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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내 자신에게 약속한 것은, 편견으로 장르를 나누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다양한 독서를 하려고 애쓰지만 문학에 치중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문학을 주로 좋아한다면 국내 문학의 비중도 당연히 높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로 국외 문학을 읽을 뿐, 국내 문학은 언제부터인가 등한시 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선정적인 책들만 골라서 읽었던 나의 잘못도 있었지만, 현실의 도피로 독서를 하는 나의 성향에 현재의 국내 문학은 맞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시대라는 공감에서 비져나오는 우울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현실감이었다. 일본문학에 많은 국내 독자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현실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소설이라는 장르라도 이왕이면 현실감있게 그려내는 일본문학에 더 끌리는 거라고 말이다. 굳이 국내 문학과 일본 문학을 비교하련느 것도 아니고, 비교하더라도 일부분의 것을 가지고 비교할 것이기에 그럴만한 계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강의 책을 읽으면서 밀려오는 비현실 속의 우울함이 나를 더욱더 깊은 어둠의 심연으로 데려가는 느낌이라 이렇게 장광설을 뱉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몇년 째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꼬박꼬박 보고 있다. 그렇기에 작년 수상작인 한강의 <몽고반점>을 기억한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몽고반점>보다 같이 실린 <아기부처>의 문체가 더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늘 스쳐버리던 이상문학상의 수상자들 중에서 한강이라는 작가를 염두해 두고 있던 터라, 신간이 나왔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책을 구입했다. 사고보니 <채식주의자>는 신작이 아니라 <몽고반점>과 비슷한 시기에 쓴 연작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엔 <몽고반점>이 실려 있어서(나에게 작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집이 있었기에)실망을 했다. 이미 읽은 작품이 또 실려 있다고 생각하니 지면의 일부분을 도둑맞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연작소설이라는 말에 나의 호기심은 일렁거렸다. 세 편의 단편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 <몽고반점>은 현실의 이야기였기에 <채식주의자>는 몽고반점의 과거가 되고, <나무 불꽃>은 몽고반점의 미래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 같은 세편의 단편을 읽을 생각에 내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를 폈을 때, 거부할 수 없는 흡인력에 끌려갈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앉은 자리에서 <채식주의자>를 한 번의 쉼없이 읽어 버렸다. 그러나 책의 맛은 씁쓸하고 비현실적이였으며 우울해서 얼른 덮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그러나 끝맛을 느끼기 전까지 덮을 수 없었다. 쉬었다 읽는다면 책에서 느껴졌던 맛이 끈덕지게 들러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몽고반점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는 그렇게 나를 옭아메고 놓아주지 않았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에 등장하는 인물은 같다. 그러나 누구의 관점에서 보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이야기는 달라지고 시간의 흐름 속에 교묘히 연결되고 있었다. <채식주의자>는 <몽고반점>에서 비디오 아티스트였던 남자의 처제, 영혜의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었다. 꿈 때문에 육식을 먹지 못하는 영혜에게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가족들의 억지 희극 속에서 자살을 기도하고, 병원에서 토플리스(젖가슴을 드러낸 옷차림) 차림을 보임으로써 그녀는 단순히 고기를 거부하려 했던 것이 아니였음이 드러난다.
<몽고반점>은 분명 단편으로 읽었지만 <채식주의자> 때문에 새롭게 다가온 작품이었다. 좀더 꿰어 맞춰진 느낌 때문인지 읽었을 당시에 둥둥 떠다니던 비현실감은 좀 더 아래로 내려온 느낌이었다. 영혜는 형부와의 비디오 작업을 하면서 <채식주의자>의 영혜보다 말이 많아졌다고 느꼈을 뿐, <몽고반점>은 형부가 중심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작년에 몽고반점을 읽으면서 영혜와 형부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싶지 않으면서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보다, 좀 더 새롭게 느껴지는 <몽고반점>보다, <나무 불꽃>이 가장 궁금했었다. 어찌 되었든 <몽고반점>의 미래의 이야기가 펼쳐질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무 불꽃>은 늘 묻히고 말았던, 그리고 영혜의 존재로 자신의 인생의 뒤엉켜 버렸던 영헤의 언니 인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인혜의 남편은 영혜와의 그런 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고, 영혜는 정신병원에 수감 되어 있다. 그런 영혜와 인혜는 친가에서도 버림 받고 인혜는 영혜를 돌본다. 그러나 그건 돌봄은 그녀에게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의미한 것 처럼,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니다. 생명을 버릴 수 없어서(그러면서도 자신의 아이는 쉽게 버릴 뻔 했다) 동생이라는 이유로 돌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혜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고, 음식을 거부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자신이 나무라 착각을 하고 죽으면 안될 이유가 없다는 말들로 자신만의 자유를 표현한다. 되려 인혜가 세상에 얽매어 있는 느낌이고 자신을 드러내 본 적이 없다는 갑갑함으로 진부하게 이야기는 흘러간다. 결국 영혜가 추구하려 했던 것, 인혜가 막으려고 했던 것의 경계가 풀림으로써 비로소 그녀들은 자유스러워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우울함이 짙은, 현실이라고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왜 놓지 못했을까. 또 다시 국내 문학을 읽을 자신감이 스르륵 사라지고 마는 마음과 싸우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놓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연작 소설임에도 이제서야 한 권으로 정리하며 매듭을 짓는 기분이라던 저자처럼 나도 <몽고반점>의 매듭을 지으려고 했던 것일까? 의식의 전체에 희망의 빛을 놔버린 나는 영혜보다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내부에는 어움이 지배적이었다. 어둠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니 이젠 빛을 봐야 할텐데 영혜처럼 물구나를 서고 싶은 건 무엇일까. 나무가 반듯이 서 있는게 아니라 팔을 아래로 지탱하며 거꾸로 서 있다던 영혜의 심정이 되는 건 무엇일까. 어둠의 심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 희망의 빛이 깃들지 않는 건 영혜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