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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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읽을 책이 몇 권 쌓여 있는지,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서점에 들어가서 맘에 드는 책을 사오고 싶은 날. 그날은 약속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들어갔었다. 시간을 때운답시고 들어갔는데, <섬>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다. 책이 눈에 들어왔음은 물론, 내 지갑엔 정확히 <섬> 책 값이 들어 있었다(약속하고 나와놓고 왜 책 값 정도 밖에 안 들고 왔을까). 집에 가는 버스비는 교통카드로 해결하면 된다 생각하고, 덜렁 책을 사버렸다. 책 값과 지갑 속 금액의 일치에 신기해 하면서. 그 날 친구와 만나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점을 서성거리던 기억이며, 계산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들고 나오던 기억은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구입해 왔음에도, 초반을 넘기지 못하면 가차없이 책꽂이에 방치되고 만다. <섬>이 그랬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작품에 알베르 카뮈의 헌사 비슷한 서문이 있었는데, 그 서문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린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섬>을 읽을 당시의 흥분과 작품에 대한 찬사가 씌여져 있었는데, 서문부터 너무 사색이 깊어 부르르 몸을 떨며 책을 내려 놓았다. 서문부터 이런 식이라면 장 그르니에의 작품은 안봐도 뻔하다는 제 멋대로의 생각이 뻗쳐 진저리를 친 것이다. <어느 개의 죽음>은 짧막한 글이라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지만, <섬>은 제목과 같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읽을 날이 올거라는 흐릿한 기대감으로 책장 속에 책을 묵혀 두었다.

 

  내 책장 속의 간택(?)되지 못한 수 많은 책들이 그렇듯, <섬>도 구입한지 8개월쯤 지나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느 밤, 책 사냥(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그날 기분에 따라 읽을 책을 찾는 것)에 나선 내 눈에 <섬>이 들어왔다. 서문을 보고 덮은 기억이 있었지만,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지친 내게 사색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섬>을 다시 펼쳐 들었는데, 묵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난해하던 서문부터 술술 읽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여기저기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여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그냥 메모지를 붙이기도 하고, 나의 느낌을 적기도 했다. 그 집중력에 흥분해서 알베르 카뮈의 심정을 이해할 정도라고 혼자서 들떠 있었다. 카뮈가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단 욕망에 확신을 가진 것도, 우리들의 젊은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설명해 주고,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는 말까지 모두 내 마음 밭에 뿌려지고 가꾸어졌다.

 

