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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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눈을 뜨니 방이 캄캄했다. 날씨가 흐린가 보다 하고 창문을 여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왠지 모를 착찹함을 가져온다. 하루가 더 길 것이라는 무언의 예감 때문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오늘 쓸 리뷰 책을 골랐다. <체실 비치에서>를 집어 들다, 책 내용이 떠올라 손길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책 겉표지를 한참을 바라봐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울함이 그득했던 책. 내가 접해 있는 세계와 결코 엮고 싶지 않았고,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일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결혼.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쁨에 넘쳐야 할 둘 만의 결혼 첫 날. 에드워드와 플레렌스에게는 가장 최악의 날로 기억되고 말았다. 도무지 문제가 뭐냐고 말하기에 애매모호한 그들의 하루.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책의 시작은 그들이 결혼을 해서 묵게될 호텔에서부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하며 일련의 회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시작은 평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왠지 모를 불안이 서려 있었다. 어느 젊은이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지켜본다는 것으로는 대답이 될 수 없는 불안감. 그런 불안감은 조금씩 드러나고 축약되어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터졌을 때는, 씁쓸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안타까움보다 책을 읽는 내내 가지고 있었던 답답함이 조금 가라 앉는 정도였을 뿐, 마음이 한없이 시려지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 첫날에 헤어졌다. 최고의 순간인 동시에, 최악의 순간을 모두 맞이한 날이었다. 무엇 때문에? 과연 무엇 때문에 그들은 헤어졌던 것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첫날 밤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서로 사랑 했지만, 감정 표현 방식과 원하는 것이 달랐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한낱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쳐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꼬여만 가는 각자의 단상들이 숨막혔다. 그럴꺼면 왜 결혼을 했냐는 악다구니는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지금처럼 남녀의 관계가 자유분방하지 못한 시대적 배경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서로의 생각을 서슴없이 털어놓지 못한 것까지 배경 탓을 하고 싶지 않다. 일부러 상처를 주며 결별을 해놓곤, 서로를 그리워 하는 것까지 철저히 모르게 살아간 두 사람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아름답다, 가슴아프다, 안타깝다라는 수식어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음에도 행하지 않는 그들이 매정하다고 생각한다. 감정만으로,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지만, 그렇기에 더 답답함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나를 뒤로한 채, 저자는 비교적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담담함을 지켜 보는 것 조차 맘에 들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 처지. 어쩌면 자신은 담담하게 지켜보는 척 하면서, 뛰어난 정밀 묘사로 인해 독자들에게 감정이입을 모두 시켜버린 건지도 모른다. 지켜보는 입장에 익숙한 나같은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들어올때면, 흥분하고, 우울해하고, 책을 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으니 말이다.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들의 상반됨과, 성장 배경의 다름들이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서 그들이 당면한 현실을 비켜갈 수 없었다. 첫날 밤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신랑은 순수한 걱정을 하고 있는 반면, 신부는 남녀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현실이 어떠한 이야기를 만나더라도 잊혀질 수 없게 했다. 