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로트렉 - 열화당미술문고 206
장소현 / 열화당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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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나의 독서를 점검해 보니, 계획 없는 편중된 독서를 일삼은 사실이 드러났다. 편안한 독서를 하기로 했지만, 걸러서 책을 읽기보다 손에 쥐어지는 대로 읽은 책들이 많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다양한 장르를 읽기 위해 일부러 읽을 책을 정해 놓았는데, 올해는 그런 노력조차 없었다. 그렇다보니 올해의 독서에 아쉬운 면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술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기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림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그림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괜시리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그런 미안함이 가득할 때, 운 좋게 온라인 서점에서 미술 관련 책을 저렴하게 구입하게 되었다. 자주 읽지 못한 책들을 잔뜩 구입하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 첫번째 타자로 '툴루즈-로트랙'을 읽었다.

 

  내게 툴루즈-로트랙은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생소한 화가였다. 이번 기회에 알아가자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지만, 의외로 낯설지 않았다.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활동을 해서인지,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많이 언급 되어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만을 보고 그를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는 법. 그의 삶과 결부시켜 그의 작품을 알아가자는 의도는 저자의 의도이기도 했다. 일화나 에피소드에 너무 관심이 쏠려 작품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흐려지는 일은 경고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툴루즈-로트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전무했기에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더욱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말하기 전에 육체적 불행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안 사실이지만, 그는 10대 때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춰 난쟁이가 되고 말았다. 명문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번의 비극적 사고로 상체는 정상이고 하체만 기형적으로 짧았다. 사촌간에 결혼한 그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다리의 결함은 가족간의 반응이 극적으로 갈라진다. 어머니는 그의 모든 것을 위로해주며 감싸고 돌지만, 그의 아버지는 외아들의 신체적 결함을 좋게 보지 않았다. 가정의 불화, 신체의 결함,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그림이었다. 자신의 다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거라는 고백처럼, 그림은 그에게 삶의 전부였다. 그의 그림에서 같은 시대의 화가인 고갱과 고흐처럼 현실과 이상이 빚는 갈등이나 비극적 좌절감을 찾아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현실을 자기 세계 속으로 끌어들여 다시 엮는 처지가 아니라, 현실 속에 자기를 내던지는 성향의 작가라 할 수 있'었다.

 

  로트랙의 그림에는 창부娼婦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많다. 그는 어떤 여성에게도 위안을 받지 못했지만, 창부들의 세계에서는 자유로웠다. 자신의 몸 때문에 일부러 추행을 찾고, 염세주의에 기울어져, 화려한 홍등의 거리에 출입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는 약간 다른 사람으로 보일 뿐, 인간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그랬으니 그가 그런 생활에 젖어들었음은 물론이다. 그곳을 도피처로 삼아서 예리한 관찰을 한 것이다. 인생의 본질을 자연이 아닌 인간 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관찰 속에서 '느끼는 대로' 그린 그의 작품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그렸다'는 말은 애매한 표현이라고 한다. 그가 개성을 표현하는 주무기가 과장이기에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그의 인물 그림들의 얼굴을 보면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일부러 인간의 얼굴을 보기 싫게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좀더 표현력을 풍부하게, 독특하게 그리기 위해서 애썼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색보다 선의 화가에 더 가까운 로트랙의 그림들은 그래서인지 그림 속의 형태는 생생히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그는 알콜 중독으로 37세에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그가 만약 더 오래 살아서 그림을 그렸더라면 어떠한 화풍이 나올지 궁금해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저자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간 로트랙의 삶과 그림은 그 안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그대로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한 화가를 이해하거나, 그림을 만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생소해 마지않았던 로트랙을 이보다 더 진실되게 만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는 '삶의 무게와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은 젊은 나이로 죽어간 한 예술가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나의 모습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빌고 또 빈다'고 했다. 그런 저자의 바람이 많은 독자들에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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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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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지방에는 폭설이 내려 휴교까지 한다는데, 내가 사는 동네는 눈이 내리는 것 조차 구경할 수 없다. 남부지방 이여서인지, 폭설이 내린 광경을 뉴스를 통해 보면 딴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분에 모든게 움츠러 들었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 들고 행동반경도 짧아졌다. 그럴때는 방구석에서 뒹굴 거리며 책 읽는게 제격이다.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책만 쌓아둔 게으름이 즐거워지는 시점이다. 날씨도 춥고, 마음도 스산해서인지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책이 읽고 싶었다. 책장을 기웃거리다 타샤 할머니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열을 올리고 보다가 잠시 시들해져서 읽지 못한 책이었다. 

