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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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에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 이라는 책을 읽었다. 고딕소설 총체라는 시리즈로 나온 책이였는데 나에겐 낯선 장르여서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독서를 즐긴 후 편독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장르를 구분짓지 않는 편인데 고딕,호러,추리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이 일어 접근을 해도 결국은 책에 뒤집히는 나를 보며서 드는 안타까움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 책에 실린 10편의 단편을 보면서 그런 과정을 고스란히 거쳐 왔다고 생각되어 진다. 첫부분의 단편들을 대하며 낯설긴 해도 괜찮다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이질감이 나를 지배했다. 나의 위치가 관찰자의 입장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수긍도 할 수 없기에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붉은 죽음의 가면'이 고전적인 호러라면 'ZOO'는 현대판 호러였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는 세계였다. 세상에는 분명 기이한 일이 많다.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일과 믿겨지지 않는 일들이 넘쳐나는 세계에 살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것 같다. 사회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여 쉬쉬하는 이야기가 많겠지만 그 어두운 면을 이 책을 통해서 경험해 버린 느낌이다. 허구라는 사실을 떠나 어둡고 우울함이 내게 몽땅 전이된 느낌, 이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책 속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부정도 자신 없지만 비현실 적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소설이 풍기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곳에 끌려와서 토막 살인을 당하고, 자신이 말하는 대로 타인을 불행에 빠트리며,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로 집을 짓는 책 속의 인물들을 가깝게 대할 수는 없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소설속의 이야기지만 이런식의 전개는 나에게 색다른 감흥을 준 것이 아니라 인상을 찡그리게 했다. 소설이다라는 설정을 벗어난 과민반응 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겐 작품의 완성도를 논할 여력도 낯선 장르를 즐길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목적이 분명한 것도, 불분명 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헤아리기 전에 나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것 같다. 보여지는 것들에 현혹되어 낯을 찡그려 버렸으니 그 이면의 것들을 보지 못함은 당연하리라.

 

  그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분위기가 아니였다는 점이다. 번역자도 말했듯이 이 책의 분위기를 퓨어(감동과 눈물을 자아내는)계열과 다크(으스스하고 오싹한 느낌을 주는)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껏 말했던 것은 다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들이였다. 으스스하고 오싹하다는 느낌보다는 인간의 본성중 악랄함을 긁어내는 분위기에 너무 치중해 버렸지만 너무나 섬세한 상상을 하게 한 작가의 문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다크한 느낌 속에서 허우적 거릴 때 어느정도 분위기를 중립시켜 주는 퓨어적인 느낌의 단편들이 있었기에 무사히(?)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비슷한 문체로 상반되는 분위기를 나타낼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의 작품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양지의 시>라는 단편은 돋보였던 작품이였다. 서정적인 문체와 반전을 가미한 전형적인 퓨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높이 평가하고 싶은 작품이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따져 보자면 비슷한 분위기의 단편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극적인 묘사와 그들의 의도를 하나의 소설로 간과하고 넘어 가기에 꺼림직해서 불만을 토로한 것이지 각자 나름 대로의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였다. 관찰이 뛰어나거나, 추리력이 뛰어났고, 인간무상을 보여 주기도 했고, 자아 혼란을 빚어 내는 등 각자의 매력은 충분 했다고 본다. 단지, 내가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과 감흥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게 안타까울 분,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할 정도로 상반된 느낌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각자 다른 분위기의 단편을 대하다보니 이런 느낌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마음에 온전히 내키지 않는 실망감. 이 모든 것이 나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은 느낌이다. 그 과정 속에는 책에 몰두하다 보니 책 속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와 현실과 나는 동떨어지게 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비현실적인 영화를 보고 나오니 밖은 너무나 환해 우울함이 깃든 투동이 오는 듯한 느낌처럼.

더위를 쫓기 위해,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한 책으로 읽을 수는 있겠지만 너무 어두운 마음이 들때는 피했으면 좋겠다. 책 속으로 말려 갈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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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없는 날 동화 보물창고 3
A. 노르덴 지음, 정진희 그림,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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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루에 수십번씩 잔소리를 듣고 잔소리를 하는 반복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가지만 듣는 것보단 하는게 더 쉽다. 내게 들리는 잔소리를 늘 무시하듯, 내가 하는 잔소리를 상대방이 흘려 버리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잔소리를 하는 입장이든 듣는 입장이든 잔소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을 원할 것이다.
그런 잔소리에서 해방되고 싶은 아이가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잔소리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며 잔소리 없는 날을 만들어 달라고 푸셀은 엄마 아빠에게 조른다. 그래서 아침부터 자정까지 잔소리 없는 날을 맞이한 푸셀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한다.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세수도 하지 않고 양치질도 건너뛴 채 자두잼으로 아침을 떼운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잔소리를 할라 치면 오늘은 잔소리가 없는 날이라고 오금을 박는다.

