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스의 비밀 시공 청소년 문학 2
앤 놀란 클라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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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청소년 문학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읽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작품이라도 청소년 문학에다  아동문학상인 뉴베리 수상작이라고 하면 관심을 더 갖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한참 불타오르는 청소년 문학에 더 불을 붙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책을 덜컥 사온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청소년 문학처럼 흡인력 있게 읽어지지 않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기 보다는 잉카 인에 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읽는 것이 녹록치 않았음은 물론 낯선 잉카문명에 대한 이질감을 떨치지 못해 곤역을 치루기도 했다.
 

  쿠시는 추토 노인과 함께 라마를 기르며 살고 있다. 쿠시가 사는 곳은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였고, 사람이 드문 곳이라 어린 쿠시 외로웠다. 하지만 자기 곁에는 듬직한 추토 할아버지와 라마, 그리고 거대한 자연이 있었기에 쿠시는 현재의 생활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며 살았다. 단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가족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은 채 말이다. 그런 쿠시의 마음은 산 아래 인디오 가족을 지켜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단란해 보이는 가족은 땅을 일구며 살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쿠시도 불행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추토 할아버지, 라마들로 이루어진 구성원 보다는 산 아래 인디오 가족이 더 단란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추토 노인이 쿠시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간다. 고지대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쿠시는 그 여행이 설레면서도 궁금했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았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가움이 앞선다. 그러나 친구를 사귈 틈 없이 쿠시는 추토 할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물물 교환도 하고, 소금을 만들어서 오는 등 피곤한 날을 보냈다. 처음에 갖었던 호기심은 어느 새 사라진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사랑하는 라마들을 돌보며 자연 앞에서 자유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 여행을 통해 쿠시는 많은 것을 깨달아 갔지만, 그래도 추토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지혜, 할아버지가 행하는 의식, 할아버지가 읊조리는 것들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다. 자신의 태생에 대한 궁금증,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연함은 할아버지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깊어져 갔다.

 

  그런 쿠시를 잘 아는 것은 추토 할아버지였다. 추토 할아버지는 큰 결심을 한 듯, 쿠시를 떠나 보낸다. 라마들을 데리고 도시로 나가게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추토는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지만, 감흥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의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여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혼자서 하는 여행임에도 라마들이 있어서 두렵지 않았고, 도시에서 가족의 구성원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나 보기도 하는 큰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여행이 되었다. 쿠시는 그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추토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한다. 그런 쿠시를 받아들이는 추토 할아버지는 쿠시의 태생에 대해 말해 주고 태양을 향해 의식을 치룸으로써 쿠시를 잉카 제국의 부활을 여는 새로운 사람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상상하지 못한 채, 청소년 문학이라고만 생각하고 읽었기에 흡인력 있게 다가오지 못한 내용에 투덜거리만 했었다. 그랬기에 책을 읽고 나서도 책의 흐름을 매끄럽게 감지할 수 없었다. 옮긴이의 글을 통해  에스파냐의 침략으로 무너져 버린 잉카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잉카족이 에스파냐를 상대로 싸울 시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배경을 알고 나니 그제서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건함이 묻어져 나왔다. 그런 시기에 어린 쿠시는 모든 것을 접은 채 잉카 제국의 부활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던지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 후 쿠시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였다. 옮긴이의 말처럼 나 또한 깊고 깊은 안데스 산중에 쿠시를 혼자 두고 떠나온 느낌이 든다. 그러나 쿠시는 그 모든 것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아침마다 해맞이 의식을 할 것이며, 라마들을 돌보고, 추토 할아버지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잉카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것이고, 잉카 제국의 중심에 쿠시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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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 시골의사 박경철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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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꺼내든 때는 환멸감으로 몸부림 치던 날이였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어떠한 책도 읽어지지 않는 밤이였다. 책꽃이에서 책을 뺐다 넣었다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밤 1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허탈감에 침대에 누워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버리는 구나' 탄식을 하며 습관대로 책꽃이의 빽빽한 책들을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책 꽃이 구석에 꽃혀 있던 이 책을 발견했다. 하루를 허무하게 마감하고 있는 나의 처지와 상반된 느낌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엔 시골의사 박경철님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기에 그의 책을 마주한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신선함은 얼마 가지 않아 책 속에서 뿜어 내는 슬픔과 아픔, 그리고 감동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전작인 <행복한 동행>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책은 메디컬 에세이가 아니라고 했다. 병원에서 만난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로 그분들을 '착한인생' 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의 소중한 이웃들의 삶에서 결정적 순간을 지켜본 '내레이터'의 입장이 될 뿐이라고 했지만 막상 그런 이웃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 마음은 격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사연들을 떠나 이 모든 이야기들을 만났을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내레이터 열할밖에 못한다고 했지만, 저자가 쏟아놓은 이야기들은 저자의 마음을 거쳐 왔기에 그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그의 마음을 알아 챌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얼마나 가슴 아파 하는지, 그가 얼마나 슬퍼하는지를. 차분하게 들렸던 그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많은 감정들을 분출하고 있었다.

