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의 죽음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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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서점을 갔다. 나의 주머니 사정은 얇팍했지만, 책을 구경한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책을 둘러보다 한 권의 책을 보자마자 뽑아 들었다.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이었다. 예전에 그 서점에서 <섬>을 사간 적이 있었다. 이름도 많이 들어본 작가에다 그 작품에 대한 명성도 자자해서 무척 궁금했었는데, 서문을 읽다가 덮고 말았다.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의 찬사가 그득한 책이었지만, 정작 나는 한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지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느 개의 죽음>부터 읽어보라고 했다. 그 말을 잊고 있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생각이 난 것이다. <섬>에 대한 추억 때문에 약간 긴장하고 책을 펼쳤는데, 쉼 없이 한 순간에 다 읽어 버리고 말았다.

 

  저자는 자신이 키우던 개, 타이오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었다. 안락사를 시켜야만 했던 아픈 기억과 타이오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들이 맞물려 있다. 그리고 타이오의 빈자리에 대한 쓸쓸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짧게 써내려 간 글 속에는 타이오의 이야기가 그득하지만, 그 외의 성찰이 담겨 있다. 타이오를 통해 시각을 넓혀 인간의 삶과 연결 시킨다고나 할까. 타이오의 이야기와 동떨어진 느낌이 묻어나는 글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타이오의 죽음에서 비져 나오는 생각들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타이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는 '대자연은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첫날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을 선사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한 뒤 (중략)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까?'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동물과 인간 구별없이 던지는 의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의 죽음을 맞이해 본 사람이라면, 저자의 이러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문도, 타이오에게 던지는 안타까운 마음도 말이다.

 

  그는 자신이 키우던 개의 죽음을 통해 일방적인 결과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개의 죽음으로 인해 슬프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글로 타이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 뿐이다. 타이오의 이야기는 저자의 이야기가 되어 갔다. 타이오를 기르면서 품었던 자잘한 감정들과 불편, 행복등을 나열하는 그는 애처로워 보인다. 그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 마리의 개가 떠남으로써 삶이 위축되어 보이기도 한다.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안락사를 시키면서 마음 아팠을 그의 내면은 곳곳에 드러난다. '개에 대해서 감상적으로 떠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부드럽고, 바스라져 버릴 정도로 여린 돌조각들에, 단단한 칼날도 무뎌지는 것'의 행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주워다 기른 개에게서 느끼는 애정이 이처럼 남달랐기에 죽음에 대한 그의 마음은 더 처연 했을 것이다.

 

  그가 타이오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보내는 잔상들도 잔상이지만, 그 안에서 비져나오는 삶의 성찰도 남달랐다. 타이오가 원하는 것을 뿌리칠 수 없음에 선행에 대한 욕구를 말하고, 개가 자신에게 갖는 애착을 통해 인간의 평등한 처우를 보려고도 했다. 오로지 죽음에 대한 슬픔이 가득했다면, 청승맞았을 글이 담담하게 비춘 이유이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이 기르던 동물들의 죽음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적 길렀던 개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며 종종 그리워 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특별했기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팔려 버린 개 때문에 무척 슬퍼했었다.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떠나 버린 개에 대한 슬픔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정과 애착으로 범벅이 된 그리움 뿐이었다. 저자처럼 많은 것을 끌어 당겨 엮으며 생각할 겨를도 없었거니와, 그런 밑거름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나이였다. 이제서야 조금씩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다고 고백할 수 있지만, 역시 헤어짐 앞에서는 처연해 질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한 마리의 개의 죽음을 통해 저자는 타이오를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 진정한 자신을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통해 드러나는 타이오에 대한 추억은 철처한 타인의 기억이지만, 그 추억이 아름다운 건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저자는 타이오와 함께 한 시간이 즐거웠고, 타이오가 없는 생활 속에서도 타이오를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사라짐에 대해서 이렇게 처연해 질 수 있다면. 저자의 슬픔까지도 부러워지는 아직도 철이 덜든 나 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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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침개 전도 이야기 - 행복한 안내자로 살아가는 순복음노원교회 전도자들의 증언
유재필 지음 / 두란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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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연말이 되어서 그런지 마음이 헛헛한 요즘이다. 모든 것이 다 시들하고, 어떠한 것도 나의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새해가 와 있다는 두려움이 일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 버리기는 싫다고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헷갈린다. 특히나 최근들어 나의 신앙에도 기복이 심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내려놓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돌볼 겨를도 없이, 나의 신앙을 추스리기 바쁜 요즘 <부침개 전도이야기>라는 책을 만났다. 책 제목만을도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해도 여김없이 한 명도 전도를 못했고, 한 영혼을 신경쓰기 보다는 내가 먼저 바로 서야 했다.
 

