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평점 :
<외면일기>를 읽으려 했던 순간부터,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는 처음 만나는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에 실린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10년전에 내가 읽었던 책을 발견하게 되면서 첫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제목의 오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었다. 미셸 투르니에의 <사상의 거울>이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101가지 개념> 이라는 어이 없는 제목으로 번역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때,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순진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상상력 자극에 도움이 되고자(무엇 때문인지 모른채) 읽은 책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 제목이 어이없는 오역의 결과물이라니.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어찌되었든 10년 전에 그의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비록 큰 감흥은 없었더라도 10년의 공백이 메꿔지는 야릇한 기분이 들어 책 속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었다.
저자는 외면일기를 '잡다한 흥미거리들로 이루어진' 책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여행기 겸, 일기, 노트를 편의상 1월부터 12월까지 나눠 추리기만 했을 뿐이라고. 그렇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잔상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가운데서도 외면적으로 관찰하거나 생각했다는 이유로 <외면일기>라는 제목을 붙인 것만 보더라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책의 구성은 짧은 단락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단락의 내용은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닌 저자의 흔적이었기에 이해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다. 처음엔 그런 내용에 당황했지만, 책의 특성을 고려하여 계속 읽다보니 이 책은 이해를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외면적으로 관찰하거나 생각 했다고 했으니 저자도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였다는 보장도 없었다. 제 3자로써 그런 저자의 기록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저자는 편의상 열두달로 나눴다고 했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변화라든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이 책을 읽고 있는 시점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였기에 감회 또한 남달랐다. 저자의 한해를 다른 관점에서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기록된 것들이 한해의 묶음인지, 여러 해의 묶음인지, 언제의 기록들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와 함께 한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순간마다 갖게 되는 나의 잡다한 생각들에 자신감을 얻은 기분이랄까. 나도 내면일기가 아닌 외면일기를 써보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저자의 글들의 도움을 받자면, 완성된 글이 아닌 누구나 쉽게 알아 먹을 수 있는 흔적이 아닌 먼저는 자신의 욕구에 충족하면 되었다. 어떤 것을 메모 해놓고 익혀보고 싶다, 생각해 보고 싶다, 나누고 싶다, 기억하고 싶다 등등 온갖 잡다함이 묻어 있더라도 상관 없었다. 그런 잡다함 속에라도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이 묻어 나면서 길이 만들어 지고 있었으므로.
그런면에서 저자와 나 사이에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참 많았다. 내가 지나쳐 버리고 잊어 버렸던 것들, 내 의식 속에서 감히 꺼내지 못한 것들의 드러남. 광활한 바다에 듬성듬성 박혀 있는 섬들처럼 나와의 연결에는 문제가 없었다. 생뚱맞다 싶으면 생뚱맞은 대로 이해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넘어가도 찝찝함이 남아 있지 않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짓게 되는 자연스런 미소. 너털웃음보다 깔깔거림보다 그런 미소의 여운은 오래 남는다. 깊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읽어 내려간 외면일기는 나에게 책을 읽는 최고의 기쁨을 선사해 준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다른 작품을 바로 읽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를 느꼈던 부분을(작품이든 작가든) 바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은 멀어져 버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에세이를 같이 내는 저자의 책 중에서, 10년 전에 읽은 것도 소설이 아니고 외면일기도 소설이 아니니 당분간은 이런 종류의 책을 주로 읽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책과의 헤어짐이 싫을 때, 책을 통해 느꼈던 기분을 오래 간직하고 싶을 때처럼 아쉬운 것도 없다. 추운 겨울 밤에는 왠지 이런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낯섬과 의문들이 뒤섞이어 만들어 내는 몰입 상태. 그런 몰입이 미셸 투르니에를 통해 자주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