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굿바이
이시다 이라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겉표지를 얼핏 보면 여름에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본다면 가을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것을 눈치 챌수 있을 것이다. 우선 바람이 느껴진다. 여인의 머리카락에도 여인이 붙잡고 있는 주황색의 천 위에도, 그리고 넓고 넓은 하늘의 공간에도. 또한 여인의 원피스 형태는 여름을 연상시키지만, 꽃무늬는 길가에 피어있는 가을 꽃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겉표지의 분위기는 늦여름보다 초가을 분위기가 난다고 말하고 싶다. 책 속의 이야기들도 가을에 만나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 것이다.

 

  내게 여름의 끝자락은 피하고 싶은 시기다. 햇볕의 뜨거움과 나른함이 공존하는 늦여름은 모든 것을 식어지게 한다. 특히나 늦여름의 한낮에 터미널에 가본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도시의 터미널보다 조금은 후미진 지방의 터미널은 여행객들의 열정도 사그라진 무료함 그 자체가 온전히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표지의 계절을 억지로라도 가을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이야기가 늦여름에 느껴야 하는 것이라면 내게 와 닿는 감정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늦여름의 늘어짐, 무료함, 사그라듬이 느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10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제목을 신경쓰다 모든 단편이 이별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분명 수많은 이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슬로 굿바이'처럼 이별보다는 사랑의 시작, 설레임을 간직한 단편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단편의 순서야 상관 없겠지만 그 모든 아픔과 시작을 거쳐 설레임을 간직하다가 마지막의 단편에서 진짜 이별을 만났을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슬로 굿바이'가 처음이나 중간에 있었다면 어색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다양한 설레임을 잔뜩 머금다 만난 이별은 잠시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설레임들과 천천히 이별을 하라는 건지, 설레임을 천천히 받아 들이라는건지 혼자만의 말장난으로 무언가를 끊고 맺으려 했었다. 그러나 사랑에 끊고 맺음이 가능할까. 사랑은 마음을 주는 것이기에 늘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들 투성인데. 그러나 그 모호함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상대방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느껴진는 것들은 진실이었다.

 

  때로는 그 느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지만 결국은 상대방과 거의 비슷한 마음이기에 설레임이라는 여운을 남겨 주었다. 이 책의 대부분의 단편들 느낌이 이러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의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기분좋게 만들었다. 사랑도 이별도 피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사랑의 설레임만을 더 만나고 싶은 것은 나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별을 겪은 나의 피해의식 일지도.

 

  그러나 책 속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잠시 자문해 보게 된다. 내가 사랑을 할때, 누군가를 좋아할때 오로지 나와 그 사람만 두고 보았는가를. 이들의 사랑의 내면 속에는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의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비출지, 그 사람과의 미래는 어떠한지, 더 나아가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까지 말이다. 이들에게는 최소한 누구 때문이라는 시선의 부담은 없었다. 철저히 둘만의 감정이 중요시 되고 있었기에 조심스레 그들의 내면을 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면 때문에 단편들 하나하나가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랑이 거창할 필요는 없으니 그러한 시각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책 속의 배경이나 삶의 모습들에서 생경함을 느꼈던 것은 일본적이다라는 것을 보지 못함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일본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똑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책 속에 언급되는 묘사 속에는 세계의 다양함이 축약된 모습이었다. 주인공들이 밥을 먹는 세계 각국의 식당이나, 외국 음악과 언어에서 느껴지는 외래어들은 내가 과연 일본 소설을 읽는 것인지 잠시 헷갈리게 만들었다. 세계화 시대에 그 정도를 거슬려 한다고 면박을 준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의 의식도 색깔을 잃어 버리지는 않을까 주제넘은 걱정까지 해본다. 어쩌면 책의 곳곳에 드러난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문화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해도, 정체성을 잠시 잃게 되기에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전제가 되는 섹스는 점점 기대하기 힘든 세상이지만, 하나의 과정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섹스의 드러남은 여전히 껄끄러운가 보다. 오히려 지지부진한 것보다 쿨한면을 담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고리타분한 면이 내안에 잠재되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의 다양함을 보게 된 것 같아 잠시 내 감성이 되살아 나는 느낌이 든다. 사랑의 설렘이든, 안정감이든, 이별이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끊임 없을 것이다. 그 끊임없음이 유독 가을에 더 진하게 다가오는 건,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나약해 지는 것은 아닐까. 대리만족이 아닌, 설레임을 가져보는 것. 올 가을에도 내겐 힘든 것일까? 잠시 그들의 설레임을 질투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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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오즈가 너무 좋다..마이리뷰




