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꿈을 꾸었다. 나는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거쳐 온 기분이었다. 꿈을 꿨다 생각하니 내 주변이 낯설긴 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현실감에 적응해 가고 있을 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꿈을 꿨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던 책, <표류>였다. 기나긴 사투가 담긴 이 책을 꿈이라고 우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 남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지극한 현실이었다.

 

  책을 열기 전에 지은이가 바다 위에서 76일을 표류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비극을 맞이할 필요도 업었고, 망망대해에 구명선과 한 남자를 띄워놓고 책을 읽기만 하면 되었다. 결말을 알아서인지 저자가 걱정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서툰 배에 관한 용어라든가 바다에 관한 이야기, 매끄럽지 않은 문체 앞에 토를 달며 어서 결말이 다가오기를 바랐다. 나 역시 위험한 레이스에 나간 저자가 이해되지 않았고, 저자의 배 솔로 호가 침몰했을 때까지도 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저자가 처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지에 대한 궁금증 밖에 없었다. 솔로 호가 침몰한 순간부터 76일을 꼬박 채우기까지 그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 진부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저자에게 처해진 위기가 단순한 경험담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상어들이 공격을 해 대는 밤이였을까. 구명선의 바닥이 구멍이 날 때 였을까. 아니면 물고기 사냥에 실패해서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던 날이였을까. 그런 처절함 때문에 위기를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에서 였다. 어떻게 76일을 버틸 수 있었냐는 질문에 '죽는 것보단 그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던 저자는 표류 기간 동안 늘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해버려도 어느 누구하나 탓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저자는 살아남았다. 바다에 대한 지식이 일반인 보다 나았다 하더라도 순간의 대처능력과 자신을 타이르는 법, 자제하는 법을 터득했기에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만새기를 잡아 먹으며 목숨을 연장했고, 증류가 되다 만 바닷물을 마시며 버텼다. 절망이 그를 심해 바닥까지 끌고 간 날도 많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섣불리 앞날을 지레짐작 하지 않았다. 이 책에 씌여진 시간 외에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저자의 고통, 외로움, 두려움이 충분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의 구조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당면한 하루하루를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구조되는 날이 다가올수록 그에게 힘을 내라는 고요한 외침보다 먹먹한 것이 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인간의 극한 상황에서의 모든 면을 서슴없이 보여 주었기에 그동안 함께 표류를 했던 시간들이 하나의 설움으로 다가왔다. 그 설움의 극에는 만새기가 있었다. 만새기는 고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지만 툭하면 보트 바닥을 들이 받고, 작살을 피해 갔으며 저자를 조롱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구조를 돕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런 만새기를 저자는 친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명선을 따라다니는 만새기 한마리 한마리를 구별할 정도로 서로의 사정을 알았기에 살상을 저지르는 것조차 저자는 두려워 했다. 그렇게 지내온 만새기들이 어부들의 눈에 띄었다. 갈매기들이 구명선 위를 멤돌았고 구명선 아래에는 저자와 긴 시간을 함께 해 온 만새기 떼가 있었다. 그리고 물고기를 찾아 온 어부들이 구명선을 발견했을 때의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서슴없이 어부들의 배에 낚여가는 신세가 되었다.

 

  만새기 이야기는 저자의 경험에서 일부분을 차지 한다. 그보다 더 큰 발견은 항해를 통해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은 자신의 이야기라기 보다 바다의 신비와 마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표류기간 동안 펼쳐지는 현실은 혹독하면서도 장엄했다. 경험보다 값진 깨달음은 없다고, 저자는 그 후의 삶이 달라졌다. 자신의 경험이 뭍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기쁠거라는 말 뿐이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저자에게 처해졌던 위기를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다 위에서 보냈던 76일의 사투를 통해 단순한 동행이 아닌 또 다른 삶을 경험한 것만은 분명하다. 위대한 자연 앞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아준 저자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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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읽은 책


 
 
1. 잘 되는 나 - 조엘 오스틴
2. 탐서주의자의 책 - 표정훈
3. 사랑하기 때문에 - 기욤 뮈소
4. soli's cartoon grammar - daniel E. Hamlin, 옥문성
5. 지구 끝의 사람들 - 루이스 세풀베다
6. 감상적 킬러의 고백 - 루이스 세풀베다
7.  모비 딕 - 허먼 멜빌
8. 배고픔의 자서전 - 아멜리 노통브
9. 해저 2만리 1 - 쥘 베른
10. 복덕방 - 이태준
 