  그래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읽었다. 전도의 불이 일어난 교회의 이야기일지라도, 나의 상황과는 멀다고 치부해 버렸다. 노원구에 위치한 교회로 10만 성도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순복음노원교회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나 하나 살기 바쁜 요즘에 그런 비전을 품는 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강팍한 마음에서 책을 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초반부터 나의 마음은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병폐를 콕콕 찔러 주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갈 해법의 열쇠를 구하는 지혜이다'라는 목사님의 말씀 앞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연말을 핑계대고, 나의 신앙이 주춤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법을 구하기 보다 회피해 버리기 바빳던 나의 모습이었다. 그랬으니 전도의 사명을 가진 순복음노원교회가 은혜롭게 다가왔겠는가. 찔림을 받으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딴청만 부리고 있었다.

 

   이 책에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어떻게 한 영혼을 구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고, 수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도자의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첫 번째 마음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없이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전도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은 어떠한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닮아가기 위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타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는 것. 역시나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나눠 주겠노라는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의 제목인 <부침개 전도>도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고, 꾸준한 전도를 통해서 결실을 거둘 수가 있었다. 목사님은 '전도용품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가는 교인들의 뒷모습이 십자가 군병들처럼 듬직하지만, 때로는 세상 속에 들어가는 양들처럼 애처로워 보인다'고 하셨다. 그들에게 사명감과 사랑이 없었다면, 그 일을 해 낼 수 있었을까. 전도를 해 본 사람만이 전도를 한다라는 말처럼, 전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많은 성도들 마음 속에 있었다. 많은 교인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어찌나 사연들이 기구하고, 애처로운지 그런 삶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찾았고, 매달렸다. 그 가운데 각 구역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기도를 끊임없이 해주었다.

 

  또한 전도 안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이 있었다. 노원구의 특징을 파악하며, 외국인 노동자과 장애인 영혼 구원에 힘썼다. 하나님의 자녀를 허물없이 사랑하는 교인들의 모습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 주변의 복음화를 외치면서도, 그런 복음을 전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사람을 골라가며 전도해 보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각자가 받은 성령을 타인에게 서슴없이 나눠주는 교인들을 보면서, 그런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다라고 느꼈다. 간증을 한다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인데, 간증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을 나누어 주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 졌다.

 

  간증만 실려 있다면 지루했을 내용에, 목사님의 적절한 설명과 객관적인 입장에서 씌여진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목사님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마음을 품은 성도들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랬기에 이 책은 순복음노원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였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나와 동떨어진 세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큰 비전을 세울 수 없더라도, 내 자신이 먼저 바로 서고 서슴없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신앙 생활을 하라고 했으면, 지쳐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의 어려움을 알고 득달같이 달려 들어 기도해주는 교인들과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했다.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릴 때,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는 얄팍한 믿음을 보지 말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길 원한다. 순복음노원교회의 이야기는 그런 간증과 하나님의 사랑, 비전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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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푸른독서노트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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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미셸 투르니에의 책을 검색하다 신간이 나온 소식을 접한 것이다. 거기다 저자의 독서 노트라고 하기에 구미가 당겼다. 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떠한 책을 선택해서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 들은 과연 어떤 책을 읽을까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셸 투르니에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책들이 무조건 좋을 거라는 받아 들임보다, 책에서 느꼈던 잔상들을 들춰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들뜨게 했다. 글을 쓰는 작가의 책에 관한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가 생기기에 충분한 얘깃거리였다.