 

  타샤 할머니의 책을 몇 권 읽다보니 어느정도 코기 코티지에 대해 익숙하다. 처음에는 낯선 집을 둘러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유자재로 타샤의 집을 구경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타샤의 집이 궁금하고, 타샤 할머니의 라이프 스타일을 알아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읽을 책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타샤 할머니의 책을 펼친다는 것은 이런 편안함이 묻어 났기에 마냥 즐겁다. 다른 책들과 반복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웠고, 볼거리가 그득했기에 언제 펼쳐도 현장감이 느껴진다. 사진만 봐도 황홀한 정원을 세세하게 글로 남겨 주는 타샤 할머니와 토바 마틴이 있었으니, 언제든지 현실을 뒤로 한 채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정원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든 늘 매혹적이다. 이 책에서는 '4월과 그전' 부터 시작한다. 한 겨울이 되어도 타샤 할머니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타고난 부지런함을 가진 할머니지만, 겨울이 되어도 봄을 준비하는 타샤 할머니의 손길은 분주하다. 눈이 쌓여서 고립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지켜보는 사람이 조금 여유로워 보일 뿐이다. 겨울이 되어 정원의 모든 생명이 잠시 활동을 멈춘 것 같지만, 타샤 할머니는 봄에 심을 씨앗을 준비한다. 땅속에서 식물들의 꿈틀거림을 미리 가늠하고, 봄이 오려면 아직 먼 것 같은 시기에도 먼저 싹을 틔우는 식물들을 맞이한다. 그렇게 타샤의 정원에 봄이 오면, 할머니는 무척 바빠진다. 꽃은 무리지어 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구근을 몇 천개씩 심는다. 구근을 파먹는 동물들에게 먹일 양까지 생각하면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구근을 심어댄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타샤 할머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 구근들이 피어날 때는 할머니의 노고에 보답하듯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군락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정원의 꽃들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쉴새 없이 피어났다 진다. 정원의 꽃과 나무는 계획없이 심어진 것이 아니기에 꽃들의 생명력은 오래 간다. 타샤 할머니의 취향이 드러나는 정원은 피어나는 꽃들도 계획성 있게 가꾸어 진다. 꽃을 기르는 사람의 취향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만큼 애정을 듬뿍 쏟아주면 꽃들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런 꽃들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일일이 열거하는 타샤 할머니는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는 금방 친구가 된다. 그런 타샤 할머니를 익히 알고 있는 토바 마틴이 타샤 할머니와 친구가 되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온실에서 일하기 전부터 타샤를 좋아했고, 타샤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 원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고 했다. 그랬으니 책 안에 실려있는 글은 타샤가 설명하지 못한 부분들까지 섬세하게 써내려 갈 수 있었다. 타샤가 원예가로써 어떤지, 정원은 어쩐지, 그녀가 키워내는 꽃들이 어떤지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느낌을 굳이 인식할 필요 없이 타샤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구경하는 것은 정신을 뺏기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가 꽃집에서 보아온 혹은 인위적으로 가꾸어진 행사를 위한 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꽃들이 피어난다. 꽃을 피우기 까다로울수록 타샤 할머니의 관심을 듬뿍 받고 피어난 꽃들은 특히 아름다웠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정원의 모습은 황홀함 그 자체다. 타샤의 정원을 통해 이름을 알게 된 꽃들도 많고, 자태에 넋을 빼앗긴 것들도 많다. 생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게 익숙한 꽃들도 타샤 할머니 정원에서는 훨씬 더 아름답게 피어난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꽃들을 살핀 정성을 식물들도 아는 듯 했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구경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황홀했고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여운은 오래 남아 추운 겨울 밤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타샤 할머니의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할 수 있게 해준 타샤 할머니가 마냥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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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를 만나다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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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물건을 홀랑 집어올 때가 있다. 그렇게 집어온 물건들이 좋을 때도 많지만, 역시나 너무 섣부르게 집어 온 탓에 풀어보고 나서야 실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뜬금없이 왠 물건 얘기를 꺼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참이다. 책 제목에 홀려서 아무것도 따져보지 않은 채 펼친 책이 이 책이다.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자꾸 의심을 드러냈다. 무언가가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자꾸만 겉도는 느낌. 그제서야 저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흐를 말하다>를 쓴 저자였다. 그리고 밀려오는 안타까움. 그 책을 재미나게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안 좋게 읽은 기억 때문에 기억하고 있던 작가였는데, 또 다시 만나고 말았다.
 

