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눈 - 3단계 문지아이들 11
다니엘 페낙 지음, 최윤정 옮김, 자크 페랑데즈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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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유에서건 닫혀있던 마음을 푼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쩔땐 스스로 깨쳐 나오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어떤 계기를 빌어 마음의 문을 열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는 늘 충돌이 있고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로지 이해심과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준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 그리고 그 소년에게 마음을 열게 된 푸른늑대. 그들은 조금은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동물원에 사는 푸른늑대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 소년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댄다. 그 눈빛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사람들은 겁을 먹기 일쑤다. 그러나 저 소년은 그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늑대를 계속 바라본다. 그런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어난다. 심지어 동물원에 쉬는 날에도. 늑대는 그 소년이 가소로우면서도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 소년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서서히 그 소년의 열의에 왜 저리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소년에게 날카로운 눈빛만 쏘아 보내던 늑대는 똑바로 앉아서 소년을 바라 본다.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그러나 그 순간 늑대는 당황하고 만다. 소년이 한쪽 눈을 감고 자신을 쳐다 본 것이다. 인간들에게 잡힐 때 다쳐 버린 한쪽 눈이 늘 감겨있던 늑대를 따라 소년이 자신의 한쪽 눈을 감은 것이다. 늑대는 그제서야 마음의 문을 연다. 인간들에 대한 불신과 삶의 무의미함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소년의 작은 행동에 열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마주보며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있던 소년은 늑대의 눈 속에 펼쳐지는 푸른늑대의 삶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푸른늑대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었다. 푸른 늑대가 가족과 헤어지고 살던 곳을 등지게 된 이유에는 인간이 있었다. 늑대의 아름다운 털을 노리며 푸른늑대의 가족을 좇는 그들. 결국 여동생을 구하려다 자신이 잡히고 그 과정에서 눈까지 다쳐 버렸다. 잠시 자신의 우리에 같이 살았던 자고새 같은 늑대에게 여동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렇게 푸른 늑대는 우리에 갇혀, 자신의 마음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아프리카를 만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푸른늑대는 아프리카의 눈을 들여다 본다. 아프리카도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눈을 통해 죄다 말해 주고 있었다.

 

  전쟁으로 아프리카는 상인 토아에게 맡겨져 떠돌게 된다. 친절하지 않은 토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토아의 짐을 싣고 다니는 낙타 냄비는 아프리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프리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던 냄비를 토아는 몰래 팔아 버리고 소년도 팔아 버린다. 아프리카는 양치기에게 팔려갔다. 그 양치기를 도와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양들을 지키고, 양치기가 소중해하는 염소를 지키고, 양들의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치타와 하이에나와도 평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염소와 하이에나와 치타가 모두 사라진 다음날 아프리카는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트럭을 얻어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정글의 노부부에 의해 완쾌 되고 그들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터전이 되던 초록 아프리카가 위협을 받는다. 결국 초록 아프리카를 떠나 이 세계로 오게 된 아프리카의 양아버지는 동물원의 열대 식물원에 직장을 얻고, 아프리카는 마음대로 동물원을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가 동물원에 와서 처음 보았던 건 낙타 냄비였다. 그리고 사라졌던 치타, 하이에나, 염소까지 모두 동물원에 있었다. 동물원은 이제 아프리카의 친구들로 넘쳐났고 모두들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동물, 푸른늑대만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푸른 늑대를 그렇게 바라본 것이고, 푸른 늑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된 푸른늑대는 결국 감겨있던 눈을 뜬다. 아프리카도 푸른 늑대를 위해 내내 감았던 눈을 뜬다. 푸른늑대도 소년도 '짜짠!'을 외치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처음에 푸른늑대의 이야기가 시작될 대 조금은 지루해했다. 이야기가 집중이 안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결국에는 눈을 뜨게 되는 푸른늑대처럼, 내 마음의 눈이 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푸른늑대의 불행도 아프리카의 현실도 암울했기에 그걸 지켜보는 과정이 나는 싫었다. 더이상의 상처도 더 이상의 불행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푸른늑대는 나보다 마음이 훨씬 밝은 이들이었다. 서로의 눈을 통해 마음을 나눈 후 아프리카의 행복에 따라간 것은 푸른늑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것도, 나은 눈을 뜨지 않는 것도 푸른늑대가 아니라 현재의 나였던 것이다. 아프리카는 자신의 순탄치 않은 삶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낸 적도 없었고 늘 명랑했으며 이야기를 참 잘하는 아이었다. 그런 아프리카가 보아온 푸른늑대가 나 같은 어른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생활에 찌들고 내게 주어진 값진 것들을 모르고 스스로 우리에 갇힌 채 어둡게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스스로 닫혀진 마음을 열어 볼 지어다. '짜잔!'하고 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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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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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 의 원작이라고 하니 퍼뜩 드는 생각이 책을 읽고 후딱 읽고 영화를 보면 재미 있겠다라는 것이었다. 몇 편의 영화를 책을 읽은 후 비교해 가면서 보니 훨씬 더 흥미로웠던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단순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 재미없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영화를 먼저 보든 책을 먼저 보든, 먼저 접한 것에 충실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는 원작을 충실히 한다는 것에 무리가 따를 뿐더러 약간의 각색은 필수 불가결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봤는데, 영화는 각색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래서 영화는 잠시 잊고 책에 충실하려 한다.

