 작가가 바로 칼렙 카였고, 그의 작품을 통해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코난 도일의 책들이 궁금해졌다. 탄탄한 구성과 높은 완성도 덕분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 같은 독자들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가 셜록 홈즈를 바탕으로 정신학과 접목시켜 썼다면, <이탈리안 비서관>은 셜록 홈즈에 좀 더 가까운 작품이다. 기획작품인 이상 많은 부분이 비슷하겠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지 않았기에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와 비교하며 읽었다. 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달랐고 칼렙 카라는 작가를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새로운 셜록 홈즈 이야기'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이야기의 흐름이나 완성도는 절대 뒤지지 않았다.

 

  이 책에는 셜록 홈즈와 그의 친구 왓슨, 사건을 의뢰한 셜록 홈즈의 형 마이크로프트가 등장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지 않아 인물의 배경을 잘 모르지만, 워낙 캐릭터가 독특해서 쉽게 구분하며 읽을 수 있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었다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고, 꼭 읽지 않았더라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인 셈이다. 홈즈와 왓슨은 마이크로프가 보내 이상한 전보로 사건에 끼어들게 된다. 정부 기관이 알지 못하도록 암호로 되어 있는 전보를 해석하면서 마이크로프트가 지정한 장소로 떠나게 된다. 그곳은 다름아닌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가끔 머무르기도 하는 궁전으로 오라 하니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셜록 홈즈는 자신이 형이 빅토리아 여왕을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는 것과 궁전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간다는 사실을 왓슨에게 알려준다. 최근 홀리루드 궁전에서는 서탑을 복원하던 관리인 두 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언론은 교묘히 사고로 덮어 버렸다. 이면에는 마이크로프트가 사건화되지 않도록 손을 썼고, 여왕 암살의 전조라며 두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홀리루드 궁전으로 가는 길부터 난관이 생겼다. 폭탄테러를 당하는가 하면, 궁전에서 기이한 하인들을 만나게 된다. 궁전으로 오는 동안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셜록 홈즈로부터 설명을 들은 왓슨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300년 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절친한 신하인 다비드 리치오의 사건과 연관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리치오가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유령을 믿지 않는 왓슨은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궁전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오히려 홈즈의 말이 사실인 것 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 안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울음 소리, 리치오의 유령이라 믿는 발자국과 노랫소리등이 300년전의 분위기를 연상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홈즈와 왓슨은 궁전의 하인, 죽은 관리인의 시체, 궁전의 이상한 현상에 대해 꼼꼼하면서도 차분하게 조사해 나간다. 복선을 깔아주었다가 전말을 밝혀주기도 하고, 그야말로 빈틈없이 흡인력 있게 사건의 전말로 독자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기이한 일들이 하나하나 조사되고 밝혀질 수록 사건은 정점에 이르렀고, 마이크로프트가 걱정했던 여왕 암살의 전조라고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영국을 견제하는 독일 세력과 권력의 편협함이 숨어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아갈수록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들어간듯 했으나, 홈즈의 통찰력으로 중심 가닥을 잡아 간다. 리치오가 잔인하게 살해 되었던 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기이한 일들에는 돈을 목적으로 한 얄팍한 술수가 있었다. 전설과 유령을 접목시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해 왔던 무리들은 의외로 궁전에 가까이 있는 인물이었다. 작은 것 하나가 단서가 되고, 홈즈의 추리로 사건은 조금씩 실마리를 향해 간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질 수록 위험해 지는 법. 그들에게도 서서히 위기가 닥치고 있었다.

 

  리치오가 잔인하게 살해된 방의 이면이 밝혀지고, 유령의 짓으로 몰고간 파렴치한 인간들의 속내도 속속들이 드러난다. 능숙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이중생활을 해 온 관리인들의 소행으로 밝혀지지만 그들이 쉽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리 없다. 홀리루드 궁전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홈즈와 왓슨, 마이크로프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을 꾸몄던 관리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고, 하나씩 사건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위험요소도 감소하게 된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추리의 묘미와 재미를 만끽했기에, 결론으로 갈수록 차분해 질 수 있었다. 과정이 충실했기에 결말이 뻥 하고 터지는 조잡함이 없었고, 결말에 다가갈수록 그동안의 사건 전말을 더듬어보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사건의 중심부로 치닿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덧대어 주어서 즐겁게 읽게 되었다.