 

  초반의 사연들 대부분은 결말이 뚜렷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삶에서 뚜렷한 결말이 있겠냐만은 꺼져가는 생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저자가 마무리 지은 글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싶었다. 어떻게 삶이 이렇게 치열하다 못해 잔인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구구절절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 앞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해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이 나의 상상으로 인해 일단락 지어진다고 생각하면 그들 앞에서 내가 너무 부끄러워 졌다.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치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치열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내가 어떻게 그들의 향후를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저자의 마음과 내 마음이 달랐다고 할지라도 저자 또한 단 한줄로 그들의 삶을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대로 아련히 남아 있는 사연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마음은 아프지만 사라지지 않은 치열한 인생으로 말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착한 인생들과 그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아름다움이 아프게 느껴진다.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고단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육체적인 고통이 크지 않더라도 삶의 고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육체의 고통이 그들에게 매달려 있더라도 그 고통은 차마  삶의 주인공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들에게 육체의 고통은 삶의 치열함 앞에 늘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육체의 질고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고 해서 질고가 이긴 것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앞에서도 겸허히 받아 들이는 많은 사람들의 사연들 속에서 그들은 육체의 질고에 절대 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타인으로 다가온 그들이지만, 저자를 비롯해서 그 모든 이야기를 마주하는 독자들에게까지 그들의 떠나감은 타인이 아닌 이웃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지만, 깊이 개입하지 못하는 그런 이웃.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 녹아 들고 있었다.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사연들은 저자가 병원에서 만난 이웃들의 이야기지만, 저자의 개인적인 사연과 이야기도 많았다. 병원이라고 해서 죽음과 치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것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삶이였다. 그런 삶들이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얽히는게 대부분이였지만, 그러한 관계를 떠나 저자와 함께 삶을 살았던 인연들도 많았다. 그래서 이 책은 메디컬 에세이가 아니라는 말을 공감할 수 있었다. 배경은 병원이 되었을지 몰라도 인생의 단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연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 아파하고 누구를 위해서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아품을 주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건강하게 사는 것, 꿈을 잃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픔을 희망으로 녹여내는 저자와 같은 의사가 있듯이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웃에게 건강한 웃음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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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네가 남긴 것 사계절 1318 문고 25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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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덮고 나니 가슴 속에 밀려 드는 먹먹함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온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이 느낌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 아, 아르네! 책을 읽는 내내 이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아르네의 이름을 부를 뿐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옮긴이 박종대님도 저며 오는 슬픔을 달랠길이 없다고 했다. 우리들의 편견과 아집 속에 스러져간 소년 아르네 때문이라고 했다. 도대체 아르네에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이 책은 아르네의 유품을 정리하는 모습부터 시작된다. 유품을 정리한다는 것은 아르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데, 책을 읽을 수록 아르네의 죽음에 대한 복선은 깔리지 않고, 아르네와의 추억을 더듬어가는 한스의 시각을 비춰 줄 뿐이다. 직접적인 아르네의 죽음의 언급은 피한 채, 유품을 정리하는 현재와 유품을 통한 아르네의 추억이 얽혀 12살 소년 아르네를 드러 낸다. 아르네는 여리고 상처가 있는 소년이다. 가족이 빚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르네 뿐이다. 아르네와 친구였던 한스의 아빠가 아르네의 양육을 맡게 되어 한스네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한스는 그런 아르네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며, 늘 아르네의 편이 되어 주었다. 아르네가 고통의 기억에서 몸을 떨 때도, 친구들이 아르네를 따돌릴 때도 말이다.

 

  아르네는 뛰어난 아이였다. 공부를 잘 했고, 글도 잘 썼으며 월반을 할 정도로 비범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였다. 그러나 아르네가 어떻게 해서 한스네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된 친구들은 아르네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르네가 어떻게 살아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내세워서가 아니라, 자신 보다 뛰어난 아르네에 대한 열등감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다름의 이유였다. 한스의 동생 라르스와 비프케 조차도 아르네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고, 비프케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었던 아르네의 마음을 알면서도 비프케는 아르네를 받아주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아르네는 뛰어난 학생이였기에 특별한 관심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다는 사실이 아르네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한 따돌림은 아르네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가족들의 생사 속에서 살아난 것도 아르네의 의지가 아니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또래의 친구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다는 것은 12살의 아르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기 충분했다.

