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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책 읽기를 좋아한다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가져봤을 것이다. 한때, 책이 좋아서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 자체가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였는지 되돌아 보면 낯이 뜨겁다. 책에 대한, 혹은 글에 대한 갈망이 짙어짐에 따라 독서의 깊이도 깊어만 갔는데, 그 깊이에 허우적 대노라면 아무나 글을 쓰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쓴 책들도 없진 않지만 나의 글은 아무나가 쓴 글이 아니길 바랬던 마음이 얼마나 무모 했는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하기로 했는데, 늘 읽은 책을 꼬박꼬박 정리하고 있으니 나의 무능력함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11년째 독후감을 쓰고 있다고 자처해 왔지만(공백기를 포함해서), 갈수록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남기는 것은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이런 책을 만날때엔 손을 놔 버리고 싶을 마음이 그득하다. 독후감 자체 만으로도 늘 낑낑 대는데, 글쓰기를 다룬 책을 정리하다니. 늘 내키는 대로 적던 나의 형식들은 왠일인지 모조리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오류를 발견했으면 고치면 되지만, 나의 오류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생각에 민망해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독후감을 하나의 글로 바라 본다는 말도 될 터, 결국은 나의 독후감이 늘 부끄러웠다는 뜻일진대, 나의 헛점이 모조리 드러나는 책을 말해야 한다니, 상당히 당황스럽다.
그러나 나의 헛점을 연암 박지원 선생이 지적해주고 가르쳐 준다고 생각해 보라. 연암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도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모든걸 전부 드러내며 가르침을 흡수 하려고 할 것이다. 연암이라면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그의 명성만 치켜 세우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크게 연연해 할 필요도 없었다. 책 속의 연암을 통해 충분히 글에 대한 그의 능력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팩션에 어우려져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니 적절히 걸러서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저자 후기에서도 밝혔지만 가상의 인물, 사건, 선정이 내포되어 있기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과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저자와 연암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렷히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체계적으로 잘 쓰는 방법, 그 방법을 제시하되, 팩션이라는 장르를 결합해 재미나게 그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히려 자신들이 그런 글쓰기를 배우며 책을 써나갔다고 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이면에는 연암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터득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말이 별로 없다. 연암의 제자 지문이 글을 배우는 과정을 너무 쉽게 봐버렸기에 내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피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그것은 연암을 배반한 중현 같은 열등감일 수도 있고, 내 모든걸 던져 새롭게 무언가를 쌓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지만 지문처럼 잘해갈 자신이 없었고 내게 그러한 열정이 남아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은 내가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숙제지만 당장 지문이 터득한 것을 살펴 보자면 무척 흥미롭다. 복잡 미묘한 정치상황을 피해 연암협으로 들어온 박지원을 우연히 만나면서 지문은 어렵게 연암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돌이라도 삼킬 수 있을 열정을 지닌 지문에게 연암이 가르쳐 주는 건 엉뚱한 것들 뿐이다. 요즘처럼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주듯 툭툭 던질 뿐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민하며, 터득해 가는 지문은 조급해하고 자신이 어떠한 과정을 겪고 있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암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자신을 훈련시켰는지 깨닫게 된다.
나 또한 연암이 글쓰는 방법에만 치중할거라 생각했기에 지문을 가르치는 방법속에 그렇게 깊은 뜻과 진리가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한 글쓰기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때, 그는 글을 쓰는 자세가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실용소설이라고 해서 요즘의 세태에 맞게 이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연암의 가르침이 빽빽히 녹아 있는 전개는 아니지만, 여운은 깊이 남는 책이였다.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집어 넣고 이론을 따르더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가르침. 그것이 지금껏 연암의 명성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가 될 것이고, 진리가 살아 있기에 어느 누구에게나 대등하게 다가온다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 대등함 속에 나의 마음이 얼마나 열리느냐에 따라서 흡수됨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연암의 가르침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마다 받아 들이는 것이 다르고 나 또한 그러한 과정속에 있기에 나름대로의 정리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문이 건네준 책을 통해 연암의 둘째아들 종채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그 책에는 지문이 연암을 만나게 되는 과정부터 연암에게 사죄하는 모습까지 온통 연암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암의 가르침이겠지만 그것 보다는 연암과 함께한 그 자체가 더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쉬운것이 아니기에 더 살갑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 구절
p 70. "이유담 이덕수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어야 책과 내가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
p 96.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에는 쓰는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는 법이야.
p 111. 문자로 된 것만이 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책에 세상 사는 지혜가 담겨 있으니 정밀하게 읽을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늘 책만 본다면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그 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p 155.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된 것들을 찍어 버릴 각오로 쓰게나, 알겠나?
p 158.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증자의 제자인 공명선은 책을 읽는 대신 스승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길을 택했다. 결국 스승이란 책을 읽은 공명선은 넓은 의미의 독서를 한 셈이다. 공명선이 택한 길이야말로 독서를 창조적으로 변통한 것이었다.
p 271.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