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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눈이 떠지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눈이 심하게 부어 있다.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만 우는건데 하는 후회도 잠시, 허둥지둥 세수를 한다.잠깐 본다는 것이 새벽 4시까지 책을 읽다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아뿔사! 마음이 아프다고 울때는 언제고 어느새 현실 앞에 내던져진 나를 보고 있자니 짧은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나의 의지대로 읽기를 조절할 수 없었다. 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느라 책 읽기를 멈췄을 뿐, 꼼짝할 수 없었다. 무엇이 나를 깊은 새벽까지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렸던 것일까. 마음속을 훑고간 감정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1장을 읽을 때, 딸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글들은 지난했다. '나'라고 하지 않고 '너'라고 자신을 드러내며, 인칭대명사가 아닌 지시대명사처럼 언급하는 것이 낯설어 어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온통 지칭하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짜증스럽기까지 해서, 엄마를 잃어 버렸다는 딸의 고백에도 시큰둥 했다. 책을 덮을 수 없는 흡인력은 있었지만, 1장을 읽다말고 지인에게 지루하다고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지인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고, 그 소설은 최고라고 했다. 정말? 그럼 나만 이렇게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말인가. 다시 책을 펼쳐들었을 때는 밤 12시가 지나 있었다. 조금만 읽다 자려 했는데,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고 눈물 콧물을 잔뜩 흘리며 저며오는 가슴을 부여안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책 읽기가 더뎌 진 것은 중간 중간 우느라, 아픈 가슴을 내리 치느라, 엄마 생각을 하느라 멍했기 때문이다.
1장을 뚫고 나오지 못하면, 초반은 지루하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 역에서 엄마를 잃어 버린 내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들네 집에 가기위해 지하철을 탄 노부부는 '엄마'가 타기 전에 닫혀 버린 문 사이로 엄마를 잃어 버렸다. 엄마를 놓친 것이 아니라, 잃어 버렸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엄마의 뇌를 갉아 먹고 있는 병 때문이었다. 아들네 집에 전화 한통만 했더라면 에피소드로 끝났겠지만, 단순한 행동조차 버거운 엄마였고 그 사실을 가족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를 찾으려는 노력과 딸의 고백이 범벅이 된 1장을 쉽게 못 뚫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비난과 함께 엄마를 찾기 위한 갈등이 우울하게 비춰질 거라는 엇나간 추측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소설 속의 '엄마'를 바라보는 그들의 구경꾼에 불과했다. 엄마를 잃어 버렸기에 엄마에 대한 추억들이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그러나 딸(1장)-큰아들(2장)-아버지.남편(3장)-어머니.아내(4장)-딸(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백 앞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엄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딸'의 위치밖에 안되는 나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벅찬 가슴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엄마'는 시골에서 오남매를 낳고 키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었다. 자꾸 나의 엄마와 소설 속의 '엄마'가 겹쳐지는 것은 그런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남매를 낳아 자식 한 명을 잃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나의 엄마. 한글도 독학으로 깨쳐 나에게 틀린 맞춤법을 가르쳐 주던 나의 엄마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엄마'에 대한 추억은 쉴새 없이 밀려왔다. 내가 잊어 버린 엄마였고, 잊고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그러할진대 엄마를 잃어 버린 그들은 오죽했을까.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오래 살라고 아프지 말라는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럴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 힘든 시절, 자신들을 키워내고 아내의 역할을 다하고, 인심人心 한번 독하게 드러내놓고 살아본 적이 없는 엄마를 그제서야 허겁지겁 떠올리고 추억하기 바빴다. 그 모든 아픔과 절망을 감당할 이는 그들이라고 꾸짖던 내가 어느새 자리바꿈을 하여, 그들과 함께 통탄하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시에서 자랐다면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던 그들의 엄마는, 나의 엄마와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9남매의 막내인 내가 엄마의 삶을 깊이 보아온 것은 아니다. 서열이 빠른 언니 오빠들과 살아온 시대가 다를 정도니, 엄마의 삶이 어떠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9남매를 키워내면서 엄마가 감당해야 할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한량인 아버지, 벌여놓은 농사, 자꾸만 커가는 자식들 모두를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때까지 수없이 내야 했던 돈을 늘 동네사람에게 빌려야 했으니, 내 위의 언니 오빠들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감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엄마가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가는 것만 바라봐도 어디로 가버릴까봐 철렁했던 그 마음, 중학교 때 부터 자취를 해서 일요일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떠나올 때의 그 불안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종교를 갖게 되면서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그런 아픔들을 모조리 끄집어 내어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책 읽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딸과 아들, 남편에게 한 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한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미안함에 가슴을 치고, 제발 돌아만 와달라고 외쳐 보아도 그 여인을 잃어 버린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딸의 집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과, 지금껏 숨겨야 했던 또 다른 사랑을 고백했지만 늘 미안해 하는 엄마의 모습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 고백들을 끝으로 잃어 버린 엄마를 영영 잊어 버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소설 속의 엄마, 나의 엄마 모두 내 곁을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다. 가족들이 마음 깊이 품으면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이 그런 두려움일 거라 생각하자 눈 앞이 흐려졌다. 두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데서 오는 깊은 회한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정말 가족들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일까. 엄마를 잃어 버린지 9개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엄마를 잃어 버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격한 사람들에 따르면, 엄마는 큰 아들을 찾아 처음 서울로 올 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발견되는 장소는 아들이 이사를 거듭해 온 집들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여름에 잃어 버린 엄마를 몇 계절이 지나가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큰 딸은 이탈리아로 간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를 보고, 기념품 가게에서 장미 묵주를 산다. 언젠가 가장 작은 나라에 가게 되거든 장미 묵주를 사달라고 했던 엄마. 바티칸 시국에 와 있는 딸은 무엇엔가 이끌리듯 성 베드로 성당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 상을 보게 된다. 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찾게 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이탈리아로 온 것은 엄마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엄마를, 엄마를 부탁한다고. 도대체 '엄마'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를 낳아주고 희생해준 '나의 엄마'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엄마의 삶이 나로 인해 부서져 버린 것을 모르고, 마음 밖에 엄마를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모든 자식들이 그런 엄마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