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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소문은 사실이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고래>에 대해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문은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책장에 오롯히 꽂혀 있는 책을 보면서도 의심과 호기심이 일었지만, 두께 때문에 선뜻 읽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들려오는 소문을 무시한 채 깊은 밤에 책을 꺼내 들었다. 조금만 읽어보자는 생각과 초반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늦은 밤 책을 꺼내든 것은 첫 번째 실수였고, 소문을 믿지 않았던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다. 5시간이 넘도록 꼼짝없이 누워 밤이 깊어가든 말든 책장을 쉴새없이 넘겼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다 읽어야지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덮은 시각은 새벽 5시. 다음 날 회사에서 헤롱거릴 것이 뻔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다 읽었다는 희열감, 소문의 진실,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책 읽기. 이 모든 것이 뿌듯함으로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자꾸만 의심의 눈길을 던졌던 책 속의 이야기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놓여진 <고래>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몇시간 전까지 내가 저 책을 읽었던가, 책 속의 인물과 이야기의 뒤엉킴은 꿈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과 또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읽느라 날을 샜다'는 허무함 때문이었다. 머리속에 어지럽게 흩어지는 수 많은 잔상들이 계속 날 따라다녔다. 그 잔상은 몇일이 지나도 떠나지 않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문득 이야기의 한 귀퉁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읽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때, 이 이야기를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밀려왔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떠돌았기에, 어떤 것이 굵직한 것인지 추려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인들의 이야기였고, 오래된 과거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낯설고 딴 세상 이야기로 생각되어지는 것들로 가득했다.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는 수 많은 이야기의 강이 있었다. 그 강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면서 판이하게 다르기도 했고 너무 닮아 있기도 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편의 복수극' 이라고 밝힌 것처럼 복수극이자 신파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학이 있는가 하면, 어둠이 있었고, 한恨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느낌을 나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한가지로 똑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의 특징 때문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읽어 나갔지만, 그 흐름가운데 어느 부분을 똑 분질러 꺼낼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다양하고 제각각인 이야기가 서로를 촘촘이 옭아매고 있어 도저히 하나의 객체로 볼 수 없었다. 이야기는 실타래를 타고 엮어져 하나의 옷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 실과 실 사이를 모두 탐색했지만 일일이 드러낼 수 없는 이유는 너무 꼼꼼하게 짜여진 옷이였기 때문이었다.
<고래>를 읽고 있노라면 세상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온갖 것을 듣고 보고, 몇 십년의 세월을 살아 훌쩍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오히려 흘러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양상은 때와 장소를 잊을 정도였다. 국밥집 노파와 혈연관계는 아니었지만, 금복을 거쳐 춘희까지 거쳐오는 시간은 적지 않았다. 1, 2부가 평범한 소녀 금복이 소도시에서 성공하는 일대기를 그렸다면, 3부는 춘희에 관한 이야기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출소한 춘희는 흥망성쇠를 누렸던 의붓아버지의 벽돌공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벽돌을 만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기대하지만 세월은 이미 그곳을 비켜가 버렸다. 금복의 일대기와 춘희, 노파의 이야기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말하고 싶은 소재들이었고, 신화적이고 기이하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들이었다. 개처럼 벌어 한푼도 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국밥집 노파, 여성 대장부를 떠오르게 만드는 기이한 힘을 가진 금복, 금복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큰 등치의 말 못하는 춘희. 이 세 여인들에 얽혀있는 수 많은 사연들은 놀라울 그 자체다. 한결같이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들과 죽은 사람의 혼과 함께 살아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는 몽롱하기 그지 없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일일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다.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이기에 그에 관한 심사평이 들어 있었는데, 독특하면서도 기이한 이 소설에 찬사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가능성 또한 내다보고 있었기에 <고래>에 대한 나의 느낌이 심사평에 의해 갈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볼 수 있어 즐거웠고, 기존의 틀과 형식을 깨면서도 과감했지만, 스토리텔링의 힘을 가지고 있어 구성력의 완성도가 돋보였다는 찬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고래>가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한낱 소설 읽기에 불과했던 것인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의 조각은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전체적으로 보려고 하면 더 흩어질 뿐이었다. '우리의 지난 세기를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로 채우고자 씌여진 것' 이라고 저자가 말했듯이 어딘가에서 흐리고 꾸려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단상으로 보면 될까? 두고두고 곱씹어도 그 만한 세월의 흔적을 남길 수 없을 것 같은 길고도 다양한 이야기 <고래>. 하룻밤에 읽은 이야기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흩뿌려 주었기에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