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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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마주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이후로 국내에 히가시노 게이고 열풍이 불어올 때도 그의 책을 선뜻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취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직접 구입 해서 읽기에는 무리였다. 여러 핑계들이 있겠지만, 역시나 추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향 탓일 것이다. 책이 나에게 안겨야만 읽을 수 있는 억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궁금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에서 책이 먼저 내게 다가와 주었다. 겉표지를 보면서 꿈자리가 뒤숭숭할까봐 약간의 걱정을 했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들어 버렸다. 이렇게 나를 쉽게 매료시킨 책이 얼마만이던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을 두번 째로 읽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감탄하는 부분은 탄탄한 스토리와 완성도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읽은 추리물 중에서 완성도에 높은 편이라고 소문을 낼 정도였다. 이번 책도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정된공간에서 두 명의 인물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기에 주인공인 '나'는 추리력이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키므로써 거부감을 없애준다. 이를테면 '너무 똑똑하잖아','직업이 저러니 그럴 수 밖에' 등등의 푸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연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낯선 집을 방문하게 되는 '나'는 그 집에서 그녀의 기억을 찾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추리라고 하면 범죄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두 인물을 실질적인 범죄에 가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에 의해 옛 연인 사야카는 범죄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년을 사귀고, 헤어진지 7년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고교동창 모임에서 다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는 그녀는 딸이 하나 있는 평범한 주부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전화에 야릇한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로 전화를 건 것은 아닐꺼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래된 열쇠 하나를 보여주며, 자신과 함께 어떤 집에 가줄 수 있겠냐고 한다. 앞뒤 정황은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부탁을 하는 그녀에게 쉽게 마음이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끌림에 의해 가기로 결정한다. 그녀가 잃어 버렸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사야카의 아버지의 낚시 가방에서 나온 지도와 열쇠는 유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 유품의 궁금증을 풀어야만 했다. 그것으로 인해 사야카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도에 나온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괴한 집 구조에 놀라고 만다. 별장촌에 숨겨져 있다시피 한 그 집은 지하로만 들어갈 수 있게 지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혼란은 그때부터 시작한다. 분명 낯이 익은 집임에도 어떠한 기억도 없기에 그 집을 조사해 보는 수 밖에 없다. 방 하나하나를 탐색해 가면서 사야카의 흐린 기억을 의지해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은 생각외로 이상한 집이었다. 분명 사람이 산 흔적은 있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 안에 있는 교과서와 책들은 제조일이 23년 전이었고, 그 외의 책들도 20년전에 발행된 것이었다. 23년 전에 모든 것이 멈췄고,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밖에 상상할 수 없었다. 집안에 몇개 되지 않은 시계들도 같은 시각에 멈춰 있었고, 전기며 수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촛불과 손전등에 의지해서 살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몇개의 수확물을 건져낸다.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가 살았음직한 방에서 일기가 발견된 것이다. 4학년 때부터 써 온 일기장에서 조금씩 그 집의 비밀을 풀어간다.

 