----------------------------------------10권
 

2월에 읽은 책
 
 
11. 창조적 디자인 경영 - 이병욱
12. 하나님의 휴식 - 마크 부캐넌
13. 힐링 다이어리 - 샌디 그레이슨
14. 조지 뮬러의 기도 - 조지 뮬러
15. 숲 속 수의사의 자연일기 - 다케타즈 미노루
 
----------------------------------------5권
 
 
3월에 읽은 책

 

 

16. 몰입 - 황농문

17. 조용한 믿음의 힘 - 토니 던지

18.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 곤살로 모우레

19. 문제아 - 제리 스피넬리

20. 리버보이 - 팀 보울러

21. 해저 2만리 2 - 쥘 베른

22.~23. 아더와 미니모이 3,4 - 뤽 베송

24.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석영중

25. 스타시커 1 - 팀 보울러

 

--------------------------------------10권

 

 

4월에 읽은 책

 

 

26. 스타시커 2 - 팀 보울러

27. 여름이 준 선물 - 유모토 가즈미

28. 내 생애 최고의 축복 3:16 - 맥스 루케이도

29. 사랑에 관한 연구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30.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에모토 마사루

31. 리처드 용재 오닐의 공감 - 리처드 용재 오닐

32. 완득이 - 김려령

33. 마시멜로 두 번째 이야기 - 호아킴 데 포사다, 앨런 싱어

34.  바다 바다 바다 - 샤론 크리치

35. 나폴레옹 놀이 - 크리스토프 하인

36. 아르네가 남긴 것 - 지크프리트 렌츠

37. 성과 이성 - 리차드 포스너

38.  귀향 외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39. 착한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 박경철

40. 안데스의 비밀 - 앤 놀란 클라크

41.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 존 버거

42. 열세살 로즈의 아주 특별한 일년 - 루이자 메이 올컷

 

---------------------------------------------17권

 

 

5월에 읽은 책

 

43. 어린왕자 - 생텍쥐페리

44.~45. 인연 1,2 - 정찬주

46. 최후의 끽연자 - 츠츠이 야스타카

47. 젊음의 탄생 - 이어령

48. 닥터 코페르니쿠스 - 존 반빌

 

----------------------------------------------------------- 6권

 

 

6월에 읽은 책

 

49. 책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

50.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존 버거

51. 지킬 박사와 하이드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52. 하늘에 있는 나의 집 - 맥스 루케이도

53. 네가 어떠한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공지영

 

--------------------------------------------------------  5권

 

 

7월에 읽은 책

 

 

54. 그리운 메이 아줌마 - 신시아 라일런트

55.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

56. 소녀, 소년을 만나다 - 알리 스미스

57. 여행할 권리 - 김연수

58.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59. 이스탄불 - 오르한 파묵

60.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 호어스트 에버스

61. 행운아54 - 에프라임 키숀

 

--------------------------------------------------------- 8권

 

8월에 읽은 책

 

 

62. 사랑이라니, 선영아 - 김연수

63. 스쿼시 - 팀 보울러

64. 아르갈의 향기 - 이시영

 

 

---------------------------------------------------------3권

 

 

- 8월은 정말 독서를 거의 하지 못했다.

최근 3년 동안 책을 이렇게 적게 읽어본 달은 처음인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독서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좋기도 하지만...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그건 좀 미안하다.

게으름의 절정에서 8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올림픽에 정신 팔려 있었고, 휴가에 더 손을 놔버렸고, 덥다고 징징댔으니..

이렇게 적게 읽었다.

9월도 책 보다는 내가 먼저 해야 할 것들에 중점을 둬야 겠다.

그러나 해야 할 독서까지 미루는 것과, 아무 생각없이 책을 쌓아 두는 일은 자제 해야 겠다.

