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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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든 늪이든 깊숙한 곳에서 쑤욱 빠져나온 느낌이다. 그 헤어나옴은 순간적으로 이루여졌다.

과부들만이 살고 있는 마리키타 마을이 나의 또 다른 거쳐라도 되는 듯한 익숙함으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갑작스런 이탈은 그렇게 찾아왔다.

마리키타 마을에 미국인 기자 고든이 찾아 오면서부터 나의 시각은 마리키타 마을 안에서가 아니라 고든의 시각으로 그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껏 이런 시선이 아니였는데 왜 갑가지 마리키타의 과부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까. 마치 시각효과를 즐기다 빠져나온 후의 멍함.

마리키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들이 사라진 마을. 분명 이런 화제는 약간의 환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걸 온전히 받아 들이지 않는 의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게릴라들이 의해서 남자들이 다 끌려간 후에도 마리키타 마을에서 그녀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고립되어 버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들이 사라진 후 그녀들의 힘으로 살아가려다 더욱 더 궁핍함에 몰린 후 치안판사 로살로를 중심으로 그녀들만의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에 따라 그들은 과거로 내려간다.

그 과거는 전쟁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게릴라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굶주림도 신식문명의 발전도 없는 그녀들만의 독자적인 낙원으로 변해간다.

그런 터전을 만들어 가기까지는 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마을의 이야기도 있었으며 시간은 서서히 그들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을에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을의 유일한 남자 라파엘 신부(남자로 보기 힘든 훌리아와 산티아고는 빼고)가 대를 잇기 위해 명분까지 버리며 마을의 과부들과 동침을 했지만 신부의 욕정만 채웠을 뿐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결국 마을의 유일한 남자인 소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고 라파엘 신부가 떠남으로써 완벅한 여자들만 존재하는 마을이 된다.

그녀들은 이제 남자들을 포기하고 위기를 발판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간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고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적나라하고 거침이 없다.

저자가 신문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듯이 콜롬비아의 내전은 그녀들을 거칠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얼핏 마리키타 마을을 보면 내전으로 얼룩진 상처들로 인해 삶이 문란하고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욕정에 찬 여자들은 가난으로 안해 앙칼져가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녀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더더군다나 마을 밖에서 그 어떠한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더이상 이럴 수는 없겠다 싶어 공동체 생활을 꾸려 가면서 그녀들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풍요로움과 안정을 되찾는다. 그렇게 남자들이 사라지고 16년의 세월이 지난 후 네명의 남자가 마리키타에 돌아온다. 그들은 변해버린 마을 여자들에 놀라지만 한 명을 제외한 세명의 남자들은 마을 근처에 가정을 꾸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렇게 갈망한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나며 책은 끝을 맺는다.

 

독특한 경험이였다. 과부마을이라는 것에 혹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몇년을 더 산 느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이 주는 아픔이다. 책의 단락이 끝날때마다 게릴라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그들의 증언은 끔찍하지만 거짓이 아니다.

그들의 증언 속의 사람들은 마리키타 마을을 떠난 남자들이기도 했고 그들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과부마을이 품고 있었던 것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였다.

남자들이 떠난 마을이라는 자극적인 묘사가 남긴 이면에는 여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진지하면서도 기특해 보였지만 그녀들의 상처는 그녀들이 함께 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남자들을 수용하는 모습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어느 것에 구속되지도 귀결 되지도 않는다. 그녀들만의 낙원 마리키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문명 스스로가 들어오기를 거부했듯이 그녀들은 과거로 내려가면서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녀들의 머뭄은 고립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간다.

그녀들은 자유를 향해 내려가고 있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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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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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슴이 저릿 저릿 아파온다.

꼭꼭 숨겨두었던 상처를 후벼낸듯 아프다.

그리고 멍하다. 내게 천국을 알려준 그 간단함 앞에....

내 자신과의 화해가 이루어 졌을때 그 곳이 천국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간단한 보이는 화해는 상당히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의 주인공 에디처럼 나 자신과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피하고 거리끼던 모든 것들을 끄집어 내고 일일이 마주 해야 한다.

내게 과연 그런 용기가 있는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거대한 여운 앞에 다시 나타난 저자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왠지 읽기가 꺼려졌다. 전작에 못미칠 것 같은 불안함... 그리고 모리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용케도 잘 피하고 있었는데 형부의 차안에서 만나버리고 말았다. 평부회사 동료가 반납좀 시켜달라는 회사도서 네권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세권이였다. 평상시에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더라도 읽지 않은 책이 내 손에 들어오면 쉽게 놔주지 않는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인 법! 그렇게 쥔 책속에 이 책이 들어 있었다.