  첫 글 <공의 유혹>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읽고만 지나쳤을 문장들에 나만의 생각들이 샘 솟듯 솟아났다. 나의 유년시절과 그때 갖었던 생각 사이를 오가기 바빴고, 간단하게나마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순한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솟아나게 만들어 주는 글을 만난 것이 얼마만이던가. 장 그르니에의 글에 아주 특별한 것이 있는게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본 것을 글로 표현해 내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르니에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끌어내지 못하기에 그가 뱉어낸는 문장마다 메모를 달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장을 던져주기만 했을 뿐인데, 내 머릿속에 관념들이 생성되었다. 잠재되어 있던 생각들을 살짝 건드려 주기만 했을 뿐인데,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많은 생각과 언어들이 내 안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해서 옮기기가 조촐할 정도다. 그르니에의 글을 통해서 내가 갖었던 생각, 장 그르니에의 평범한 문장들은 소소했다. 하지만 평범한 글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가. 그 가능성의 깊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르니에라면, 그의 글이 하나의 가지라면, 독자는 저자가 만들어 놓은 가지에 수많은 잔가지를 뻗으며 공중으로, 땅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깊은 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채 그의 책을 읽어나갔고,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 때문에 잠시 책을 덮었다. 이대로 끝까지 읽다간 내 안의 무언가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차라리 무언가가 터져 버리도록 나두지 못했던 것을 다음 날 바로 후회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벅찬 감정이 일었던 전날 밤의 기억을 부여안고, 책을 펼쳤지만 이미 글자들은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잠시 책을 덮고 다음 날 읽은 것 뿐인데. 며칠을 책을 덮었다 펼쳤다를 반복하다, 여러 날 공백을 두고 꾸역꾸역 읽다 마무리 짓고 말았다. 처음에 느꼈던 희열과 뜻 모를 감정의 발산은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에 느꼈던 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지지부진하고 힘겹게 <섬>의 나머지를 읽어 나갔고, 책의 반토막은 살아서, 다른 반토막은 죽어서 내 안에 떠돌기도 하고 겉돌기도 했다.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급격한 변화의 양상을 띄게 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책을 덮어야 했을 때는 무척 괴로웠다.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보다는 무언가가 잡힐 듯 하다가 사라져 버린 허망함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까지 이어졌다면, 내가 어떠한 결심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내제되어 있었다. 내가 젊지 않아서일까. 잠재력이 바닥나 버린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찾아 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불덩이가 내 안을 잠시 훑었다 사라져 버린 느낌. 이 책을 읽는 다른 이들은 이런 불덩이가 일었다 싶음, 절대 놓지 말기를 바란다는 충고 밖에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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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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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은 사실이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고래>에 대해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문은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책장에 오롯히 꽂혀 있는 책을 보면서도 의심과 호기심이 일었지만, 두께 때문에 선뜻 읽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들려오는 소문을 무시한 채 깊은 밤에 책을 꺼내 들었다. 조금만 읽어보자는 생각과 초반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늦은 밤 책을 꺼내든 것은 첫 번째 실수였고, 소문을 믿지 않았던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다. 5시간이 넘도록 꼼짝없이 누워 밤이 깊어가든 말든 책장을 쉴새없이 넘겼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다 읽어야지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덮은 시각은 새벽 5시. 다음 날 회사에서 헤롱거릴 것이 뻔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다 읽었다는 희열감, 소문의 진실,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책 읽기. 이 모든 것이 뿌듯함으로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자꾸만 의심의 눈길을 던졌던 책 속의 이야기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놓여진 <고래>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몇시간 전까지 내가 저 책을 읽었던가, 책 속의 인물과 이야기의 뒤엉킴은 꿈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과 또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읽느라 날을 샜다'는 허무함 때문이었다. 머리속에 어지럽게 흩어지는 수 많은 잔상들이 계속 날 따라다녔다. 그 잔상은 몇일이 지나도 떠나지 않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문득 이야기의 한 귀퉁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읽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때, 이 이야기를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밀려왔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떠돌았기에, 어떤 것이 굵직한 것인지 추려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인들의 이야기였고, 오래된 과거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낯설고 딴 세상 이야기로 생각되어지는 것들로 가득했다.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는 수 많은 이야기의 강이 있었다. 그 강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면서 판이하게 다르기도 했고 너무 닮아 있기도 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편의 복수극' 이라고 밝힌 것처럼 복수극이자 신파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학이 있는가 하면, 어둠이 있었고, 한恨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느낌을 나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한가지로 똑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의 특징 때문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읽어 나갔지만, 그 흐름가운데 어느 부분을 똑 분질러 꺼낼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다양하고 제각각인 이야기가 서로를 촘촘이 옭아매고 있어 도저히 하나의 객체로 볼 수 없었다. 이야기는 실타래를 타고 엮어져 하나의 옷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 실과 실 사이를 모두 탐색했지만 일일이 드러낼 수 없는 이유는 너무 꼼꼼하게 짜여진 옷이였기 때문이었다.

 

  <고래>를 읽고 있노라면 세상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온갖 것을 듣고 보고, 몇 십년의 세월을 살아 훌쩍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오히려 흘러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양상은 때와 장소를 잊을 정도였다. 국밥집 노파와 혈연관계는 아니었지만, 금복을 거쳐 춘희까지 거쳐오는 시간은 적지 않았다. 1, 2부가 평범한 소녀 금복이 소도시에서 성공하는 일대기를 그렸다면, 3부는 춘희에 관한 이야기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출소한 춘희는 흥망성쇠를 누렸던 의붓아버지의 벽돌공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벽돌을 만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기대하지만 세월은 이미 그곳을 비켜가 버렸다. 금복의 일대기와 춘희, 노파의 이야기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말하고 싶은 소재들이었고, 신화적이고 기이하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들이었다. 개처럼 벌어 한푼도 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국밥집 노파, 여성 대장부를 떠오르게 만드는 기이한 힘을 가진 금복, 금복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큰 등치의 말 못하는 춘희. 이 세 여인들에 얽혀있는 수 많은 사연들은 놀라울 그 자체다. 한결같이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들과 죽은 사람의 혼과 함께 살아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는 몽롱하기 그지 없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일일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다.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이기에 그에 관한 심사평이 들어 있었는데, 독특하면서도 기이한 이 소설에 찬사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가능성 또한 내다보고 있었기에 <고래>에 대한 나의 느낌이 심사평에 의해 갈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볼 수 있어 즐거웠고, 기존의 틀과 형식을 깨면서도 과감했지만, 스토리텔링의 힘을 가지고 있어 구성력의 완성도가 돋보였다는 찬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고래>가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한낱 소설 읽기에 불과했던 것인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의 조각은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전체적으로 보려고 하면 더 흩어질 뿐이었다. '우리의 지난 세기를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로 채우고자 씌여진 것' 이라고 저자가 말했듯이 어딘가에서 흐리고 꾸려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단상으로 보면 될까? 두고두고 곱씹어도 그 만한 세월의 흔적을 남길 수 없을 것 같은 길고도 다양한 이야기 <고래>. 하룻밤에 읽은 이야기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흩뿌려 주었기에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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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의 하이쿠 기행 2 -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 바쇼의 하이쿠 기행 2
마쓰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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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에 이어 바쇼의 하이쿠 기행 2번째 책을 읽었다. 1권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1689년에 오쿠를 향해서 가는 여정을 기록했다면, 2권 '산도화 흩날리는 삿갓은 누구인가'는 1684~5년에 걸쳐 노자라시 기행을 담은 책이다. 기행을 떠나기 전, 4년 남짓의 은둔 생활을 하다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라고 한다.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님께 성묘하고, 오가키의 하이쿠 시인 보쿠인을 방문하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이기도 했다. 1권에서는 주석이 너무 많아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2권은 주석이 현저히 줄어들어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이쿠와 기행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좀더 만끽할 수 있어 편안했다.