 

  그렇게 학교에 간 푸셀은 짝궁 올레에게 오늘은 잔소리 없는 날이라고 자랑을 한다. 올레는 부러워 하면서 이것 저것 제안을 한다. 그리고 돈 없이 오디오 사는 법을 알려주며 해보라고 한다. 푸셀은 잔소리 없는 날을 내 맘대로 해도 되는 날로 착각하고 수업도 빼먹은 채 오디오를 사러간다. 그러나 오디오 사는데 실패한 푸셀은 집으로 돌아간다.

 평상시보다 일찍 도착한 푸셀을 보고 엄마는 잔소리르 하려고 하지만 오늘은 잔소리르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 엄마한테 푸셀은 즉흥적으로 파티를 열겠다고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하고 길거리고 나가 파티에 초대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다 동네에서 소문난 술주정뱅이 아우구스트 아저씨를 데리고 와서는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만다. 잠이 들어버린 아우구스트 아저씨를 뒤로한 채 그 많은 음식을 두고 결국 엄마와 단둘이 파티를 하게 된다.

 

  아무리 잔소리를 하지 않는 날로 정했다고 해도 그런 푸셀을 보며 엄마와 아빠는 끝까지 인내심을 보여 주었다. 나라면 진즉 한대 쥐어박고 푸셀의 행위를 전부 무마시켜 버렸을 텐데 부모라는 이유로,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인내를 보여준 것이다. 그런 마음을 푸셀은 알지 못한채 올레와 함께 텐트를 가지고 공원에서 자겠다고 끝까지 말썽을 피운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푸셀의 말을 들어주는 부모님은 걱정이 태산이다. 공원의 밤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을 무시한 채 푸셀은 공원에서 잔다는 생각에 신나게 준비를 하고 올레와 텐트를 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밖을 나가게 된 올레는 텐트 근처에 귀신이 있다는 소동을 벌인다. 어쩔 수 없이 푸셀은 밖을 살펴보다 그 사람이 다름아닌 아빠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걱정이 되어서 뒤를 쫓아온 아빠와 푸셀, 올레는 텐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귀가를 하고, 땡땡이를 친 푸셀은 선생님게 편지를 쓰고 잔소리 없는 날을 마무리 한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푸셀의 하루를 보고나니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잔소리 꾼이다라는 생각을 떠나서 푸셀 부모의 인내가 놀라웠고, 공원까지 따라간 아빠를 보고 있자니 내가 더 든든했다. 푸셀이 엉뚱하긴 했지만 밖고 명랑한 것은 부모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들은 잔소리에 있어서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또한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 잘 되라고 하는 마음이 때론 지나친 포용력과 일탈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런 자식을 이해하고 지켜 보고자 하는 마음은 드넓다는 생각을 했다. 푸셀의 부모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따면 '잔소리 없는 날'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푸셀이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 속에는 부모의 이해가 있었다. 푸셀도 부모님을 이해해주고 직접 경험한 것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잔소리 없는 날은 그나마 평탄할 수 있었다.

 

  가끔은 서로의 입장을 뒤바꿔서 생각할 수 있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런 마음은 상대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벽을 쌓는 일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그 벽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하고 높이가 어느 정도인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푸셀의 가족처럼 잔소리 없는 날이 가능할 것이다. 서로간의 벽이 높거나 골이 깊을 때는 이해로 이루어지는 인내와 사랑이 멈춰버릴 것이다.

물론 생각하지 않고 바로 실행을 옮겨도 좋은 것이다. 자유와 방종은 어느 정도 구분시켜 줄 수 있다면. 그럴때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사랑으로 넘쳐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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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모리 준이치 지음, 한유희 옮김 / 지원북클럽(하얀풍차)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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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예전에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해준 지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부분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지, 읽어 보라는 권유는 하지 않는데 선뜻 추천을 해 줬기에 기억에 남아 있던 책이였다.

그래서 도서 대출증을 만들고 막 둘러본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은 만남이라는 연속성을 떠올리기 충분했다.

