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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
한승원 외 지음 / 예문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비가 내린다.
저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어야지 생각하는 순간 두통이 밀려온다.
최근 들어 잦은 두통이 신경 씌인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일까. 책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아야 겠다라고 다짐했으나 그 다짐은 내 방문을 여는 순간 허물어진다.
나의 읽힘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많은 책들. 그 다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는 책을 펼쳐 든다.
오늘은 '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 차례다.
무척이나 아꼈던 책이다.
차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에세이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사람을 듬뿍 받았다. 더군다나 어디선가 익숙한 '와온'이라는 단어가 나를 이끌었는데 알고 보니 좀 떨어져 있긴 해도 나의 고향시에 포함되어 있는 면소재지의 바다 이름이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큼지막한 글씨로 써 있는 버스를 본 기억이 있던 와온. 그렇게 덧붙여진 사실 하나가 책을 더 아끼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비는 주룩 주룩 내리고 창문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는 나의 감성을 자극했다. 두통이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의 책 읽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녹차를 우려 놓고(숯가마에서 구운 다기와 나름 대로 맛 좋은 녹차가 있었기에.)읽고 싶었으나 책을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차를 마시는 효과를 맛보아 버렸다.
차 향이 그윽했고 입안에 그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지고 차를 마시고 난 후의 개운함이 어느새 안착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차를 마시고 난 후의 느낌인데.
빗소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 온 몸을 감싸고 도는 개운함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벌렁 누웠다.
너무나 편안했기에 스르르 잠이 밀려 왔다. 눈을 떠보니 30분 정도 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을 이루면서 녹차의 그윽함을 분명 맡은 것 같았다. 꿈에서든, 책에서든, 나의 상상에서든.
한비야씨는 '중국견문록'에서 그런말을 했었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원서로 읽는 책보다 한글로 된 책을 만날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단박에 속도부터 차이가 나고 뻥 뚫리는 느낌이라 했다.
원서로 읽어 본 경험은 없지만 번역본과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에서의 차이는 나름대로 감지하고 있다.
이렇게 핵심을 겉도는 이유는 이 책에 실린 11명의 문장가들의 언어가 너무나 단하 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비야씨가 중국에서 어학 연수를 할 당시 친구를 통해 받아 본 한글로 된 우리책을 읽을때의 느낌이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짐작을 해본다.
어찌보면 차 라는 주제 안에서 어느 정도 압박감을 느끼며 펼쳐놓은 글임에도 그들은 자유분방 했다.
자신의 직업이나 인생이나 여유나 추억을 꺼내서 차와의 만남을 연결해야 함에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다양했다.
그 경혐은 때론 청아하고 단아하고 씁쓰레 하면서도 정갈있는 여러 가지의 차 맛처럼 편안했다.
단지 그들의 언어 속에서 차를 받아들였을 뿐인데 우리의 말이 이처럼 맛깔스러울 수 있었던가. 이처럼 아늑함이 들었던가. 또한 이토록 맑고 다정 다감할 수 있었던가.
수없이 되뇌어 보아도 책에 대한 나의 취함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차를 가까이 하면 그리 되는 것인가. 그들의 글 속에 삶 속에 푹 빠지면서도 억지로 차를 끓일 필요를 못 느꼈다.
한잔의 차를 통해 철학을 넘나들고 영화를 넘나들고 생활을 넘나드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함에도 차를 마시는 그들에게는 차의 그윽한 향이 느껴졌다.
차에 대한 남다른 애정, 감출 것 없는 자신의 전부를 털어 놓음에도 소박함이 방대함으로 바뀌지 않는 절제가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정갈하고 담백한 수필들이였다.
차를 통한 여유와 삶의 향기가 편안히 밀려오는 우리의 정서에 딱 맞는 글들이였다. 그런 글들로 인해 내 몸과 마음은 맑아졌고 차에 대한 애정이 더 진하게 솟아났다.
찻잔의 소박함에 멋들어지는 수묵화들. 그리고 시들.
차를 마시는데 이것 말고 정말 무엇이 더 필요하랴.
나를 느끼고 너를 느끼고 존재감을 구분 짓지 않음에 차 한잔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랴.
책을 덮고 나서도 그윽한 그 향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입안에 머금은 한 모금의 따스한 차 향은 그대로 온몸으로 퍼져 내 안에 머무른다.