 

  1권을 읽으면서 주석과 배경지식에 힘들었음에도, 하이쿠가 손에 잡힐듯 말듯한 미묘한 매력에 빠져 2권에도 선뜻 손이 갔다. 그러나 책이 얇다고, 주석이 적다고 좋아했던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모호함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이쿠 기행을 읽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 안에 내포된 의미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하이쿠의 특징상 설명이 없이도 즉각 짧은 시어에 어떠한 풍경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설명이 주어지지 않으면 애매모호한게 하이쿠다. 짧은 율격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의미파악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하이쿠다. 짧은 글자 안에 어느 정도 정해진 시어들을 채워야 하는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그래서 하이쿠의 의미는 철저히 주관적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바쇼의 하이쿠 기행 2권에서 봉착한 어려움이 그것이었다. 바쇼가 어떠한 심경으로 이 여행을 출발했는지 서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나 같은 일반독자들이 깊은 의미를 헤어리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바쇼의 발자취를 따라 기행을 하며 하이쿠를 읊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안에 내포된 많은 것을 지나쳐 버린 느낌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배경지식이 얕고, 시대적 교감이 많이 떨어졌기에 생긴 어려움이였으리라. 그러나 바쇼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것을 알려 했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어려움과 욕망을 잠시 눌러둔 채 하이쿠 기행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왜 바쇼가 하이쿠의 유명한 시인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애절한 시와 여행지에서 만난 하이쿠 시인과 교류하는 장면들은 그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1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쇼의 하이쿠 기행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는 그림이었다. 바쇼가 직접 그린 그림과 시가 적혀 있는 것도 있었고, 바쇼가 여행한 곳을 보여주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글로 상상하기에 부족한 부분을 한 점의 그림들이 희미하게나마 공간이동을 시켜주었다. 또한 2권에는 부록이 딸려 있었는데, '하이쿠의 세계'를 통해 하이쿠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7.5를 기본으로 하는 짧은 율격을 지닌 시가 하이쿠라고 알고 있었지만, 하이쿠가 무엇인지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 아쉬워하던 참에 만난 부록은 나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 주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쿠는 엄밀히 말하면 '하이카이 홋쿠'라고 한다. 하이카이란 단어가 '골계滑稽 '라는 뜻의 중국어에서 왔으며, 일본에서 이 단어가 처음으로 쓰인 것은 일본 최초로 공식적으로 편찬된 칙찬 와카집 [고킨와캬수(905)]에서라고 한다. 하이카이가 문예 형식의 하나로 성립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의 일이니, 렌가 중 정통이 아닌 것을 하이카이의 렌가, 즉 하이카이라고 했다 한다. 이렇게 렌가의 여기餘技로 시작된 하이카이는 17세기에 이르러서 일본 운문 문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하이쿠는 '홋쿠'와 같은 의미의 용어로, 1890년대에 마사오키 시키가 하이카이를 특히 홋쿠 중심으로 개혁한 이후의 것을 카리킨다. 그래서 작자와 독자가 동일한 그룹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작자=독자'일 필요도 없단다. 바쇼는 단순한 언어유희를 벗어난 문학으로 끌어 올리고자 했으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하이쿠는 5.7.5의 짧은 시지만, 직접 지어 보면 쉽지 않다.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이쿠를 즐기지만, 막상 율격과 형식에 따라 지어보려고 하면 텅빈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냄을 느끼게 된다. 하이쿠랍시고 글자에 맞춰 몇 편 지어보기도 했지만, 유치하고 시시해서 조금 흥미를 갖다 말았다. 바쇼의 하이쿠를 통해 독자의 위치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이이다 류타는 뛰어난 작품이란 "의미 해석의 영역을 넘어서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 이라고 말했다. 바쇼의 하이쿠는 의미를 알고 배경지식을 알면 더 큰 울림이 오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나의 감정을 이입시켜 주는 작품이 많았다. 