 

 

 

2008년도에 생긴 책
 
 
280.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다카하시 겐이치로

281.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 팔란티리 2020
282. 톨스토이의 비밀일기 - 톨스토이
283. 목마름 - 맥스 루케이도
284. 설타누나, 나의 멘토가 되어줘 - 설보연
285. 꾸르제뜨 이야기 - 질 파리
286. 악인 - 요시다 슈이치
287. 서진규의 희망 - 서진규
288. 날아라,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 - 윤무부
289. 영광의 왕과 마주치다 - 제임스 w. 골, 마이클 앤 골
290. 소외 - 루이스 세풀베다
291. 귀향 - 루이스 세풀베다
292. 섬 - 장 그르니에
293. 태양의 여행자 - 손미나
294.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명권
295. 디지로그 - 이어령
296.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 박경철
297. 셰익스피어는 없다 - 버지니아 펠로스
298. 안녕이라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299.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300. 아이반호 - 월터 스콧
301. 돈키호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302. 80일간의 세계일주 - 쥘 베른

303.~304. 15소년 표류기 1,2 - 쥘 베른


305. 잡식동물의 딜레마 - 마이클 폴란

306. 잘 풀리는 여자 스타일 - 신영란

307.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 히라노 게이치로

308.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더글러스 애덤스

309. 약이 되는 독 독이 되는 독 - 다나카 마치

3103. 가스등 이펙트 - 로빈 스턴

311~312. 타임슬립 1,2 - 오기와라 히로시

313.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도종환

314. 나를 벗겨줘 - 까뜨린느 쥬베르

315.~316. 콜레라 시대의 사랑 1,2 - 가르시아 마르케스

317. 성공미학 - 이지수

318. 국어랑 한자랑 같이 공부해 - 정우상

319.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마츠오 바쇼

320. 2008 열린책들 매뉴얼 - 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321. 클래식 인생 변주곡 - 윤미숙

322. 건강한 생리 - 조연경, 김경숙

323. 카라바조 - 질 랑베르

324. 질문상자 - 다니카와 슌타로

325. 낭만과 모허의 고고학 여행 - 스티븐 버트먼

326. 시각의 의미 - 존 버거

327.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 - 마르틴 우르반

328. 테메레르 4 - 나오미 노빅

329.  롤리타 - 블라지미르 나보코프

330. 고흐보다 소중한 우리미술가 33 - 임두빈

331.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 캐슬린 에릭슨

332. 외면 - 루이스 세풀베다

333. 스무살 도쿄 - 오쿠다 히데오

334. 종소리 - 신경숙

335. 19세 - 이순원

336.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 오영욱

337. 그림에 마음을 놓다 - 이주은 

338.~339. 장외인간 - 이외수

340. 최초의 인간 - 알베르 카뮈

 

341. 삿뽀로 여인숙 - 하성란

342. 우울한 얼굴의 아이 - 오에 겐자부로

343. 책이여, 안녕 - 오에 겐자부로
344. 부활 - 레프 니꼴라예비치 톨스토이
345. 코코 샤넬 - 앙리 지델

346.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 루이스 세풀베다

347. 꾿빠이, 이상 - 김연수

348. 그늘의 집 - 현월

349.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아스트리드 트롯찌

350. 우동 한그릇 - 구리 료헤이

351.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352. blessing of the rainbow(무지개 원리) - norbert d.y.cha

 

 

 

353.~358. 배터리 1~6 - 아사노 아쓰코

359.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 정끝별 해설

360.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 황정은

361. G - 존 버거

362. 가재미 - 문태준

363.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모리미 토미히코

364. 표류 - 스티븐 캘러핸

365. 88만원 세대 - 우석훈, 박권일

366.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 박준

367.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 - 오쿠다 히데오

368. 책 읽어주는 여자 - 레몽 장

369. 청년의사 장기려 - 손홍규

370.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이윤기

371. 청혼 - 이응준

372.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 이응준

373. 까트린 이야기 - 빠트릭 모디아노

374. 하루하루가 이별의 나날 - 알랭 레몽

375. 자유의 감옥 - 미하엘 엔데

376. 색, 샤라쿠 -  김재희

377.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이호준

378. 권정생 - 이원준

379. 슈크림 러브 - 나가시마유

380. 아픔의 기록 - 존 버거

381. 체실 비치에서 - 이언 매큐언

382.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 신정일

383. 가슴 뛰는 삶 - 강헌구

384. 다도 - 이기윤

385. 설탕사원이 회사를 녹인다 - 다키타 유키코

386.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387.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클레이 서키

 

 

- 8월 한달 동안 생긴 책은 총 28권의 책이 생겼다.