  평범한 초등학생 유스케의 일기는 별 특징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 속에는 이 집에 대한 단서가 곳곳에 들어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복선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일기장이었다. 초반에 무심코 읽고 지나쳤지만, 그 뒤에 발견 하는 유스케 아버지의 편지와 꿰어 맞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사야카도 그 일기장의 내용과 편지를 꿰어 맞춰 가면서, 집 안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하면서 비밀을 풀어갔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빈틈없는 역량이 발휘되는 곳이다. 곳곳에 단서를 뿌려놓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전개를 풀어가는 과정. 다른 작가들도 그런 구조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더 빈틈없이 옥죄어 가는 느낌이다. 그가 흩뿌려놓은 단서 하나를 끝까지 쥐고 있다가 만약 이것이 결말에 설명되지 않는다면, 빈틈을 여지없이 폭로(?)해 버리겠다는 나의 포부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철저했다. 내가 쥐고 있던 단서 하나도 간단하게 처리하고 설명해 주는 저자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만큼 독자는 물론 스토리까지 모조리 꿰고 있다 서서히 풀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비밀을 풀어가면 갈수록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사야카와 23년전의 유스케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유스케의 일기장에 드디어 사야카가 등장한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집에 드나들며 어느 정도 생활을 했는데 조각 조각 흩어진 기억은 모아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엄마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여전히 사야카는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더욱 더 의문이 드는 것은 책 제목이다. 분명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제목을 잊어 버리기 일쑤다. 제목을 잊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좀 더 일찍 사야카의 비극을 예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추리에 빠지다 보면 끝에서 만나게 되는 반전에 충격을 받는다. 유스케의 일기장과 유스케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편지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작은 단서 하나로 그 집의 정체까지 추리해 가는 능력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차라리 그 기억을 사야카가 잊고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야카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결혼 생활도, 아이의 양육도 제대로 할 수 없는(학대까지 일삼는) 그녀에게 잃어 버린 어린 시절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 과정을 '나'와 함께 한 이유는 '나'가 쓴 칼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야카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던 둘 만의 시간(6년의 사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사야카에게 짧은 엽서 한장이 온다. 이혼을 했고, 아이는 남편이 키운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역시 나 이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걸 믿고, 앞으로도 살아갈 생각이야' 라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는 말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사야카를 지켜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는 힘든 과정을 겪은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감추고 싶은 상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고, 성장해 오면서 겪은 상처들이 꽤 오래감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상처를 발견했고,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지 못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언젠가 나의 상처를 드러낼 날이 오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에서 나오는 '집'의 의미는 '오래전에 스스로 죽인 또 다른 내가 있게 마련' 인 상징물이며, '자아찾기'의 한 갈래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집'의 의미에서 여러가지 뜻이 갈라져 나옴을 나 또한 인정하며,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더라도 비극이 아닌 희망적인 결말로 각자 마무리 지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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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 - 맥스 루케이도
맥스 루케이도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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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한 감기가 걸리고 나니, 건강했던 며칠 전이 무척 그리워 진다. 맘껏 책을 보며 뒹굴거렸는데, 지금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차를 연거푸 들이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건강할 때 지킬걸' 하는 후회가 든다. 건강할 때는 다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몸이 아프니 오로지 건강했던 시절만 그리워 진다. '몸만 아프지 않았더라면'을 전제로 하루 스케줄을 상상해보지만, 여전히 마음만 앞서가고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내일도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아프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이다. 그런 마음 가운데 나를 스쳐가는 단어는 '감사'이다. 건강할 때 건강한 몸을 주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건강한 몸을 제쳐두고 다른 걱정에 얽매이느라 효율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여전히 경험을 해야만 깨닫는 얇팍한 마음을 지닌 나였다.

 