그들의 사랑이 순탄하지 않음을 예감하면서도, 결말로 가고 싶지 않고, 멈추고 싶지도 않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나의 복잡한 심정은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 감정을 내게 이입시켜 버렸고, 나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그들의 첫 날밤과, 내면적인 이유를 설명해 가기 위해 꿰어맞춰진 이야기 속에서도 기운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이, 서로를 그리워 하는 것을 서로가 모른다는 사실보다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아프게 이별했고, 그 이후에는 더 아픈 사랑을 하며 삶의 환희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허무감이야말로 삶에서 의지를 떨어트리는 치명적인 경험이다.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세월이 허무할 정도로 많이 흐른 뒤였다. 그 뒤의 인생은 너무나 간결하게 드러나 있었기에 씁쓸한 감정에 짐을 더 드리울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재결합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화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깊은 대화를 하지 못한 그들에게 질타를 하고 있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지 못한 행위에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때문일까. 나는 왜 이렇게 책 내용이 우울하다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일까. 대리만족을 얻으려 했던 사랑의 달콤함에서 쓴맛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난 체실 비치에서의 기억이, 서로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서 오는 처절함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흐릿한 점이 될 때까지 사라져 가느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워드. 에드워드를 남겨 두고 뒤 돌아 보지 않고 자갈길을 걸어 갔던 플로렌스. 그때부터 이미 그들은 체실 비치에서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좀 더 따뜻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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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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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을 책을 쌓아두고서도 서점을 기웃 거리는 이유는, 나를 설레게 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문학은 책에게 다가가게 해주고, 책 읽기를 즐겨하게 된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소설을 읽는게 뭐가 재미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을 갖는 것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날의 기분과 금전적인 여유에 따라서 책을 고르는 양상이 달라지긴 하지만, 서점을 기웃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번역한 김화영님은 파리의 서점에서 책이 얇아 만만해 보여, 집어 들었다고 했다. 한 달 간의 휴가를 마치고,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그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다 읽어 버렸다고.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곳은 헌책방이었다. 헌책방은 괜찮은 가격에 좋은 책들을 구입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득한 곳이다. 김화영님이 번역했고, 출판사가 낯익다는 이유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 들었다. 파리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을 번역까지 하게 되고, 그 책을 나는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우연들로 맺어진 책과의 인연. 하지만 책 내용은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만 보아도 스산한 가을의 막바지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숲을 떠나면서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 에서 읽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이라 글귀를 떠올린 것. 거기에서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자기치유적인 회상들로 써내려간 어린시절의 이야기는 심연의 아픔을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복닥 거리며 살던,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집이 팔렸다는 소식으로 시작하는 책은 깊은 회한을 드러낸다.