태극취호 () l 2007-05-1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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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를 안다는 것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내가 읽은 '나의 미카엘'과 '블랙 박스' 외에 이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절판이였다. 그런데 서점에서 이 책을 보았기에 다음에 사기로 하고 다른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서점에 가보니 이 책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그때부터 조바심이 났다. 구할 수 없는 책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책이 꽂혀 있는 위치등 며칠을 눈에서 아른거리는 책을 보았다.
그 달에도 너무나 많은 책을 사서 도저히 여유가 없었지만 그 아른거림과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이 책을 샀다. 아모스 오즈의 작품이 많음에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의 미카엘'을 읽고 그냥 습관적으로 다른 작품을 찾게 되었는데 그런 열악함이 나의 호기심을 더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여튼 이렇게 '아모스 오즈'의 세번째 작품을 탐독하게 되었다.

  '오즈의 이 작품은 하나의 코드code이며, 그의 소설을 읽는 작업은 하나의 해독decode이다' 라는 번역가의 말이 강하게 인지 된다. 만약 '나의 미카엘'을 읽지 않고 이 작품을 먼저 대했더라면 오즈도 참 난해한 작가이며 따분하다라는 틀 속에 다둬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독서의 시기 그리고 한 작가의 작품을 대하게 되는 순서가 중요하면서도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또 들게 하는 작품이였다.

  제목을 보고 연애소설인줄 알았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서 주인공 요엘의 긴 사색뒤에 진부한, 그러면서 은근히 바라게 되는 운명이 터져 나오면서 제목에 딱 맞춰줄거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나의 생각은 빗나가기 시작했고, 중간쯤 부터는 제목을 상기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의 코드이자 해독이라는 말이 딱 맞는게 내가 읽은 세 작품에는 분명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는 여자들이 나온다. 우선 그 여자라는 존재 자체가 코드가 되겠고 그 존재의 깊이가 그리고 삶에 부여하는 공간적 의미가 가장 난해하였던게 '여자를 안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해독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뚜렷한 언질없이 그냥 현상과 사물을 묘사하듯이 아니면 은유속에 담아버리듯이 사건과 추억을 말해가는 문체에서부터 집중력을 요하게 만든다. 잠시 딴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내가 무얼 읽고 있는지 잠시 멍하게 만드는게 요엘이 과거와 현실 속에서 끈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과 비슷했다.


  죽은 아내로 인해 비밀 요원직을 관두고 간질을 앓는 딸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 이브리아의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23년동안 해외를 누비며 바쁘게 지냈던 시간들을 집안일로 채운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분명 남아도는 시간이 많을 것 같은데도 늘 집안일이 끊임없어서 본문에서처럼 전기를 만드는 시간, 뿌쉬낀처럼 시를 지을 시간조차 없다는 비약으로 항상 바쁘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 늘 생각은 끊이지 않고 삶은 살아지고 있고 또 자신을 찾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나도 늘 복잡하고 바쁜 마음이였다. 확실하게 그리고 열정없이 살아지는 평범한 날들 속에서도내가 만족감을 느끼는 한두가지로도 존재해 갈 수 있다는게 비단 나의 삶만이 아닌것 같다는게 요엘을 통해서 느껴졌다. 오히려 그런 삶 속에서 그 이전의 삶보다 뚜렷한 규칙이 생성되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도 보여줬다.. 만족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말이다.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 그것 또한 존재가 허무하지 않다는 걸 일깨워 주는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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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모 2007-07-24 15:55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TEXTAREA id="cmt_comment_1255901">오즈 작품의 번역자로서 늘 두려운 마음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종종 검색합니다만 참 좋은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연말 쯤 오즈의 가장 최근 작품인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물론 역자로서 참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만,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되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렇게라도 오즈의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기쁨을 앗아가지는 말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TEXTAREA>
오즈 작품의 번역자로서 늘 두려운 마음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종종 검색합니다만
참 좋은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연말 쯤 오즈의 가장 최근 작품인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물론 역자로서 참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만,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되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렇게라도 오즈의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기쁨을 앗아가지는 말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태극취호 2007-09-12 20:4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TEXTAREA id="cmt_comment_1300174">아.. 저는 왜 이제서야 이 댓글을 본 것일까요. 블로그에 너무 무관심했었나 봅니다. 번역자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무한 영광입니다. 아모스 오즈도 정말 제겐 보물같은 존재입니다. 나의 미카엘로 아모스 오즈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 작품으로 인해 팬이 되어버린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지금껏 읽은 세 작품 중에서 이 책이 제일 좋았어요. 최근에 발매된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는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신간이 나온다니 너무 너무 기쁩니다. <여자를 안다는 것> 번역 정말 좋았어요. 매끄럽고 막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어요. 신간이 나온다니 너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여자를 안다는 것>을 번역해 주신 최창모님이 번역한 책이라니 더더욱 기대가 됩니다. 아아.. 너무 좋아요 오즈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이렇게 소소한 독자의 가슴에 바람을 일으켜 주셔서 감사해요 그것도 따스하고 뿌듯한 바람을요..^^</TEXTAREA>
아.. 저는 왜 이제서야 이 댓글을 본 것일까요. 블로그에 너무 무관심했었나 봅니다. 번역자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무한 영광입니다. 아모스 오즈도 정말 제겐 보물같은 존재입니다. 나의 미카엘로 아모스 오즈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 작품으로 인해 팬이 되어버린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지금껏 읽은 세 작품 중에서 이 책이 제일 좋았어요. 최근에 발매된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는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신간이 나온다니 너무 너무 기쁩니다. <여자를 안다는 것> 번역 정말 좋았어요. 매끄럽고 막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어요. 신간이 나온다니 너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여자를 안다는 것>을 번역해 주신 최창모님이 번역한 책이라니 더더욱 기대가 됩니다. 아아.. 너무 좋아요 오즈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이렇게 소소한 독자의 가슴에 바람을 일으켜 주셔서 감사해요 그것도 따스하고 뿌듯한 바람을요..^^

