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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나를 부른다 -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30편의 에세이 ㅣ APCTP 크로스로드 1
APCTP 기획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11월
평점 :
과학과 절대 친하지 않지만, 책 표지에 새겨진 몇몇 이름들을 보고 홀랑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일등 공신인 소설가 김연수, 번역가 정영목, 정재승 교수 정도가 내게 익숙한 이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손에 책을 쥐고 보니 섣부르게 책을 고른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 들었다. 운 좋게 정재승 교수님의 사인까지 떡하니 받아왔지만, 과학에 문외한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자 30편의 단편을 순차적으로 읽지 말고, 랜덤으로 읽어보라는 지인의 충고가 따라왔다. 순차적인 얽매임에서 벗어나면 읽기에 좀 더 재미를 붙일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지인의 말이 귀를 멤돌았지만, 지금껏 책을 읽어온 습관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었다. 꾸역꾸역(?) 책을 읽어 나갔는데, 100페이지가 가까워지자 지인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뒷 부분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과학에 문외한인 나는 종종 재미난 글을 만나기도 했지만 지루했다. 나의 관심사도 아니였고, 약간은 혹해서 읽게 된 책이였기에 졸린 눈으로 읽기만을 번복했다.
책을 특성상 사색을 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눈은 이미 다음 문장을 좇고 있었고, 머릿속에 멤도는 글자들은 저만치 앞에서 읽은 것들이었다. 일치되지 않는 이해와 읽기의 속도 때문에 잠시 멈칫거리다가 뒷 부분을 들춰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제목보다는 첫 문단의 끌림으로 단편들을 읽어 나갔다. 첫 문단이 끌리면 읽고, 끌리지 않으면 잠시 보류해 두는 식으로 읽어 나갔다. 그런데 왠걸, 그렇게 읽다보니 지인의 말대로 부담감도 덜어 졌고 훨씬 편안하게 읽혀졌다. 정말 재미난 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 글이 묶여 있다. <과학 밖에서>,<과학의 변경 지대에서>,<과학 안에서> 이다. 얼핏 제목만 봐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순서대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연수님의 글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서문을 경쾌하게 열어주었기에 나름 즐거웠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글들은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생소했고, 첫 문단의 유혹에는 성공했지만 나의 이해를 백퍼센트 이끌어 주지는 못했다. 흥미롭게 다가갔다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결말을 만나게 되는 반복이었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바탕을 두고 일상생활과 삶, 배움등 연결을 지어 나갔지만, 그 이상을 이해하거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는 무리였다. 제목만 봤을 때는 <과학 밖에서>의 소제목을 달고 있는 글들이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의 재미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두 번째 단락 또한 별 기대없이 지루한 시선으로 읽어 나갔다. 그러나 의외로 나의 관심을 끄는 글들이 많았고, '과학'과 연관되었다는 생각은 잊은 채 흥미롭게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부제목에서도 나와있듯이 <과학의 변경 지대에서>는 다양함을 맛볼 수 있었다. 첫 단락에서도 그런 다양함을 만날 수 있었지만 내게 생소했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인문과 과학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글이라고 했는데, 그런 거창한 설명보다는 실제로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는 독서의 묘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김연수님은 '소설을 쓰는 일이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일'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이 글을 잘 쓸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두번 째 단락에서 그런 의견에 대해 수긍함과 동시에 의아함을 갖게 되었다. 어느 정도 문학과 인문학에 연관된 분들의 글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인체 실험과 과학 영웅담의 결탁'에 대해 얘기한 정영목님의 글도 인상 깊었고, '과학적 추론 방법의 비밀'은 거기에 나온 책들을 찾아서 읽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한국 과학'의 개념에 대한 김태호 님의 글은 재미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편안하고 재미있던 글을 꼽으라면 이정모님의 '과학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과학과 연관짓기를 잠시 잊을 정도였다. 글의 마지막에 저자의 사진과 약력이 나와 있었는데, 글을 통해 저자를 상상하면서 읽다가 막상 저자의 얼굴과 약력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난기 그득한 저자를 만날 줄 알았는데, 장길산(?) 같은 외모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에피소드 때문에 책을 읽고 난 후, 저자를 새롭게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가기도 했다.
세번 째 단락은 <과학 안에서>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과학과 관련되어 있거나 파생되어 나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저자들은(앞의 저자들도 대부분 그랬지만, 여기서는 범위가 좁아졌다.) 좀 더 생생한 현장의 에피소드와 자신의 생각들을 들려주었다. 역시나 어려운 글도 있었고, 재미난 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율은 앞에서 했던 것처럼 랜덤으로 읽었기에 좀 더 편안했다. 사인을 받았던 정재승님의 글도 좋았고,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나의 유년시절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이렇듯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이 의외로 흥미롭고 뿌듯하게 다가왔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이지만, 이 책의 기획처럼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통해서 다양함을 맛보았다. 우선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섭취할 수 있는 것들만을 끌어 모았지만 먼 훗날 과학과 좀 더 가까워진 후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새로운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과학과 친해졌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내게 낯선 분야라고 해서 두려움을 갖고 어렵다고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어떤 길에서든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돋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