지금은 그 지인과 자주 연락을 하지 않지만 한때 추천해 주었던 책만은 남아 희미하지만 끊기지 않는 연결을 확인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주인공들도 연결의 끊을 놓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세상과의 연결일 수도 있었고 서로에 대한 것일 수도, 아니면 낯선 세계와의 연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그들이 조금 특별해 보였지만 그 특별함은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거부감이 아닌, 오히려 위로를 받는 느낌이였다. 그들보다 낫다고 해서 받는 위로가 아니라 그들로 인해서 순수함을 발견 했기에 위로를 받은 것이다. 내 안에도 그런 것이 존재 한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세탁소에서 빨래를 지키는 테루를 봤을 때 영화 '해바라기'의 오태식이 떠올랐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행동거지와 수첩에 무언가를 꼼꼼히 적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오태식은 자신의 과오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이지만 테루는 어릴 때 사고로 머리를 다쳐 깊은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할머니 말로는 맨홀에 빠져서라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그래서 기억이 많이 딸리고 말도 어눌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테루가 무시되어 지거나 바보스럽다 말할 수 없었다.

테루의 그런면 너머에는 순수함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탁물을 놓고 간 미즈에에게 옷을 돌려 주려다 길을 잃기도 하는 그 지만 미즈에에겐 테루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사랑에 배신 당하고 도벽을 일삼고 자살까지 하는 그녀에게 테루가 곁에 있는 사람 전부인 것이다. 그런 테루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떠나지만 테루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미즈에에게 무엇이 되어 주거나 다시 만날 거라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즈에가 떠나던 날 흘리고 간 원피스를 들고 미즈에의 고향을 찾아간다. 할머니가 운영하던 세탁소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할일이 없어진 것이다.

 

옷을 가져다 주는 과정에서 미즈에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정리해 가지만 할머니의 죽음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 테루를 따라 미즈에도 고향을 등진다.

그때부터 그들의 여정은 시작되고 부족한 것 투성이의 두 사람의 앞길은 순탄치가 않지만 그것을 피하지는 않는다. 우연히 샐리를 만나 두 사람의 안정적인 생활이 이어지지만 아직도 두 사람은 불안정하다. 미즈에는 테루에게 도리어 위로를 받고 있다고 했지만 그런 테루와의 생활에서도 과거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도벽을 하다 감옥에 갇힌다.

그런 미즈에를 기다려 주는 테루는 늘 그대로다. 샐리가 떠나면서 테루는 절대 미즈에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이 아니더라도 테루는 배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자신의 감춰진 과게에 연연해 하기 보다는 현재를 충실하게, 미즈에와 함께 살아가기를 갈망할 뿐이다.

그건 미즈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상처뿐인 과거를 떨쳐버리고 테루의 순수함을 닮아가며 늘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테루의 곁에 있는 것이 미즈에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미즈에는 세상에 섞여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

테루의 곁이라면 세상에서의 아픔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테루와 함께 한다고해서 세상과의 충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즈에에게는 힘이 된다.

 

자칫 불행한 과거를 지녔다고 생각할 수 있는 테루를 보면 위안을 얻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안타까움이 아닌 현재를 꿋꿋이 살아가는 테루를 보며 스르르 동화되어 가는 것이리라.

그것은 샐리처럼 그들이 조금 마음에 들었을 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통해 느껴지는 감동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사랑이라는 매개물로 맺어진 감동일 수도 있고 인간 본연의 모습이 가진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이 넘친다. '나는 왜 저들처럼 열심히 살지 못하는 걸까',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한탄보다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권해본다. 그럴 때 나도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위로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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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이시다 이라 지음, 최선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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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는 내내 얼마나 몸을 비비 꼬았는지 모른다. 조용한 곳에서 나 혼자 책을 읽고 있음에도 혹여나 누가 볼까 긴장하면서 읽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적나라한 베드신의 연속으로 이렇게 당황을 한 것인데 야동이 판을 치는 세상에 책이 적나라 해봤자지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묘사에 대한 상상력이 뛰어난 편인데 거기다가 작가의 문체가 뒷받침해 준다면 한편의 영상보다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책을 꾸준히 보아온 탓에 묘사에 대한 상상력은 조금 있는 편인데 여기다 저자의 문체가 더 자극을 시켜 주었으니 머릿속에는 낯뜨거운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창년이였으니 베드신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고, 단순한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욕망의 분출이기도 했고 욕망의 채움이기도 했지만 창년 료는 그 세계에 매료되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남들이 봤을때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료에게는 새로움이 되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희열보다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을 상대하면서 무한함 속으로 들어 간다는 것은 현실 세계와 분명 달랐다.