 

 

 

 

- 포스팅 하러 왔다가...

이 댓글을 발견했다. 한달 훨씬 전에 달아진 댓글인데 난 왜 이제서야 본 것일까.

댓글이 통 안달려서 인식을 못하고 있었다.

아아...

정말 아모스 오즈는 <여자를 안다는 것>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라버렸는데 그 책을 번역한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아주다니.. 영광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기쁜 것은 연말에 아모스 오즈의 신작이 나온다니!!!

아아... 정말 너무 기쁜 소식이다.

진즉 알려줬음에도 이제서야 기쁨을 누리고 있는 바보가 되어버렸지만...

이 작은 댓글로 정말 가슴이 부풀어 버렸다. 아아.. 아모스 오즈..

난 당신의 글이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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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1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책도 처음 보고 듣지만, 서재를 서성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에 흔적 남깁니다. 기뻐하는 님의 마음에도 공감하며 축하합니다! 새로운 책과 작가 소개 감사하며...

안녕반짝 2007-09-13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정말 저 댓글을 전 왜 이제서야 봤는지..^^
 



1. 반고흐 사랑과 광기의 나날 - 데릭 펠

 

2. 슬로 굿바이 - 이시다 이라

 

3. 한밤중에 행진 - 오쿠다 히데오

 

 

 

 

- 적립금으로 산 미술책 이후로 오랜만에 책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주일에 서너권씩 쌓이던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책이 안오니 좀 낯설기 까지 하다.^^

오늘은 세권의 책이 왔다. 지인이 보내준 '반고흐 사랑과 광기의 나날'과 '한밤중에 행진'과 황매에서 보내준 이시다 이라의 신간이다.

 

  고흐 책이라면 환장을 하는데 이 책은 느낌이 괜찮아 보인다. 최소한 울궈 먹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시다 이라 책 또한 가을에 읽기 딱 좋은 사랑 이야기인것 같고....

오쿠다 히데오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온 책들은 대체로 만족이다.^^

책들이 부족하랴.. 시간이 부족하지..^^

언제 다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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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1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들이 부족하랴~ 시간이 부족하지~' 동감!
요샌 밤에 눈이 뻑뻑해서 책을 읽을수가 없어요~그러다 보니 자꾸 쌓여갑니다!
알라딘에서 노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가~~~~ㅠㅠ