  몸이 아플 때까지도 '감사'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몇 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된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신간 <주의 은혜>를 마주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몸이 아프지 않았기에 별 다른 느낌없이 휙휙 읽어갔다. 그렇게 대충 읽는 모습이 못 마땅했는지 감기가 내게 들어왔다. 그것도 온 몸을 마구 훑고 지나가는 지독한 감기였다. 그런 상태에서 책을 펴니 글자가 눈 앞에서 뱅뱅 돌았지만, '감사'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목사님은 짧은 문장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짧은 글과 간단한 성경말씀, 감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사진 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사진들은 자연을 그리기도 하고, 추상적인 것,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 사진에 어울리는 성경말씀과 목사님의 글을 보고 있으면 편안했다. 굳이 신앙과 연관된 책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읽어도 좋을만큼 부담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보다 진하게 배어 나온 책이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목사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글과 사진, 말씀을 통해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믿지 않자, 그에 대한 증거를 들이미는 것 같았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사랑, 기도, 축복, 은혜 이 네가지의 주제가 이 책의 중점이었다. 모두 '예수님처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느낄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께 구하지만 말고, 나를 알아달라고 떼만 쓰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노력해 보라고 말이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 왔었다. 따지고 보니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모두 아시고 계시는데,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기도라는 수단으로 고백하게 만드셨는데, 나는 떼를 쓰고 때로는 협박까지 하고 있었으니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상대는 독자인 '나'라고 생각되어 졌지만,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나'를 집어 넣어 관심을 끌려는 마음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얼마나 '나'가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기에 친절히 하나님을 알리셨을까. 친절히 알려도 하나님의 존재를 오해하고, 부정하는 무리들이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다.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받아 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짧은 시간 동안 틈 나는 대로 하나님과의 교감을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많은 감정들이 이입 된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열매를 맺'으므로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힘이 있다는 말씀.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걸 주신'다는 말씀.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느니 독생자를 포기하는 편을 택하시리라'는 말씀. 이렇게 다양하게 우리의 마음밭에 떨어지는 말씀을 잘 묻었다가 다시 싹이 돋게 하면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 놓은 편지라고 생각되어 질 정도로 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실천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기도를 드리며, 은혜를 구하면 되었다. 내게 와 닿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한다면 그야 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라야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귀한 시간을 '주의 은혜'를 통해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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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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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맨 부커상을 주목하게 된 것은 2006년 수상작인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때문이다. 우연히 알게 된 존 반빌의 소설이 너무 좋아 부커상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올해의 맨 부커(2002부터 금융기업인 맨 그룹Man Group이 상금을 지원하면서 명칭이 '맨 부커상'으로 바뀌었다.)수상작도 구입해 두었지만, 작년 수상작도 비슷하게 출판이 되어서 그 책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2008년 수상작보다 왜 더 늦게 출판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책 두께를 보자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 시점에서 조금 늦게 만난 감도 없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김석희님이 번역을 맡아 주어서 흡족한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원래 두꺼운 책을 좋아지만, 요즘에는 읽기 보다는 내 책장에서 전시용으로 몰락(?)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두꺼운 책을 손에 쥐게 되니, 부담도 갔지만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특히나 겨울에 읽는 장편은 추위도 잊은 채, 책 속으로 나를 끌어 들이기에 더 매력적이다. 장편은 독자의 입장에서 두 종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두께에 상관없이 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빠져 들게 만드는 것과 두께에 상관 있게 지루한 책으로 말이다. 어이없는 나뉨이지만, 전자의 장편을 만나게 되면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면에서 <상실의 상속>은 전자에 가까운 편이었다. 온전한 것이 아닌 가깝다고 표현한 이유는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피부로 와닿지 않는 내용일지라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어느 한 주제를 일관성있게 명시하지 않는다. 물이 흐르듯,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듯 드러내지만 시간을 뒤죽박죽 흐트려 놓는다. 그 흐트러짐은 기묘하다. 옮긴이도 말했지만 코믹, 진지, 낙서 같은 실없는 말, 아름다운 경치 묘사와 슬픔과 기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문장이라고 했다. 두께 때문에 읽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들을 가볍다라고 할 수 없지만, 많은 것이 낯설었을 뿐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히말라야의 작은 도시 칼리퐁. 들어본적도 없을 뿐더러 위치 짐작도 되지 않는 산중의 집, 초오유에는 16살의 소녀 사이와 은퇴한 판사인 외할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다. 사이는 부모님이 러시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자 기숙사에서 거의 쫓겨나듯 외할아버지 댁으로 온다. 전직 판사인 제무바이는 딸과 의절한 후, 손녀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그런 손녀가 불쑥 찾아온 것이 달갑지 않지만, 소설의 시작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한다. 판사의 총을 뺏으로 온 불량 청소년들의 등장으로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그 사건만으로도 무언가가 석연치 않고 께름직한데, 저자는 독자에게 바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 난데없이 이야기의 중심은 초오유의 요리사 아들 비주가 일하고 있는 뉴욕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비주의 처지도 독자를 곤경에서 끌어내어 주지 않는다. 불법 이주 노동자로 여러곳을 떠돌며, 불 이익을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고 인도와 뉴욕이라는 거리와 문명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확연히 드러났다. 초오유에서 드러나는 인도의 현 시류는 지켜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거기다 불법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까지 같이 지켜봐야 했다. 어째 우울함으로 급격히 감정이 격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의 예감대로 이야기의 흐름은 순탄하게 명맥을 유지해 가는 것 같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의외였다. 낯선 나라의 낯선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발을 헛디뎌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줄거리를 말하라고 하면 흐름을 묘사하고 있기에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책 속 인물들의 삶 속에 비춰진 현재와 과거에 대한 잔상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구경꾼의 입장이였기에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이, 비주, 제무바이의 삶이 그려지긴 하지만 회한과 후회가 깃들어 있을 뿐 혼란스러웠다. 비주가 사랑에 빠지는 지안과의 관계도 시원하지 않았고, 힘들게 미국으로 건너간 비주의 삶은 비참했다. 전직 판사였다던 제무바이는 좀 나을까 싶었지만, 그가 회상하는 과거는 세 인물 중에서 가장 씁쓸하다. 권위와 허영에 물들어 이제는 무기력해져 버린 제무바이의 과거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나온 세월의 상실들이 사이에게 혹은 비슷한 세대인 비주에게 상속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속된 말로 어른들이 자주 하는 '나의 죄' 때문에 후손들의 삶도 평탄치 않음을 드러내고 있는 삶. 제무바이의 회상은 그런 상실로 그득했다.