  나의 덤벙댐을 탓한 것은 렘브란트를 색다르게 만나고 싶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데에서 오는 안타까움이었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내리는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전작 <고흐를 만나다>로 심하게 데여서인지 그 작가의 책은 피하고만 싶었다. 이 책의 내용이 확 바뀌지 않는 이상, 나의 편견이 깨지기는 커녕 더 굳혀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흐를 만나다>와 너무도 흡사했다. 책 제목에서부터 책의 구성까지 다를게 없었다. 저자는 시만 썼고, 그림에 붙은 글은 다른 사람이 썼으며, 번역도 제 3자가 했다. 당연히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일테지만, 이렇게 짜집기 되어진 책을 정말 좋아하지 않기에 온전히 읽기를 진즉 포기해 버렸다. 아무리 전작에 대한 실망이 크다지만, 너무 하는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에 대해 전혀 모른다거나 그의 그림을 보지 않았다면 몰라도, 어설픈 지식이 들어있는 내게 이 책은 통할 리가 없었다.

 

  <고흐를 만나다>도 내가 고흐를 좋아하기 때문에 읽은 책이었다. 당연히 어설픈 지식이 난무했고, 그 지식을 총동원해서 읽었지만 지금껏 만나왔던 책과는 너무도 달랐다. 고흐의 그림과 그의 인생을 겉도는 느낌. 그나마 내가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화가에 대해 색다르게 엮어진 책을 보며 당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렘브란트라니!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역시나 초반부터 책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내가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책의 구성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 사람의 느낌을 읽어나가도 그 느낌이 내게 전해질까 말까인데, 다른 사람의 글이 실려있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색다른 단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느 글 하나 온전히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 속에 렘브란트의 그림을 억지로 꿰어맞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림이 실려 있고, 그림에 대한 설명 혹은 느낌과 함께 이어지는 추상적인 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이질감이 가득했다.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렘브란트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한 명의 화가를 너무 틀 속에 가뒀는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몇 가지 수식어와 연결할 뿐, 특별한 편견은 없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글은 없는 편견도 만들게 하는 소통의 엇갈림이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성서와 관련된 그림이었다. 렘브란트 하면 자화상을 빼놓을 수 없기에 자화상은 제쳐놓고서라도, 몇몇 초상화를 빼면 대부분이 성서와 연관된 작품들이다. 그가 성서의 내용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성서에 관련된 그림을 공통적으로 실었다는 사실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성경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그림 자체만으로도 이해 불능인데, 설명도 부족했고, 개인적인 느낌이 강해서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적어 안타까웠다. 렘브란트 하면 '빛'을 빼 놓을 수 없는 화가이기에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한 그림의 특징을 잘 살려서 설명한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빛'의 가능성은 작았다. 빛의 통과여부에만 설명이 국한되었던 것이다.