안녕반짝 2007-09-13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쌓인 책들이.. ㅠㅠ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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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과의 만남에도 인연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게 간택(?)된 책들마다 특별함이 있지만, 읽지 않았다면 서운했을 것 같은 만남이 있다. 대부분 그러한 영향은 작가의 발견으로 이루어 지는데 내게 그런 작가는 도스또예프스끼와 토마스 만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우연히 서점에서 나온 전집을 보고 재회한 경우라면, 토마스 만은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된 보물같은 존재였다. '상실의 시대'가 핸드폰 광고에 나오면서 궁금해서 읽게 되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보다는 책 속에 나왔던 '마의 산'을 통해서 토마스 만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마의 산'이 궁금해서 구입했다가 두 달동안 낑낑대며 읽고 난 후, 토마스 만의 책은 여렵다고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서점에서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을 보고 홀라당 사버린 후 토마스 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라 버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가장 먼저 토마스 만과의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다. '핫라인'을 읽고 알게 된 작가지만 별 감흥을 얻지 못해 묻혀 버렸던 작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우연히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곤살레 모우레의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아동책은 아는 작가가 없어서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핫라인'으로 인연을 맺게 된 작가라 '어! 이 작가가 동화책도 썼네'하며 아는 작가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주의 대여기간을 넘기고 다시 빌렸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는데 따뜻한 마음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다. 잠시 현실을 잊고 풋풋한 마음을 품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동화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무척 궁금해지고 있으니 당분간은 저자의 다른 책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레임이 생긴다. 이 작가에게 열광을 하는 이유는 전혀 닮지 않은 두 개체가 아웅다웅 살아 가는 모습을 너무 이쁘게 썼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돌봐주던 주인이 긴 휴가를 간 사이에 고양이 소르바스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 이동 중이던 갈매기 무리에서 벗어난대다가 기름떼까지 뒤집어써서 목숨이 위태롭게 된 갈매기 켕가가 자신의 집 베란다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켕가는 다짜고짜 알을 낳게 될것 같다며 소르바스에게 세가지의 약속을 강요한다. 자신이 낳은 알을 먹지 않기, 부화 할 때까지 알을 보호해 주기, 태어난 새끼에게 나는 법을 알려주기. 소르바스에게는 지키기 힘든 약속이였지만 켕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순순히 약속을 하고 만다. 그렇게 켕가는 숨을 거두고 소르바스를 비롯한 부둣가의 고양이들에게는 비상이 걸린다. 모두가 소르바스가 켕가와 한 약속을 지켜주려 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을 뒤져 알을 부화하는 법, 먹이를 주는 법, 나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자신들과 다른 새끼 갈매기를 돌보면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기도 한다. 새끼 갈매기는 자신이 갈매기라는 사실과 날아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 하지만 소르바스 덕분에 건강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역시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알려준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여러 고양이들이 힘을 합쳐 백과사전을 완벽하게 독파한 후 여러차례 새끼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고양이들은 인간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인간의 도움을 받으려면 인간의 말을 섞는 금기를 깨아한다. 회의를 거쳐 금기를 깨는 것을 허락받은 소르바스는 그들의 선택해준 인간, 시인에게 도움을 받기로 한다. 시인이라면 고양이가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들이 갈매기를 키우게 된 것도, 그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도 이해해 줄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생각대로 시인은 그들의 말을 들어 주었고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새끼 갈매기가 날 수 있도록 최종적인 도움을 주었다.

 

  분명 소르바스와 새끼 갈매기는 이별을 했다. 서로의 존재가 다르기에, 살아가는 터전과 방식이 다르기에 정해진 운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슬픈 이별은 아니였다. 그들이 함께 한다는 현실이 더 슬픈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게 그들에게는 행복일 것이다. 그 행복의 충실한 재료는 서로간의 사랑이였다. 소르바스에게 엄마라 부르던 새끼 갈매기와 그런 갈매기를 품어 주는 고양이 사이를 메꿀 수 있었던 것은 사랑밖에 없었다. 도무지 사랑이 솟아날 수 없는, 너무나 다른 고양이와 갈매기 였지만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마음을 심어준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였을까.



 

