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롭지 않다 [2] 추천 2
 


  며칠전, 남해 바다와 밤하늘을 닳도록 보고 왔었다. 한 낮의 푸른 바다와 해질녁의 파스텔 같던 하늘도 좋았지만 어둠에 묻혀 검은 바다를 부수고 있던 하얀 파도와 총총한 별이 더 좋았다. 그 파도와 별을 보며 중얼중얼 말도 많이 하고 왔었다. 그런 중얼거림이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
책,영원한 나의 쉼터 | 태극취호 | 2007-08-22 | 2007-08-28

 

 

 

 

 

- 어제 알라딘 '이주의 리뷰' 선정된 기쁨도 가시지 않았는데...

예스 이십사를 들어가보니 이주의 리뷰에 선정됐다는 쪽지가 왔다.

헉.. 이게 먼일이래...

어떤 리뷰인가 궁금해서 봤더니..

 

세상에 시집이 아닌가!

책 얘기보다 잡설이 더 많았던 리뷰였는데....

그것도 정말 시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게 없는 시집 리뷰를 뽑아주다니....

이건 정말 운 치고 너무 대박인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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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8-2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박나셨군요..축하드려요..^^&

안녕반짝 2007-09-0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먼일인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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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만나다 - 태극취호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어린시절, 나의 여름은 논 기억 뿐이다. 공부는 팽개치고 소꿉놀이, 물놀이, 봉숭아 물 들이기 등 어떻게 하면 밖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그런 연구만 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나의 여름 추억 한가지가 섬뜩하게 다가오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나무위의 아지트 때문이였다. 너무나 평범한 나무였지만 그 평범함은 어느 누구에..

 

 

 

- 꿈의 마일리지를 지급하는....

알란딘에 부끄러운 리뷰가 뽑혔다.

리뷰는 부끄럽지만...

이제 소원이 없다. ㅋ

오오.. 꿈의 마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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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향기 2007-08-2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흥미로운 책인거 같네요. 리뷰도 잘 읽었어요^^

치유 2007-08-28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기분좋으시겠어요..^^&

twinpix 2007-08-2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안녕반짝 2007-08-2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드립니다.. 정말 매일 잠잠한 블로그 드디어 방문객과 댓글을 만나는군요..
아.. 눈물 나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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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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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나서면서 가방에 꼭 챙기는 것은 책 한권과 cdp다. 걸을땐 음악을 듣고, 멈출땐 책을 꺼내든다. 그렇게하면 어디에서건 내게 익숙한 분위기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이어폰을 빼거나 책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노라면 익숙하던 곳들도 낯설게 느껴진다. 내 세계에서 너무 깊이 묻혀 있었다고 해도 그런 단절이 고립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풍경을 색다른 광경으로 볼 수 있는건 세상과의 단절을 잠시 만들어 낼 때 가능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은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세상과의 단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나라면 스쳤을 것들, 나였다면 우울함에 빠져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여행지에서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런 느낌들은 꼭 저자가 있었던 곳의 정황들이 아니라, 그곳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많았다. 여행의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리는 것보다 자신에게 고백적이 글들이였기에 더 좋았다. 여행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여행은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함이면서도, 같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홀로 서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건 내 자신과의 대화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대화를 저자는 거침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자가 뱉어내는 언어가 거칠었다거나 다듬은 흔적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여행하면서 이런 글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박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였다. 여행지 속에서의 스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 혼자 있더라도 외로움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저자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였다.

 

  그러나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방황이라는 걸 방관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고백적인 언어 속에서 저자의 생각을 낱낱이 볼 수 있었으니 그에게 느껴지는 일말의 두려움을 지나칠 수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비롯해 순간순간의 두려움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두려움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렵고 떨리면서도 헤쳐 나가보고 싶은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또한 여행은 순간순간의 두려움 속에서 또 다른 이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보면 저자는 그런 두려움을 어김없이 남겨 놓고 있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책장을 넘기는 손이 허탈하거나 맥이 풀려 버릴때가 있다. 여행지의 이야기든, 저자의 이야기든 저자의 글에서는 남겨진 이별이 많았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둘러 책장을 넘기면 다른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그러면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책장만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사람에게 내 마음을 비추지 못하고 떠나 보내 버린 것처럼 주저 앉고만 싶었다.

