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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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의 부모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건 여전히 익숙치 않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다. 나의 부모의 드러남 때문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사랑 표현이 익숙치 않기에 그것이 부끄럽다는 거다. 사랑은 표현할 때 무르익는 법인데 가족과의 사랑 표현은 늘 서툴고 쑥스럽기에 두리뭉실하게 치부해 버릴 때가 많다. 그런 나의 부모가 죽음에 임박 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동안 무관심 했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어떻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할 것인가.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피하고 싶을 것이다. 아직은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쳐 오지 않을 거라고 자부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늘 아버지의 부재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런 아버지와 제대로 마음을 나눠 본 적이 없는 아들이 있다. 병이 든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그제서야 그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동안 아버지와 벌어져 버린 간격은 너무 컸고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대다 어버지는 죽음에 임박했다는 긴박감 보다 여전히 농담을 일삼으며 아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아버지였다. 에드워드 블룸의 아들 윌리엄은 그런 아버지를 너무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가 괜찮은 부모였다는 사실을 인정 받고 싶다는 것도.

 

  그래서 윌리엄은 자신의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을 기억하기로 한다. 그의 추억과 아버지의 일생을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다시 재생시켰다. 그러나 윌리엄이 회고하는 아버지는 그 동안 우리가 익숙해 있던 자기 고백적인 형식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든다.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리면서도 어느새 아버지의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혼란을 주기도 했다. 윌리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헷갈리기도 했고, 윌리엄이 느끼는 에드워드 블룸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윌리엄이 말하고 있는 아버지의 신화적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왔다갔다 하는 구성에 그의 죽음이 중요한건지 그의 삶이 중요한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얘기 했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윌리엄이 말하고자 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나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윌리엄의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부의 영향도 어느정도 있겠지만 에드워드는 어릴 때 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윌리엄이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해 말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며,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장 큰 매력은 따듯한 마음이다. 그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신비적인 힘이었다. 그 범위는 인간을 넘어 동물에게도 나타났고 물속에서나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미쳤다. 그런 내용들을 보다 보면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말아야 할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윌리엄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싶다. 자식에게 아버지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도 하등 이상할게 없다는 믿음을 갖고 싶어서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에드워드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윌리엄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이 글을 썼다고 해도 왠지 에드워드가 느껴지지 않아 서운한 마음 때문에, 아버지의 여러 차례의 죽음의 위협 앞에 나타난 것들이라고 믿고 싶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고, 어디선가 강과 바다 속을 누비며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 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나 또한 병원에서의 죽음보다 그가 사랑한 도시의 늪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결심을 존중해 주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괜찮은 아버지였다고 말해주고 싶은 윌리엄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아들로써 가장 값진 말을 하지 못했더라도 언젠가는 아버지가 듣게 될 말을 아끼고 싶은 윌리엄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 윌리엄에게 아버지는 불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합리화 하기 위해 이 글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발상지 부모. 그렇게 윌리엄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멋지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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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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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직도 우리나라 출판계에 불어 오는 일본문학의 열풍은 식지 않는 것 같다. 그 열풍에 휩쓸리지 않겠노라 다짐 했는데, 재작년부터 읽어제낀 일본문학은 국내 문학의 양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국내문학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지만 일본문학이 주는 매력을 떨쳐 버리기 힘들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내 눈에 띄는 작가는 드물었다. 분명 그들이 써내는 글은 다른데 일본문학이라는 틀 속에서는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작가가 쓴 것이라면 무조건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그 드문 작가들 틈에는 이사카 코타로도 포함된다. 그가 내 안에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믿음이 가는 터라 그의 작품을 손에 쥐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분명 이사카 코타로의 글에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솔직함도 어느 정도 내제되어 있지만 그가 만들어 내는 인물들에게서는 늘 정의가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뿌듯한 기분이 든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활작 폈을 때의 만족감. 그런 만족감이 그의 글 속에는 존재한다. 그의 작품을 서너편 정도 읽고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이 섣부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막을 읽고 보니 나름대로의 확신이 선다. 약간 다른 스타일의 책들도 만났었지만 자신의 맡은 본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이사카 코타로 스타일이라고 각인되고 있었다. 또한 특별한 것도 소소한 일상으로 만들며 호들갑 떨지 않는 차분함. 그런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사막>에서는 평범한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분명 독특하게 보자면 볼 수 있는 그들인데 어느 정도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하나의 개체로 봐지지가 않았다. 5명의 그들은 둘 이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 하는 것 같았고, 전부가 모였을 때는 대책 없으면서도 편안하고 든든했다.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당당한 이시지마를 비롯해 도리이, 도도, 미나미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기타무라. 대학교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은 신입생 환영회 때 만나 대학 4년의 시간을 동고동락 한다. 이 책의 구성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기로 나뉘어져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라든가 여러가지 주변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이 끝날때 쯤, 일년이 아니라 4년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고 조금은 서운(?) 했지만, 그들이 함께 한 시간들을 돌아보면 4년의 세월이라고 해도 충분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서로의 독특함과 평범함을 고루고루 나눠가져 결국은 평평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대학생활만을 상상하며 입학한 그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는 것이었다. 이사카 코타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범죄자 소탕은 물론이고, 그 사건으로 인해 도리이에게 닥친 위기, 엉뚱한 볼링게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마작 등 캠퍼스 안에서보다 그 밖에서 마주치는 사회는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사막을 사회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 실현되길 바랬다. 사막에 눈이 내리게 한다는 것이 그들이 뒤집으려고 했던 것의 예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도리이가 팔을 잃고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이시지마가 보여줬던 행동으로 인해 다시 도리이가 생기를 되찾았 듯, 사막에 눈이 내리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시지마만의 독특함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사막처럼 황량한 사회에 밑진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첫걸음을 내딛는 건 원치 않는다. 그들이 지나왔던 4년의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더라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연약하게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시련과 기쁨이 있었기에 사회를 향한 예행연습 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렇게 또 한편의 이사카 코타로 작품을 만났다. 그 만남의 과정은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처음에 말했던 뿌듯함, 정의감이 느껴지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 거창하게 정의감까지 끄집어 내서 이 책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정의감은 좀 다르다. 정의감이라기 보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나 할까. 아직은 때 묻지 않은 그들을 지켜 보며 대리만족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부디 좌절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사회라는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를 발견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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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로 린킨파크 티켓이 왔다.