 

  열 명의 대 식구는 그동안 단칸방 생활을 접고,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한다. 그 전에도 이사는 있어 왔지만, 지은이의 기억에는 없다.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어려 기억이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가 태어나기 전에 식구들은 전쟁의 고충을 겪기도 했다. 어머니가 포탄 파편에 맞기도 했지만, 무사했고 죽음을 넘어 살아남은 가족들은 이사를 한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식구가 많은 집, 독특한 집안분위기를 가진 집으로 어디서건 사람들의 눈에 띈다. 아이들이 커나갈 수록 한 명씩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집안의 의식 같은 것이 진행된다. 큰 형이 떠나고, 누나가 떠나고 자신의 차례가 되어 우울한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보니 집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고향의 냄새부터 추억,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피어났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향할때면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들뜸으로 나타나곤 했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파티를 하는 모습은, 가난하지만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집안의 또다른 어두움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련의 줄거리만 살펴보면, 가족 많은 집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녹아 있는, 내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깊은 슬픔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기억들이 지워질까 빠르게 써 내려 간 듯한 글을 따라 가면서, 감탄과 탄식을 자아내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옮긴이는 '하마터면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을 퍽, 하고 터뜨릴 뻔했다' 고 고백했다.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이 뭘까. 그건 어린시절 안에 감추어 있던 환희와 함께 버무려진 나름대로의 성장의 고통이 아니였을까. 세상에 나혼자만 던져진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했던 배부른 불평에서 오는 번뇌가 아니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우리집과 너무나 닮아있던 어린 시절. 많은 가족, 가난, 차레차례 집을 떠나가는 자녀들의 행렬. 저자는 열명의 자녀 중 여덟번째였다. 나는 대가족의 막내였기에, 그가 누렸던 추억과 종종 엇나갈 때가 있었다. 늘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혼자 남겨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 언니와 오빠들이 주말에 다녀갈때면 눈 만난 강아지마냥 좋아 폴짝폴짝 뛰다가도, 일요일이 되어 모두들 떠나가면 우울함이 나를 덮쳐왔다. 지금껏 고백해 보지 않은 나의 어린시절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며 파헤치는 듯한 저자의 고백. 그 고백들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사랑이 기울어짐에는 아이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저녁이면 전쟁을 몰고 오는 아버지 앞에서 가족과 어머니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며 자랐으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자 '바야흐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한다. 결핍된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연스레 흘러들어가는 사랑을 어쩔 줄 몰라했던 가족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모든 짐이 드리워지고, 그런 어머니마저 병들어 돌아가시자 남아있는 건 형재자매들 뿐이다. 많은 가족이었기에 동떨어짐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각자의 가슴에 간직되어 있는 외로운 존재감을 나는 이해한다. 한 부모에게 나온 자녀들이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고충. 그런 고충을 인식하기도 전에 고향집은 사라지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아버지,어머니, 누이), 그를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고백한 저자. '어린 시절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지상낙원의 기억은 치유되지 않는다' 라고 회상하던 그는 무엇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했을까. 정말 죽은 가족들과의 단순한 평화만을 원했을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좀 더 평안하게 지키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였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런 느낌 때문에 자기치유적인 소설이라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보지만, 그로인해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왈칵 울음을 터트릴 정도의 회한이 깊이 자리하고 있진 않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 없이 서글퍼지는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권이 이런 느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옮긴이의 손에 붙들려 먼 길을 향해 온 한 권의 책.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제목이 그제서야 서글프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고 내 곁으로 왔던 것일까. 이별의 하루를 살고 있는 나지만, 잠깐이라도 그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다. 내 품에서 편히 쉬라고, 펑펑 울음을 터트리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그 대상이 단지 이 책의 주인공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내 자신이 무엇보다 잘 알고 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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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 벼랑 끝에서 산 소망을 찾은 산소망선교회 이야기
김재홍 지음 / 두란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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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에 도착 하면 컴퓨터를 켜자마자 블로그를 살펴 본 후, 30분 정도 블럭 맞추기 게임을 한다. 그러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는데, 책을 읽고 나면 눈이 무척 아프다. '눈에 무리를 주는 일들만 했구나' 라며 눈 맛사지를 위해 눈을 감으면 앞이 깜깜하다. 그럴 때면 김재홍 목사님 생각이 난다. 눈 맛사지를 위해 잠시 어둠 속에 갇힐 때면, 이 어둠이 걷히지 않았을 목사님은 어떠했을까 하는 울컥함과 두려움이 몰려온다. 황급히 눈을 뜨고 내 눈이 멀지 않을 거라는 확신 속에서, 김재홍 목사님의 일은 나와는 먼 얘기라고 순간 안심하고 만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나의 눈이 멀게 된다면, 나의 몸이 불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 잠깐의 상상뿐이었지만, 그런 나와 맞설 자신이 없어 황급히 떨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갖었던 잠깐의 상상이 현실이 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서른 살의 나이에, 그것도 결혼한지 6개월 만에 베체트 병에 걸렸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한국은행에 다닐만큰 재원이었던 김재홍 목사님은 결국 시력을 잃는다. 시력만 아니었다면 앞길이 창창한 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슬픔은 뒤로 하더라도,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김재홍 목사님은 좌절한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 그때 불현듯 "자살 하면 지옥 간다" 라는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고 한다. 자살을 하는 대신 지옥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려는 생각으로 목숨을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목숨은 지켰지만, 산 목숨이 아니었고, 모든 것은 절망스러웠다.

 

