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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54
에프라임 키숀 지음, 이용숙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7월
평점 :
요즘 들어 자신감이 너무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무엇에 대한 자신감이냐고 상대방에게 묻기도 전에 나는 의기소침 해지고 말았다. 학창시절부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비하하기 바빴고, 누군가 나를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당황스러워 하며 늘 부정만 했다. 그렇다보니 내게 따끔한 충고라도 들려오는 날에는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 앉아 버리고 마는 고질병을 달고 살고 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소리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다가도 교만과 자신감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해 헤메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심한 자책감 속에서 살고 있는 딱한 남자를 알게 됐다. 젊다고 할 수 없는 50대 중반 줄에 접어드는 그에겐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고, 삶의 의미조차 찾을 수 없는 무기력감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의 처지를 놓고 그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지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누어야 할지 심하게 헷갈렸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어 놓았을 법도 한 50대의 칼 뮐러는 현재 최악의 상황이었다. 희미하게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삼류배우라는 딱지도 사라져 버리고 지금껏 그래왔듯 교사인 아내 힐데에게 빌붙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배역을 주지 않았고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TV속 미녀 배우를 상상 속으로 가두곤 했다. 한마디로 존재감 없이 생활을 유지해 가는 중년의 사내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일거리가 생긴다. 유명 영화제작자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칼 뮐러를 캐스팅 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듣고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중요배역이긴 하지만, 좋은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수락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틈도 없이 아내와 자신의 에이전트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다른 배우의 변덕으로 칼의 역할은 바뀐다. 미녀 배우 카를라의 남편 역할에다 베드신도 있었다. 하지만 첫 촬영은 끔찍했다. 무명배우에다 별 볼일 없는 자신을 모든 사람이 무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카를라는 더 심했다. 카를라는 자신의 몸에 손이라도 댈까봐 마치 벌레보듯 칼을 대했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대사도 똑바로 외우지 못하고 형편없는 촬영을 끝낸 칼은 다시는 그런 촬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역할은 칼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칼은 자신이 찍은 미니시리즈가 절대 방영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의 생각과는 다르게 엉망으로 찍은 미니시리즈는 방영이 되었고, 다음 날 칼은 엄청난 스타가 되어 있었다. 대사를 제대로 읊지 못해 느낌대로 하라는 영화감독 말대로 한 것인데, 많은 시청자들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지금껏 그런 연기는 본 적이 없다는 비평가의 리뷰는 칼을 더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때부터 칼의 운명은 달라진다. 계단에서 울고 있던 우울증에 걸린 무병배우 칼이 아니라 혜성처럼 등장한 최고의 배우가 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언론의 농간으로 하루 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그의 모든 행동과 언행을 부풀려서 생각하고 말하며,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쓴다. 주변 사람들이든 언론이든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조차 칼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온다. 칼의 인기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이익을 보려는 무리들인 것이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인기에 칼 자신 조차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많은 혼란이 야기 되고 있었다. 카를라 조차도 칼에게 은밀하고 다가오고 있었으니 칼은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그가 힘들거나 고민을 하다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윗층에 사는 심리학자가 건네 준 책에서 방법을 찾곤 했다. 스포크 박사의 '남편과 남성들의 상식'이라는 책이었다. '결혼한지 108개월이 지난 남자들은'으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글은 칼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곤 했다. 칼 스스로가 짜맞추기를 해서 억지로 해결책을 찾는지는 몰라도 칼이 당면한 상황과 그 책은 묘하게 맞물리고 있었다. 카를라와의 만남 속에서도, 아내에 대한 감정도, 자신을 버겁게만 한 인기 속에서도 그는 스포크 박사의 책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을 나름대로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인기인이 된 그를 사람들은 가만 두지 않았다. 왜곡된 사실로 스캔들을 터트리는 여기자,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딸, 인기에 따라 변덕스러운 감독과 언론들. 상황은 갈수록 최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언론의 농간에 얻게 된 인기였고, 그로 인해 펼쳐진 상황이였으므로 그가 내리막길을 걷는 건 순식간이었다. 언론의 조작으로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칼은 그렇게 얻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진짜 행운의 반전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얽혀 갈 때, 의외의 방법으로 그에겐 물질의 평화와 일상의 평온함이 찾아온다. 더불어 카를라와의 관계까지도.
한 남자의 운명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에 놀라워 하기도 전에 책 속에 흩뿌려진 풍자 분위기에 어쩔줄을 몰랐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세태는 주인공의 내면속으로 들어가서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그의 심리를 통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저자가 이끄는 대로 나 또한 주인공 처럼 끌려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울함으로 점철되어 지지 않는 주인공의 태도라고나 할까.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거나 깊은 고민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난국을 헤쳐나가려는 의지는 있었다. 그 의지를 빌미로 삼아 웃지못할 상황을 만들어 가는 저자의 유머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았다고 말하고 싶다. 억지를 써서 절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을 농간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커다란 악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독자였으며, 그에게 닥친 운명으로 인해 세상의 오류를 철저하게 맛보았다. 칼이 스포크 박사의 책에 메달렸던 이유가 어쩌면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잃어 버려 의지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현대의 우리는 너무나 나약하고, 의지박약이며 쉬운 방법으로 인기를 얻으려는 기질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풍자 작가로 알려진 에프라임 키숀의 소설을 통해 내 자신의 위치를 점검해 보며, 세태에 찌들여 살지는 않았는지 한번 쯤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을 읽는 묘미가 더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