그래 읽어보자 까지껏! 이라며 가볍게 시작한 책을 몇시간만에 다 읽어 버리고 나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삶의 아픈 부분인 상처를 후벼내다 못해 그 절절함이 나에게 느껴지도록 만들어 버린 책은 어두웠지만 암울하지 않았고 슬펐지만 불행은 아니였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울상이 되어버렸대도 깊은 심연속의 우울은 아니였지만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게 있었다. 내 자신과의 화해...

과연 할 수 있을까....

 

평생 루비가든에서 놀이기구를 고치며 살아온 에디는 자신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다고 믿지 않았다. 군대에서 다리를 다친 후 절음발이가 되었고 늘 가난했고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있었지만 너무 일찍 떠나버렸고 아내의 불임으로 자식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루비가든에서 일을하며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노후를 보냈는데 놀이기구의 추락으로 어린아이를 구하고 목숨을 잃고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통해 자신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믿는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사람들 중에는 아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돌아보게 되는 자기의 삶의 잔상은 아프고 서럽고 후회스럽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사실들과 또 나로 인한 타인과의 연결성을 통해 에디의 깊은 상처를 공유하고 위로 받게 된다.

나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 또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람, 그리고 아버지와의 오해속에서 비롯된 상처들도 이해를 통해 오해를 풀게 된다. 자신이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삶의 고리를 통해 에디는 진정한 천국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 이렇듯 천국을 우리가 상상하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인듯 그렇게 마음속의 응어리를 다 풀어버린다. 그럴때에 진정으로 천국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은 에디뿐만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준다. 에디가 품고 있던 상처의 세세한면을 들췄을때 떠오른 사실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또한 자신이 모르고 있던 타인에게 준 상처와 불행했던 우연한 일상들도 그들의 몫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그들처럼 타인의 삶에 연결고리를 끼워주고 삶을 마감한다.

 

그 연결성...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요소가 되어버리는 그 연결성 앞에 '당신과 나의 삶은 하나입니다'라는 메인 문구를 이해하게 된다.

늘 느끼게 되는 고독감 속에는 나와 연결된 다른 삶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막연하게 연상될 수 밖에 없는 또다른 삶을 생각하게 된다. 그 삶의 생각에서부터 천국을 만나기 위한 과제(?)가 시작된 것이다.

타인과의 화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 자신과의 화해라는 사실부터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의 자만이고 기만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 이해한다는 위선을 저질렀을까...

그 위선을 하나 하나 걷어내고 싶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 준 상처를 위로해주기 전에 알면서도 위로해 주지 못한 상처부터 치료해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건 선뜻 하기가 힘이 들고 많은 상처를 들춰야 하기에 벌써부터 뒷걸음질 치고 싶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진정한 천국을 만나기 전에 내 안에 천국을 만들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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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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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창 인기 있었던 '황진이'인줄 알았다.

그 황진이가 북한 작가의 것이라니... 생소하고 놀라웠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황진이를 검색해 보니 내가 알고 있던 황진이는 전경린 작품이였고 내가 놀랬던 만큼이나 북한 작가의 작품 황진이였다. 그 유명한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손자라니...

모든것이 생소했다. 그러나 거리낌없던 한가지 반가움은 북한소설을 읽는다는 것이였다. 북한과 남한의 관계를 생각할때 이런 소설 자체가 얼마나 반갑고 신기한지 또 문학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기쁜지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 속에서 첫번째 장벽은 언어였다. 방송에서 우스갯 소리로나 접할 수 있는 북한 언어처럼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언어 쓰임새와 표기법처럼 황진이의 언어는 낯설었다.

16세기의 배경인데다 북한작가의 글이니 1권의 읽힘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한시간을 낑낑대고 읽어도 겨우 40페이지 정도 였고 모르는 말뜻이며 낯선 언어들을 건너뛰어도 여전히 그작 저작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2권에서는 1권에서의 막힘없이 술술 읽혀졌는데 1권에서나 2권에서나 저자의 역량을 볼 수 있었던건 이런 낯섬의 앞에서도 글의 흐름은 막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모르는 언어.. 알 수 없는 비유인데도 읽기의 막힘이였지 흐름의 막힘은 아니였다.