 

  아르네가 살던 곳은 폐선 처리장이였으므로 사내 아이들에게는 호기심과 놀이거리가 제공 되는 장소였다. 실로 책 속에 등장하는 모험과 놀이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쏟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혹적인 것이였다. 아르네 또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보아왔던 바다의 풍경과 배에 관한 지식들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철저히 배척 당하고 만다. 오히려 자신의 뛰어남 때문에 또래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생각했으니 아르네의 고충은 켜켜이 쌓여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아르네에게 한스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놀이에 끼워 줄 틈이 보이면 언제든지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철석같이 그 아이들을 믿었다. 늘 혼자 생활 하는 칼룩씨와 친구가 되는 것보다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모르고 아이들은 아르네를 이용했다. 여행을 핑계로 도둑질을 했고, 나쁜 일에 아르네를 포함 시켰기에 칼룩씨가 다쳤고, 물건들이 사라졌다. 아르네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잃어 버렸지만, 그 일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을 공모했던 아이들은 오히려 아르네를 모른체 한다. 괴로움에서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아르네는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간다. 그리고 아르네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르네와 같은 방을 썼던 한스가 아르네의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그 물건에 대한 추억과 함께 그려진다. 한스는 그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아르네의 표정, 몸짓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르네가 그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대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 얽혀 애절함을 더해 갔다. 한스도 아르네의 가족들도 아르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르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책은 끝이 난다. 이러한 결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르네를 따돌린 아이들을 과연 내가 비난 할 수 있을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르네를 다그칠 수 있을까.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아르네 같은 아이를 쉽게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르네와 닮았던 아이들을 따돌렸던 내 자신도. 아르네의 스러짐 앞에서 깊이 반성해 본다. 내가 아르네를 그렇게 만든 것이고, 우리가 아르네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더 이상 아르네 같은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다른 세상으로 밀어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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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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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아침은 정말 눈을 뜨기 싫다. 한주의 시작에 대한 부담감이 꿈틀거리며 나를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막상 출근 해서 이것저것 하다보니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월요일을 한주의 통과의례로 보내야 하는 것인지 한숨이 나온다. 월요일이든 한주든 모든 날들을 좀 더 즐겁게 보낼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만족스러워 하는 무언가를 할 때 처럼 일상이, 삶이 즐거울 수는 없는 걸까? 그다지 팍팍하지도 않는 일상을 가지고 너무 요란을 떨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뵈를레 씨를 보고 있자니 그가 느끼는 재미가 왜 나에겐 없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그의 재미를 온전히 닮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놀이로 봤고, 그가 놀이를 위해 행했던 모든 것들 속에는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책의 시작은 뵈를뢰 씨의 편지로 시작 된다. 그리고 그 편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한 구성이 숨 쉴틈 없이 옥죄어 오는 느낌에 조금은 답답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저지른 사건 때문에 담당 변호사에게 보내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무엇인지 몰라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 나갔던 것인데, 그의 편지는 점점 더 장황해 지고 있었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배제한 채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부터 모든 것을 통달한 듯한 시각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사건의 경황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흐려져 버렸고 뵈를뢰 씨의 언변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언변 속에서 내가 길을 헤메고, 혼란스러워 했음은 자명하다. 그가 우아한 척 하며 독설을 뱉어내는 모습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에 흥미를 잃은 것 또한 말이다.

 