내가 구입한 책은 7권이고...

그 중에 네권은 헌책방에서 구입한거라 저렴하게 구입했다.

절대 절대 절대.. 읽은 책이 생기는 책을 따라 잡을 수 없구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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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9-02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이 생기는 책을 따라 잡을 수 없다에 동감.^^

안녕반짝 2008-09-0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권 생겼는데 3권 읽었어요..ㅠ
 
아르갈의 향기 - 황금이삭 2
이시영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지인과 밥을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지인이 시 한편을 들려 주었다.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서정주가 술자리에서의 에피소드를 다룬 시였는데, 어찌나 우습던지 그 시가 실린 시집을 사달라고 했다. 그 뒤로 잊어먹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책이 한 권 배달되어 왔다. 전에 말했던 시가 든 시집을 찾았다며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아아, 감동의 물결. 내가 흘린 말을 주워 담아 깜짝 놀래주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하루르 살아가는 힘을 얻곤 한다. 그 시집이 바로 <아르갈의 향기>이다. 책을 받자마다 지인이 얘기해 주었던 시를 찾아 보았다. <젊은 동리>라는 시였는데, 직접 읽고 나니 젊은 동리와 젊은 미당이 술자리에서 대화했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라 오랜만에 시를 읽는 즐거움에 빠지고 있었다.

 

  시 한 편 때문에 시집을 사 본게 얼마만이던가.  한 곡의 노래가 좋아 음반을 사본적은 자주여도 시 한 편 때문에 시집을 사본 적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내가 직접 산 시집은 아니지만). <젊은 동리>를 여러 번을 읽고 나니 남은 건 다른 시였다. 깊은 밤, 창문을 열고 가을이 오는 냄새를 담뿍 맡으며 <아르갈의 향기>를 펼쳤다. 아르갈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던 차였는데, 책을 펼치자 마자 아르갈의 정체가 드러났다. 몽골에서 귀한 연료로 쓰이는 말린 쏘똥이 아르갈이었다. 한참 가을 향기를 만끽하며 시를 느끼려 하던 내게 소똥이 아르갈이라고 하니, 잠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tv에서  아르갈이 어떻게 쓰이는지 본 기억이 있어 그 향기가 고약할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서문에서 시인이 말했듯이 저녁 무렵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려 온 몽골 소년들은 어머니의 겔에서 피어오르는 이 연기를 보고 지극한 평화를 느낀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린시절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 저녁 먹으라고 악다구니를 쓰던 엄마가 무서워 부리나케 달려가면서도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저녁밥 짓던 연기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그런 것이 아닐까.

 

  아르갈을 알고, 엄마를 떠 올리고, 어린시절을 좇다보니 추억이 더 또렷해진 느낌이다. 시인 또한 고향인 전남 구례의 이야기며, 지인들의 이야기로 시를 채워가고 있었기에 추억의 농도는 짙어지고 있었다. 지금껏 어려운 시를 많이 접해서인지 서정시를 오랜만에 대하는 나도 즐거워졌다. 시인에겐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이시영 시인의 시를 읽고 있자니 시인의 안목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 놓기도 하고, 주변에서 들은 얘기를 시로 풀어 놓기도 한다. 시인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시를 옮기거나, 시대에 관한 시들은 종종 나의 이해력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다시 곱씹어봐도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땐 멍하니 시를 바라보며 무슨 뜻일까를 생각하며 멍하게 있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좋았다. 읽힘으로 따지자면 금방 읽어 버릴 수 있는게 시다. 그 안에서 시인의 의도를 알아채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더라도 그게 시를 읽는 과정안에 포함된 매력이다. 내가 이시영 시인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잠시나마 고민하는 시간이 그래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시를 쓰는 건 제쳐두고라도 시를 읽는 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멋모르고 시가 좋다고 시를 읽어대다가 어느 순간 시의 높은 경지를 깨닫고 나니 그 전처럼 자유롭게 시에 다가가지 못한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시집을 만날 때면 내가 시를 좋아하던 시절로 들어가게 된다. 내 주변의 이야기들, 혹은 다른 사람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런 일이 자유로운 것이 서정시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가을로 접어드는 초입에 이시영의 시를 읽었던 것이 기대 이상으로 다가왔다. 시는 깊은 밤에 읽어야 제맛이 나고, 초가을에 읽어야 찰지듯이 한껏 물이 오를 때 만난 시는 포근했다. 시인의 모든 경험과 내면 세계가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경험들이 모두 내 것인양 나를 대입 시켰던 밤이었다. 한 편의 시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된 시인. 시를 통해 계절을 느꼈고, 시를 통해 깊은 밤이 정적을 알았던 시간. 시를 읽었기에 하룻밤의 꿈일지라도 행복했던 밤이었다.