이것이 바로...

코트와 바꾼 티켓이다..ㅋㅋㅋ

생일 선물로 받을 것들을 다 합쳐서 멋진 코트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티켓 값만 10만원에 왔다갔다 교통비 하면 15만원...

이것저것 쓰다보면 20만원은 훌쩍이기에....

결국 코트 한벌 값이 된 것이다.

고골의 <외투>에서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근면하고 근면해서 코트를 장만 했지만 나는 그 코트를 버리고 이 티켓을 택한 셈인가?

여튼.. 4년만에 오는 린킨파크니..

즐겁게 다녀와야 겠다..

오.. 린킨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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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린킨파크. 부럽습니다. -_ㅠ
 
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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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바탕 힘겨운 꿈을 꾼 듯한 기분이다. 분명 현재의 나는 존재 했었는데 어느새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다 인류의 시작을 다시 지켜본 듯한 기분. 내가 인류의 시작을 지켜 본 것은 아니니 다시 지켜 봤다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인류의 끄트머리에서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 든다. 전적으로 파피용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묘한 기분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지구에서 더이상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던 무리들이 우주선을 타고 떠날 때만 해도 소설이라는 개념이 내 안에 박혀 있어 관찰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이 우주여행을 하고, 그들의 변화를 좇다 보니 어느새 파피용호의 인식되지 않는 탑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둥둥 떠 있는 느낌. 그러다 새로운 땅에 도착 했지만 이것이 시작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비현실감. 파피용호는 내 눈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아직도 정착하지 못하고 헤메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베르베르의 신작이기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만난 <개미>의 충격이 가시질 않아 늘 그의 작품을 염두해 두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의 신작을 마주하는 느낌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기쁨도 있고, 이번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의 무게로 써 내려 갔을까 하는 기대감이 곁들여 지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역시 베르베르만의 독특함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모습에 그 답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엮어지지 않는 중간중간의 공백들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공백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지구를 떠나 우주에 있다는 시간적, 공간적 공백일까? 그런 공백이라면 소설적인 요소로 치부해 버릴 수 있지만 독자와 저자만의 혹은 번역자까지 포함시켜 무언의 공백을 만들었다는 느낌. 그 기분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내내 나를 따라 다녔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비현실 적인 파피용호의 운명을 지켜봐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현실적이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파피용호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현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에서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 그런 변화를 인간들은 오래 전부터 감지해 왔을 것이다. 환경 문제라든지 과학적인 면으로 따져 볼때라든지 모든 사람이 지구의 미래를 겸허히 받아 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한 개인이나 국가가 그런 생각을 품었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이 우주로의 탈출일 것이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의 조건이 맞는 엔지니어 이브 크라메르와 억만장자 맥 나마라, 요트 선수 엘리자베트의 만남으로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태양에너지로 움직이는 나비 모양의 범선 파피용. 거기서 14만 4천명을 태우고 그들은 천년 동안의 여행을 계획한다. 천년 후에 그들의 후손들은 새로운 행성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 계획하에 그들은 파피용호를 띄웠다. 천년 동안의 여행을 하려면 파피용호 안에서 자급자족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떠나온 지구의 모습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인간들 내부에 감춰져 있는 본성은 우주선 안이라도, 우주선이 아닌 것 같은 공간 속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천년동안 여행을 한 그들의 후손들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그게 파피용호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이었다. 이브 크라메르가 명시한 행성에 도착해서 또 다른 생명체를(우주에서 그들은 다른 생명체이므로) 보존 시킬 수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두명의 소년, 소녀가 새로운 행성에 도착한다. 그 행성이 태초의 낙원 에덴동산은 아니더라도 성경의 창세기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그들은 인류의 큰 목적을 띄고 행성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뱀 때문에 소녀가 목숨을 잃는 것이나, 소년이 자신의 갈비뼈로 인공수정을 하는 모습이나 창세기외 비슷 했기에 행성에 남겨진 한 남자와 소녀를 인류의 출발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소설로 즐겨 달라고 했지만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두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껏 지구를 떠나 지구보다 황폐한 행성에서의 불안한 출발을 추구 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우주선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결국은 나 자신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까. 그게 파피용호의 운명이라고 해도, 비현실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그럴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게 우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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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일고 갑니다~ thanks to~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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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처럼 몹시 추운 날이면 러시아의 추위를 상상해 본다. 더불어 따뜻한 방에서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을 품어 본다. 추운 겨울에는 왠지 장편이 읽기 좋고, 어느 정도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이라면 금상첨화라는 생각 때문이다. 러시아가 추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 추위가 모든 러시아 문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로 읽었던 러시아 문학에서의 겨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고골의 '외투'도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찬바람이 몸 속으로 스며들 때면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고충이 생각난다. 그는 얼마나 추웠을까. 그리고 새 외투가 생겼을 때 얼마나 따뜻하고 뿌듯했을까. 외투를 뺏긴 그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한참 러시아 문학에 빠져 있을 때, 고골의 작품을 대했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 문학이라면 환장하던 내가 고골이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독특함, 당황스러움, 만족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이 짙다는 이유로 고골의 작품을 제대로 탐독을 못했다는 느낌이 늘 내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이 책을 소개할 기회가 생겨서 다시 한번 읽었는데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익숙함 속의 새로움, 낯섬 가운데 밀려오는 흥미로움. 그런 흐름 속에서 만난 고골의 작품들은 여전히 색다른 매력을 주고 있었다.