  김재홍 목사님은 결혼 전, 자기 딸을 데려가려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장모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당장 몸이 아프고, 영이 흐트러지니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렸다. 성경 말씀 중 욥기가 위로가 될꺼라고 해서 말씀 테이프를 사다가 들었다. 김재홍 목사님보다 더 한 시련을 당한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 -욥기 1:21' 라고 고백했다. 목사님은 그런 욥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께만 위로를 받았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강원도 오지에서 생활을 할 때도, 눈이 멀어 버린 후에 하나님의 뜻을 받기 위해 기도할 때도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리고 사람이 깜깜한 일을 만나면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심과 부정, 분노, 수용, 재활. 목사님에게는 재활의 단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고, 3년간의 피눈물 나는 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치게 된다.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목사님의 시선에서만 씌여진 것이 아니라 사모님의 시선으로 씌여진 글을 발견할 수 있다. 목사님의 글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에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며, 이겨 나갔는지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보다 사모님의 글을 통해서 김재홍 목사님이나 가족의 고충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두 분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써 내려 간 글에서 고통을 읽을 수 있었지만, 목사님은 홀로 싸워야 했고, 사모님은 그 모든 것을 아울러야 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아이를 돌봐야 했고, 목사님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줘야 했다. 다니 던 학교를 그만 둘 수 없어, 야간반으로 옮기고 나머지 시간에는 목사님이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글을 읽을 수 없는 목사님을 위해 대신 레포트를 써야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무지 해나갈 수 없는 일을 사모님은 해나갔고, 목사님 또한 그런 사모님의 배려 속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다. 그 가운데서 도움을 받은 분들이 많았다. 작은 것에서 부터 큰 일까지 하나님이 그 가정을 돌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보살핌이 계속 되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무사히 마친 목사님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은 목사님을 받아줄 만한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신기할 정도의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처럼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해 목회를 해보는 것이 어떠겠냐는 하나님의 뜻이 들려왔다. 일년에 4 천명의 사람들이 사고로, 병으로 시력을 잃어 버린다고 했다. 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너 명에서 기도 모임을 갖고, 작은 출발을 시작했다. 많은 시련들이 있었다. 중도 실명자와 시각 장애인이 집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들을 데려오는 일, 그들을 먹이는 일, 봉사자를 찾는 일, 예배를 드리는 일부터 모든 것이 시련의 고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곳곳에 도움의 손길을 심어 놓으셨고, 지금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11대의 봉고차가 움직일 만큼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나에게 오는 책들은 대부분 사무실로 도착 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책을 펼쳐보는 곳도 사무실이다. 표지도 산뜻하고, 책도 가벼워 보여 잠깐 읽어볼까 하고 펼친 것이 퇴근을 하기 전에 다 읽어 버렸다. 그러나 사무실이여서 눈물을 참았지, 집에서 읽었더라면 왈칵 눈물을 쏟아낼 만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두 분의 글은 담담했고 그 세월을 이겨낸 분들 같지 않았다. 내가 가질 수 없는 평안함이 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왔기에 현재의 그 분들의 모습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통해서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고, 삶의 고통이 이렇게 치열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실재로 그 삶을 살아오신 분들은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했을 때의 그 막막함처럼, 글 밖에 감추어진 이면의 삶의 고통은 훨씬 컸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힘들고, 삶을 포기해 버리라는 뜻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라면 절대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난관. 그 난관 속에서 늘 우리를 지켜보는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사실을 잊고 있으면 산소망선교회의 존재의 기쁨을 잊게 된다.

 

  가끔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 하나님은 왜 꼭 사람들이 불행해져야 나타나냐고. 왜 사랑한다면서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냐고. 그런 이들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더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져버리는 질문이다.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지만, 인간의 불행과 행복을 일부러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어떠한 고통에 빠져 있을 때라도 먼저 다가와 주셔서 보듬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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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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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헉 완결도 아니고.. 그런데 프린트 된 사인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없어요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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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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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을 때 나의 모습은, 이틀 동안 감지 안은 머리를 돌돌 말아놓고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손가락으로 박박 긁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작가는 항상 안경을 걸치고, 절대 머리를 빗는 법이 없다.' 라는 문장과 마주쳤다. 어머니가 작가가 되겠다는 저자를 타이르자 저자가 작가에 대해 조사한 바를 나열한 첫 문장이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지만, 1960년대 초에 작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은 진지하면서도 우스웠다. 파울로 코엘료의 첫 산문집이라고 해서 약간 긴장하고 펼쳤는데, 프롤로그를 읽고 마음을 느긋하게 놔버렸다. 