 잠시 저자의 이력을 살펴본다면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갈매기 켕가가 기름떼 때문에 낙오되고 죽어갔던 것처럼, 인간의 자연 파괴를 고발하면서도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자연스레 이끌어 내기도 했다. 고양이와 갈매기는 자연에 더 가까운 생명체이지만 서로 다른 개체의 만남과 인간의 등장은 우리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서로간의 조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소르바스가 갈매기를 키우고 돌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도움으로 새끼 갈매기가 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은 고양이들이 새끼 갈매기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을 보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이렇게 따뜻함으로 넘치는 거라 생각한다. 고양이와 갈매기의 낯설지만 따뜻한 사랑을 보았다면 이제는 인간의 사랑을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사랑의 대상은 넘쳐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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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1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멋진 작품이군요. '곤살로 모우레' 의 작품은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하나 밖에 못 읽었지만... 이 책 보고 싶어요! 바구니에 찜~~~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
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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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상태에 따라서 책에 대한 기억이 달리지는 편이다. 책을 읽기 최악의 조건이였다면 그 책에 대한 이미지는 기억의 저편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가끔 책의 내용보다 책을 읽는 배경이 더 인상 깊을 때도 있지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분위기와 내용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환상의 조화가 아니였나 싶다. 좁은 기차칸이였지만 옆에 앉은 사람의 다리에 무례하게 두 발을 걸치고 숄을 등뒤에 대고 책을 읽었다. 책보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더 집중을 했어야 할 상황이였지만 내게는 창 밖의 풍경이 책을 읽기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 편안함을 떠올리면 이 책이 떠오르고, 이 책을 떠올리면 그때의 편안함이 밀려오는 상호보완적인 느낌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책의 절반을 그렇게 읽고 나머지 절반은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며 읽었다. 시끄러운 곳이였지만 분위기에 취해 순식간에 읽어갔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조건이 충분했으므로 책 또한 강렬 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강렬함의 가운데는 편지라는 매개물이 있었다. 독자와의 관계를 더 진하게 연결시켜 주었던 것은 누구에게나 한가지의 추억으로 남겨 있을 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기억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가로써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었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저자는 기치조오지의 레오나르도 카페에서 편지를 대필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편지를 대신 써주면서도 가끔 푸념을 섞어가며 소설은 쓰지 않고 무엇을 하는걸까 라고 한탄하지만, 대필을 해주었던 시간들이 그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 되리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사연 하나하나가 더해가면 갈수록 저자가 대필을 관둘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의 의도일 뿐이였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에는 그 모든 것을 믿고 싶게 만드는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마음을 덜어내는 일이였기 때문이다.

 

  저자가 레오나르도 카페에서 편지를 잘 써준다고 소문이 나게 된 건, 단순히 글을 잘 써서만은 아니였을 것이다. 글솜씨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의뢰인들의 마음을 진실하게 전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게 아니였나 싶다. 의뢰인들의 사연을 듣더라도 의뢰인의 입장으로 빠져들지 않는다면, 글을 잘 쓴대도 편지의 요점을 잘 잡았다 해도 진실이 없다면 감동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감정에 치우치는 격한 편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써나갈 것인지의 구상도 중요하다. 대필가가 힘든 것은 의뢰인의 마음도, 편지를 받을 사람의 입장도 제 3자로써 잘 헤어려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는 의뢰자의 입장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동화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어려움을 저자가 잘 풀어 냈기에 레오나르도 카페에서 그는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누렸을 거라 믿는다. 또한 사연을 들었더라도 많은 부분을 상상하며 써야 하기에 소설가 지망생의 본본과도 동떨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소설가 지망생이 저자의 의도였다고 해도 말이다.

 

  의뢰인들의 사연은 다양했다. 변화무쌍한 삶의 편린들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각자의 아픔과 설렘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풋풋한 마음도 있었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한도, 자기 치료적인 편지도 있었다. 물론 저자가 의도한대로 흘러가서 편지의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마음의 드러남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료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든, 그 마음을 지켜보는 상대방이든 두리뭉실 했던 것들을 펼침으로써 변화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마음을 드러내는 글 앞에서 그 사람을 달리 본다든지, 잊고 지냈던 추억을 꺼냄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료했던 것만 봐도 충분했다. 우리의 내부에 묵혀있던 것들의 실체가 커다란 짐이 아니였다는 사실을. 그랬기에 저자가 써주는 편지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마음을 정리 못하는 사람들의 대신이 아닌, 그 편지로 인해서 자신의 삶을 조율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저자도 초반에 밝혔듯이 손으로 쓰는 편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우체국의 소인부터 상대방이 접었을 종이의 면을 쓰다듬음으로 지나간 체취를 느끼는 것을 나 또한 좋아하기에 지금껏 펜팔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편지는 평상시에 꺼내기 힘들었던 얘기들을 나열하기가 좋다. 받는 사람을 염두하고 쓰는 편지라도 결국은 자신에게 쓰는 고백적인 편지가 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타인에게 드러낸다는 것은 어렵지만 편지는 그나마 쉬울지도 모른다.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을 드러낸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그 마음이 나의 과거였다고 해도 내면의 흐름의 한 면을 떼어서 보냈기에 그 또한 하나의 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의뢰인들의 고백을 대신해 주었다. 표현이 서툴다고 의뢰했지만 스스로의 고백이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나면 편지가 써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의 첫번째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깨달아 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타인이 아닌 내 자신부터 라는 걸.

 

 

오타발견

 

p. 123 고동학교 ->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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