 

  제무바이의 상실이 과거형이였다면, 사이와 비주는 현재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잃고, 사랑을 잃고 인도인도 영국인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비주. 혼란스러운 인도의 사회 속에서 그녀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외따로이 떨어져 지내왔던 과거처럼, 그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애견 무트에게 애정을 더 쏟는다. 무트가 실종 됐을 때 편협함과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제무바이였으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비주는 어떠한가. 하나뿐인 외 아들을 미국에 보내놓고, 오로지 그런 아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길고 긴 여정의 마무리는 비주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만, 그의 모습은 더 초라하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가져간 것을 잃지는 말아야 하는데, 미국으로 갈 때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마치 우리 윗 세대들의 삶에 서려 있는 한恨을 지켜본 것 같았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서구적인 요소가 비서구적인 나라에 도입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두 세계 사이의 불균형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 변화는 나중에 개인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소설 속의 인물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잘 조율한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기도 하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방대하면서도 독특한 문체로 이루어진 소설 속에 담아놓았다. 그 안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사회문제들이 보완되지 않고 더 격렬해져서 안타까웠다. 독자를 우울함 속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한 순간에 설 수도 없을 만큼 나약하고 힘 없는 개인의 삶을 통해 통해 국경과 인종을 넘어 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와 개인의 고충까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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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잊고 살아가는, 혹은 이미 잊어 버린 엄마를 떠 올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참 다사로운 어머니께>, 마루오카 마을 편

 


•  서평 도서와 동일한 분야에서 강력 추천하는 도서

김정현의 <아버지>, <어머니>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엄마를 가진 모든 이들, 혹은 엄마를 잃어버린 모들 이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 되어줘,라는.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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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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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떠지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눈이 심하게 부어 있다.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만 우는건데 하는 후회도 잠시, 허둥지둥 세수를 한다.잠깐 본다는 것이 새벽 4시까지 책을 읽다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아뿔사! 마음이 아프다고 울때는 언제고 어느새 현실 앞에 내던져진 나를 보고 있자니 짧은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나의 의지대로 읽기를 조절할 수 없었다. 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느라 책 읽기를 멈췄을 뿐, 꼼짝할 수 없었다. 무엇이 나를 깊은 새벽까지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렸던 것일까. 마음속을 훑고간 감정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1장을 읽을 때, 딸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글들은 지난했다. '나'라고 하지 않고 '너'라고 자신을 드러내며, 인칭대명사가 아닌 지시대명사처럼 언급하는 것이 낯설어 어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온통 지칭하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짜증스럽기까지 해서, 엄마를 잃어 버렸다는 딸의 고백에도 시큰둥 했다. 책을 덮을 수 없는 흡인력은 있었지만, 1장을 읽다말고 지인에게 지루하다고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지인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고, 그 소설은 최고라고 했다. 정말? 그럼 나만 이렇게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말인가. 다시 책을 펼쳐들었을 때는 밤 12시가 지나 있었다. 조금만 읽다 자려 했는데,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고 눈물 콧물을 잔뜩 흘리며 저며오는 가슴을 부여안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책 읽기가 더뎌 진 것은 중간 중간 우느라, 아픈 가슴을 내리 치느라, 엄마 생각을 하느라 멍했기 때문이다.

