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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폭풍이 지날 때 ㅣ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4
캐런 헤스 지음, 부희령 옮김 / 생각과느낌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결국, 울어 버리고 말았다.
이 울음은 단순히 슬프고, 가여워서가 아닌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 오는 고통이 내게로 전해져 왔기에 터져 나오는 눈물이였다. 그렇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물은 쉽게 말라 버릴 테지만 가슴의 통증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고통은 이렇듯 서서히 잠식 되는가 보다.
지나 갔을거라 생각했던 모래 폭풍이 다시 몰려 올때 처럼, 모래가 모든것을 덮어 버렸던 암담함처럼, 고통은 희망이 되었다가 슬픔이 되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모래는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빌리 조와 오클라호마를 떠날 수 없었던 그 모래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내게도 들러 붙고 있었다.
모래가 온 집안을 뒤덮는 광경과 자신의 목에도 귀에도 이불 속에서도 모래와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던 빌리 조의 모습을 보며 모래가 내 입안에 서걱서걱 씹히는 느낌,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래에서 도망칠 수 없는 현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은 처절한 바닥의 비극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처절함이 가슴 아픈 것이 아니라 그, 처절함을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솔직하게 드러내는 빌리 조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자신의 실수로 엄마와 남동생을 잃었다 생각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함에도 그 모든 현실을 유순하게 받아들이기에 마음의 아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한 채 현실을 비판했더라면 그려려니 이해했을 텐데 너무나 여리고 여린 빌리 조의 모습에 내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터인데 꿋꿋이 버티어 나가는 빌리 조의 모습이 마냥 슬펐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빌리 조가 내 뱉는 불평도, 모래에서,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나선 가출도, 왜 그리 슬펐던 것일까. 그 울림을 받아 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랬던게 아니였을까. 그 울림의 대상이 나라고 생각했기에, 빌리 조를 다독여 줄 사람이 이젠 생겼다고 생각 했기에 그랬던게 아닐까.
그 어린 마음이 처연하고 대견스럽다.
좌절하고 우울해하고 어긋나 버려도 누구 하나 타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가 희망이 되고 정면돌파 하는 모습은 나 또한 빌리 조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늘 모래와 가난과 외로움의 틈바구니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빌리 조였지만 결코 어린이다운 좌절을 보여 주지 않았기에 빌리 조의 이면의 슬픔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와 남동생의 죽음으로 아빠가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만을 언급해도, 친구들이 자신의 망가진 손을 쳐다봐도 그 아픔을 드러내되 징징거리거나 구차하게 굴지 않았다. 단지 조금 속상해 했을 뿐.
그래서 더 가슴 아픈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땅, 농작물이 자랄 수 없는 땅에서 그 땅을 일구며 살아야 하는 빌리 조의 아빠며, 오클라호마 사람들이며, 공황에 빠져 버린 미국인들까지 온 나라는 가난과 아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조금씩 공황을 빠져 나오지만 그 빠져나옴은 고통과 맞섰을 때라는 것을 모두들 느꼈을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가출을 했던 조가 다시 돌아왔던 때처럼, 결코 모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모래 폭풍을 향해 전진할 때 비로소 폭풍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처럼 말이다. 그럴 때에 희망의 비는 내릴 것이고, 모래를 잠잠히 만들어 줄 것이며, 농작물의 싹을 틔워 삶에 가능성을 증가시켜 줄 것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빌리 조는 그 한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헤쳐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과정이 너무 처연하고 가슴 아파서 작가마져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고쳐서 쓰고 싶을 정도였다고 하니 모래 폭풍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빌리 조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을 고쳐 쓰고 싶었던 작가, 그 작가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는 나 같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는 숨겨져 있는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빌리 조를 보며 눈물짓고 모래 폭풍 속의 암울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 희망이 빌리 조에겐 엄마에 대한 그리움, 피아노에 대한 열망이 되어 서서히 피어 나고 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도 힘겨운 시간이였다.
그러나 빌리 조는 모래 폭풍의 지나옴을 경험했다.
그 경험의 산물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 희망만 건져 내기로 했다.
그 희망이 내게도 닿는다면 기꺼이 품에 안으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