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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책이 남겨준 여운을 어쩌지 못할 때는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게 된다. 책 내용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기도 하면서 현실 세계의 나와 책 속의 나를 하나로 만들어 보려 애쓴다. 책을 통해 받은 감정들 하나하나가 내 몸안에 박혀,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내 안을 떠도는 느낌. 오랜만에 신작을 발표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을 읽을 때가 그랬다. 책을 읽고 나니 새벽 3시였지만, 피곤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이 책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차고 뿌듯해 나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마주앉아 "왜 가네시로 가즈키 책은 나오지 않는 걸까"라고 푸념할 정도로 그의 책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막상 그의 작품이 나왔을 때는 아껴 읽고 싶어 구입을 늦췄지만,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을 골라 그의 책을 읽었다. 매일 가즈키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며 오도방정을 떨면서 꼭꼭 씹어 읽었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을 읽어 봤다면 이야기와 이야기가 이어지는 연결성을 매력을 알 것이다. <영화처럼>에서도 그런 연결이 약방에 감초 역할을 하듯 맛깔나게 버무려져 있었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연결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가 마지막 단편으로 인해 하나로 완성되어지는 묘미란. 이야기의 색깔은 제각각 달랐지만, 하나의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느낌은 그의 글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였다.
첫 단편 <태양은 가득히>를 읽었을 때 조금은 우울했다. 결코 밝지 않은 작가의 경험이 묻어나는 재일 일본인으로써 학창시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민족학교를 같이 다니던 용일이라는 친구와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자꾸만 엇갈리는 그들의 운명이 부정적으로 끝날까봐 조마조마했다. 도피처의 일환으로 액션영화를 즐겨보고, 느낌을 나누며 존재하지 않던 시나리오를 만들어 갔던 그들. 암울했던 현실만큼이나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은 방황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기다려온 것은 아니라며 씁쓸함을 떨칠 수 없었던 찰나, 그 둘을 이어 주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니 바로 영화였다. 순식간에 우울함에서 감동의 물결에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저자는 이틀 동안 용일이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고 고백했다. 책이 주는 여운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 깊은 밤에 생각에 빠졌던 나처럼 말이다.
두번 째 단편 <정무문>도 밝지 않았다. 남편의 자살로 인해 고모토는 여러 달 동안 집안에서 지낸다. 그러다 비디오 대여점으로부터 남편이 자살하던 날 빌려간 테입을 반납해 달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로 인해 나루미라는 청년과 만나게 되고, 고모토는 그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나루미로 인해 수 많은 영화를 접하게 되고, <태양은 가득히>에서 용일이가 삶의 전환을 갖기 전에 본 <로마의 휴일>을 두 사람도 보게 된다. 그러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우연히 나루미가 가져오게 된다. 반전을 예감하듯, 다음 단편에서의 연결을 기대 시키듯, <정무문>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세번 째, 네번 째 단편은 앞의 이야기와 분위기가 조금은 달랐다. 사랑과 복수가 뒤얽힌 내용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비슷할지 몰라도, 아버지의 차와 돈을 훔친 <프랭키와 자니>는 소재가 조금은 자극적이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지 못한 돈, 아버지의 부정을 지켜봐 왔더라도 고등학생인 그들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던질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십대의 감성과 고민을 잘 엮어 내었고, 영화를 소재로 풀어냈음은 물론 <정무문>과의 연결도 잊지 않았다. 그들 역시 <로마의 휴일>을 보게 되고, <페일 라이더> 주인공들도 예외가 아니였다. 조직폭력배의 살해 현장을 우연히 보게 된 평범한 한 가족은 해를 입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은 여인은 복수를 하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우연히 엄마 아빠의 이혼으로 혼란을 맞이하게 된 소년과 만난다. 가족을 잃은 슬픔, 복수, 부모의 이혼이 뿜어내는 여운은 고통이었다. 끝까지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프랭키와 자니>처럼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소재라 하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상처를 맛봐야 했던 아픔 같은 것이었다.
네 편의 이야기속 인물들은 동일한 장소에서 상영하는 <로마의 휴일>을 보게 된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각자의 색깔을 내뿜으며 연결의 고리를 끊지 않던 이야기의 종착역은 마지막 단편 <사랑의 샘>이었다. 모든 단편에 나오는 <로마의 휴일>이 어떻게 해서 상영이 되었는가에 대한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었다. 앞의 단편들을 아우르고 있었기에 궁금증 해소와 함께 최고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우정, 사랑, 복수 등 인생의 여러가지 맛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면, <사랑의 샘>에서는 가족간의 정이 끈끈히 배어나는 분위기라고 말하고 싶다. 할머니의 건강 악화로 인해 네명의 손주들이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찾으며 드러나는 에피소드는 웃음과 사랑, 정이 있었다. 새벽까지 읽어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하게 한 작품이기도 했고, 영화로 인해 맺어진 사연들 중에서 가장 따뜻한 사연이었다. 혼자서 킥킥 대기도 했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으며, 뿌듯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의 휴일>이 상영되던 날, 앞서 만난 단편의 주인공들이 하나하나 등장할 때의 만족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영화처럼>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모두 영화같은 내용이었다. 영화를 소재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어 기다린 보람을 느꼈다.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애환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어 더 끈끈함을 느꼈다. 그 감정을 주제하지 못해 책을 읽자마자 <로마의 휴일> DVD를 주문했고, 도착한지 한참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시작된 나의 이야기가 <로마의 휴일>을 보고 나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랄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로마의 휴일>을 필두로 한 수 많은 영화가 떠다니는데, 그 영화를 접하고 나면 이 이야기가 잊혀져 버릴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느꼈던 이 벅찬 감정들이 희미해 질 때쯤 DVD를 꺼내 보려고 한다. 그때쯤이면 새벽녁의 주체할 수 없었던 기분도, 책 속의 사연들도 또렷하게 되살아 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