단순히 하이쿠라 하면 바쇼가 떠올라서, 혹은 바쇼가 유명한 시인이기 때문에가 아닌 나의 가슴을 얼마나 울리는지를 살펴보며 바쇼를 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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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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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쥘 베른 컬렉션을 읽다보니, 20권의 전집을 다 모으고 싶었고 순서대로 읽고 싶었다. 우선 전집을 모두 구매하려고 검색해보니 출간이 안된건지, 품절인지 책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9권의 책을 모으지 못한채 컬렉션 첫 번째 책 <지구 속 여행>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가 개봉했다 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책을 다 읽은 시점은 영화가 내려간 뒤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처음 기대했던 마음에서 무언가가 허전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쥘 베른의 작품을 몇 권 읽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즐거움과 놀라움이 많았다. 그런 특징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이 책은 초반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나올 거라는 기대감 같은 것을 품어 버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사건의 발단은 우연히 발견된 고문서 때문이었다. 화자인 '나'의 삼촌이자 광물학자인 리덴브로크 교수가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문서로 인해 이 거대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슬란드 연금술사가 남긴 룬 문자 암호를 통해 지구의 중심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 쥘 베른의 문학을 탐독하는 재미지만, 지구의 중심이라는 말에 나는 무언가가 툭 떨어질걸로 제멋대로 상상해 버린 것이다. 전개는 빠르지 않았고,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 지구의 중심으로 내려가는 통로로 가는 과정까지 책의 1/3이 지나버렸다. 그 과정에서 흥미를 조금씩 잃어가다 그 댓가로 지구의 중심에 도달했을 때 엄청난 것이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악셀은 이 책의 화자이긴 하지만, 리덴브로크 삼촌이 이 여행의 주인공이다. 오히려 악셀은 삼촌의 손에 끌려 내키지 않은 여행에 동참했고, 겁이 많았다. 이 여행은 몹시 위험하고,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은밀하게 진행 시켜야 했기 때문에 독일을 떠나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그곳에서 안내인 한스를 고용한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사화산 중에 가장 높은 1500미터를 자랑하는 스네펠스를 향해 가야한다. 이 세명이 거대한 여행의 인원 전부였기에 조금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들의 행보를 좇을 수 밖에 없었다. 악셀이 우연히 암호를 해독하고, 그 메세지를 따라 시작한 무모한 여행이었지만 리덴브로크 교수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악셀은 번번히 삼촌과의 논쟁에서 압도당하고 말지만, 그만큼 삼촌의 과학적 지식은 넓었고 고집도 셌다. 그런 삼촌과 한스, 이 셋의 여행은 그렇에 이어졌고 위기와 고행의 연속이었다. 해발 3000미터 깊이를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간도 많이 걸렸고,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럴때마다 과묵하고 충실한 한스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었고, 삼촌은 해박한 지식과 무모함으로 지구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 애썼다. 악셀만 이 여행이 어서 끝나길 바랐고, 집에서 기다리는 약혼녀 그라우벤 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많은 위기가 있었다. 악셀이 길을 잃기도 하고, 물을 먹지 못해 탈진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한스와 리덴브로크 삼촌은 악셀을 구해주었고, 여행을 포기할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악셀의 기대를 부응시켜 주지 못한채 여행은 계속 되었다. 마침내 그 숱한 과정을 거쳐 연금술사가 말한 지구의 중심에 도착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지구의 중심에 펼쳐진 바다였다. 바다 밑에, 대륙 밑에 또 다른 바다가 있는 셈이었는데 그곳에서 사람이 산 흔적과 고대 생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긴 항해를 끝내고 처음 도착했던 해안으로 다시 돌아오고, 그곳에서 뗏목을 타고 다시 화산의 분출구를 타고 오는 과정으로 그들의 여행은 끝이 난다. 화산으로 들어갔다가 화산으로 나온 셈이지만, 그들이 들어간 곳에서 나온 곳의 거리는 5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함부르크로 돌아온 그들은 이미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여행이 학계에 알려졌고, 리덴브로크 교수(물론, 조카인 악셀도)는 많은 명예를 누리게 된다.