 

또한 황진이라는 소설 자체 부터가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북한에서 이런 소설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속에 이런 작품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무참히 깨트려준 증거였다. 특히 노골적인 성묘사나 음담패설 그리고 양반과 관리들을 비꼬는 의미부여가 놀라웠다. 내가 북한의 문학을 너무 경시하고 있었지만(읽은적이 없으니.. 그리고 나만의 잣대로 그어 버렸으니..) 이번 계기로 무지함을 깨트려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황진이 하면 벽계수 서경덕과의 일화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런 일화도 내게는 희미해서 이 책에서는 에피소드로만 끝나 버렸을때야 비중은 서경덕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을 정도였다. 우리가 보통 아는 것과는 다르게 놈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추가해 놈이와의 사랑의 중점에 황진이의 삶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초반에 놈이와의 어린시절.. 그리고 황진이가 기생으로 나서면서 놈이에게 처녀를 주었을때도 그들이 중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황진이가 깊이 사랑할 그와 문학적,예술적 깊이가 통하는 누군가가 나올거라는 기대를 했었고 황진이의 화려한 기생의 삶이 부각 될거라며 상상했다.

그러나 결말은 식상했다. 황진이가 놈이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고 사랑하게 되었을때 놈이는 목숨을 잃어버린다.

이런 스토리의 뻔함에도 이 책을 가볍게 여기며 무시할 수 없는게 책 속의 또하나의 문학적 소재였다.

언어는 걸쭉했고 단아하면서도 깔끔한 시조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시조들을 통해 또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를 경험한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사투리의 뜻풀이가 나와 있었지만 그런 뜻은 읽으면서 일일이 찾을 수도 없었고(찾다보면 흐름도 깨지고..) 오로지 상상에 의해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상의 나래속에 날개를 달아준게 시조였다. 고리타분하다 느꼈던 시조가 그리 정갈할 수 없었다. 시에 대한 깨어 있음이 많은 도움을 준거라 생각하지만 여튼 황진이를 읽는 내내 일반 소설에서 느꼈던 가벼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시대속의 사람이 될수 있게 인도해 준 작가의 문체며 창작성에 빠져들었고 여운이 오래 남았던 것이다.

 

이렇게 북한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자체가 읽는 내내 반갑고 신기했고 기뻤다. 또한 끝없이 북한과의 문학적 교류를 시도하는 무리가 있다는 데에 놀랐고 그 열정앞에 부끄러워 졌다.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북한의 문학을 읽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멀리한채 공상의 문학만.. 편리한 문학만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단과 함게 단절된 것이 어디 문학뿐이랴..

그러나 그 단절의 연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영원한 단절은 없을 듯 하다.

접하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북한문학을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소설에서 새롭게 만난 황진이와 북한 문학의 만남은 즐거웠다라고 말하고 싶다.

역시 문학은 즐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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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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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랑은 무엇 일까요?' 라는 질문에 배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그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배려하는 사랑이야 말로 평형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뿐만이 아닌 모든면에서 배려를 하면 적어도 상대방에서 상처를 주지 않을거라 자신있어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모습은?

그런 희미한 기억력을 지닌채 한없이 휩쓸리며 살아가고 있다.

뚜렷한 확신과 주관도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되는대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또 마주치고 말았군'이라는 생각이 들자 당황스러웠다.

주인공 '위'가 행했던 언행과 행동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참 이기적인 사람이였구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껏 숱하게 그런 언행을 내 뱉어 왔지만 '위'의 경험앞에 왠지 그런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위'보다 더 큰 만행을 저질러온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나.. 나.. 나... 나의 모습이다.. 나의 모습이야' 라는 말이 계속 머리속에 맴돌았다.

 

'위'앞만 보며 달려온 사람이였다. 고속승진을 하게 되었고 그 승진 안에는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짓밟은 티가 역력했다. 자신을 정당하게 자신의 할일을 통해 승진을 했고 그런 행진은 당연한 결과물이다 라는 생각앞에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새로운 승진과 함께 발령받은 곳은 내부의 압력에 의해 구조조정을 시키려는 팀이였다. 자신의 상사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자연스레 빠져 나오면 자신의 자리는 유지 시켜준다는 조건을 받지만 '위'는 왠지 그게 꺼림직했다.

구조조정에 의해 해체될 팀안에서의 자신의 활약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순간 위의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꿈틀댄다. 양심이였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아는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양심의 소리가 꿈틀댔던 것이다. 전혀 '위'답지 않은 모습이였다. 그런 마음의 변화속에는 회사내에서 인도자라 불리우는 퇴직한 중직자의 만남이 있었다. 그러한 만남과 모두 괴상하고 안일하다고 생각되는 팀원들 속에서 부인과의 갈등 그리고 구조조정 시키려는 무리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서서히 양심을 넘어선 배려를 배우게 된다. 현장에서 뛰면서 세상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되고 욕심만 채우려는 무리속에서 얼마나 소박하고 열심인 사람들이 그 희생양이 되어 가는지 혼란과  깨달음 속에서 '위'는 값진 것들을 얻어간다.