 

  가끔 책을 읽으면서 희열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작품 속의 몰입이 될때도 있을 것이고, 내가 원했던 것을 만났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희열을 느꼈던 것은 야나가와 도시 여사였다. 처음엔 어리바리한 유괴단을 진두지휘 한다는 것에 끌려서 그 과정을 무척 궁금해 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촘촘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사가 벌여놓은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귀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는 분명 유괴 되었다. 나름대로 준비한 유괴범(후에 여사가 '무지개 동자'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들에게 유괴가 되긴 했으나 여사는 너무 차분하고 순종적이었다. 그리고 유괴범들을 헛점을 차근차근 짚어주면 은신처까지 제공하게 된다. 친절해도 너무 친절한 여사는 서서히 무지개 동자들에게 일을 부추기며 자신의 구출보다 경찰들과의 접선에 더 적극적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자신의 몸값을 100억엔으로 올리고 대충매체를 통해 일본전역 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이슈가 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몸값 제의를 받고서 여사의 가족이나, 경찰이나, 일본전역이 동요하면서도 여사의 구출을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컸다.

 

  여사가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아등바등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 베푼 것이 더 많았기에 여사를 극진대우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여사를 구출하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이 있으니 경찰본부장 이카리였다. 그는 여사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여사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첩첩산중 여사의 집으로 단박에 내려온다. 그 뿐만이 아닌 그 지역의 사람들이나 여사의 도움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의 진심이 전해져 무지개 동자가 단서만 흘린다고 하면 바로 신고당할 정도의 열의가 일본열도에 흘러 넘치고 있었다. 여사의 유괴 사건 가운데는 이카리와 여사의 보이지 않는 두뇌싸움이 시작 되고 있었다. 이카리도 경찰로써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이카리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사였다. 유괴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과 충격 그 자체인 요구들을 제시함으로써 이카리 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다. 그런 과정 속에는 유괴범들에게 자신의 몸값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은 물론 여사의 자녀들이나 경찰측, 여사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꼼꼼함과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모두들 여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따뜻한 여사의 인품에 무지개 동자까지 빨려들고 말았으니 이 유괴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유괴단은 물론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는 그 사건을 해결 할 사람은 여사 뿐이었다. 여사는 차근차근 모든것을 해결해 나갔다. 그 배후에 여사가 신용을 쌓았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 모든 일을 벌이고 마무리 한 사람은 여사였다. 도무지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은 100억엔의 몸값의 출처와 수령을 모두 해결한 후 무지개 동자의 개과천선까지 보았으니 그야말로 여사의 연극은 완벽했다. 물론 모든 잡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후일 이 사건을 통해 여사는 자신을 다시 한번 살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여사의 입을 통해 나온 이유를 듣는다면 허무할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무지개 동자를 도와 자신의 유괴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보다 궁금했을 테니까. 그러나 여사의 답은 간단했다. 그 모든 배후에 여사가 있었다는 걸 눈치 챈 이카리가 물었을 때, 여사는 짐짓 말을 돌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줄어버린 몸무게로 인해 삶의 마지막에에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지개 동자가 나타난 것이다.