 

  도대체 미셸 투르니에가 좋아했던 책은 무엇이고, 이 책에 실려 있는 책들은 어떤 책들일까. 궁금증에 목차를 훑어 보면서 약간은 의아해 진다. 몇몇 작가는 익숙하지만, 대부분이 낯선 작가들이었고 생소했다. 그리고 그나마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은 청소년들이 주로 읽는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성인의 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굳이 연령대로 구분할 필요도 없지만) 실어 놨을 거라는 추측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거기다 저자는 서문으로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로 시작하고 있었다. 보통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 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서문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미셸 투르니에 답게 방대하면서도 흥미롭다. 말의 습득에서 낭독과 구술문학까지 연결해 간다. 그러면서 낭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해석이 독자나 낭독자인 자신을 의미하므로, 더 맛깔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시의 경우에 그러한데, 아직까지도 시를 묵독하며, 읽기에 여념이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저자는 작품을 설명해 나가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듯이, 또한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한 경험까지 덧붙이고 있다. 쥘 베른에서부터 루이스 캐럴, 키플링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지만, 책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작품을 알아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셸 투르니에에 의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고 있으므로 소단원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러곤 다시 세로운 세계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옮긴이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책들이 청소년을 위한 책들인데 반해 문학적, 철학적 배경이 없으면 투르니에의 해석을 혼자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투르니에는 그 부분을 자신의 글쓰기 재주가 부족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나 또한 투르니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충분한 흥미가 갔지만, 직접 읽은 책들이 아니였기에 해석의 난해한 부분을 많이 만났었다. 이러한 해석도 존재하는 구나라고 느끼기에는 생소한 작품이 많았고, 작품들의 특성상 이미 커버린 뒤에는 잘 읽지 않은 분야였다(요즘에서야 어린시절에 얇은 동화책으로 읽었던 책들을 성인판(?)으로 읽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가 제시한 몇가지 해석들은 수긍이 갔다. 쥘 베른을 접하기 전에 청소년 책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는데, 두툼한 해저 2만리를 읽고 나니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투르니에는 위대한 작가 겸 지리학자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쥘 베른 컬렉션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라 이번 기회에 쥘 베른 작품을 탐독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투르니에의 해석을 보니 궁금증을 더 생기고 말았다. 그가 수학교수였다는 사실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옥스퍼드 대학교 학장의 딸인 앨리스에서 뱃놀이 중 들려준 이야기를 엮은 것이라는 사실부터가 흥미로웠다. 나에게 그 책은 조카들에게 읽어주던 동화책 속에서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그런 배경과 투르니에의 색다른 해석이라니. 루이스 캐럴은 계집아이들에게 이상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여자가 되어 가면서 너무나 다른 존재로 변해 버려서 어렸을때 갖었던 우정이 예의를 차리게 되는 정도 밖에 안된다고. 투르니에는 거기에 '앨리스가 겪는 시련들을 섹스라는 암흑세계로의 추락으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라고 했다. 가끔 성장소설들을 읽다가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보면 낯선 감정을 느끼곤 했는데, 투르니에의 이런 해석 앞에 입이 떡 벌어진다. 어쩜 나도 그런 유혹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꼭 저자의 해석에 따라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니 이해가 가면 가는 대로, 그 책이 흥미로우면 흥미로운대로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소소한 다짐을 해도 상관없다. 단지 저자 해석을 다른 사람의 견해로 받아들이면 생소한 이야기도 훨씬 가깝게 다가올거라 생각한다. 그 작품을 쓴 작가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쩔 때는 지식을 총동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일상 속에서도 쓸 수 있다는 미미한 의미를 받기도 했다. 투르니에는 '소설을 출간하는 것은 독자에게 소설의 반을 제공하고, 독자가 책을 읽어 나가면서 머릿속에서 나머지 반을 써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저자의 소설이 아니지만, 기존 작품에 저자의 견해를 붙이고, 원 작품의 이야기를 탐독 하는 것. 그런 일련의 연결이야말로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채워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의 대상 연령대나, 아니면 나같은 어른이나 모두다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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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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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들>을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을 더 읽고 싶었다. 검색을 해보니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밖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바로 주문해서 받은 책은, 색이 약간 바랜 초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는 걸 알고나니 조금은 씁쓸해 졌지만, 이제라도 내 손에 쥐어 있는 이 책이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전작을 통해서 알게된 저자의 성장과 내면의 세계가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기에, 새로운 책에서는 어떠한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했다.