부인과의 갈등해소 속에서 그 동안 무관심 했던 것들을 깨달아 가고 자신이 갖는 일이며 그 외 여러가지 면.. 아니 자신의 삶의 많은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 과정은 인간적이였다. 감정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게 쉽게 고쳐지지 않음을 알기에 더 인상깊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적자생존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기가 더 쉬운 일터에서 맛보지 못한 끈끈함의 주역이 내가 되고 그걸 만들어 가는 과정속의 끈끈함은 사회생활의 삭막함을 몰아내줬다.

팀원 하나 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찾는 동시에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마련하는 것.... 인간의 욕구의 높은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이제 중요한건 나의 변화다.

그런 도전을 받았다면 과감히 나를 깨트려야 한다.

일터에서의 나의 소망을 생각해 보았다.

즐겁게 일하기, 보람 느끼기, 원만한 인간관계, 친절 등등...

지금껏 포기해버렸던 나의 소망들이 하나 하나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저것들을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앞선다.

아니 그 두려움 앞에 귀찮음과 포기가 앞선다. 그러나 지금 내게 당면해 있는 문제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언제까지 시간만 죽이며 끔찍한 일터를 외면하고 살텐가.. 내게 주어진 시간 내게 주어진 조건 내게 주어진 삶인데 그것들을 더이상 포기해버리고 싶지 않다. 완벽한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현재 나의 일안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끌어 올리고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만족감이 만들어 내는 뿌듯함을 이젠 정말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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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 잃어버린 나를 만나는 이야기
쉬타오 지음, 장연 옮김 / 고려원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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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겉표지의 모습이 왠지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내 멋대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전혀 내가 생각한 책이 아니였다.

작가의 말부터 가슴에 와 닿았고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 하나가 나의 마음을 어느새 느슨하게 해주었다. 그 느슨한 마음 속으로 또다른 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귀중한걸 깨달았다. 내가 흘러버린 마음의 소리들.. 머리에서 생각한 것들이 마음으로 내려오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생각들이 진정한 사라짐이 아니라는 것!

그걸 누군가는 늘 붙잡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생각들이 뜻밖의 결과를 낳고 그 행위의 행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걸 보고 있으니 아직까지 세상은 따뜻하다는 걸 느꼈다.

그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아닌 그 행위를 알게 된 이들 마음 속에도 그 따스함이 전해지니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전위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 느낌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 편안함 속에서 서서히 외치는 나를 변화시키는 말들이 정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적이 있다면 그 상처를 다 치유해 주고 싶을 정도의 감언이였다.

나 자신 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과의 공유된 삶의 고리를 더 조여주는 이야기와 조언 속에서 나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늘 나를 깨트려도 깨어지지 않는 후회들...

그 후회의 상처들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허물들이 무너지면 맥이 탁 풀린채 눈물이 흐르듯...

나의 상태도 그러했다. 맥이 풀리면서 나를 돌아보니 내가 안쓰러웠다.

늘 내자신을 다독이며 꾹꾹 참아왔던 것들 안에서 그건 나만이 아니였다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기쁨의 순간보다 힘들고 상처 투성이의 일들을 더 기억하고 망각의 속에서도 존재시키는 것 같다. 그 망각의 상처들까지 위로해 주는 책한권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하나의 주제를 만날때마다 나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위로의 말들이 이런 스타일로 씌여질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감동적인 얘기속에..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고 허황되기까지 생각되어 지는 얘기속에서 어느새 나는 스며들어 버린 것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내가 먼저 용서와 사과를 하고 남이 나를 위로해 주길 기다리기 보다 내 자신을 내 스스로가 위로하고.. 그게 오직 나에게만 할당되는 가치가 아니였다.

내가 그런 마음을 뿌리면 그 마음들이 널리 널리 퍼졌다.

그런 마음의 힘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가 보일지는 몰라도 그 형태나 움직임 크기는 보이지가 않는다.

마음의 힘의 위대함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위대함의 가운데 내가 있다. 어느순간 놓아버렸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면 결코 놓아버림이 아니였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감동은 많이 받았다 자부하지만 깊은 위로를 받은 적이 몇번이나 있을까... 분명 감동으로 시작된 책이였지만 나는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위로의 손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결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진부한 사실이 진실임을 깨닫는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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