 

  작품 해설을 보면 이 책의 저자가 셜록 홈즈와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의 정신과 의사인 크라이즐러를 중심으로 새로운 작품을 써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보다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를 먼저 읽었기에 나 또한  두 책을 비교하며 읽어 나름 기대하는 바이다. 자신의 스타일과 셜록 홈즈의 특징을 잘 살려내서 책을 쓸 수 있는 작가 칼렙 카. 단 두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비슷하면서도 뚜렷한 구성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기획된 책이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요소를 두루 갖춘 책을 읽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새로운 장르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셜록 홈즈에 무한한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게 된다면, 좀 더 비교하며 회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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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읽은 책
 
 
1. 혼자 놀기 - 강미영
2. 코기빌 마을 축제 - 타샤 튜더
3. 조혜련의 박살 일본어 - 조혜련
4. 책 그림책 - 밀란 쿤데라 외
5.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 이철수
6. 아픔의 기록 - 존 버거
7.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8. 코기빌 납치 대소동 - 타샤 튜더
9. 섬 - 장 그르니에
10. 코기빌의 크리스마스 - 타샤 튜더
11. 속 깊은 이성친구 - 장 자끄 상뻬
12. 건강한 생리 - 조연경.김경숙
13. 배고픈 새 - 이덕무
14.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마츠오 바쇼

15. 타샤의 특별한 날 - 타샤 튜더
16~17. 미트포드 이야기 1,2 - 잰 캐런
18. 바쇼의 하이쿠 기행 2 - 마츠오 바쇼
19. 지구 속 여행 - 쥘 베른
20. 고래 - 천명관
 

2월에 읽은 책
 
 
21. 꼬마 난장이 미짓 - 팀 보울러
22. 꼬마 인형 - 가브리엘 벵상
23. 타샤의 그림 인생 - 해리 데이비스
24. 암리타 - 요시모토 바나나
25. 시계탑 - 전아리
26. 바시르와 왈츠를 - 아리폴먼, 데이비드 플론스키
27. 트와일라잇 - 스테프니 메이어
28. 뉴문 - 스테프니 메이어
29. 동정없는 세상 - 박현욱
30.~31.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 1,2 - 칼렙 카
32. 홍길동전 - 허균
33. 이클립스 - 스테프니 메이어
34. 박사가 사랑한 수식 - 오가와 요코
35. 셜록홈즈 이탈리아인 비서 - 칼렙 카
 
* 아직 리뷰 쓰지 않은 책 - 동정없는 세상, 셜록홈즈 이탈리아인 비서관
*붉은 색 - 좋았던 책
 
 
- 2월에도 적지 않은 책을 읽었지만, 더 많은 권수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쌓여가는 책 때문이 아닌가 싶다.
2월에는 트와일라잇 때문에 에드워드 때문에 힘들었고,
칼렙 카 라는 괜찮은 작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번 달에는 29권의 책이 생겼고, 내가 구입한 책 가격은 만원이 아마 안 될 것이다! ㅋ
적립금과 협박으로 얻어낸 책과, 이벤트 당첨되서 받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생기는 책을 따라잡지 못하는 구나!
 
 
 
 
 

2009년도에 생긴 책

 

 

435. 나니아 연대기 - c.s 루이스

436.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437. 미셸 오바마 - 엘리자베스 라이트폿

438. 파이 이야기 일러스트 - 얀 마텔

439. 칼잡이들의 이야기 - 보르헤스

440. 이방인 - 알베르 카뮈

441.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442. 바쇼의 하이쿠 기행 3 - 마츠오 바쇼

443. 뉴 마인드 뉴 섹스 - 김해준

444. 월드 체인징 - 알렉스 스테픈

445. 성스러운 세 도시 - 르 클레지오

446. 제주 걷기 여행 - 서명숙

447.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다 - 루치우스 부르크하르트

448. 인간의 지성을 진화시킨 세계 고전 200문장

449. 제 7의 인간 - 존 버거, 장 모르

450.~451. 황제의 밀사 1,2 - 쥘 베른

452~454. 신비의 섬 1,2,3 - 쥘 베른

455. 시민의 불복종 - 헨리 데이빗 소로우

456. 타샤의 식탁 - 타샤 튜더

457. 꽃피는 자궁 - 이유명호

458.~459. 괴물 1,2 - 이외수

460. 고양이는 과학적으로 사랑을 한다? - 다케우치 가오루, 후지이 가오루

461.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462. 한국의 인터넷을 論하다 - 권헌영 외

463.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464. 지구에서 달까지 - 쥘 베른

465.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필립 퍼키스

466. 비밀의 화원 -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467. 2009 이상문학상 작품집 - 김연수 외

468. 불한당들의 세계사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467. 일상적인 삶 - 장 그르니에

468. 북학의 - 박제가

469. 픽션들 - 보르헤스

470. 알렙 - 보르헤스

471.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 - 아놀드 베넷

472.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 - 알베르 카뮈

473. 행운을 부르는 아이, 럭키 - 수잔 패트런

474. 결혼, 여름 - 알베르 카뮈

475. 죽음의 중지 - 주제 사라마구

476. 구스타프 클림트 - 에바 디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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