 

  늙은이의 객기라고 해도 상관없고 노년의 쓸쓸함 때문이었다 생각해도 무관하지만 그런 여사의 마음에 수긍이 가는 건 왜일까. 여사의 연극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힘들어 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계산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여사의 몸값은 큰 손해가 가는 부분이 아니었다. 또한 무지개 동자가 개과천선 하는 바람에 남아버린 많은 돈은 결국 여사가 보관하고 있었으니 인과관계를 따져 보자면 얼추 성립이 되는 게임이었다. 그 과정이 온전히 옳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때가 얼마나 있을까. 그 댓가의 판단은 유보 하더라도 82년 여사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을 순간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여사를 비판하고 이해하는 건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여사를 이해하고 싶다. 어느 정도의 중립을 일궈 냈으니 그 정도면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남은 생은 그때보다 더 즐겁게 살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다.

 

  후기를 읽다 이 책의 발행연도를 보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읽어도 시대의 뒤떨어짐이나 허술한 구성이 느껴지지 않는 책인데 1978년에 출판된 책이라니.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이기에 이런 스토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가식적인 부분이 많다 생각했던 일본인들의 신뢰를 이 기회를 통해 일본의 특징으로 굳힐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편의 소설이지만 여사가 쌓았던 수 많은 사람들과의 신뢰가 없었다면 여사는 그런 연극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런 신뢰를 역이용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의 책이지만 그 과정속에 숨겨진 뜻은 충분히 느껴져 미스터리 소설이면서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처음 맛보았던 여사에 대한 희열은 하나의 추억으로 굳혀지고 있다. 그 희열을 여사처럼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여사에게 은혜를 입은 느낌.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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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원수필 - 김용준

 

2. 공산당선언 - 마르크스, 엥겔스

 

3. 슬픔이여 안녕 - 사강

 

4. 알랭 어록 - 알랭

 

5. 테메레르 2 - 나오미 노빅

 

6. 엽기 고대 풍속사 - 추수밭

 

7. 오로로 콩밭에서 붙잡아서 - 오기와라 히로시

 

 

 

 

- 책을 얼마동안 정리 안했는지 모르겠다.

지저분한 책장속의 책들이 숨이 막혀서 쓸고 닦고 내게 들어온 책들을 정리를 했다.

책 머리에 간단한 메모를 하고 책도장을 찍고... 정리를 했지만..

여전히 책장은 비좁아 들어갈 곳이 없다.

도무지 책장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서 서로 엉켜있는 책들이 짠하긴 하지만...

나의 숨쉴 공간이 책들로 채워지는 것도 과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며칠동안 들어온 책들을 정리해 보니...

거의 다 받은 책들이다.

알랭 어록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파본으로 교환한 책이고..

나머지는 지인에게 받은 책들이다.

범우문고는 헌책방에서 고른 책들이고..

나머지는 지인이 읽고 보내준 책들이다.

 

이벤트를 끊어서 책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아도..

이렇게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들어오고 있다.