 

  나의 지나친 편견일 수도 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전작에서도 그랬으니 이번 책도 그럴 것이라는 지나침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좋아하는 화가의 특징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자신만 간직할 수 밖에 없는 추억이 되고 소중한 기억이 될 뿐이다. 내가 감정이입을 시키지 않고 시를 읽었을 수도 있고,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그림에 대한 설명을 대충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모든 편견과 아집을 단박에 깨어줄 수 있는 새로움을 바랐던 것이다. 그 새로움을 만나지 못해, 이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렘브란트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가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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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서평을 보내주세요.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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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투를 빈다>를 읽고 있다고, 몇몇 지인들에게 말하자 다들 아는체를 한다. 여러 매체에서 연재를 했다며 재미있다고 하는데, 내게는 도통 금시초문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게 아는체를 하는 사람이 많단 말인가. 호기심에 책을 펼쳤지만, 서문부터 불쾌해지고 만다. 불친절한 독특한 말투에 걸러지지 않은 언어(이 책을 읽고 있으면 걸러진다 것이 무의미하다.)를 쓰지만, 맞는 말을 툭툭 뱉어 내는 그가 적응이 될 리가 없다. '틀에 박힌'과는 거리가 먼 그의 글을 읽는 것이 녹록치 않을 거라는 것을 바로 간파하고 말았다. 틀에 박힌 책들만 읽어 온 나에게 쉽게 다가올 리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먼저 그의 언어가 내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야메(이런 표현이 저자에게 어울린다. 얌전한 표현은 밍숭맹숭하다.) 상담가인(저자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저자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은 그 독특함에 홀려 상담에 따른 답을 듣고 있는지, 말투를 따라가며 적응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책을 읽다가 멍 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잔디에 풀을 뽑다가 멍 때린 저자와 조금은 닮은). Q&A 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질문을 던진 타인의 고민과 대답하는 저자를 늘 상기시켜야 한다. 둘을 구분짓지 않으면, 누가 질문을 했고 누가 답을 하고 있는지 그것 조차도 헷갈리기 마련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독설을 퍼붓는 건 기본이고, 질문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서슴없이 욕을 해 댄다. 그런 저자를 보며 내가 민망해지고 말았지만, 그의 대답이 공감이 많이 가는 것이 많아 그런 욕쯤은 소소한 첨과물에 불과했다.

 

  아마 그가 수 많은 사람들의 질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더라면, 나도 어영부영 끌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저자가 이끄는대로, 혹은 세상 사람들이 던져놓은 질문 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독설 속에는 해결책이 들어 있었고(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그 만큼 질문이 다양했고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도 많았다.), 특유의 날카로움 또한 가지고 있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 옆의 누군가가 그렇게 대답을 해 주었다면 12번도 넘게 상처를 받고, 어둠 속에 파묻혀 버렸을 충고를 서슴없이 한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문의 본질을 꿰뚫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덧붙이며, 답을 찾아주려는 노력.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삶의 경험에서 묻어나온 해결책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크게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 다섯 가지로 구분해서 질문과 답을 묶어 놓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류에 포함이 되기에 공감을 많이 할 것이다. 직,간접적인 상황 속에서 마주한 질문과 답은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딱 드러맞는 것 같았다. 나의 고민이 될 수도 있고,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고민들이 많았기에 삶의 언저리에서 뚝뚝 떨어져 나오는 듯한 생생함을 맛보았다. 그런 질문들이 다 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명쾌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저자 앞에서는 말 그대로 한낱 고민에 불과했다. 그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걸리적 거릴게 없어 보였다. 그 만큼 세상 이곳 저곳에서 부딪힌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서 흘러 나오는 연륜(?)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때는 '저게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이야'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딴 소리만 하다 끝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지나온 과정 속에서 느꼈던 것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한 것이 타인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삶의 잔상을 드러내는 그가 마뜩찮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지, 고민을 해결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내용들이 식상했다. 그렇지만 내가 질문하는 사람의 심정이라 생각하고 답을 읽을 때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심지어 욕 한마디까지도 위로가 되고 충고가 되고 있었다. 질문하는 사람의 절박함을 잊지 않았고, 헛점 또한 놓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졌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한 대답이 모든 질문에 정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저자 또한 그런 의도로 한 것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대답이라고 했기에 그 안에서 건져낼 것만 건져내야 하는 것이 질문을 하는 사람과 독자의 몫이다. 저자가 뱉은 말에 상처를 받거나, 질문의 본질을 피해 간다면 그의 말은 처음의 나처럼 불쾌할 뿐이다.