 

  전작에서 저자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좋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는데, 그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어 갔다. 저자는 아버지에 대한 자극적인 표현을 지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한 순간에, 고모의 옷장 깊숙히 들어 있는 아버지의 편지 백여 통이 발견된 것이다.

 

  그 편지들은 아버지가 모로코에서 군복무를 할 당시에 가족들에게 쓴 편지였다. 저자는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될 한 남자의 젊은 적 시절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죽음에 대해서 불안에 떨때도, 현재 자신이 있으므로 그 남자가 죽지 않을 거라면서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아버지의 편지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모로코에서의 군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는 더 이상의 세세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 편지를 통해 자신도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한 것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유년시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아버지의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다.

 

  이 책은 전편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추가한 것이고, 아버지의 존재를 부각시키므로써 자신의 온전함을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살아왔는 증거. 그리고 행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딸려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가톨릭이었던 집안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신부가 되기를 꿈꾸었다. 신부가 되면 오지로 순례를 떠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던 그에게 철학선생 샤를르 블랑셰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대변혁을 가져온다. 그를 통해 문학에서부터 삶까지를 넘나들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또한 캐나다로 일 년동안 종교공동체에 들어가 수련을 받는 동안 그는 점차 신부가 되겠다는 꿈에서 자신이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알제리 전투>를 보고 충격을 받고, 군복을 입은 군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속에 공익요원의 자격으로 알제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배움에 굶주린 청소년들에게 기초를 가르쳤다. 어느정도의 속죄의 심정으로 알제리를 향한 것이었는데, 그곳은 아버지가 젊을적 군복부를 했던 모로코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또다른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가 돌아온 프랑스는 혼란스러웠다. 혁명이 휩쓸고 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자유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이 사라졌으니 먹고 살아야했다. 별 경력이 없는 그는 임금이 형편없는 일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밥 딜런의 음악을 듣게 되고, 그는 밥 딜런에 심하게 빠지게 된다. 밥 딜런과 관계된 모든 것을 듣고, 읽던 그는 밥 딜런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맘 먹는다. 가정교사로 있던 곳의 하녀방에서 밥 딜런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의외로 그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밥 딜런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는 삶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다른 욕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얼마나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는 무언의 메세지를 전하는 듯 했다. 어쩌면 회한이 깊이 남아 있는 추억을 꺼내면서 많은 좌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염려와는 다르게 저자는 꿋꿋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했고, 삶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죄책감이나 후회보다는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모습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향해 나가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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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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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겨울이면, 뜨뜻한 아랫목에서 간식을 먹으며 재미난 소설들을 읽기를 소망하게 된다. 추울 때는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만히 누워 책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맛보는 것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이 지겨울 때면, 곧장 집어 드는 것이 산문집이다. 산문은 날씨가 스산해 질 때, 어울리는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변화를 좇으며, 흩어지려 하는 마음을 다잡아 보는 것. 반대로 변화에 따른 마음을 타인에게 의지해 보는 것. 그것이 산문을 읽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였을까. 여름내내 쳐다도 보지 않았던, 미셸 투르니에 책을 집어들었다. 올 초에 이 책을 읽다 만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 있는 책을 다시 집어 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여기까지 읽었다고 표시해 둔 앞부분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책 한권을 읽으면서 두 세개를 만나는 느낌이랄까. 꾸역꾸역 꿰어 맞춰, 읽다만 부분부터 다시 시작해 나갔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을 두 번째로 접하고 나니, 그의 글이 조금 익숙하지만 더 광범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에서부터, 인간 본성의 깊이까지 파고드는 역량은 놀라웠다. 그가 철학 공부을 공부 했다는 사실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유자재로 가벼움과 무거움을 넘나들며, 사유를 유도하는 것은 미셸 투르니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얘기를 꺼내면, 납득을 하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지나쳐 버리는 소재들에서 끌어내는 다양한 시선들은,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생각하기에 알맞았다.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춰서서 생각에 빠지기도 하며, 저자가 써내려간 글을 통해 다른 식으로 접근해 보기도 했다.