아.. 책.. 책.. 책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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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더라면
티에리 코엔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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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청년이 자살을 하려고 한다.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꽃다운 20살의 청춘을 마감하려 한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신을 원망하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며 지금의 절망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것도 그의 생일 날 약, 위스키, 마리화나에 생의 마지막을 걸려고 한다. 사랑하는 그녀가 눈에 아른거리고 부모님이 눈에 밟혀 잠시 망설여지지만 그는 약과 위스키를 삼킨다. 그렇게 지고지순한 사랑에 상처를 받은 채 삶을 포기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일러도 너무 이르다. 사랑의 아픔을 이겨보지 못하고 자살을 한다는 것이 이르다는 것이 아니라, 책의 첫장을 열자마자 그의 절망이 드러나며 자살하려 한다는 것이 이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약을 삼키고 위스키를 마셔 버림으로써 잠시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의문을 갖게 한다. 그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어떠한 모양으로 그려질지 의아하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국 그는 다시 깨어난다.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던지간에 상황을 파악해 보려 하지만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빅토리아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빅토리아는 제레미에게 나긋나긋하다. 현실이 아닌 꿈 같은 상황에서 정신을 차려보려 하지만 자신이 자실을 하려했던 순간만 기억날 뿐, 빅토리아가가 왜 자신곁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제레미가 자살했던 날로부터 꼭 1년이 지난 자신의 생일이라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1년의 시간, 그 공백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레미가 기억하려고 애써도 자살 후의 일들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빅토리아의 말을 들어 봐도 자신이 정말 그랬는지 확신없는 상태에서 솔직하게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빅토리아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려 하지만 무언가가 석연찮다. 기억상실증이라고 하기엔 1년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의아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치 다른사람이 자신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듯, 하고 있는 일도 친한친구도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기로 하고 입원을 한 제레미는 잠이 들기 전, 이상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노인의 형태를 본 후 정신을 잃고 만다. 그러나 그가 깨어났을 때는 병원에 입원했던 어제가 아니라 2년의 세월이 흐른 자신의 생일날이었다. 자기 곁엔 빅토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었고 한 가정의 단란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상했다. 2년의 시간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2년의 흔적을 좇고 자신의 위치를 찾아 보려 하지만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병원에서와 똑같이 갑작스러운 기도 소리와 노인의 출연으로 잠에 빠져들고 그는 계속해서 시간을 건너 뛰며 자신의 생일날 깨어난다.

 

  그는 깨어 날때마다 자신의 위치와 가족들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고 언제 잠이 들어 깨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빅토리아와 두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또 다른 제레미는 가족과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악랄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의 절정에서 진짜 제레미로 돌아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지만, 가짜 제레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준 상처를 캐내 가면서 잃어버린 삶 보다는 그들의 행복을 찾아주려 애쓴다. 그것은 가짜 제레미가 가족들에게 접근을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조취를 취해보긴 하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자신은 불행에 불행을 거듭하여 빅토리아와 두 아들, 자신의 부모님의 삶도 망쳐 버리고 깊은 상처와 회한과 운명에 관한 단념으로 늙어 갈 뿐이었다.

 

  자신에게 삶이 얼마 남지 않았았을 때, 한 랍비와 만나게 된다. 그 랍비는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상황을 모두 고백하고 도움을 청했던 랍비였다. 그때 랍비는 자신의 말을 다 들은 후 짐작을 하면서도 결국 답을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낄 때, 그 랍비는 자신이 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지 말해준다. 제레미는 자살을 한 날 실제로 죽은 것이다. 가짜 제레미가 뜯어 버렸던 시편을 중심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 보니, 그의 자살은 신에 대한 도전이었고 신은 그에 대한 응징을 했으며 결국은 용서를 해주신다는 의미였다. 제레미는 자신의 그런 상황에서 용서를 빌어 본 적이 없다. 랍비의 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이 충실히 살아갈 수 있었던 소중한 삶,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잘못을 깨달으며 용서를 빈다. 그리고 그는 목구멍으로 튀어 나오는 알약을 뱉기 위해 빅토리아의 이름을 부른다.

 