 

  지구 속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전개가 흥미진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끝나자 허무해져 버렸다. 초반에 갖었던 '거대한 무언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이미 지구 속에서 충분히 느꼈음에도...), 싱겁게 끝나버렸다는 사실만 되뇌이게 되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단어를 무시하고, 발견과 탐험에만 주목했던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구 속 안에서 발견과 탐험이 이루어졌지만, 과학적 발견이 주류라는 생각에 무심코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과정을 즐기는 책을 나의 혼란과 착각으로 허무하게 만들어버린 경험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쥘 베른의 문학세계는 탐독할만 하고, 궁금하고, 완독하고 싶다. 그런 욕망의 발판이 이 책이 되었다 생각하며 다음 작품에서 만나볼 새로운 세계를 꿈꿔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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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새 - 이덕무의 시와 산문 모음집
이덕무 지음, 김용운 엮음 / 거송미디어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재미난 책을 읽다보면 밤 12시를 넘기기 마련인데, 출출함을 참지 못할 때가 많다. 거실에 식구들이 자고 있어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지 못하면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다. 배가 너무 불러도 독서가 힘들지만, 배가 너무 고파도 독서가 되질 않는다. 간식을 준비해야지 하면서도 늘 잊어먹고 배고픔에 허덕이다 잠이 드는 날이 많다. 그때의 배고픔이 나에게 가장 난감하고, 당황스럽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배고픔은 이정도지만, 굶주림과는 거리가 먼 배고픔이다. 그래서 이덕무의 배고픔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러워진다. 그는 가난해서 배가 고팠고, 배고픔을 잊기 위해 책을 읽었고, 배고파야 책이 더 잘 읽어진다고 했다. 배고픔과 거리가 먼 시대에 살고 있는 내게는 너무나 먼 깨달음이다.

 

 

  이덕무를 알게 된 것은 ‘책만 보는 바보’를 통해서였다. 그 책 이후로 이덕무의 책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와 산문 모음집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이 책은 이덕무가 관직생활을 하기 전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에 씌인 글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마흔이 넘어서 관직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그가 겪었던 어려움이 어땠을지 짐작은 가지만 상상은 할 수 없다. 그의 글에 그런 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절절해졌다. '가장 으뜸가는 것은 가난을 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처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덕무. 어쩌면 가난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있었기에 그의 내면을 깊이 울리는 글들이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는 간서치看書痴인 자신의 모습과 백탑파, 중국 연경을 다녀온 일화들이 담겨 있었다면, '배고픈 새'는 간서치였던 이덕무가 겹치긴 하지만 가난함과 학문에 대한 깨달음, 직접 지은 사소절士小節등으로 채워져 있다. 다양한 글이 실려 있지만, 기본적인 흐름은 '가난'이었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느껴졌다. 짤막한 산문과 시를 읽고 있노라면 소소한 그의 일상이 눈 앞에 그려졌고, 그의 마음 따라 나의 마음도 차분해지고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건강이 연약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내면에서 나오는 글들은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깨달음이었고, 충고였고, 본받고 싶은 점이었다.

 

  이덕무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다른이에게 하는 충고라는 느낌도 강했다. 번뇌에 휩싸일 때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글이 와닿는 부분이 많았고, 메모지를 붙여 체크한 곳도 많았다. 그 부분만 찾아 읽어도 이덕무의 마음이 내게 와닿는 느낌이 들어 언제 읽어도 차분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소소한 글이 대부분이었기에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기도 해서 내 기분을 다스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부분이라든가,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릿한 마음, 어머니를 잃은 절절한 심정 앞에서는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에게 책이라는 귀한 벗이 있고, 백탑파라는 소중한 인연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가난 때문에 가족을 고생시켜야 했고, 책을 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기꺼이 즐거워 했던 또 다른 이면에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한 외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글을 읽는 내내 마른 나뭇가지가 내 마음에서 탁탁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그런 이덕무를 다시 만날 수 있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끔 책만 읽다보면 세상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가 하고 걱정할 때가 있는데, 이덕무는 그런 나의 시름을 한번에 씻겨 주기도 했다. '모름지기 벗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책과 더불어 노닐 일이다' 라고 했으니 그의 말을 따라 책을 통해 노니는 일을 멈추지 않고 즐거워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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