 

  이 책은 8가지 주제로 나뉘어 진다. 집, 도시, 아이들 등 어떻게 보면 쉽게 접하지만 깊이 있는 생각은 해 보지 않는 것들이다. 거기다 그렇게 광범위한 재료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가 더 난감한게 사실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피력하면 되는 것이지만, 왠지 주제만 살펴보면 하나의 정의가 만들어야 한다는 듯 살짝 부담감이 가기도 했다. 이런 경솔한 생각은 무너져 버렸지만, 주제를 정해놨다고 해서 그 안에서 국한되는 글들은 아니다. 묶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도록 비슷한 이미지들이 들어가 있는 글들이었다. 또한 피상적인 연결들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자면 '손'이라는 글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두 손이 달린 모습을 설명하면서 손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을 같이 드러낸다. 손이 우리의 신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수음하다' 까지 범위를 두며 겉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 거미에게 손의 의미를 부여할 때는 '몸에서 잘려진 채로 악몽 속에서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능력을 부여받은 메마른 작은 손을 닮았다' 라고 표현한다. 또한< 책>이라는 제목에서 저자는 '왜 쓰는가'의 대답으로 읽혀지기 위해 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책이라고 하는 시장에 내놓을 이 제품을 방안에 들어 앉아서 만들고 있는 수공업자' 라고도 말한다. 이처럼 저자는 하나의 재료에서 사유를 맘껏 끌어내고 있었다.

 

  때론 너무 깊이 들어가는 그의 글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헤메기도 했다. 저자에게 익숙한 주제들을 말할 때는 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었기에 멀뚱멀뚱 읽기만 하고 있었다. 훗날, 그때 미셸 투르니에가 한 말들이 다른 글과 연결 되어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설사 그럴지라도 산문을 읽는 재미는 사색하는 묘미가 있기에 모호함 속을 헤메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글은 방대하다. 마치 수 백년 된 나무처럼, 굵은 몸통을 두고 아래로로는 뿌리를, 위로는 가지를 마음껏 펼쳐 나가는 것 같다. 어떠한 가지와 뿌리를 만나든지 그것은 한 몸통에서 나온 것이면서 각자의 위치가 있으므로, 꼭 연결 짓지 않아도 된다.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맘껏 흡수하며 가끔 다른 개체를 통해 이동을 하면 된다.

 

  이 책의 끝무렵에는, 번역가 김화영님과 미셸 투르니에와의 만남을 정리한 대담이 실려 있다. 대담을 통해서 저자의 집과, 저자의 글의 세계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대담으로 인해 좀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머나먼 프랑스의 한 세제관에서 살고 있는 고령의 저자에게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곳에서 글이 탄생하고, 사제관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고 생각하니 포근했다. 앞으로도 소설과 산문을 병행으로 출간하는 저자의 행보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머나먼 땅에서도 그를 기억하고, 그의 글을 만끽하며 사색에 빠지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서, 늘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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