 

  책 속에 담겨 있는 질문들을 한 개의 덩어리로 묶어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 하지만, 그의 대답을 쉽게 단정 짓기도 곤란하다. 처음에 서문을 마주했을 때보다 덜 불쾌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하는 방식은 나에게 거슬린다. 거기다 이런 질문과 대답으로 채워져 있는 책은 나의 취향과 거리가 멀기에, 몰입보다는 구경꾼의 위치에 있었던 적이 더 많았다. 구경꾼의 위치에만 있어도 이런 질문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는게 인생이라고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그랬기에 대답을 하는 저자도 많이 난처하고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종종 대답이 반복이 되고 겉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문제인냥 최선을 다해 답을 달아준 열의는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해결책을 던져 줬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첫 머리에 '세상사 다 행복하자는 수작이 아니더냐' 라며 '이 책이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던 저자의 노고를 잊지 않으면 된다. 질문과 답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지 말고, 가끔은 뛰어 넘으며 정면돌파를 해보는 것이야 말로 저자가 이 책 구석구석에 던지는 메세지일지도 모르므로.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부딪히는 고민과 해결책이 들어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무엇이든지 대답해 주는 질문 상자 - 다니카와 슌타로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에 대한 고민이 한 가지라도 있는 자!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을 '꿈'이란 단어로 포장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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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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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마주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이후로 국내에 히가시노 게이고 열풍이 불어올 때도 그의 책을 선뜻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취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직접 구입 해서 읽기에는 무리였다. 여러 핑계들이 있겠지만, 역시나 추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향 탓일 것이다. 책이 나에게 안겨야만 읽을 수 있는 억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궁금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에서 책이 먼저 내게 다가와 주었다. 겉표지를 보면서 꿈자리가 뒤숭숭할까봐 약간의 걱정을 했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들어 버렸다. 이렇게 나를 쉽게 매료시킨 책이 얼마만이던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을 두번 째로 읽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감탄하는 부분은 탄탄한 스토리와 완성도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읽은 추리물 중에서 완성도에 높은 편이라고 소문을 낼 정도였다. 이번 책도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정된공간에서 두 명의 인물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기에 주인공인 '나'는 추리력이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키므로써 거부감을 없애준다. 이를테면 '너무 똑똑하잖아','직업이 저러니 그럴 수 밖에' 등등의 푸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연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낯선 집을 방문하게 되는 '나'는 그 집에서 그녀의 기억을 찾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추리라고 하면 범죄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두 인물을 실질적인 범죄에 가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에 의해 옛 연인 사야카는 범죄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년을 사귀고, 헤어진지 7년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고교동창 모임에서 다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는 그녀는 딸이 하나 있는 평범한 주부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전화에 야릇한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로 전화를 건 것은 아닐꺼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래된 열쇠 하나를 보여주며, 자신과 함께 어떤 집에 가줄 수 있겠냐고 한다. 앞뒤 정황은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부탁을 하는 그녀에게 쉽게 마음이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끌림에 의해 가기로 결정한다. 그녀가 잃어 버렸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사야카의 아버지의 낚시 가방에서 나온 지도와 열쇠는 유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 유품의 궁금증을 풀어야만 했다. 그것으로 인해 사야카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도에 나온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괴한 집 구조에 놀라고 만다. 별장촌에 숨겨져 있다시피 한 그 집은 지하로만 들어갈 수 있게 지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혼란은 그때부터 시작한다. 분명 낯이 익은 집임에도 어떠한 기억도 없기에 그 집을 조사해 보는 수 밖에 없다. 방 하나하나를 탐색해 가면서 사야카의 흐린 기억을 의지해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은 생각외로 이상한 집이었다. 분명 사람이 산 흔적은 있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 안에 있는 교과서와 책들은 제조일이 23년 전이었고, 그 외의 책들도 20년전에 발행된 것이었다. 23년 전에 모든 것이 멈췄고,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밖에 상상할 수 없었다. 집안에 몇개 되지 않은 시계들도 같은 시각에 멈춰 있었고, 전기며 수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촛불과 손전등에 의지해서 살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몇개의 수확물을 건져낸다.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가 살았음직한 방에서 일기가 발견된 것이다. 4학년 때부터 써 온 일기장에서 조금씩 그 집의 비밀을 풀어간다.