 

  1장을 뚫고 나오지 못하면, 초반은 지루하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 역에서 엄마를 잃어 버린 내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들네 집에 가기위해 지하철을 탄 노부부는 '엄마'가 타기 전에 닫혀 버린 문 사이로 엄마를 잃어 버렸다. 엄마를 놓친 것이 아니라, 잃어 버렸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엄마의 뇌를 갉아 먹고 있는 병 때문이었다. 아들네 집에 전화 한통만 했더라면 에피소드로 끝났겠지만, 단순한 행동조차 버거운 엄마였고 그 사실을 가족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를 찾으려는 노력과 딸의 고백이 범벅이 된 1장을 쉽게 못 뚫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비난과 함께 엄마를 찾기 위한 갈등이 우울하게 비춰질 거라는 엇나간 추측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소설 속의 '엄마'를 바라보는 그들의 구경꾼에 불과했다. 엄마를 잃어 버렸기에 엄마에 대한 추억들이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그러나 딸(1장)-큰아들(2장)-아버지.남편(3장)-어머니.아내(4장)-딸(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백 앞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엄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딸'의 위치밖에 안되는 나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벅찬 가슴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엄마'는 시골에서 오남매를 낳고 키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었다. 자꾸 나의 엄마와 소설 속의 '엄마'가 겹쳐지는 것은 그런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남매를 낳아 자식 한 명을 잃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나의 엄마. 한글도 독학으로 깨쳐 나에게 틀린 맞춤법을 가르쳐 주던 나의 엄마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엄마'에 대한 추억은 쉴새 없이 밀려왔다. 내가 잊어 버린 엄마였고, 잊고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그러할진대 엄마를 잃어 버린 그들은 오죽했을까.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오래 살라고 아프지 말라는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럴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 힘든 시절, 자신들을 키워내고 아내의 역할을 다하고, 인심人心 한번 독하게 드러내놓고 살아본 적이 없는 엄마를 그제서야 허겁지겁 떠올리고 추억하기 바빴다. 그 모든 아픔과 절망을 감당할 이는 그들이라고 꾸짖던 내가 어느새 자리바꿈을 하여, 그들과 함께 통탄하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시에서 자랐다면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던 그들의 엄마는, 나의 엄마와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9남매의 막내인 내가 엄마의 삶을 깊이 보아온 것은 아니다. 서열이 빠른 언니 오빠들과 살아온 시대가 다를 정도니, 엄마의 삶이 어떠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9남매를 키워내면서 엄마가 감당해야 할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한량인 아버지, 벌여놓은 농사, 자꾸만 커가는 자식들 모두를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때까지 수없이 내야 했던 돈을 늘 동네사람에게 빌려야 했으니, 내 위의 언니 오빠들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감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엄마가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가는 것만 바라봐도 어디로 가버릴까봐 철렁했던 그 마음, 중학교 때 부터 자취를 해서 일요일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떠나올 때의 그 불안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종교를 갖게 되면서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그런 아픔들을 모조리 끄집어 내어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책 읽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딸과 아들, 남편에게 한 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한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었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미안함에 가슴을 치고, 제발 돌아만 와달라고 외쳐 보아도 그 여인을 잃어 버린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딸의 집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과, 지금껏 숨겨야 했던 또 다른 사랑을 고백했지만 늘 미안해 하는 엄마의 모습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 고백들을 끝으로 잃어 버린 엄마를 영영 잊어 버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소설 속의 엄마, 나의 엄마 모두 내 곁을 떠나버릴까봐 두려웠다. 가족들이 마음 깊이 품으면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이 그런 두려움일 거라 생각하자 눈 앞이 흐려졌다. 두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데서 오는 깊은 회한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정말 가족들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일까. 엄마를 잃어 버린지 9개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엄마를 잃어 버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격한 사람들에 따르면, 엄마는 큰 아들을 찾아 처음 서울로 올 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발견되는 장소는 아들이 이사를 거듭해 온 집들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여름에 잃어 버린 엄마를 몇 계절이 지나가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큰 딸은 이탈리아로 간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를 보고, 기념품 가게에서 장미 묵주를 산다. 언젠가 가장 작은 나라에 가게 되거든 장미 묵주를 사달라고 했던 엄마. 바티칸 시국에 와 있는 딸은 무엇엔가 이끌리듯 성 베드로 성당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 상을 보게 된다. 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찾게 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이탈리아로 온 것은 엄마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엄마를, 엄마를 부탁한다고. 도대체 '엄마'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를 낳아주고 희생해준 '나의 엄마'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엄마의 삶이 나로 인해 부서져 버린 것을 모르고, 마음 밖에 엄마를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모든 자식들이 그런 엄마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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