 

 

 

 

젊은 동리

 

                      - 이시형

 

 

 

  술이 거나해지자 젊은 동리가 젊은 미당 앞에서 어젯밤에

잠 아니와서 지었다는 자작시 한 수를 낭송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 미당이 들고 있던 술잔을 탁 내려놓

고 무릎을 치며 탄복해 마지 않았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

는 것을......이라. 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컸

다. 그러자 동리가 그 대춧빛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꾸했

다. "아이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이다." 미당이 나머지 한 손으로 술상을 쾅 내리치면서 소리

쳤다. "됐네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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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쿼시 - 그림자 소년, 소녀를 만나다
팀 보울러 지음, 유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가면서 나에게 닥칠 아픔을 예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나로 인해 상처받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챌 수 있다면 말이다. 내 곁의 사람들에게 나는 어떠한 사람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한 남자의 독선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가정을 얘기하고 싶어 미래의 한 부분을 알고 싶다고 떼를 써본다.

  제이미는 스쿼시를 좋아하는 16세 소년이다. 스쿼시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쿼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소질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제이미는 스쿼시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기 성적도 부진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숨 막혔다. 스쿼시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갔다. 아버지는 승부만을 강요했고, 제이미를 무조건 몰아 붙였다. 힘든 훈련과 경기를 마치고 와도 독선적인 아버지와 늘 불안한 어머니가 있는 집이 제이미는 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있고 싶을 때 찾아가는 창고가 제이미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 날도 제이미는 아버지의 오해로 꾸중을 듣고 창고로 향했다. 그러나 자신만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창고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제이미 또래의 소녀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불룩한 배가 불편해 보였고, 힘겨워 보였다. 제이미의 심정도 여의치 않았지만, 그 소녀에게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제이미의 도움을 철저히 거부했고 방어만 하고 있었다. 그런 소녀에게 제이미는 자꾸만 마음이 씌였다. 도움을 주고 싶었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 소녀를 보고 있자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생각보다 위험에 처해 있었고, 제이미의 상황도 점점 나빠져 가고 있었다.



  무엇이 제이미를 궁지로 몰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승부욕은 도를 지나쳤고, 스쿼시에 흥미를 잃어가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답답했다. 거기다 자신의 창고에 몰래 기거 하고 있는 소녀의 일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 제이미는 온 세상의 짐을 떠 맡은 듯 하다. 어디로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현재의 자신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찼다. 어느 것 하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고, 소녀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재 처해진 상황을 해결방법이라기 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스스로 그림자라고 자처한 소녀는 세상으로 나가기를 권유하지만 제이미에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꾸만 조급해 지는 마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제이미는 결국 집을 나가기로 결심 한다. 소녀가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 머무를 곳까지만 따라가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소녀를 쫓는 사람들에게 맞기도 하고, 친구에게 큰 돈을 빌리기도 하고, 스쿼시를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제이미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기로 한다. 처음으로 제이미는 숨막히는 자신의 생활에서 빠져나와 소녀와의 동행을 감행한다.

 