   그의 이야기는 허무와 권태가 밀려왔다. 그가 진부한 말들을 늘어 놓았다는 것에서 느껴진 감정들이 아닌 그가 행한 놀이 속에서 이미 감지해 버린 것들이었다. 그가 아무리 신랄한 말투로 자신의 놀이를 설명하며, 돈, 권력, 청치에 대해서 논해도 그의 의견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려는 행위로만 보였고, 무언가를 감추기에 급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세상 살이에서의 놀이를 아무렇지 않은듯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그가 위대해 보이지 않았다. 변호사라는 직업 외에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함구한 채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을 뱉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권태로움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 권태에 내가 빠져 버렸다. 그래서 그가 읊어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신랄한 비판들이 진부했다. 또한 그에게 살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의 언변에 속아 그가 저지른 살인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과 놀이의 일환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쉽게 인정해 줘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의 합리화는 물론 타인을 끌어 들이려 했고 그의 의도는 결말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살인이였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도 모자라 담당 변호사를 놀이에 끌여 들이려고 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흥미로울 거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은 개의치 않아 했고 놀이 또한 끝내려 하지 않았다. 돈과 권력, 정치를 떠나 이젠 타인의 파멸을 노리는 것이다. 그가 담당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장황스럽고 온갖 얘기가 섞인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혹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 타당하는 말을 장황스럽게 늘어 놓았다는 것밖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틀린 목적으로 돈, 권력, 정치를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바라본 사회의 병폐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마치 자신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일부만을 드러낸 것이라고 자신 하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자신은 나폴레옹이 정복전쟁을 했던 것에 빗대어 인생 놀이를 감행한 것 뿐이라고 떳떳해 했다. 그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를 안쓰럽게 생각하기 이전에 내 안에 멤도는 이 씁쓸함은 무엇일까. 살인의 정황을 알겠다고 펼쳐 든 책 속에서 온갖 씁쓸한 맛을 다 맛본 기분이다. 그래서 그의 행위를 탓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의 놀이에 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지 않기를 바랄 뿐, 좀 더 밝은 세상의 빛이 그가 드러낸 어둠을 걷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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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바다 바다 올 에이지 클래식
샤론 크리치 지음,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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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상처를 숨기고 싶어, 거짓말을 했던 적을 떠올려 본다. 처음엔 가슴이 두근거리고 상대방이 눈치 채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지만, 차츰 익숙해 지다 보니 거짓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왜 나를 감추려 거짓말을 했을까. 다른 사람에게 밑보이기 싫어서, 동정의 대상이 되기 싫어서 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내가 약해 보이지 않으려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기정 사실에 과장을 보태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발설을 하며, 상대방은 싸그리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고, 내 마음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 약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약해진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약함을 진정으로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소피도 그런 아이였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법을 건다. 나는 현재의 가족 안에서 무척 행복하며, 가족들이 내가 없이 살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건 만큼 다른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피는 외삼촌과 사촌들의 여행에 기꺼이 동행했다. 동행이라기 보다는 졸라서 하게 된 여행이지만, 소피에게는 이 여행이 무척 중요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서 큰 외삼촌의 배를 타고 아일랜드에 있는 봄피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여정이였기 때문이다. 외삼촌 세명과 남자 사촌 두명 사이에 소피가 동행하려 하니, 소피의 부모님도, 삼촌과 사촌들도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소피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를 굳혔고, 항해에 필요한 기초 지식들을 습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랑자 호를 타고 녹록치 않은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삼촌의 배는 호화롭거나 편리하지 않았다. 출발 전에 많은 수리가 필요했고, 배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돛을 달고 가는 배라서 항해 기술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였다. 그렇지만 소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방랑자 호에 올랐고, 틈틈히 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읽게 된 이야기는 대부분 소피의 일지였고, 소피를 통해서 여행 과정은 물론 소피의 내면에 대해서도 알게 될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안심을 뒤로 한채 소피의 일지에 이어 사촌 코디의 일지가 등장한다. 사촌 코디의 일지는 소피의 일지를 통한 익숙함에서 분위기의 쇄신을 유도했으며 소피의 일지와 일치하지 않음에 의아함을 갖게 되었다. 엎치락 뒤치락 등장하는 소피와 코디의 일지를 통해 누구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항해는 계속 되었고, 순탄함과 순찬치 않는 여정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배를 타고 아일랜드로 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간의 트러블이 있든 불만이 있든 방랑자 호에서 모두 생활을 해야 했다. 싫든 좋든 자기가 맡은 일을 해야 했고, 정해 놓은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도 항해에 필요한 조건이였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각자의 습관대로 생활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 졌고 항해를 하게 되면서 여러가지의 에피소드를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소피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이 만나러 가는 봄피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소피는 가족들에게 외면과 동정을 동시에 받고 있었으니, 항해하는 가운데 소피가 깨트려야 할 것은 삼촌과 사촌들간의 벽이 아니라 자신 안에 세워진 벽이였다. 소피의 이야기를 통해서 혼란스러운 마음를 코디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말해줌으로써 소피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고, 나름의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피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추억과 두려움, 그리고 사실이 덧대어져 마구 얽혀 있기에 그 안에서의 혼란스러움은 잠잠해 지지 않았다.

 

  항해를 마칠 때쯤, 소피는 처음 방랑자 호를 탔을 때의 소피가 아니였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았고 스스로도 깨달음을 더해 갔다. 그리고 기정 사실과 자신이 건 체면 상태를 구분해 낼 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여정이 없었다면 소피는 자신의 과거와 상처의 아픔을 덜어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처음엔 자신에게 껄끄럽게 대했던 삼촌과 사촌들과 봄피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소피의 모습은 달라지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파도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소피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자신을 져 버릴 수가 없었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소피의 곁에는 새로운 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도 소피를 새로운 구성원으로 맞이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는 여행이 있었다. 여행을 통해 부딪히고,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사이 소피의 마음이 그리고 가족들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비단 그 여행은 소피에게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들에게도 자신을 새로이 바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가 굽이치고 넘실대며 소피를 불렀듯이 그 바다를 두려워 하지 않는 소피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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