 

  그런 마음이 더 허망한 것은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섞인 두려움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고 사려져 버린 소년, 자신이 팔아야 할 옥수수를 건네는 청년, 한국인 아버지를 두고 있지만 전쟁 이후로 만난적이 없다는 베트남 사내.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고 다시 돌아간대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별은 더 허무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온전히 독자에게 남겨 주었던 저자는 여헹에서 만날 수 있는 잔여물을 그대로 전해준 셈이다. 낯선 곳에서 오도카니 서 있는 나를 만나고, 나의 존재가 감사함으로 전해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사실에 벅차오를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남겨짐을 통해서 보여 주었다. 그 남겨짐이 서글프지 않은 것은 새로운 만남이 있다는 것을 책을 덮을 즈음에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을 이리저리 요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저자의 문체이다. 여행의 기록들이기에 여행 에세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울림이 너무 깊었다. 자잘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들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멈춤을 드러내는 저자의 글은 나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내가 길을 잃어 버려도 일어설 힘이 없어도 그 모든 것을 천천히 붙들어 주며 가식적인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모습은 두려움이 나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는 그런 두려움과 맞서고 싶어서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두려움과 마주칠 때가 많지만 나 혼자만의 두려움이 아닌 세상과의 타협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행을 하면 두려움이 사라질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막막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보고 있노라니, 여행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진정 두려워 해야할 것은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아버린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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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 산책
김영숙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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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오르세전이 9월 2일 까지이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 그림도 몇 점 있고 내가 파리로 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그림들이 국내에 전시되고 있다 생각하니 며칠들어 연일 안절부절이다. 진즉부터 전시회의 일정을 알고 있었지만 다음 기회로 넘긴 것이였는데, 이 책을 읽고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내가 그림에 대해서 안다면 얼마나 알겠는가. 이건 다 저자 때문이다. 너무나 재미나게 친근하게 써내려간 글 때문에 그림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미술책을 읽다 킥킥 댄 것도 처음이고 그림에 얽힌 배경이 이렇게 재미나게 다가오다니, 저자가 사랑스러워서(?) 곤란할 지경이다. 그렇게 저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어디선가 낯이 익은 듯한 분위기였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전시회를 보고 너무 맘에 들어서 샀던 책, '밀레와 바르비종파 화가들(공저)'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 저자였다. 그나저나 9월 2일까지인 오르세 전을 어찌 갈 것인지 나의 관심은 오로지 그곳으로만 쏠리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오르세전이 열리고 있어서 잠시 루브르 박물관을 무시한 채 호들갑을 떨었지만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에 약간의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최근에 읽은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된 '루브르 박물관'의 영향인 것 같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책이지만 절제된 설명과 작품 선정에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루브르는 전혀 색다르게 다가온다. 전에 읽었던 책들과 중복되는 그림도 있고, 얽힌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글솜씨는 앞 부분에서 말했으니 각설하더라도 그런 차이를 보였던 것은 시각의 차이가 아니였나 싶다. '루브르 박물관'은 박물관 안에서의 시각으로 보았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산책하기 좋게 주변의 것들에서 부터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것들 이라고 해서 중점을 벗어난 잡다한 것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기 쉽게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시대상을 비롯한 화가의 개인적인 얘기까지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그림 속으로 초대를 하고 있느 느낌이였다. 거기다가 저자가 나름대로 구축한 동선을 따라가면, 미술관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으니 책의 제목 또한 명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책을 읽기 전 왜 루브르와 오르세 박물관의 산책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부끄럽게도 두 박물관이 상당히 가깝고,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데에서 오는 무지 였는데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는 저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루브르에서 오르세까지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선택한 그림들과 저자의 풀어나가는 방식이 지극히 개인적이다 말할지 몰라도 저자 또한 누누히 강조 했듯이, 루브르와 오르세의 그림을 다 보기는 벅차다. 그러므로 이 책으로 인해 루브르와 오르세의 역사는 물론,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통해 미술계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건 확실하다. 또한 중구난방 식으로 내 안에 담겨있는 주워들은 지식들이 이제서야 자리를 잡은 것 같은 후련함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그림들이 많아서 그림에 끌려가는 들썩임이 아닌, 각 나라의 회화를 중심으로 인상주의 이후까지의 그림들을 순차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회화의 특징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무궁무진한 흥미로운 것들이 나를 더욱 즐겁게 했다. 그 이야기에 끌려 중요한 그림들을 지나쳐 버리고 다시 돌아오는 일들도 빈번 했지만, 방대함으로 겉핥기 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던 루브르와 오르세를 이토록 즐겁게 만날 수 있는건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게 당연히 낫겠지만 지금껏 감상했던 짧은 소견을 밝히자면, 그림도 마찬가지로 얇게나마 사전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나다. 그림이 너무 강렬해서 감상한 이후에 배경을 알아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런 경우는 만나기 드물기에 사전지식을 갖춘 후에 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이런 연유로 사전지식이 조금 갖춰졌다고 이 책을 들고 가서 직접 그림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들고 오르세전을 본다고 해도 책에서 본 그림이 중복되는 경우는 희박하겠지만, 거대한 미술전에 주눅 들지 않고 친한척 할 수 있어서 저자에게 감사할 뿐이다.