  제이미가 결정한 행위의 이면을 제이미 자신이 볼 수 없는게 당연하다. 학교에서, 집에서,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기에 현재의 자신을 밀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알아 가는 것, 자신 곁에 있는 소녀를 도와주는 것이 제이미에게 처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이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감당해야 할 상처는 더욱 더 커져 버렸다. 독자도 제이미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반전이었기에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꼭 이렇게까지 아프고 힘든 상처를 들쑤셔야 했을까 하고 작가를 원망해 보기도 했다. 소녀가 제이미에게 풀어놓은 사실들도 충격이었지만, 제이미가 감당해야 할 마음의 상처가 두려웠다. 도피성 가출을 했지만 제이미가 얻은 것보다 잃어 버린 것이 더 커보였다. 그 일로 인해 아버지는 달라졌다. 제이미도 치열한 성장통의 과정을 거쳐면서 달라졌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팀 보울러의 책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다. 그러나 저자가 펼쳐놓은 세계는 치열했다. 십대들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깊이 파고든 이번 작품에서는 피하고 싶었던 주제들을 많이 만났다. 부모의 욕심, 임신, 돈,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십대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냈기에 우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동안 십대들의 문제를 알면서도 그들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피해버리고 색안경을 끼고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내면을 정면으로 파고든 저자의 역량에 힘을 더해주면서도 극단적인 방법 밖에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안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현재의 나를 피할 수는 없더라도 다가올 미래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픈 마음. 제이미의 아버지로 인해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치뤄야 할 댓가였다. 각자에게 문제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인정하고 헤쳐 나갈 때에 진정한 가족이 될 거라 생각한다. 제이미의 아버지는 새로운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고, 제이미도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가식적인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치열한 십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현재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중점이지만 곁에는 더 소중한 사람들이 있노라고. 그리고 그 고통을 충분히 보듬어 줄 사람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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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 때문에 김연수 소설은 어렵다 생각해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집어든 소설은 <꾿빠이 이상> 이었고 역시 녹록치 않아 소문의 진상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읽고 나니 김연수 소설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련함을 느끼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들이 나를 파고들어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다.
 

  책의 시작은 우울했다. 기뻐야 할 결혼식임에도 신랑 광수는 자꾸만 신부 선영이 들고 있던 부케의 꽃대에 집착한다. 한 때 선영의 애인이었던 진우가 결혼식 직전, 선영의 곁에 머문 뒤로 꽃대가 꺽였다 생각한 광수는 그 꽃대를 시작으로 자신과 광수, 선영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더불어 질투어린 시선과, 의심까지도 서슴없이.

 

  책 제목과 세 주인공의 얽힘을 알았을 때, 나만의 스토리는 이미 구축되었다. 소설을 많이 읽었다는 자신감으로 선영과 진우의 관계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나는 지지부진한 시선을 던졌다. 광수의 우울한 고백에서 복선을 만났다 생각했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쫓는 것이 흥미롭지 않았다. 질투와 의심으로 얼룩져 가는 광수를 보는 것이 안쓰러웠고, 사랑에 관한 정체성의 모호함을 잔뜩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나같은 단순한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독특하게 풀어 나갔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중점에는 광수가 있었기에 주인공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니 주인공은 광수도 아니었고, 진우나 선영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은 교묘히 섞인 사랑의 요소 역할에 충실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주요 인물에게 세세히 박아 놓은 작가의 사랑관이 눈길을 끌었다. 광수를 중심으로 점철되어지던 사랑관이 선영과 진우를 통해 새롭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혼한 선영의 곁을 멤돌면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외치며 광수의 존재를 생각해 주지 않은 진우. 진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흔들림을 발견했다 믿는 남자 광수.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주입시키는 것 같은 여자 선영. 이 셋의 모습은 또렷했다. 그리고 셋이 만들어 내는 사랑은 환상이라곤 존재 하지 않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었다. 그래서 선영의 고백에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되묻는 광수가 당황했던 것일까.

 

  저자는 마치 언어의 유희를 즐기듯 그들의 이야기 속에 생소한 어휘를 펼쳐 놓기도 한다. 세 사람의 사랑과 맞물리듯 펼쳐지는 생소한 어휘들은 현재와 발견되지 못한 세계를 가늠하듯 맛깔나게 버무려지고 있었다. 저자가 펼쳐놓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은 세 인물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저자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라고. 그들은 사랑을 찾아 헤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기에 헤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저자의 사랑관이 녹아 있는 주인공들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구축시키는 것. 구축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점검해 보는 것. 그것이 저자가 연애소설을 쓴 이유가 아닐까. 책 곳곳에 시대의 패러디를 해 놓은 저자의 의도는 어쩌면 타인의 사랑을 쫓지 말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니, 선영아에 자신의 이름을 대입시켜서 생각해 보길 바란다. <사랑이라니, 선아야>. 아주 어색한 제목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랑 얘기가 펼쳐질 것 같아 조금은 두려워 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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