 

  파울료 코엘료가 국내에 바람을 일으키기 전인 2002년 말에 <연금술사>를 읽었다. 나름 감명을 받아 다음 작품도 읽어보려 기억하고 있던 작가였다. 그러던 중 <연금술사>는 붐을 일으켰고,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저자에 관한 나의 관심은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언제 바람이 잦아지나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싸그리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선물 받지 못했다면, 여전히 구경만 하고 있을 작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연이 있는 작가의 책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편견을 섞지 않고 읽을 자신이 없었고, 작가와의 재회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냥 책을 읽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겠지만, 소소한 추억으로 간직해 오던 작가가 주목 받게 되면 나같은 소심한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런 사연이 있었으니,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앞에서 얼마나 수선을 떨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그동안 쌓아온 시샘과 편견이 간단히 무너져 버렸으니 허무했다. 소설이 아닌 산문이었기에 더 편안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으로 인해 저자와 나름 성공적인 재회를 일궈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저자가 겪은 일화,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일화와 전 세계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것들이라고 했다. 독자들의 요청으로 책으로 묶이게 되었다고. 이 책의 탄생 배경만 살펴보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저자의 책을 한 권 밖에 읽지 않은 상태였고, 공백기도 6년이나 되어서 그의 글이 어떻게 다가올지 무척 궁금했다. 조심스레 넘기는 종잇장들 사이로 펼쳐지는 저자의 내면. 타인의 이야기든, 들은 이야기든 저자를 거쳐 왔기에 그 모든 이야기는 저자를 통해 재조명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라면, 독자들은 그의 소소한 일상을 무척 궁금해 한다. 그의 일상을 느끼며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커다란 감회를 느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 독자들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출발했다. 자신의 삶은 서로 다른 세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같다던 저자는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의 일상으로 이끌었다. 일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만끽할 때와, 인터넷으로 세상과 연결된 자신을 비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저자. 잠시나마 그의 일상을 들여다 봄으로써 평안함을 느꼈다. 어떠한 글이 펼쳐지던지간에 책의 제목처럼 흘러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초반에 이 책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감지해서인지 모든 것이 순탄했다. 글을 써내려간 저자의 행위가 과거의 일이 되어 독자에게 전해지는 것도, 글을 읽고 또 다른 세계를 만끽하는 독자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랐다. 그러나 그 세계는 너무나 광활해서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를 잠재우지 못할 때도 있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저자의 이동 경로, 일상에서 내면의 깊은 곳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항해 때문이었다. 저자는 배 한 척을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배는 가끔 필요에 따라 목적지에 정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흐름에 맡겨졌다.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수 많은 이야기를 뱃전에 차곡차곡 실었다. 뱃전에는 많은 이야기로 넘쳐났다. 신비로운 이야기,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 감동과 기쁨이 밀려오는 이야기, 모호함을 던져주는 이야기 들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공통된 무엇을 찾는다기 보다는 다양한 삶의 잔상들로 인해 일순간 나이를 먹은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추억들을 모두 꺼내놓은 것 같았다. 그 추억들로 인해 나는 회한의 깊은 주름을 간직한 노인이 되어 갔다.

 

  저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에는 어떤 소리들이 났을까. 저자가 운행하는 배에 올라타기 전에 갖었던 온갖 잡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어느새 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 까지 바라볼 수 있는 심연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갈수록 염세주의적이 되어간다던 저자의 신에 대한 경외심이 그런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다른 신을 존중해 주려는 모습, 생각을 거듭해도 뜻을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로 통해 나의 눈은 깊어져 갔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더라도 저자가 펼쳐놓은 광활한 세계를 두루두루 살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 타인에게 들은 얘기들을 통해 저자는 여전히 삶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단란함을 떨치고 도전에 응하도록 우리를 충동질하는 힘때문에 삶의 의미를 좇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지상에서의 삶이 덧없다 할지라도 삶의 의미를 좇고 독자들에게도 일깨워주는 저자. 아주 오랜만에 만난 저자의 세계에 푹 빠진 느낌이었다. 저자와 나 사이에 긴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연금술사>처럼 신비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현실적인 이야기, 삶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 신비로움을 좇아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나의 욕망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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