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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요즘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한권씩 모아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작가의 책을 모두 탐독한다는 것은 여러가지의 조건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에 쉽지 않은게 사실이다. 루이스 세풀베다 이전에 프란츠 카프카나 도스또예프스끼 같은 작가에도 푹 빠져 보았지만, 그들의 책은 어렵거나 너무 방대해 전집을 완독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은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흡인력도 뛰어나 완독하기에 적절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자의 작품을 5권째 읽다 보니 읽을 작품이 서서히 줄어드는 현상이 안타까워 조금씩 우울해지려 한다. 온라인 서점에에 절판된 책들을 구해 놓기도 했지만, 아껴 읽어야 해서인지 이래저래 마음이 가라 앉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한권 한권 읽어 나가다 보니 저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분위기에 빠졌던 것은 환경이 주제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는데 ,장르의 변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과 <악어>라는 단편이 들어 있었는데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서술 형식부터 주제까지 지금껏 만나왔던 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악어> 또한 환경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기법이 드러나는 단편이었다. 두편 다 흑색소설로 볼 수 있는데,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면서도 그에 따른 결론은 독자에게 맡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두 편의 단편은 슬픈내용을 담고 있다.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동일한 슬픔이 아니라 절대 사라지지 않는 슬픔의 원천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한 킬러가 등장하고 점차적으로 감정에 휩쓸리게 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내키는 대로 살고 있는 킬러. 자신이 맡은 일은 프로답게 깔끔하게 처리 하지만 새로운 표적의 사진을 보는 순간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때, 자신의 여자가 도착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불길함을 느낀다. 그는 프로답지 않게 표적을 놓치는 실수를 하고 그를 다시 찾아 없애지만, 그의 곁에는 뜻밖의 인물이 지키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여자. 자신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했던 여자가 자신의 표적 때문에 그에게 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의 왼쪽 가슴에 총알을 박는다. 냉혈안일 것 같은 그가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그의 예감은 시작부터 뭔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그녀를 잃어 버린다는 슬픔. 그 슬픔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킬러답지 못한 감상적인 고백들을 늘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악어>는 보험 회사 조사 요원을 통해 피혁계의 거물들이 살해되는 진실을 파헤치고 있었다. 막대한 보험금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에서 조사 요원 콘트레라스는 사건의 진실을 쫓는다. 그 와중에 피혁회사의 만행과 한 여인의 복수심으로 희생된 인디오들과 그들의 황폐한 땅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인디오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악어들과 부족들을 몰살시킨 피혁회사의 거물에 대한 복수를 한다쳐도, 그들을 이용해 자신의 분노를 뱉어냈던 오르넬라는 용서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건 인디오들을 또 한번 죽이는 행위였고, 비겁했으며, 자신을 정당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인디오들을 몰살시킨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비단 그녀에게만 비난을 퍼부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작품 다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저자의 색다른 기법에 심취하기 보다는 마음이 무거워 힘겨웠다. 킬러의 개인적인 슬픔을 떠나 사회악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서글펐으며, 물질을 위해 파괴와 살상을 서슴치 않는 인간들에게도 환멸이 덧입혀 졌다. 물질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다른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은 결코 성립되지 않았던 걸까. 씁쓸한 감정들을 곱씹은 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조용히 덮었다. 더이상 아픔을 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올라왔지만 다른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를 수 없기에 울적한 마음을 털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