  이 기이한 이야기를 읽고 난 후,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뜨거움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제레미처럼 신에 대한 기만이라기 보다, 나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대충 살아 버리는 교만 때문이었다. 제레미의 자살 이후로 펼쳐지는 그의 삶은 가슴이 저릿저릿 거릴 정도로 불행하고 상처 투성이인 삶이었다. 제레미 자신에게만 그 상처가 닿았다면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은 제레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굴까, 왜 저러는 것일까 제레미 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수 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레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져 버렸다. 선한 모습이 드러 나는게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 반대의 요소가 짙게 나와 버렸던게 가짜 제레미였던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고 거부할 수 없는 제레미의 독특한 삶을 보면서 많이 우울했었다. 너무나 어두웠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것을 제레미는 되돌려 보려 했지만 가끔씩 깨어나는 자신의 생일 날 하루로는 부족 했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뼈저리게 느낀 셈이니 그 과정은 가혹했으나 다행일지도 모른다. 반전이 있었기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제레미가 되기 전에 내 삶 뿐만이 아닌, 타인의 삶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관계 속에서 때로는 실수도 하고 상처도 주지만, 그런 소중한 사람들로 인해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신의 개입을 나타냈을지는 모르나, 용서를 빌면 된다 생각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나타내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였을까. 모든것을 쉽게 생각하지 말지어다. 그 댓가는 가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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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도 모르는 북극 이야기 - 지구의 마지막 보물 창고 북극으로 떠나자 토토 과학상자 6
박지환 지음, 김미경 그림 / 토토북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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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게 된 건, 최근에 읽은 '과학, 우주에 마법을 걸다' 때문이었다. 책이 난해해서 투덜거렸더니 지인이 과학 상식좀 키우라며 이 책을 주었다. 단순히 북극이야기로 알고 이게 무슨 과학 상식 책이냐고 물었더니 딱 내 수준에 맞는 책이니 무조건 읽어보라고 한다. 책도 얇고 과학책이라고 얼마나 어렵겠어 하는 마음에 휘리릭 읽어 나갔는데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어린이 책이라고 얕보는 마음이 있었던게 사실이지만 이렇게 과학 기본 상식이 없었나 하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네'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쉽고 재미나게 설명해 주어서 흥미로움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책이라면 과학이 어렵지 않을 것 같고 공부를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북극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거대한 얼음과 북금곰 혹은 펭귄? 이 정도 밖에 떠올리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거라 생각한다. 저자도 그런 설레임을 안고 북극으로 향했으니 그의 흔적을 좇는 것만으로도 내가 북극에 닿은듯 떨리기 시작했다. 저자는 북극으로 떠났던 이야기를 서두로, 니알슨 과학 기지촌에 있는 다산과학기지를 중심으로 풀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연구원들이 머무는 다산과학기지는 북극이라기 보다는 평화로은 호숫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 친화적인 곳이었다. 그곳에서의 에피소드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궁금증을 풀어 주었지만, 가장 궁금한건 북극의 모습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나 하듯이 저자는 북극을 친절히 소개해 주고 있었다. 북극의 위치부터 시작해서 북극을 찾은 탐험가들, 빙산에 오른 이야기며 너무나 재미있게 펼쳐져서 책 속에 푹 빠져 정신없이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 가운데서도 너무나 기본적인 것들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기도 하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북극의 위치도 제대로 몰랐고 백야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눈동자 색이 달라진다는 것도 몰랐다. 거기다 남극과 북극을 비교 설명해 주는 부분에서는 내 지식의 바닥이 여지없이 드러나 민망했다. 그런 민망함은 '북극에 누가 살까?' 하는 부분에서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북극에 순록과 여우가 살거라는 생각도, 계절이 있을거란 생각도, 식물이 자라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고 있을 때, 조금씩 북극의 위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극의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생태계의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 지구 전체에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북극은 타격을 받고 있고 그런 영향이 우리도 느낄 정도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잦은 태풍과 홍수만 보더라도 충분히 직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연파괴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북극이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 수 많은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역효과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빙하가 녹으면서 뱃길이 열리자 여러나라에서 북극계발에 앞장서면서 파괴를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북극에서 사는 사람들과 동식물들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외부의 영향이 심해지고 있으니, 북극을 이대로 두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미지의 대륙이었던 북극이 탐험가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북극을 연구하며 인류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으니 북극이 몸살을 앓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처럼 북극의 작은 것에서부터 큰 문제점까지 북극의 세세한 면을 살펴볼 수 있어서 즐겁고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설명해주며 궁금증을 풀어 나가는 구성은 너무너무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마치 신세계를 여행한듯한 기분과 북극의 신비로움을 만끽하며 과학공부도 했으니, 어린이 책이라고 무시할만한 요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북극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노력한다고 단박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을 할 때, 북극을 지키고 지구를 살릴 수 있으니 나의 존재가 미미하면서도 크게 느껴진다. 나 하나로 변화될 순 없겠지만, 나의 작은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으니, 살아가면서 적어도 자연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북극 체험에서처럼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스스럼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드는 아쉬움이라도 해도 그런 공간이 너무 그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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