 

  평범한 초등학생 유스케의 일기는 별 특징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 속에는 이 집에 대한 단서가 곳곳에 들어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복선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일기장이었다. 초반에 무심코 읽고 지나쳤지만, 그 뒤에 발견 하는 유스케 아버지의 편지와 꿰어 맞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사야카도 그 일기장의 내용과 편지를 꿰어 맞춰 가면서, 집 안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하면서 비밀을 풀어갔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빈틈없는 역량이 발휘되는 곳이다. 곳곳에 단서를 뿌려놓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전개를 풀어가는 과정. 다른 작가들도 그런 구조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더 빈틈없이 옥죄어 가는 느낌이다. 그가 흩뿌려놓은 단서 하나를 끝까지 쥐고 있다가 만약 이것이 결말에 설명되지 않는다면, 빈틈을 여지없이 폭로(?)해 버리겠다는 나의 포부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철저했다. 내가 쥐고 있던 단서 하나도 간단하게 처리하고 설명해 주는 저자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만큼 독자는 물론 스토리까지 모조리 꿰고 있다 서서히 풀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비밀을 풀어가면 갈수록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사야카와 23년전의 유스케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유스케의 일기장에 드디어 사야카가 등장한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집에 드나들며 어느 정도 생활을 했는데 조각 조각 흩어진 기억은 모아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엄마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여전히 사야카는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더욱 더 의문이 드는 것은 책 제목이다. 분명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제목을 잊어 버리기 일쑤다. 제목을 잊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좀 더 일찍 사야카의 비극을 예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추리에 빠지다 보면 끝에서 만나게 되는 반전에 충격을 받는다. 유스케의 일기장과 유스케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편지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작은 단서 하나로 그 집의 정체까지 추리해 가는 능력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차라리 그 기억을 사야카가 잊고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야카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결혼 생활도, 아이의 양육도 제대로 할 수 없는(학대까지 일삼는) 그녀에게 잃어 버린 어린 시절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 과정을 '나'와 함께 한 이유는 '나'가 쓴 칼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야카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던 둘 만의 시간(6년의 사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사야카에게 짧은 엽서 한장이 온다. 이혼을 했고, 아이는 남편이 키운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역시 나 이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걸 믿고, 앞으로도 살아갈 생각이야' 라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는 말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사야카를 지켜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는 힘든 과정을 겪은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감추고 싶은 상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고, 성장해 오면서 겪은 상처들이 꽤 오래감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상처를 발견했고,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지 못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언젠가 나의 상처를 드러낼 날이 오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에서 나오는 '집'의 의미는 '오래전에 스스로 죽인 또 다른 내가 있게 마련' 인 상징물이며, '자아찾기'의 한 갈래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집'의 의미에서 여러가지 뜻이 갈라져 나옴을 나 또한 인정하며,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더라도 비극이 아닌 희망적인 결말로 각자 마무리 지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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