자신은 여자를 비롯한 그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창년의 제안도 별 느낌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정열을 찾아 보고자 하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료에게 창년을 제안했던 미도 시즈카가 료의 자질(?)을 어느정도 알아본 것도 있지만 여자 손님들은 료를 상당히 맘에 들어한다. 미즈카가 충고했듯이 그 여성들 하나하나에 진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진심의 발견은 섹스일 수도 있지만 여성들 내부에 깊숙히 묻혀있는 욕망을 이해해주고 들어주는 것에서 비롯됐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녀들은 섹스를 통해서 욕망을 분출하려고 했지만 그 늪에 빠진 것은 료였다.

여자들의 욕망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 세계에 대한 혐오보다 그녀들을 있는 그대로를 보아주며 자신이 찾고자 했던 열정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간다.

20살 료에겐 그것이 분출이였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아픈 기억도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지리멸렬함에도.

 

 그러나 료가 그런 느낌이라고 해서 창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는 없었다.

변태적인 손님을 주로 다루며 자신 또한 그런 습성을 즐겼던 아즈마는 료가 단기간에 vip 전용으로 뽑힌게 보통사람 이여서 라고 했다. 보통사람의 사고와 고뇌를 지닌 료가 평범해서 그런 매력을 뿜어 낸 것이라고(물론 외모도 어느정도 받쳐 주면서).

자칫 료가 창년이 된 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였고 욕망의 분출도 아닌 열정을 찾는 계기였다고 해서 획일화된 사고를 심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역효과를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료가 창년의 일을 잠시의 흥분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일을 계속 추진하기로 한 결말에서 드러나지만, 저자의 섬세한 문체 속에 푹 빠지다보면 료가 손님들을 대했을때 진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찾아가는 료에게는 새로움이 될 수도 있었지만 료를 지켜보는 타인에게는 행위에 대한 자각심이 떨어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위험성을 뒷받침해 주었던 건 저자의 섬세함이였다. 료를 통해서 충족해가는 다양한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문체는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때로는 여자들보다 더 깊은 곳을 헤엄치는 듯한 저자의 묘사는 료가 빠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랬기에 료는 그 매력의 발산이 되는 여성의 육체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일을 계속하게 만든게 아닐까.

창년으로써의 일을 관뒀다면 오히려 퇴폐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경험밖에 되지 않을 일을 료의 결정으로 하나의 세계로 인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처음 줄줄이 이어지는 베드신을 보면서 적나라하다 느낌이면서도 담담하게 관찰자로써 써내려가는 저자의 문체에 저급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나또한 덤덤하게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찾은 것은 없었다.

료처럼 여성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찾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은 것도 아닌, 지켜본 것이 전부였다.

그 세계의 존재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료를 통해서 얻을 만큼 내 삶이 무료하다 생각되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에 대한 억압도 아니고 편견도 아니다.

성에 대한 편견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더 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순히 빛을 보고 싶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료의 세계는 너무나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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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콤한 나의 도시 - 정이현

 

2. 파피용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작년, 한참 달콤한 나의 도시가 인기가 있을때...

읽고는 싶은데 제가 직접 사서 보기가 왠지 그렇더라구요.

어디서 누가 안주나.. 이런 심정으로 바라본 책이였는데...

제가 있는 곳으로 놀러온 친구가 책이나 한권 사주겠다고 해서...

극구 사양하다가 '루모와 어둠속 이야기'를 선물 받았는데...

좀 지나서 제 생일이오니 또 책을 사준다고 하더라구요....

 

그때가 아직도 정이현님 책을 못 읽고 있던 때라서....

민망함에도 저 책을 덜컹 말했지요.

그런데 친구가 바빠서 책을 못 보내줬지요.

그러다가 저번주 토요일 간만에 메신저로 대화를 걸더라구요.

그래서 인사하면서도 저 책이 불연듯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책 안주냐고 물었더니....

잊어 먹고 있었다고 미안하니 한권 더 말하라는 거예요...

헐......

이쯤이면 뻔뻔함에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 그러지 않아도 돼.. 미안한데...

그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으로 할래'

 

라고 말해버렸다죠.. ㅠㅠ

헐.... 전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책 앞에서는 더더욱 더...

그런데도 책을 보고 있으니 왜 이리 기분이 좋을까요..

으흐흐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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