 

  총 다섯 편의 단편 중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었던 작품은 '광인일기'와 '네프스끼 거리'였다. '코','외투','자화상'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부분이 많은데, 광인일기와 네프스끼 거리는 왠지 모호함 속에 묻혀 버린 듯 흐릿했다. 그래서 두 작품을 더 염두해서 읽었는데 두번째 읽음에도 첫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처음 읽을 때 발견하지 못했던 것, 놓쳐 버렸던 것들을 되돌아 봄으로써 내 기억속에 비어버린 부분을 채워갈 수 있을거라 생각 했다. 그러나 그 두작품은 다시 읽고 보니 채워지지 않은 의문들이 여전하더라도 늘 찌꺼기 처럼 남아 있던 아쉬움은 어느 정도 해소된 기분이었다. 나의 집중이 흐트러져서 생긴 비움이 아니라는 안심 때문이었을까.

 

  관심을 요했던 두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 버려서인지 나머지 세 작품은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코를 잃어 버리고 한바탕 웃지 못할 헤프닝을 벌였던 <코>. 외투를 잃고 충격으로 목숨을 잃은 관리의 사연을 다룬 <외투>. 어느 고리대금업자의 자화상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자화상>. 모두다 가볍게 읽을 수 있었음에도 고골 특유의 스타일에 젖어 든 시간들은 독특했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을 읽으면서 익숙해져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과 그들의 문화의 바탕이 있었기에 고골의 작품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문학의 첫 작품이 고골의 작품이라면 다른 작품들이 서정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고골의 작품을 다른 러시아 작품들에 비해 늦게 접해서 고골의 작품은 독특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러시아를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의 러시아 문학에 고골의 작품들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뿌쉬낀, 도스또예프스끼를 주로 읽다 접한 그의 작품은 색깔이 달랐다. 자신의 운명처럼 광기적인 면에 해학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느껴졌음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골의 작품은 러시아의 익숙함에만 젖어 러시아 문학을 찾아 헤메던 내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 주었다. 고골의 작품을 접하기 전에 만났던 러시아 문학들은 깊은 내면을 다룬 작품들이었다면, 고골의 작품은 감추고 싶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유머러스하게 다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유머스러운 면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그가 그려내는 상황들에서 통쾌하게 웃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웃음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듯 고골의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라고 단정 짓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고골의 작품들이 왠지 겨울의 깊은 밤과 어울리는 것 같아 추운 날씨 속에 잠시 그의 세계로 잠입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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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7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