 

  문학을 통한 몰입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왜 책을 읽는지 왜 내가 책을 좋아하는지를. 그러나 그런 몰입은 책을 통해 다양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 인해 깨달아 가고 있었다. 지금껏 무지 속에서 헉헉대며 그림을 보아온 시간이 헛되지 않다. 마치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을 예비하고 있었듯이 그런 시간들이 찰나의 과정으로 느껴지는게 오버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무겁지 않고 명쾌하게 나의 마음을 씻겨주는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 산책'. 그야말로 한 번의 산책으로 구름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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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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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전, 남해 바다와 밤하늘을 닳도록 보고 왔었다. 한 낮의 푸른 바다와 해질녁의 파스텔 같던 하늘도 좋았지만 어둠에 묻혀 검은 바다를 부수고 있던 하얀 파도와 총총한 별이 더 좋았다. 그 파도와 별을 보며 중얼중얼 말도 많이 하고 왔었다. 그런 중얼거림이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했었는데 시 한편 읽고 나서 그 행위 조차도 기꺼이 수긍할 수 없음이 가히 충격적이다. 김사인 시인도 이런 시 하나쯤은 옮겨적는 것만으로도 새로 시 한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냐며 이성선의 시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을 빌리고 있다. 훌륭한 시가 많아서 이 시를 새로 지은 셈 쳐줄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저자의 억지(?)가 끝까지 이어졌음 하는 바람이였다. 저자가 옮겨적은 시에서 나의 행위가 들통났기 때문에 저자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이라.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을 더럽히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나는 남해의 하늘과 별들을 더럽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김사인의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앞에서 나는 넘어지고 만다. 나는 발붙일 곳 없는 버려진 영혼이 되어 버렸다.

 

  시집을 좋아하긴 하지만 시를 알고 읽는 것이 아니여서인지 마음에 와 닿는 시 한수 남기지 못할 때가 많다. 소설 읽듯 휘리릭 읽어버린 경우도 허다하고 분위기에 이끌려 읽은적도 많기에 시 앞에서 나는 움츠러들기 일쑤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문학처럼 시를 고르는 관점도, 이 시가 어떻더라는 느낌도 내게서 멀어져 있는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시에 끌렸노라, 그래서 밤새워 읽었노라며 말하는 시집이 있다. 그런 시집을 보는 나의 기준은 처음 한 두편의 시를 읽고 나서 판단을 내리는게 전부다. 시가 내 안으로 안착에 성공했냐 아니냐를 보고 다음 시들을 읽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김사인의 시집은 내 마음으로의 안착에 단박에 성공한 시이다. 첫 시 '풍경의 깊이'의 첫 연은 이렇다. '바람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 보는 이 아무도 없다.' 3행의 시를 읽고 내 눈 앞에는 그런 광경이 펼쳐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눈여겨 봐주는 풀 한포기 없이 나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시작은 좋았어도 내가 이 시들을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뒤로 갈수록 시의 의미부여는 물론 읽기만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허다했다. 결국 나는 분위기를 느끼는 것으로 시를 논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쳤지만 굳이 저자의 의도나 해설가의 해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고 내게 처해진 환경에 따라 문학작품의 해석이 갈라지듯 시도 그렇게 읽으면 될 것이다. 내가 느꼈던 것과 저자나 해설가의 설명에 따라가다 무릎을 탁 치며 이런 뜻이 숨겨져 있었구나 라고 느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의 언어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분명 우리가 아는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음에도 다른 언어를 말하고 있다. 어디서 저런 언어들을 찾아내는지 그들의 위대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가 낯설거나 생경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알고 있는 것들을 마치 숙련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조화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시인의 숙명은 무엇일까. 언어를 잘 쓰는 것,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게 그들의 일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시인의 숙명에 정의란 없다. 그러나 김사인 시집의 해설을 해주었던 임우기님의 말을 들어보면 시인은 숙명적으로 우주 자연과의 교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 그래서 시인은 우주 자연 속에서 새로운 시적 사유와 변신능력을 부여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모호한 생각을 똑부러지게 말해주고 있어 무릎을 탁치며 '그래 시인은 그런 것 같아'라고 인정하고 만다. 시는 특별한 일, 의미있는 일들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내가 시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다 내게도 한번쯤은 스쳤을 생각들을 잘 나타내고 있기에 그런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개인적 경험, 시인의 의식속에 감추어진 함축적인 의미들을 드러내는 시가 분명 더 많다. 그러나 그런 시들을 읽으며 나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숙명이기도 하고 고통이 되기도 하는 그들의 소산물들을 보며 그 안에서 나는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이 고요하다해도 무작정 서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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